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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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학교에서 늘 일등을
뺏기지 않는 미자는 백일장에서
장미 동산에 대해 썼다
대궐 속 음모와
비밀금고의 부정에 대해
그러면서 그 애는
판자촌 루핑 지붕의 눈물과
화해할 수 없는 어떤 대통령의
폭력에 대해 썼다
빨간 원고지에 남은
숱한 지우개 자국
미자야, 그런데 그렇게 쓰지 마라
그러면 너와 나 우리는
불편한 관계가 된단다
교정엔
눈물처럼
봄비가 내렸다
졸렬한 핑계
그럴 줄 알았다 영호야
결국 우리는 굽은 등으로
작별을 했다
억울해 억울해,
호곡 같은 어머니의 눈물을 닦으며 너는
다급한 생계를 택했다
공부는 하고 싶지만
학교는 더 이상 싫다던 네 말
너는 변명하지 않았고
나는 설득하지 못했다
세상 도처가 학교라는 말,
위로랍시고 건넨 말인데 참
졸렬한 핑계였다
가난에도 꽃이 핀다는 거짓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시작노트
40년 교육노동을 마친다. 전두환 군부 때 시작해서 ‘날리면 정부’에서 마치게 됐다. 돌아본다. 초임 교사 시절에 ‘금지곡’을 가르치던 ‘무모한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어떤 선생님도 ‘유신’에 대해, ‘광주항쟁’에 대해 직설하지 않았던 서운함에 대한 반감 아니었을까 싶다.
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피의자’가 되어 제자와 함께 법정에 섰던 일. 그런데 이상하게 자랑스러웠다. 그 애가 ‘미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떠난 ‘영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얼마나 많은 ‘영호들’을 학교 밖으로 내쳤을까? 그런데도 나는 ‘교육만이 유일한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신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쯤에선 버려도 좋겠는데 잘 버려지지 않는다. 학생이 교사를 고소하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교육은 분명한 미래다.
내 청춘의 한때를 위무하던 가객 김민기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몽골에서 맞은 장례식 날, 점심 식당에는 페달이 망가진 빨간 전자 피아노가 있었다. 그를 보내는 의식으로 ‘동지’들과 함께 〈아침이슬〉을 불렀다. 이젠 내가 학교를 떠날 차례, 내일은 우리 학교 전체 ‘학습노동자’들과 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학교에서 부르는 마지막 〈아침이슬〉이 되지 싶다.
학교야, 안녕. 너무 아프지는 말고.
권혁소(eches@hanmail.net) 평창 진부에서 났다.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처음 작품을 발표하였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論介가 살아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과업》, 《아내의 수사법》, 《우리가 너무 가엾다》, 《거기 두고 온 말들》 등이 있다. 제3회 강원문화예술상과 제6회 박영근 작품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