완벽해진다는 것
1
청춘을 담보로 감정을 함부로 휘두르던 시절은 갔다
감정은 온갖 병에 휩싸였고
허울은 지친 영혼을 꿰뚫었다
생밤 같던 시간
그 시간을 구부려 감히 생의 주름을 펴려 하다니
낙엽에 마음 흔들릴 때는 지났다며
눈가에 맺힌 물기를 지우라고 한다
잎새가 가을을 채워주리라는 여름날의 약속도 잊으라고 한다
휘어진 길 등성이에서나마 짧은 식사라도 챙기며
스스로를 밝히라고 한다
다가올 이별과 악수하라고 한다
입덧 같은 길을 달려가 매달려도
노래는 더욱 쓰디쓸 것이며
직선은 결국 곡선이 될 거라 한다
그러니 이제
곡선으로 한눈팔겠다
곡선으로 옆길로 새겠다
상냥함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야겠다
다정함을 하나씩 하나씩 흩트려야겠다
언제나 싸움은 나의 싸움이었고
눈물 없이
이제 그만 소년을 놓는다
나가지 않겠다고 뻗대고 있는 소년을 버려야겠다
마구마구 내다버려야겠다
2
겨울잎새처럼 바스러질 듯 마른 빛깔로 너에게 간다
소태 씹은 눈빛으로 나무껍질 되어 네 앞에 나타난다
너의 촉촉함으로 나의 건조함을 태우려
오천 년쯤 됨직한 달빛을 뭉쳐 너에게 간다
나의 여윔이 달의 소행쯤으로 치부될 수 있도록
내 신음을 매만져다오
조붓하면서 드넓은 너의 안에서 맘껏 버무려지도록
내 뾰족함을 다듬어다오
언어의 뼈를 곱게 빻아
서로에게 젖으려 날개를 우아하게 펼쳐 보이지만
결국 밀어 넣는 것은 날개로 할퀸 자국뿐
표정을 꿰매고 또 꿰매 낯설음을 어울림으로 바꾸는 것
흔들면 흔들리고
잡으면 잡혀주마
굳건하던 동공이 잠시 움찔해도 손을 놓지 않는 것
그늘에 버려진 절정을 카타르시스로 되살리는 일
볕을 보태 그늘을 떠받치는 일
모두 전율이다
3
서성이고 싶지도 맴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그날 달라붙는 고단함 속에서도
미처 가보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겨울이 닥치기 전
잎 지는 짧은 가을볕이라도 쬘까 싶어
그 방향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가슴 두근거린 것도 잠시,
결국 붙잡혀 되돌아왔다
평온을 흠집 내는 건 예견됐던 일
내가 온전히 나였기를 바란 게 무슨 큰 잘못인양
그렇게 내 끝물의 시작은
그 누구에게도 응원받지 못한 채 미완의 기척만 낳고 장렬히 죽어갔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우리는 서로에게 돌팔매질하듯 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지 않았다
4
내가 잊었었다
겨우겨우 안고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지 말았어야 했다
찬바람이 흘러내리게 틈을 유지해야 했다
아무리 밤하늘에 별들이 출렁거려도
눈 뜨지 말고
멈추지 말고
절뚝거려야 했다
내가 순간 풀어졌었다
사랑이, 허기를, 달래주리라
내가 짧았다
난 병실이었고 넌 환자였다
퇴원환자는 병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지겠지
아니 간직되겠지
난 사랑 같은 건 믿지 않아
단지 연애를 믿을 뿐
어쩌면
잊혀지는 것도
간직하는 것도 내겐 어울리지 않네
5
악이 평범하다면 선은 특별하다는 것
세상이 얼룩진 건 특별함이 부족해서인가
평범함이 넘쳐서인가
빨래 마르는 소리조차 비명으로 파고드는 완벽
화려함에 갇힌 허름함
마지막 언덕바지려니 했던 우듬지에
앓고 또 앓던 가슴앓이가
도드라진 능선으로 펼쳐지는 게
우리 사는 모습 아니겠냐고
순간순간이 절실함이었다고
난폭한 시간 앞에 어떻게 절실하지 않겠냐고
절실함은 있음과 없음이 한몸임을 분명히 한다
6
너의 파도에 나의 뱃전이 흔들린다
잠깐씩 평화가 찾아와
오늘은 평안하신지
여전히 얼룩과 비통을 욱여넣고
덫에 걸린 산짐승 되어 흔들리는지
끝도 없이 흔들리는지
달릴 줄만 알았던 전율은
싸움의 본질을 살피지 않았지
예감 따위를 믿고
아무렇지 않게
미래의 지금을 내던지며
불운에 대한 면역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렸지
보이니?
다짐의 인질이 되어 겨우 매달려 있는 고요가
폭발도 삶을 위한 평화라고
무너지고 싶은 나날들의 어깨를 두드렸지
허공에 갖다 바친 안녕
도착은 이미 떠난 지 오래
대본도 연습도 없이 펼쳐진 싸움은
어느덧 무언극이 되어 뒷걸음질만 쳤지
붉게 더 붉게 뒤척이며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 동안
마침내 깊고 환한 고통이 왔지
고통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어 줄게
뭔지 모를 괄호에 묶였어도
봄은 꽃을 풀어놓는 게 맞으니까
오늘도 고통과 잘 지낼 수 있지?
시작노트
언젠가부터 들을수록 거슬리는 말들이 있다. 포용, 다양성, 소통 등.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이 제일 빠르게, 제일 편하게, 제일 쉽게 사람들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자연스레 너그럽게 감싸 받아들이고,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끼리 스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얼마나 서로 막혀 있으면 포용, 다양성, 소통과 같은 말들이 흩날리고 있겠는가.
나는 카톡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상대방하고 말할 게 있으면 문자를 보내거나 직접 전화를 걸어 통화할 뿐이다. 문자도 몇 번 오가면 그것도 답답해서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눌러 직접 목소리 들으며 통화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게 더 편하다.
빠르고 편리하며 게다가 불편한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카톡은 이제 우리 생활 자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카톡에 정이 가지 않았다. 거창하게 말해 편리함 뒤에 숨은 폭력성과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불안감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카톡에 얽매여 아까운 내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압도했다.
나는 학교에서든, 문학단체에서든, 심지어 가족들끼리든 그 누구와도 카톡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연락할 건 다 연락하고, 중요한 소식도 다 듣는다. 아니 어떻게든 연락이 되고 어떻게든 소식이 온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참 속 편하게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맞다. 속 편하다.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시계가 없는 곳에서 간혹 몇 시인지 확인하는 게 전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소통을 이야기한다. 개인 간의 불화이든, 사회 구성원 간의 불화이든 불화를 깨부수려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만큼 소통이 안 되는 시대와 공간에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소통이라는 것이 방법적으로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만 발달했지 정작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우리는 살고 있는가. 백날 카톡 해 봤자 소통이 아니라는 건 우리는 다 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얼마나 소통이 안 되면 소통 전문가라는 희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겠는가.
한때 문학이 나를 풍요롭게 해 주리라 믿고 밤낮없이 문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었다. 지금은 쌓여 가는 책을 보며 저 책들을 언제 다 읽지, 하면서 정작 예전만큼 내 손이 책을 잡지 않는다. 며칠 전 읽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 것이다. 떨어진 집중력과 기억력을 붙들고 한동안 뜸했던 책과의 소통을 이어 가 봐야겠다. 그러면서 문득 다시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명남(kmn0308@hanmail.net) 강릉에서 났다. 2000년 계간 《작가들》 여름호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가 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인천부평초등학교 교사.
완벽해진다는 것
1
청춘을 담보로 감정을 함부로 휘두르던 시절은 갔다
감정은 온갖 병에 휩싸였고
허울은 지친 영혼을 꿰뚫었다
생밤 같던 시간
그 시간을 구부려 감히 생의 주름을 펴려 하다니
낙엽에 마음 흔들릴 때는 지났다며
눈가에 맺힌 물기를 지우라고 한다
잎새가 가을을 채워주리라는 여름날의 약속도 잊으라고 한다
휘어진 길 등성이에서나마 짧은 식사라도 챙기며
스스로를 밝히라고 한다
다가올 이별과 악수하라고 한다
입덧 같은 길을 달려가 매달려도
노래는 더욱 쓰디쓸 것이며
직선은 결국 곡선이 될 거라 한다
그러니 이제
곡선으로 한눈팔겠다
곡선으로 옆길로 새겠다
상냥함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야겠다
다정함을 하나씩 하나씩 흩트려야겠다
언제나 싸움은 나의 싸움이었고
눈물 없이
이제 그만 소년을 놓는다
나가지 않겠다고 뻗대고 있는 소년을 버려야겠다
마구마구 내다버려야겠다
2
겨울잎새처럼 바스러질 듯 마른 빛깔로 너에게 간다
소태 씹은 눈빛으로 나무껍질 되어 네 앞에 나타난다
너의 촉촉함으로 나의 건조함을 태우려
오천 년쯤 됨직한 달빛을 뭉쳐 너에게 간다
나의 여윔이 달의 소행쯤으로 치부될 수 있도록
내 신음을 매만져다오
조붓하면서 드넓은 너의 안에서 맘껏 버무려지도록
내 뾰족함을 다듬어다오
언어의 뼈를 곱게 빻아
서로에게 젖으려 날개를 우아하게 펼쳐 보이지만
결국 밀어 넣는 것은 날개로 할퀸 자국뿐
표정을 꿰매고 또 꿰매 낯설음을 어울림으로 바꾸는 것
흔들면 흔들리고
잡으면 잡혀주마
굳건하던 동공이 잠시 움찔해도 손을 놓지 않는 것
그늘에 버려진 절정을 카타르시스로 되살리는 일
볕을 보태 그늘을 떠받치는 일
모두 전율이다
3
서성이고 싶지도 맴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그날 달라붙는 고단함 속에서도
미처 가보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겨울이 닥치기 전
잎 지는 짧은 가을볕이라도 쬘까 싶어
그 방향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가슴 두근거린 것도 잠시,
결국 붙잡혀 되돌아왔다
평온을 흠집 내는 건 예견됐던 일
내가 온전히 나였기를 바란 게 무슨 큰 잘못인양
그렇게 내 끝물의 시작은
그 누구에게도 응원받지 못한 채 미완의 기척만 낳고 장렬히 죽어갔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우리는 서로에게 돌팔매질하듯 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지 않았다
4
내가 잊었었다
겨우겨우 안고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지 말았어야 했다
찬바람이 흘러내리게 틈을 유지해야 했다
아무리 밤하늘에 별들이 출렁거려도
눈 뜨지 말고
멈추지 말고
절뚝거려야 했다
내가 순간 풀어졌었다
사랑이, 허기를, 달래주리라
내가 짧았다
난 병실이었고 넌 환자였다
퇴원환자는 병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지겠지
아니 간직되겠지
난 사랑 같은 건 믿지 않아
단지 연애를 믿을 뿐
어쩌면
잊혀지는 것도
간직하는 것도 내겐 어울리지 않네
5
악이 평범하다면 선은 특별하다는 것
세상이 얼룩진 건 특별함이 부족해서인가
평범함이 넘쳐서인가
빨래 마르는 소리조차 비명으로 파고드는 완벽
화려함에 갇힌 허름함
마지막 언덕바지려니 했던 우듬지에
앓고 또 앓던 가슴앓이가
도드라진 능선으로 펼쳐지는 게
우리 사는 모습 아니겠냐고
순간순간이 절실함이었다고
난폭한 시간 앞에 어떻게 절실하지 않겠냐고
절실함은 있음과 없음이 한몸임을 분명히 한다
6
너의 파도에 나의 뱃전이 흔들린다
잠깐씩 평화가 찾아와
오늘은 평안하신지
여전히 얼룩과 비통을 욱여넣고
덫에 걸린 산짐승 되어 흔들리는지
끝도 없이 흔들리는지
달릴 줄만 알았던 전율은
싸움의 본질을 살피지 않았지
예감 따위를 믿고
아무렇지 않게
미래의 지금을 내던지며
불운에 대한 면역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렸지
보이니?
다짐의 인질이 되어 겨우 매달려 있는 고요가
폭발도 삶을 위한 평화라고
무너지고 싶은 나날들의 어깨를 두드렸지
허공에 갖다 바친 안녕
도착은 이미 떠난 지 오래
대본도 연습도 없이 펼쳐진 싸움은
어느덧 무언극이 되어 뒷걸음질만 쳤지
붉게 더 붉게 뒤척이며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 동안
마침내 깊고 환한 고통이 왔지
고통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어 줄게
뭔지 모를 괄호에 묶였어도
봄은 꽃을 풀어놓는 게 맞으니까
오늘도 고통과 잘 지낼 수 있지?
시작노트
언젠가부터 들을수록 거슬리는 말들이 있다. 포용, 다양성, 소통 등.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이 제일 빠르게, 제일 편하게, 제일 쉽게 사람들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자연스레 너그럽게 감싸 받아들이고,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끼리 스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얼마나 서로 막혀 있으면 포용, 다양성, 소통과 같은 말들이 흩날리고 있겠는가.
나는 카톡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상대방하고 말할 게 있으면 문자를 보내거나 직접 전화를 걸어 통화할 뿐이다. 문자도 몇 번 오가면 그것도 답답해서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눌러 직접 목소리 들으며 통화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게 더 편하다.
빠르고 편리하며 게다가 불편한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카톡은 이제 우리 생활 자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카톡에 정이 가지 않았다. 거창하게 말해 편리함 뒤에 숨은 폭력성과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불안감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카톡에 얽매여 아까운 내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압도했다.
나는 학교에서든, 문학단체에서든, 심지어 가족들끼리든 그 누구와도 카톡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연락할 건 다 연락하고, 중요한 소식도 다 듣는다. 아니 어떻게든 연락이 되고 어떻게든 소식이 온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참 속 편하게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맞다. 속 편하다.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시계가 없는 곳에서 간혹 몇 시인지 확인하는 게 전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소통을 이야기한다. 개인 간의 불화이든, 사회 구성원 간의 불화이든 불화를 깨부수려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만큼 소통이 안 되는 시대와 공간에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소통이라는 것이 방법적으로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만 발달했지 정작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우리는 살고 있는가. 백날 카톡 해 봤자 소통이 아니라는 건 우리는 다 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얼마나 소통이 안 되면 소통 전문가라는 희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겠는가.
한때 문학이 나를 풍요롭게 해 주리라 믿고 밤낮없이 문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었다. 지금은 쌓여 가는 책을 보며 저 책들을 언제 다 읽지, 하면서 정작 예전만큼 내 손이 책을 잡지 않는다. 며칠 전 읽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 것이다. 떨어진 집중력과 기억력을 붙들고 한동안 뜸했던 책과의 소통을 이어 가 봐야겠다. 그러면서 문득 다시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명남(kmn0308@hanmail.net) 강릉에서 났다. 2000년 계간 《작가들》 여름호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가 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인천부평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