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호[지상 중계] ‘돌봄’ 중심으로의 전환, 무해한 말들을 넘어 정치적인 전망으로 | 돌봄이 짐이 되지 않으려면, |조기현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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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중계] ‘돌봄’ 중심으로의 전환, 무해한 말들을 넘어 정치적인 전망으로


돌봄이 짐이 되지 않으려면, 

- 능력주의와 공정을 넘어서는 교육



조기현

ruaendrlgus@naver.com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대표,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 《몫》 저자




돌봄을 가시화할 수 있는 이름 찾기


나에게 돌봄은 ‘짐’이었다. 돌봄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 채 혼자 닥치는 대로 해 나갈 때, 돌봄은 부담 그 자체였고 불행에 다름 아니었고 삶의 방해물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건 내가 스무 살 때였다. 한부모 가정이었기에 유일한 보호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계속 아팠고, 나는 병원비, 간병, 저임금 일자리에 삶이 자주 휘청거렸다.

아버지도 나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견디듯이 살아 냈다. 돌보면서 겪는 피해들이 분명한데, 마치 그런 피해는 없는 것처럼 세상은 흘러갔다. 화가 났다. 하지만 분노가 나아갈 방향이 마땅치 않았다. 여전히 돌봄은 가족의 우환이나 안타까운 사연쯤으로 여겨졌기에,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분노는 아픈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아버지도 인지가 저하되고 싶어서 저하된 게 아닐 텐데 돌봄이 내 삶을 집어삼킬 때마다 아픈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이 들었다. 돈은 돈대로, 감정은 감정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돌봄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 세상에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목소리 내면 어떨까? 내가 세상에 느끼던 분노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질문이었다. 특히 청(소)년기라는 ‘이행기’에 ‘과중한’ 돌봄으로 학업, 진로 탐색, 성장, 놀이 등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에 섞일 수 없게 되는 양상을 부를 말이 필요했다.

이런 양상을 부르는 말을 찾으려고 도서관에서 책들을 뒤적였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간병 문제를 다룬 책들의 도움이 컸다. 그중 마이니치신문에 실린 르포 〈간병살인〉에서 ‘영케어러(young carer)’라는 명칭을 알게 됐다. 아픈 이를 돌보는 청(소)년을 부르는 말이었다. 일본에서는 영케어러가 돌봄을 하면서 직장이나 학업, 꿈 등을 포기하는 희생이 온당한 것인지 논의하는 포럼이 열린다고도 했다. ‘이거다!’ 싶었다.

이제까지 영케어러들이 겪는 무시와 차별은 비가 내리는데 우산도 없이 다 맞는 꼴이었다. 가정, 학교, 직장 어디에서도 영케어러가 겪는 어려움이 가시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척들에게 ‘돌봄의 밑천’ 취급을 받으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학교에서 돌봄 상황으로 숙제를 하지 못하거나 지각이나 조퇴가 잦거나 따돌림을 당해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돌봄으로 텅 빈 이력서로 일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직장에서도 자주 반차나 휴가를 쓰기에 조직에 폐 끼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각자 알아서 견디고 삼키던 ‘개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무시와 차별을 막아 줄 우산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영케어러라는 우산 아래 모여 우리가 겪는 일들이 단지 개인 사정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야 했다.



돌봄 경험,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그러려면 모여야 했다. 무작정 주민센터, 보건소, 대학병원 로비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렸다. ‘청년케어러 네트워크’라는 이름을 붙여 내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을 적힌 명함을 만들었다. 젊은데 아픈 이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이면 명함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저는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져서 돌보고 있는데요. 청년 시기에 돌봄을 하며 겪은 어려움을 나누는 모임을 해 보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아무도 응해 주지 않았다. 내가 섣부르게 접근한 걸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듯했다. 좋지도 않은 돌봄 경험을 구태여 서로 나누기까지 해야 하냐는 반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나부터가 그랬다. 돌봄에 대해 말한다는 건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았고, 돌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이 마치 ‘지극히’ 돌보는 효녀, 효자에게만 있을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의 힘듦을 세상에 말해도 되는 건지 계속해서 검열하게 됐다. 그저 혼자 삼키고 삭히는 것만이 돌봄 경험을 지고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돌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속 억압들을 마주해야 했다. 나부터 솔직하게 마주하며 말해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공공기관이나 병원에서 겪었던 모멸감, 아버지에게 폭력적이었던 부끄러운 순간들이 주는 죄책감,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하게 되면서 느낀 박탈감까지 숨김없이 써야 했다. 그래야 누군가 말하고 싶을 때 참조가 되어 또 다른 말하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상상했다. 내가 겪은 일들과 겪은 일들의 기원을 탐색하며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썼다.

책은 곧바로 만남들로 이어졌다. SNS나 이메일 같은 온라인으로도, 강의나 북토크 같은 오프라인으로 ‘나도 영케어러(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성별도, 연령도, 직업도 다양했다. 책을 읽으며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돌봄의 기억들을 비로소 응시하게 됐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만난 이들 중 다섯 명이 모여 자조 모임을 꾸리기로 했다. 2021년 7월 29일 첫 모임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가정에서, 공공기관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들을 쏟아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 부정적인 것을 다 쏟아내고 나면 돌봄을 했기에 쌓인 자신만의 역량을 말할 수 있었다. 돌봄에는 슬픔도 크지만, 분명 기쁨도 있었다. 돌봄을 무작정 ‘짐’으로만 여기기 아까운 이유였다. 돌봄의 슬픔과 기쁨, 부담과 보람을 골고루 담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런 마음으로 청(소)년기 돌봄을 한 이들을 인터뷰해 책 《새파란 돌봄》을 냈다.

그러다 좋은 계기가 생겼다. 「청년기본법」이 제정되면서 국무총리실 산하에 청년정책조정위원회가 생겼고, 각 부처마다 청년정책위원회가 생겼다. 나는 보건복지부의 민간위원 제안을 받았다. 영케어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위원회에서 나는 자조 모임에서 나누거나, 인터뷰에서 들었던 영케어러의 어려움을 모아 발표를 했다. 복지 전문가들에게 영케어러는 너무도 낯선 존재였다. 아동복지부터 청년복지, 기초생활보장부터 4대 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과 장애인활동지원 등 기본적인 복지와 사회서비스를 어느 정도 갖췄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영케어러는 ‘가설’에 불과하거나 ‘극소수’로 여겨졌다. 혼자 사는 노인과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데 영케어러가 대수냐는 말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들에 대항할 만한 자료가 별로 없었다. 실태 조사나 연구들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존재 자체로 항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었고 자조 모임에서 만난 이들이 겪는 일이라고, 해외에서는 이들을 영케어러라고 부르며 지원하거나 지원을 논의하고 있다고.

그런 말들이 복지부 차관 주재의 간담회로 이어졌다. 두 번의 공식적인 간담회가 진행됐다. 논의를 하던 차에 진실탐사보도그룹 셜록에서 보도한 청년 간병 살인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다. 대선 시기였기에 대선 후보들과 정당들이 줄줄이 대책을 내놓았다. 대책 마련은 급물살을 탔다. 2022월 2월 14일 제6차 청년정책조정위원회에서 〈가족돌봄청년[영케어러] 지원대책 수립 방안〉이 발표됐다. 청(소)년기에 아픈 이를 돌보며 겪는 어려움에 공식적인 이름이 생긴 셈이다.



‘영영케어 프로젝트’의 시작


“제가 한 돌봄 경험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쓸모’가 있다고 느꼈어요.”

함께 목소리를 내었던 영케어러가 남긴 말이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 하등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돌봄 경험을 삼키지 않고 내뱉으니 세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의 경험은 무언가 더 해 보고 싶게 마음을 달구었다. 자조 모임에 참여한 사람 중 네 사람이 모여 비영리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이후 다양한 영역의 돌봄 이슈를 배우는 강연 시리즈 ‘돌봄학교’, 돌봄 과정과 이후의 애도의 문제를 워크숍으로 풀어낸 ‘돌봄과 애도 연습’ 등 활동을 이어 갔지만, 비영리단체 설립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2023년 3월이 돼서야 비영리임의단체로 등록했다.

이름은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이었다. 돌봄을 혼자서 다 짊어지지 않도록 사회가 n인분으로 나눠야 한다는 지향을 담았고, 그러려면 꼭 영케어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잘 의존할 수 있는 ‘돌봄안전망’이 많아져야 한다고 여겼다. 잘 의존할 수 있는 돌봄안전망에는 충분한 돌봄서비스도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일상적 관계 안에서 돌봄을 원활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일상 속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촉진되는 것이 곧 돌봄안전망이다.

우리는 돌봄이 곧 고립이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다. 돌봄 상황에서 어디 물어볼 때도 마땅치 않고, 복지 신청을 할 때나 주변에 이해를 구할 때도 끊임없이 내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청(소)년기에 돌봄 경험은 또래들과 쉽게 나누기 어렵다. 또래들에게 돌봄은 너무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영케어러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려진 게 없으니, 그저 칭찬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영케어러에게 효녀/효자다, 어른스럽다, 철들었다, 기특하다 등의 칭찬은 지지보다 억압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그 어려움은 가족으로서 감당할 일이며 꿋꿋하게 잘 견디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과중한 돌봄을 혼자 다 도맡으려고 하는 영케어러가 있었는데, 심리상담을 받으며 유년기부터 들은 어른들의 말들이 마음속에 책임감을 강화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돌봄이 고립이 되는 경로들은 이토록 다양하다.

나에게 필요한 정보나 지식, 태도나 마음을 제때 알려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떨까? 내가 처한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으면 어떨까? 편견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고, 내가 말하도록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영케어러들을 만나 이제까지 혼자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을 되짚다 보면 자주 나오는 바람들이었다.

영케어러가 고립되지 않도록 곁에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해 보기로 했다. 2023년 연말쯤이었다. 어릴 적 치매 할머니를 돌보았던 박다솜 활동가가 사업 계획서의 뼈대를 만들었고, 이후 논의하며 살을 붙였다. 그 자신도 누군가 휘청거릴 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청소년 지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영영케어’로 정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사회적 현상을 부르는 ‘노노케어’를 패러디한 말이었다. 돌봄 경험을 가진 청년이 돌봄 경험 중인 청소년을 만나 돌봄과 진로 등 일상의 고민도 나누고, 돌봄 노하우, 하고 싶은 걸 놓치지 않는 방법, 돌봄 받는 이와 심리적 거리를 두는 법, 책임감 내려놓는 마음가짐 등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영영케어 멘토의 주요 활동이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해 상반기에 1기를 마쳤고, 지금은 2기를 진행 중이다.

막상 만난 돌봄 청소년들은 돌봄 부담뿐 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위기 속에서 살아갔다. 또래와 어울리기 어려움, 위생의 문제, 알코올 의존, 온라인을 이용한 성 착취 등이 돌봄 부담과 얽혀 일상을 어질렀다. 아이가 보호자가 됐다는 건 아이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상을 유지하는 노동을 해 주고 위생이나 사회적 예의를 알려주는 보호자가 없었고, 다양한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때 대변해 줄 보호자가 없었다. 멘토링을 하며 단지 돌봄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위기 전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배움을 얻었다.

그런 배움을 바탕으로 멘토의 역할도 다시 정립해 나갔다. 멘토 입장에서는 멘티가 겪는 문제를 같이 해결해 주고 싶지만 자신도 어찌할 줄 모르는 문제가 많았다. 그때 조바심이나 무력감이 들 수도 있었고, 결국에는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 자체에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려면 멘토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기 책임인 것처럼 느끼지 말아야 했다. 어떤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기보다 느려도 꾸준하게 해소할 수 있다는 마음이 필요했다.

영영케어 프로젝트에 자문과 협력으로 함께한 청소년 상담사는 멘토링을 벽돌 쌓는 일로 생각하길 바란다고 했다. 내가 지반을 잘 다지고 한 칸의 벽돌이라도 튼튼하게 쌓아 놔야 다음 사람이 와서 또 쌓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는 일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질문하는 과정이자,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자원에 연결하거나 또 다른 이들이 벽돌을 함께 쌓을 것이라고 세상을 믿어야 하는 결심이었다.

“아, 말해도 되는구나!”

한 멘티는 멘토들을 만난 경험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돌봄 경험은 좋지 않은 이야기여서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를 때조차도 친구들에게는 여행을 다녀온다고 알렸다. 돌봄 상황을 항상 숨기고 살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숨겨지지 않았다. 자꾸만 날카로워지고 세상에 공허함을 느끼는 자신을 자주 마주했다.

그러다 멘토들을 만났다. 멘토들이 먼저 자신들의 돌봄 이야기를 열어 주었고, 돌봄 하면서 겪은 차별이나 부정적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게 마음에 와닿았다. 나만 겪는 불행이 아니라는 위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봇물처럼 쏟아 내게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돌봄이 자신에게 남긴 습관을 발견했다. 10대 시절 내내 늘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살았기에 내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삶의 주도권을 쥐어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멘토들과 차근차근 삶의 주도권을 쥐는 연습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을 찾고 정하는 게 멘토링의 내용이 됐다.

그런 작은 시도들은 삶을 더 낫게 하는 감정들을 피어나게 했다. 그건 이제 멘토뿐 아니라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도 되겠다는 용기였고, 나의 돌봄 경험이 앞으로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멘토링이 잘 진행될수록 멘토와 멘티의 위계는 서서히 녹아내린다. 멘토는 멘티에게 비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고, 멘티는 멘토에게 비쳐 자신의 삶의 전망들을 내다본다. 서로 만나는 동안, 돌봄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취약함에 반응하는 역량으로 비로소 익어 갔다.



영케어러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영케어러 지원 정책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 있다. 빠른 속도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분명하다. 더 나은 돌봄 지원을 위한 숙고와 합의 과정이 누락되는 듯하다. 우선 명명부터 문제였다. 영케어러를 공공이 지원하기 위해 만든 명명은 ‘가족돌봄청년’이었다. 이름이 생긴 건 중요한 일이지만, 낙인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명명 자체를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영케어러라는 원어에 없는 ‘가족’을 붙인 건 시대착오적인 오류다. 돌봄을 가족 책임으로만 두는 규범은 한계에 다다랐고 그 한계 지점에서 겨우 버티는 청(소)년을 다시 가족 돌봄으로 호명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돌봄을 꼭 가족만이 해야 할 거 같은 느낌도 주며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는 꼴이다. 돌봄청소년을 지원하는 복지관들을 다니다 보면 하나같이 비슷한 곤란함을 토로한다.

“아이들을 ‘가족돌봄청소년’이라고 부르는 게 곤란해요. 꼭 계속 가족 돌봄을 해야 한다고 확정을 지어 주는 것 같으니까요.”

조금 더 고려가 필요했던 지점이다. 오히려 ‘가족’을 빼고 ‘돌봄청(소)년’으로만 부르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낙인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가족에서 돌봄을 빼내야만 돌봄 그 자체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계기라도 생긴다.

지원의 방향도 문제적이다. 영케어러는 돌봄을 하기에 미래를 준비하지 못해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지는 ‘빈곤의 악순환’ 속에 갇힌다. 악순환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해 영케어러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기회의 평등 관점이다. 기회의 평등은 영케어러가 충분하게 돌봄을 받지 못해서 ‘성장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문제를 응시하게 해 준다. 아픈 부모나 조부모, 형제와 함께 자라더라도 정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사회적 관계 경험과 놀이 등을 충분히 보장받을 권리들이 제공돼야 한다.

현재 한국의 지원 정책은 이런 기회의 평등을 모두에게 보장하지 않는다. 영케어러의 규정에 하향 연령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영케어러의 규정은 법률이 없기에 아직 조례나 사업 단위로만 합의된 상태다. 2022년 보건복지부의 〈가족돌봄청(소)년 실태조사〉에서는 13~34세로 연령이 규정됐고, 「서울특별시 가족돌봄청년 지원에 관한 조례」에서는 9~34세로 연령이 규정됐다. 왜 하한 연령이 있는 것일까? 13세 혹은 9세 미만은 돌봄 상황에 놓이지 않는 것일까?

하한 연령을 제한하는 이유 중 하나로 국가가 아동의 비공식 노동을 인정하게 되는 꼴이라는 의견이 있다. 국가가 아동기 영케어러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 아동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런 아동기 영케어러에 대한 배제는 국가뿐 아니라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마주한 적이 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회의를 하다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않은 영케어러를 만난 한 사회복지사가 사례를 공유했다. 하지만 그는 아동이 아픈 부모를 위해 뭔가 수행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걸 과연 돌봄이라고 부를 정도가 되겠냐고 덧붙였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돌봄 부담은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부담 정도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돌봄을 했다는 영케어러들을 만난다. 정신 질환, 말기 암, 희귀 질환 등으로 부모가 젊을 때부터 아프거나, 조부모와 살면서 일찍 노쇠나 치매를 마주한 이들이다. 이들은 아동이 단지 돌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이미 돌봄의 주체였음을 말해 준다. 아동은 돌봄의 주체로 이전부터 돌봄을 해 왔고 하고 있다. 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인정해야만 이들의 성장권을 온전하게 보장할 수 있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영케어러 하향 연령 제한을 없애는 건 시작일 뿐이다. 영케어러들은 사실상 가정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한다. 영케어러가 어리면 어릴수록 자신의 어려움을 알리거나 필요한 사항을 요청하기 힘들다. 어릴 적부터 돌봄을 수행하거나 온전한 보호자가 없다고 여길 때, 친인척들에게 ‘돌봄 밑천’으로 취급받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이런 양상은 아동 그 자체를 개인으로 존중하지 않고 소유물로 여기는 문화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돌봄을 하는 아동은 사적 영역에서도, 공적 영역에서도 모두 배제돼 있다.

영케어러의 지원은 기회의 평등 관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기회의 평등은 자칫 영케어러를 돌봄이라는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인 일에서 구해 줘야 한다는 관점으로 번져 버린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돌봄 영역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무가치하게 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제까지 돌봄이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가 생산과 재생산의 위계다. 재생산은 생산보다 덜 가치 있고, 이 덜 가치 있는 일은 가정 내 여성들에게 무급으로 떠넘겨져 왔다. 돌봄이 임금노동으로 사회화되었더라도 중고령의 여성들이 하는 값싼 노동 취급을 받았고, 이제는 여성 이주노동자들에게 돌봄을 넘기고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말자는 방안을 논의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돌봄을 저평가하면 할수록 돌봄은 떠넘겨야 할 ‘폭탄’이 된다. 그저 돌봄을 하면 피해 보고 손해 입는 것처럼 여겨지며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인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돌봄은 누구나 받는다. 그럼에도 특정 누군가만 돌봄을 하는 상황을 우리는 ‘문제’라고 정의하고 합의해야 한다. 돌봄은 떠넘겨야만 살 수 있는 ‘폭탄’이 아니라, 함께 이어 달리는 ‘바톤’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그 이어 달리기에 참가해야 돌봄을 한 시간의 가치도 올라간다. 영케어러 지원이 단지 기회의 평등이나 생산의 관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돌봄 그 자체의 가치를 끌어올릴 때, 누가 돌봄을 하더라도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다.



‘돌봄교육’을 상상하자


영영케어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영케어러 지원 정책을 보면서도 느끼는 모종의 불편함이 있다. 돌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돌봄을 경험한 이들 중심으로만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돌봄의 당사자인데, 마치 영케어러라는 ‘부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을지 걱정됐다. 영케어러를 지원하는 국가들에서는 영케어러를 ‘숨은 인구(hidden army)’라고 부른다. 지원하고 싶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당사자 스스로 영케어러라는 인식이 부재하다는 점이 꼽힌다. 어릴 때부터 돌봄을 수행했기에 자신의 돌봄에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럼 주변의 어른들, 혹은 친구들이 먼저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으면 어떨까? 인식의 책임을 영케어러에게만 부여하면 안 되는 이유다. 돌봄에 대한 이해를 우리 모두 공유해야 한다. 이때 돌봄은 특정 취약 계층의 일로만 여겨져서도 안 된다. 취약함과 의존이라는 우리의 필연적인 조건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이 영케어러일 뿐이다.

우리 모두 취약하기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지는 능력주의와 공정성 시비에서는 바로 이 진실이 은폐돼 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 논의는 마치 우리가 아무런 의존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냈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는 듯하다. 모두가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시험을 보고 ‘공정한’ 결과를 받아든 것일까? 그 시험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관계와 자원에 의존해야 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가 의존했기에 능력도 발휘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해 준다.

돌봄이 취약한 누군가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임을 알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취약함도, 의존도, 돌봄도 우리 삶의 예외가 아니다. 그 계기 중 하나로 ‘돌봄교육’을 상상해 본다. 나의 취약함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너의 취약함에 더 잘 반응하며 성장해 나갈 수 있으려면 어떤 교육이 있으면 좋을까? 나를 돌봐 준 사람들의 가치를 이해하고 결국 나도 돌봐야 하는 사람임을 공기처럼 알기 위해서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부모와 자식으로, 학생과 학생으로, 학생과 선생으로, 학생과 급식 노동자, 청소 노동자로 맺는 관계들을 돌봄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보며 다시 생각해 보면 일상은 어떻게 바뀔까?

‘돌봄교육’은 돌봄을 할 때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고 실습 등으로 직접 체험하는 실용적인 교육이 될 수도 있고, 민주시민교육이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알리고 사회 참여 활동을 독려하듯이 돌봄의 가치를 알리고 돌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가치 중심의 교육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사회 과목에서 성평등이나 노동권을 배울 수 있듯이 돌봄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는 방향도 있을 듯하다. 교육과정뿐 아니라, 학교가 돌봄의 가치를 선언하고 학교 문화나 생활 규정 등으로 학교 구성원 간의 관계를 서로 돌봄의 관계로 보는 관점을 확산시킬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돌봄교육’은 이런 다양한 상이 경합하는 장이 돼야 하고, 학생, 교사, 주민, 지역 사회 등 다양한 주체들이 나아갈 방향을 함께 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돌봄 상황은 어느 생애 시기든 겪을 수 있기에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혼란을 줄이고 유용할 수 있다. 여러 질병이나 장애가 일상에서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위기 상황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과 경로는 무엇인지, 돌봄은 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이런 논의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돌봄이 무작정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혼자가 아닌 돌봄을 해 나갈 수 있다. 돌봄 상황이 놀림거리도 아니고, 특별한 상황도 아니게 된다면, 영케어러는 숨은 인구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교실 전체, 학교 전체, 공동체 전체가 돌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돌봄 역량이 올라간다면 말이다.

교실 안에서 배울 수 있는 돌봄은 한정적일 수 있다. 지역 사회와 상호작용을 하며 내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돌봄의 현재들을 익히고 느낄 수 있으면 어떨까? 동네의 의료 기관들,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 같은 돌봄 기관이나 돌봄과 관련된 시민사회, 복지관 등과 함께하는 것이다. 돌봄이 특정 전문가의 영역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돌봄을 교육할 수 있는 강사는 누구나 될 수 있도록 열어 두어야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년이든 아동이든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 따로 있고 배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닌 서로 돌보고 서로 배우는 돌봄교육. 그렇게 돌봄교육으로 지역 사회의 공동체 돌봄의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돌봄교육이 개인의 인식을 높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다른 공동체를 그리는 매개가 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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