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교육과 교육운동, 전환의 과제
체제를 전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운동’을 시작하자
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오이가…… 아직 비싸네.” 2개 4,500원이 찍힌 오이 앞에서, 젊은 부부가 망설이다 그냥 간다. 마트에서 종종 보는 장면이다. 나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3월 초 강의하러 갔던 서울의 대학가 앞에는 ‘임대 문의’ 종이를 붙인 빈 점포들이 이빨 빠진 자리처럼 듬성듬성하다. TV에는 부산대 앞 점포 4곳 중 1곳이 공실이라는 뉴스가 나온다. 20대 청년 절반 이상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고 한다. 접경 지역에 살면서 가까이서 보게 되는 군사 훈련의 강도는 점점 높아진다. 올해는 소양호에서 대규모 도하 작전을 펼치는 장면도 보았다. 아들은 얼마 전 미확인 비행 물체가 군사 분계선을 넘어와 24시간 실전 상황 비상 대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한다.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 채로 완전 군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적을 기다리고 있었을 청년들에게 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시골집에 홀로 살아가기를 고집하던 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요즘 요양원도 좋은 데는 좋다더라”라는 말을 한다. 이상하다, ‘절대로 요양원은 가지 않고 싶다’고 했는데……. 〈플랜 75〉라는 일본 영화가 개봉했다. 노인들이 75세가 되면 존엄하게 죽을 기회를 주고, 비용을 국가가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한 합리적 대안처럼 양자택일의 선택이 제시된다. 구차하게 연명하는 삶을 살 것인가, 명예롭게 사라질 것인가. 이것을 ‘선택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새로운 세계 합리성’이 도처에서 등장한다. 30년 전 정리 해고 도입과 함께 등장한 ‘명예퇴직’은 이제 ‘명예 죽음’에 이르고 있다.
며칠 전 새벽, 첫차를 타러 가는 길에 동네에서 소나무를 베는 걸 봤다. 놀라서 다급하게 “아저씨, 아저씨! 왜 나무를 잘라요?” 하고 물으니, 답은 않고 서로 손짓만 하면서 미룬다. 뛰어가서 보니까 모두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도 놀랐는지 “이거 이거, 안 돼 안 돼, 잘라 잘라” 허둥대며 해명을 한다. 불법 체류 노동자를 ‘색출’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갑자기 소리치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한국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지, 버스에 올라서야 나는 생각한다. 다음 날, 잘린 소나무 밑동을 따라 하늘 위로 지나가는 전선을 보면서 이유를 알았다. 소나무를 뽑고 전기가 흐르는 곳은 밀양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강변에 희끗희끗 보이는 게 첫눈 온 흔적일까 반가운 마음에 강에 내려갔다가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눈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보니 허옇게 부글거리는 거품이었다. 나는 가선 안 될 곳에 가서, 보면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서 집으로 왔다. 여기는 강과 호수의 발원지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겨울이 끝나 갈 무렵엔 그 강 곳곳에 ‘해빙기 얼음 깨짐 주의’ 푯말이 세워진다. 사실 늘 불안하다. 언제 어디서 발밑이 꺼질지 모르는, 허약한 체제의 살얼음판 위를 건너가는 기분.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은 오래되었다. 어느 날은 아파트가, 어느 날은 빌라가, 어느 날은 은행이 무너진다. 이것은 오래된 붕괴다. 일상 곳곳에서 세상의 한 귀퉁이가 날마다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시골 빈집의 담벼락처럼. 베어지고 뽑혀 나갈 위험으로부터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삶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왔는데, 그 농촌이 생태 위기의 최일선 전쟁터다.
연결된 위기
우리들 각자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불안은 세계적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발발했고,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 전쟁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미, 중, 러 사이의 적대적 긴장 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전쟁 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 조선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로 재규정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 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이 파산했고, 한국에선 전세 사기 사건이 터지고 부동산 시장 붕괴가 시작됐으며,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을 시작으로 대형 건설사들의 부도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108%가 넘었다. 한마디로 소득보다 빚이 더 많은 구조다. 선진국 경제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의 3∼4배에 이른다. 기업 부채만 아니라 정부 부채, 가계 부채 비율도 높다. 앞에서 보았던 동네의 풍경은 세계의 풍경을 거울처럼 비춰 준다. 경제지들은 IMF 외환 위기 때보다 더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IMF 때는 해고자들에겐 명예 퇴직금이라도 있었고 가계에는 저축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때는 없던 부채까지 잔뜩 짊어지고 위기를 맞이해야 한다. 대량 해고는 회사에서 쫓겨난 이들을 창업으로 내몰았고 자영업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제는 자영업 시장이 붕괴한다. 외식 배달 문화가 K-문화의 상징이 되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도 자영업의 불황은 끝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 이후 공공 서비스 삭감과 국가 복지의 부재를 대출로 때워 왔고, 팬데믹 때까지도 대출이 복지를 대신했지만, 고금리 시대가 왔고 대출로 버티는 것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일자리와 소득은 줄어들고 금리와 물가는 오르고 있는데,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뾰족한 벼랑 끝 위에 홀로 선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툭툭 떨어진다. 저녁 뉴스를 모으면 무너진 삶들의 거대한 무덤이 날마다 생겨난다.
이 이야기들이 교육과 무슨 상관인가. 이런 상황들이 오늘날 우리가 ‘교육의 위기’라고 부르는 사태를 구성하고 있는 교육의 현실이고 조건이다. 모든 곳이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교실만 무너지지 않을 리는 없다. 지금 우리가 ‘교실 붕괴’, ‘교육의 위기’라 부르는 것도 갑작스럽게 온 게 아닌, 오래된 위기이다. 오늘날 교실 붕괴, 학교 붕괴로 불리는 교육의 위기는 사회의 붕괴가 일어나는 구조 속에 자리한다. 교육의 위기는 더 큰 체제의 붕괴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학교의 안과 밖을 분리하고 교육을 교육 문제로만 바라보는 사유에 익숙하다. 분리의 선은 교육과 사회, 교육과 가정, 교육과 노동, 교육과 돌봄 사이에 쉽게 그어진다. 분리의 선을 긋고 나면, 나눠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하나의 체제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이 분리의 선은 ‘생산과 재생산, 노동과 돌봄, 착취와 수탈(남반구와 북반구), 사회와 자연, 경제와 정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등을 가르는 근대적 분리에서도 나타난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전자를 중심에 놓고 사회를 배치하며 후자의 영역을 축소하고 은폐하며 수탈해 온 것이 서구 자본주의 역사이고 성장 체제다. 환경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개수대의 비유’는 이 분리의 모순을 보다 쉽게 설명한다. 개수대가 ‘시장 경제’라고 불리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내부를 상징한다면, 외부는 그 바깥에 있는 훨씬 광대한 진짜 생산의 영역이다. 마리아 미즈는 지구가 생산하는 것 중에서 시장이 생산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비유하며 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자연, 여성, 식민지의 노동과 생산이라고 설명한 적 있다.[ref]마리아 미즈, 최재인 옮김(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 축적》, 갈무리.[/ref] 에코 페미니스트와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외부화, 무상화, 비가시화한 진짜 생산의 영역을 드러내고, 생산을 생산하는 재생산 노동을 정의하였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재생산에 대한 무상의 전유와 수탈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공식화된 임노동 체제로부터의 착취보다 비공식 경제로부터의 수탈이 성장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ref]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 - 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장석준 옮김(2023), 책세상)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다.[/ref]
자본주의 체제는 수도를 틀면 언제나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다 쓰고 난 물을 배수구로 흘려보내면 그 물이 어디선가 정화되어 다시 수도꼭지에서 콸콸 흘러나올 것이라는 가정하에 맘껏 쓰고 버리면서 생산 영역(개수대) 안에서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 매진했던 체제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꼭지에서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거나, 더러운 물이 나오거나,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지금 기후 위기, 생태 위기가 바로 그 난리다. 그런데도 자본은 여전히 이것을 지구의 뭇 생명들이 처한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위기로 본다. 강이 마르고 썩어 가는데, 수돗물이 제때 안 나오는 것만 걱정하는 꼴이다.
개수대의 비유는 노동과 돌봄, 교육과 돌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공장에 노동자들이 콸콸 쏟아져 들어와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콸콸 쏟아져 나가면 다음 날 어디선가 다시 정화되고 재생되어,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할 수 있는 몸이 되어 회사로 돌아온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음 날 다시 누군가가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서 학교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여겨 왔다. 우리는 이런 가정-학교-사회 모델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기며, ‘어디서, 누가, 어떻게’ 그들을 돌봐 왔는지 묻지 않았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개수대의 위기가 개수대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듯이, 지금 학교의 위기, 교육의 위기도 학교 안에서 교육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없는 상태이다. 우리는 고장 난 수도 고치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교육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교육 바깥으로 외부화했던 것들을 적극 교육운동의 장으로 가져와야 하고, 교육 영역이라 불리는 좁은 틀을 벗어나 더 넓은 관점에서 교육운동의 과제를 보아야 한다. 현재 체제 위기는 시장의 실패나 제도의 실패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님에도, 외국인 가사 도우미나 늘봄학교 같은 대안은 여전히 노동 시장, 돌봄 시장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려는 협소한 시각에서 해결책을 찾는 사례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노동 체제와 가부장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대안이다.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재생산 문제를 해결하라는 자본의 명령, 생산과 성장 중심주의, 체제 유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대안인 것이다.
개수대 바깥의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개수대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전’이 시작된다. ‘학교폭력’, ‘교실 붕괴’라 부르는 사태는 내전의 격돌이자 계급 전쟁의 단면이다. 오히려 문제를 계속 학교 안으로 불러들이는 저 이름이 사태의 본질을 축소하고 단순화한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양식을 대표하는 3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ref]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정기현 옮김(2024), 장석준 해제,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원더박스.[/ref] 체제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봉쇄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들이 된다. 그 ‘몫’이 20세기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에서처럼 더 큰 이익이나 분배의 몫, 인정의 몫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일 때, 사회적 투쟁은 개인들의 투쟁으로 파편화되고, 더 잘 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된다.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의 양상은 분배 투쟁이나 정체성 투쟁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 투쟁이 펼쳐지는 신자유주의적 내전 상황에 이미 돌입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바깥도 없고 다음도 없으니, 체제 안에서만 대안을 찾으라는 것은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구호가 만들어 낸 정신의 감옥이다. 그 감옥은 ‘현실적 대안, 실현 가능한 대안, 제도화할 수 있는 대안, 동의 가능한 대안(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동의할 수 있는 대안)’ 등으로 표현된다.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자본주의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만든다. 사적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그럴수록 보호, 안전, 질서에 대한 요청도 함께 높아지지만, 그 요구를 감시와 통제, 그리고 폭력을 진압하는 폭력으로 잠식시킨다. 구성원들의 대화, 토론, 조정, 합의는 모두 당사자 간의 강제적인 법적 절차로 흡수되고,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 역량을 완전히 말살시킨다. 스튜어트 홀은 1970년대 영국에서 발생한 노상강도 사건을 계기로 폭력 예방을 위해 국가가 법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고찰한 바 있다. 각종 ‘보호법’과 ‘예방법’은 피해를 당하는 약자와 민중을 보호하기보다는 체제의 질서와 안녕을 보호하고, 저항을 폭력으로 규정하여 진압하는 법적 근거로 사용된다.[ref]스튜어트 홀 외, 임영호 옮김(2023), 《위기 관리 –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 박영사.[/ref]
무너지는 성장 신화와 교육 신화
현재의 노동-교육-돌봄의 삼중 위탁 체제는 성장 체제를 지탱해 온 체제이며, 성장 체제에 의해 지탱되어 온 체제이다. 그러니 성장 체제의 근본적 위기가 도래한 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체제이다. 근대 국가 교육은 국가 엘리트 양성, 노동자 양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복무했다. 전자는 인재 개발, 후자는 인력 보급이라고 불린다. 교육과정에서 분류되는 관리 계급과 생산 계급은 인문계와 실업계 같은 이원화된 진로에 따라 또는 성적에 따라 나눠지고, 이 과정에서 ‘시험’이 후자에 대한 전자의 지배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적 장치가 되어 왔다. 이런 차별적 구조 속에서도 과거의 교육은 하나의 신화에 의해 지탱되어 왔는데, 그것은 ‘제대로 배워야 제대로 된 직업을 얻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교육은 필요하다고 믿어졌다. 특히 인재 개발론이 경제 성장론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던 한국 사회에서 교육 신화는 성장 신화와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다. 고도 성장기에 사람들은 20대 초반에 사회로 나오면 졸업장을 가지고 직업을 얻고 그것으로 평생 제 앞가림은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교육 수준은 직업, 임금, 소득, 지위, 인정, 처우 등과 대체로 비례했고, 문화 자본, 상징 자본으로서의 학력·학벌 자본은 다른 사회적 자원과 호환 가능했다. 성장 신화가 지속되는 동안은 교육 신화도 함께 유지되었다.
그러나 성장 신화가 붕괴했다. 1990년대 이후 성장을 추동해 온 금융 호황기도 막을 내리고, 중산층 자산 기반이었던 주식, 아파트도 불안정해지고, 학력과 학벌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위 소득 보장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청년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고학력 실업자들도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전문직도 고용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퇴직할 수 없는 노년층과 실업 잉여군의 진입으로 하층 저임금 불안정 노동 시장도 경쟁이 치열하다. 이제 어지간한 대학을 나와도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래로부터 시작된 일자리 박탈과 몰락의 도미노가 점점 상층 계급을 향해 오면서, 중간 계급의 계급 재생산 위기와 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도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상층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하방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의대 쏠림’ 현상은 중간 계급 상층부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입시 전쟁은 특정 계급의 전쟁이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교육 의제이고 정책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그 끝은 삼포·사포·오포요, ‘모쏠’에, ‘무직’에, ‘무능’한, 직장도 없고 집도 없는 어른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고, 그 공포감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20년 정도 교육과정을 거쳐 사회로 나오면 제 힘으로 먹고살 수 있기는커녕, 배운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선배들처럼 곧 자신들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학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교사 자신도 믿지 않는 환상과 망상을 심어 준다. 거대한 거짓말의 향연장이 되어 버린 학교에서 진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앎과 삶의 괴리’는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지만, 지금의 상황은 ‘실천교육학’이 제기한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세상에서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재난과 참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청년/학생들은 그것을 매일 보고 듣고 있으며, 그런 세상에서 자신들은 미래가 봉쇄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학교에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수업을 하고, 숙제를 내고, 시험을 본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토론은 사라지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해진 진도만 나간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계속 4.16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배가 침몰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라’ 했던, 참사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으라’ 했던. 과거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주권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부장적 책임감을 과시적으로 보여 줘야 했다면, 현대의 통치자들은 우주선을 개발하고 지하 벙커를 만들면서 재난이 닥치면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과거 군부 독재의 가부장제 통치는 무서운 아버지의 얼굴로 내 가족, 내 국가를 호령하며 내가 먹이고 살리니 내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부장들은 나는 내가 알아서 살겠으니 너희도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30년을 거쳐 오는 동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국가의 역할과 통치 양식의 변화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재난과 참사의 과정에서 등장했던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정치공동체의 부재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학부모, 학생에게 눈앞의 교사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국가와 통치 권력의 표상이며, 체제의 인격화된 존재다. 진리의 체계가 작동하던 시대의 교사는 ‘지식 전달자’ 행세라도 할 수 있었지만,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의 교사는 쓸모없는 ‘교과서적 지식’이나 읽어 주는 우스운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교권 추락’이라 부르는 사태가 어떤 사회 변동 속에서 출현한 것인지 역사적 관점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식과 학문의 생산과 전달이 이뤄지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청소년들은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는 유튜브가 더 낫고, 입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일타 강사’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신적 스승도 사교육 강사가 담당한다. 성적대로 줄 세우면서도 타인을 도우라고 말하는 위선적인 교사보다, 너만 생각하라고 따끔하게 조언하며 ‘멘탈을 잡아 주는’ 사교육 강사들이 차라리 더 솔직하고 자신을 위해 주는 참스승처럼 보인다. 위선은 구리고 위악은 멋져 보이는 시대가 됐다. 교사들이 정치적 발언으로 봉변을 당할까 봐 입단속을 하는 사이, 스타 강사, 셀럽들은 혐오 발언을 내뱉어도 사이다 발언으로 영웅이 된다. 상위권 학생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실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학교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온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교사가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교실 붕괴’란 수업을 정상적으로 못 할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실 붕괴는 정상성의 붕괴가 문제가 아니고, 정상성의 회복이 교육의 회복이 될 수도 없다. 구체제의 정상성을 되찾는 것이 진보적 교육운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정상적으로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위계화된 직업을 얻고, 정상적으로 임금을 받는 대신 정상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던 그런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좋은 체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회가 너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자, 지금보다는 덜 나빴던 체제를 그리워하는 ‘과거 지향’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그린 뉴딜’ 같은 녹색 케인즈주의는 계급 타협 시대를 그리워하는 서구 리버럴 좌파의 보수주의적 퇴행이다. ‘그런 시절’도 없었던 한국에서는 ‘그게 어디냐, 그거라도 해 보면 좋겠다’가 미래로의 퇴행을 이끄는 단골 멘트이다. 20세기 성장 체제에 조응했던 복지 체제는 앞으로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교육 체제도 마찬가지다. 그 체제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고, 무너져야 한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무너뜨리느냐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더 이상 체제 유지냐, 체제 전환이냐가 아니다. 우리는 무질서와 혼돈 속의 몰락이냐, 전망과 계획을 가진 체제 전환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된 저항
저항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항자들의 모습은 점점 가시화되고 커져 가고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소리 높여 위기를 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레타 툰베리는 수요일의 학교 파업을 시작했다. ‘청소년 기후행동’의 구호는 “체제 전환(system change)”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체제 전복(uproot the system)”이다. 이것이 전 세계적인 기후운동의 씨앗이 되어 번져 나간 과정을 생각해 보라. 조직된 시민들의 모범적 시위만이 저항인 것은 아니다. 나는 학교에서 자는 학생들도 온몸으로 체제를 거부하는 잠재적 저항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수업이야말로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했던 그 ‘불쉿 잡(bullshit jobs)’이 아닌가. 정당한 대가 없이 과도한 업무를 부과하거나, 시간 낭비인 무의미한 일을 반복적으로 시키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태업과 작업 방해로 소극적 불복종을 표출해 온 것은 오랜 전통이다. 그러니 일탈 행위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학교 거부도 학교에서 시위를 배우고 조직해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의 자발적 불복종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콧이 민중의 은닉 대본[ref]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2020),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 후마니타스.[/ref]을 통해 밝히려고 했던 것처럼, 민중의 행동에서 숨겨진 마음속 이야기를 발견하듯이 학생들의 거부에서 체제에 대한 거부를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로부터 유발된 폭력을 학교에 가둬 놓고 학교 안에서만 해결하라는 지침을 따르는 대신, 폭력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켜 체제 거부자들을 체제 전환의 동지들로 만들 수는 없을까. 위기에 대한 감각, 봉쇄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억울함, 헛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반항심, 이 모든 억압된 감정들이 뒤엉켜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터져 나오고 폭력적인 형태로 서로에게 분사되고 있는 것이라면, 분리와 격리 조치, 법적 제재란 아무런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추방과 배제, 감시와 통제를 통해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그것이 두려워 꼼짝 못 하게 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죄수복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현장을 너무 모르고 하는 순진한 소리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약자의 공격과 혐오는 지금 다른 현장에서도 수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현상이다. 켄 로치가 영화 〈나의 올드 오크〉에서 보여 주는 영국의 몰락한 노동 계급과 시리아 난민 사이의 갈등과 혐오의 양상은 최근 한국의 건설 노동자 탄압과 이를 이주 노동자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시킨 사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켄 로치가 건네는 질문은 ‘약자들의 연결된 위기를 연결된 저항으로 직조할 수 없는가’이다.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몰면서 탄압한 것은 1970년대 영국 정부의 전략과 똑같다. 대처 정부가 노동자 투쟁이나 학생 시위를 훌리건이나 노상강도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몰아갔듯이, 가장 강성 노조인 탄광노조를 본보기로 분쇄하고자 했듯이, 윤석열 정부는 건설노조를 찍어 눌렀다. 영국 탄광 노동자의 몰락과 노동조합운동의 쇠퇴도, 시리아에서 발발한 내전도, 모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전쟁의 결과다. 여기에 대한 분노가 집단적 혐오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위기를 연결하는 용기와 연대, 저항이 필요하다고 켄 로치는 말한다. 각자의 위기를 연결할 때 우리는 그 위기를 일으킨 공통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고, 함께 맞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최근 유럽에서 ‘EU 환경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농민 시위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한다. 그 누구보다 기후 위기에 고통받고, 그리하여 더 적극적으로 전환을 희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최일선 당사자들이 기후 정책의 열렬한 반대자로 나타나는 ‘그린 백래시’를 우리는 당혹스럽게 마주한다. 이것은 도시 중산층이 주도하는 ‘녹색 시민’이라는 정체성운동과 PC운동적 성격으로 변모해 간 녹색운동에 대한 소외된 계급의 누적된 반감의 표출이다. 또한 말만 ‘정의로운 전환’을 앞세울 뿐 실효적인 대책은 내놓지 않은 채, 자본에겐 녹색 시장, 녹색 산업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면서, 노동자 민중과 농민에게 탄소세, 기후세로 책임을 전가하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기후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격이다. 이번 트랙터 시위는 과거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으로 촉발되었던 화물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어 돌봄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까지 확산되었던 노란조끼 시위의 농민판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의 저항을 ‘반환경주의’, ‘반기후 세력’이라는 납작한 언어로 불러서는 적대와 갈등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EU가 있는 브뤼셀에 집결한 농민 시위대에는 여성 소농이 중심이 된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비아 캄페시나도 있지만 네덜란드 농민당 같은 극우 정당 지지자들도 있었다. 스페인 농민들은 유럽으로 수입되는 길목에서 모로코 농민들의 농산물을 실은 트럭을 공격하기도 했다. 아마 그들은 EU와 자본주의 농식품 체제에 퍼부을 욕을 눈앞의 화물 노동자에게 퍼부었을 것이다.
우리는 농민 시위, 노동자 투쟁의 이유를 지지할 수 있지만, 인종 차별의 언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판하고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인종주의자 딱지를 붙이고 백안시하는 것으로는,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조 탄압, 대량 해고 사태와 건설 현장의 사망·사고 사건을 막아 낼 수 없으며, 건설 노동자 문제도 이주 노동자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건설·농업 분야 에너지 전환도 기후 위기 앞에서 후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 대책이 없이는 계속 갈등이 심화될 것이고, 정의로운 노동 전환도 에너지 전환도 모두 어렵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표출되는 교육 노동자와 돌봄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의 적대와 갈등도 마찬가지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라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양식을 지금의 학교만큼 잘 보여 주는 곳도 없다.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을 향해 연대하기보다 서로를 적대화하며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지점도 모두 법적 절차로 이전된다. 이처럼 서로를 향해 적대와 혐오를 표출하게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점점 더 불신하고 조롱하게 만드는 ‘대중 혐오’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적대의 전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위기를 연결하는 선들에 의해서만 다시 그려질 수 있다.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를 동일하게 하고, 이주 노동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고 단결권, 교섭권, 파업권을 동등하게 가질 때,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은 인종을 넘어 정부와 사측의 차별 정책에 함께 저항할 수 있다. 농업 현장도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위기를 연결하고 공동의 대안과 목표를 만들 때만 우리는 보편적 정의와 권리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자신도 이미 단일 정체성의 존재가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오가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교차로의 존재다. 나무 베기 작업을 하는 이주 노동자에게 한국인인 내가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었듯이 말이다. 각자의 피해와 자기의 권리 속에 갇힐 때 연결된 이들의 권리는 나의 권리와 상충하는 것이 되고, 혐오와 폭력을 역사적 맥락에서 도려내어 각각의 분리된 사건으로 보게 되면 그 사건 속의 가해자를 ‘괴물’로밖에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괴물을 죽여도, 괴물을 만드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괴물은 금방 다시 나타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누구나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건이 일어난 전체 구조를 함께 볼 때이다. 그때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각자의 삶 속에 각자의 목소리로 터져 나오는 위기들은 상관없어 보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교육 현장에서 날마다 마주치는 존재들도 그러하다. 학교에는 마트 앞에서 오이를 들고 망설이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어머니의 간병이나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돌봄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발을 구르는 교사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에는 입시 제도나 평가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육 경쟁’에서 완전히 ‘열외’인 학생들,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온 어린이, 생활비나 대출금 때문에 벌어진 부모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잠든 청소년이 있을 것이다. ‘불법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위축되고 불안해지는 이주 배경 가정의 자녀와, ‘외국인 노동자 불법 고용 때문에’ 일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설 노동자의 자녀가 함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 그 속에서 그어진 온갖 적대와 혐오와 차별의 선들이 뒤엉키는 곳이기도 하다. 이 다양한 취약성들이야말로 연대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취약성을 잇는 선들을 연대와 저항의 선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
체제를 전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운동’을 시작하자
‘체제 전환’이란 말이 운동의 과제로 대두하고 있는 이유는, 각각의 운동으로 각각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 체제가 일으킨 현재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 또한 같은 판단 속에서 만들어진 교육운동의 방향 전환을 제시하는 말일 것이다. 최근 체제 전환이라는 판단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전국의 여러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모여, 각 부문별 의제별로 분리된 사회운동을 가로질러 연결하기 위한 ‘체제전환운동 포럼’(2024년 2월 1~3일)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2024년 3월 23일)를 개최했는데, 체제 전환 운동을 제안하는 발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의 얼굴로 여성을, 농민의 얼굴로 이주 노동자를, 빈민의 얼굴로 청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운동의 가로지르기를 요약하는 이 문장을 나는 참 좋아한다.
체제 전환을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체제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당연히 자본주의 체제라고 대답하면, ‘혁명이라도 하자는 것이냐’는 말이 돌아온다. 혁명이라면 혁명이다. 그러면 왜 혁명이 아니고 ‘전환’이냐 묻는다. 나는 전환이 혁명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어느 날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의미가 ‘전환’이란 말 속에 담겨 있다. 전환이 그냥 될 리 없기에, ‘전환 운동’이 필요하다. 현 체제의 주인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기에 전환 운동은 곧 저항 운동이기도 할 것이다. 체제 전환 운동에는 위급할수록 근본적 변화를 위한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회운동을 해 나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현 사태는 지난 30년간 전 세계적 자본주의 축적 위기에 대응했던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이제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20세기 후반에 잠깐 나타났던 고도 성장도, 수출 신화도, 흥청망청 풍요롭던 시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강대국들의 전쟁과 대공황과 대감염병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이전보다 훨씬 나쁜 형태로. ‘세계의 끝’에 도달했음을 누구나 감지한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위기는 점점 더 분명하게 감지되지만, 위기의 실체는 점점 복잡해지고 모호해진다. 그럴수록 더욱더 위기의 단면들에만 주목하기보다, 위기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위기를 다 막아 내지 못할지라도,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대비하면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닥치는 것과,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채로 막연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기후 정의’는 환경 정책의 방향을 가리키는 담론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기후 정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체제 전환’ 역시 위기의 징후에만 매몰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해결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구호로 등장해서 구체적인 사회 변혁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인식과 실천을 촉구한 교육 혁명의 화두요 담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담론에서 보다 실천적인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던 노동 체제, 교육 체제, 돌봄 체제는 연결되어 무너지고 있다. 각 체제들의 붕괴는 체제 전체의 붕괴를 예고한다. 그러나 체제의 끝은 다른 세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낡은 체제의 붕괴가 곧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자동으로 열어 주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교육 혁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다양한 운동들이 모이고 엮이며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체제 전환 운동의 물결에 합류하고, 교육운동의 장 안으로 체제 전환 운동을 적극 펼쳐 내자. 저항의 교육학, 해방의 교육학으로서의 페다고지 운동을 생태적 페다고지 운동으로 다시 재구성하고 확장해 나갈 방법을 체제 전환 운동 속에서 함께 찾아 가 보자고, 교육운동의 동지들에게 제안한다.
특집 | 교육과 교육운동, 전환의 과제
체제를 전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운동’을 시작하자
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오이가…… 아직 비싸네.” 2개 4,500원이 찍힌 오이 앞에서, 젊은 부부가 망설이다 그냥 간다. 마트에서 종종 보는 장면이다. 나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3월 초 강의하러 갔던 서울의 대학가 앞에는 ‘임대 문의’ 종이를 붙인 빈 점포들이 이빨 빠진 자리처럼 듬성듬성하다. TV에는 부산대 앞 점포 4곳 중 1곳이 공실이라는 뉴스가 나온다. 20대 청년 절반 이상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고 한다. 접경 지역에 살면서 가까이서 보게 되는 군사 훈련의 강도는 점점 높아진다. 올해는 소양호에서 대규모 도하 작전을 펼치는 장면도 보았다. 아들은 얼마 전 미확인 비행 물체가 군사 분계선을 넘어와 24시간 실전 상황 비상 대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한다.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 채로 완전 군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적을 기다리고 있었을 청년들에게 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시골집에 홀로 살아가기를 고집하던 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요즘 요양원도 좋은 데는 좋다더라”라는 말을 한다. 이상하다, ‘절대로 요양원은 가지 않고 싶다’고 했는데……. 〈플랜 75〉라는 일본 영화가 개봉했다. 노인들이 75세가 되면 존엄하게 죽을 기회를 주고, 비용을 국가가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한 합리적 대안처럼 양자택일의 선택이 제시된다. 구차하게 연명하는 삶을 살 것인가, 명예롭게 사라질 것인가. 이것을 ‘선택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새로운 세계 합리성’이 도처에서 등장한다. 30년 전 정리 해고 도입과 함께 등장한 ‘명예퇴직’은 이제 ‘명예 죽음’에 이르고 있다.
며칠 전 새벽, 첫차를 타러 가는 길에 동네에서 소나무를 베는 걸 봤다. 놀라서 다급하게 “아저씨, 아저씨! 왜 나무를 잘라요?” 하고 물으니, 답은 않고 서로 손짓만 하면서 미룬다. 뛰어가서 보니까 모두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도 놀랐는지 “이거 이거, 안 돼 안 돼, 잘라 잘라” 허둥대며 해명을 한다. 불법 체류 노동자를 ‘색출’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갑자기 소리치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한국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지, 버스에 올라서야 나는 생각한다. 다음 날, 잘린 소나무 밑동을 따라 하늘 위로 지나가는 전선을 보면서 이유를 알았다. 소나무를 뽑고 전기가 흐르는 곳은 밀양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강변에 희끗희끗 보이는 게 첫눈 온 흔적일까 반가운 마음에 강에 내려갔다가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눈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보니 허옇게 부글거리는 거품이었다. 나는 가선 안 될 곳에 가서, 보면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서 집으로 왔다. 여기는 강과 호수의 발원지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겨울이 끝나 갈 무렵엔 그 강 곳곳에 ‘해빙기 얼음 깨짐 주의’ 푯말이 세워진다. 사실 늘 불안하다. 언제 어디서 발밑이 꺼질지 모르는, 허약한 체제의 살얼음판 위를 건너가는 기분.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은 오래되었다. 어느 날은 아파트가, 어느 날은 빌라가, 어느 날은 은행이 무너진다. 이것은 오래된 붕괴다. 일상 곳곳에서 세상의 한 귀퉁이가 날마다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시골 빈집의 담벼락처럼. 베어지고 뽑혀 나갈 위험으로부터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삶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왔는데, 그 농촌이 생태 위기의 최일선 전쟁터다.
연결된 위기
우리들 각자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불안은 세계적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발발했고,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 전쟁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미, 중, 러 사이의 적대적 긴장 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전쟁 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 조선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로 재규정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 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이 파산했고, 한국에선 전세 사기 사건이 터지고 부동산 시장 붕괴가 시작됐으며,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을 시작으로 대형 건설사들의 부도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108%가 넘었다. 한마디로 소득보다 빚이 더 많은 구조다. 선진국 경제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의 3∼4배에 이른다. 기업 부채만 아니라 정부 부채, 가계 부채 비율도 높다. 앞에서 보았던 동네의 풍경은 세계의 풍경을 거울처럼 비춰 준다. 경제지들은 IMF 외환 위기 때보다 더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IMF 때는 해고자들에겐 명예 퇴직금이라도 있었고 가계에는 저축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때는 없던 부채까지 잔뜩 짊어지고 위기를 맞이해야 한다. 대량 해고는 회사에서 쫓겨난 이들을 창업으로 내몰았고 자영업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제는 자영업 시장이 붕괴한다. 외식 배달 문화가 K-문화의 상징이 되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도 자영업의 불황은 끝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 이후 공공 서비스 삭감과 국가 복지의 부재를 대출로 때워 왔고, 팬데믹 때까지도 대출이 복지를 대신했지만, 고금리 시대가 왔고 대출로 버티는 것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일자리와 소득은 줄어들고 금리와 물가는 오르고 있는데,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뾰족한 벼랑 끝 위에 홀로 선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툭툭 떨어진다. 저녁 뉴스를 모으면 무너진 삶들의 거대한 무덤이 날마다 생겨난다.
이 이야기들이 교육과 무슨 상관인가. 이런 상황들이 오늘날 우리가 ‘교육의 위기’라고 부르는 사태를 구성하고 있는 교육의 현실이고 조건이다. 모든 곳이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교실만 무너지지 않을 리는 없다. 지금 우리가 ‘교실 붕괴’, ‘교육의 위기’라 부르는 것도 갑작스럽게 온 게 아닌, 오래된 위기이다. 오늘날 교실 붕괴, 학교 붕괴로 불리는 교육의 위기는 사회의 붕괴가 일어나는 구조 속에 자리한다. 교육의 위기는 더 큰 체제의 붕괴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학교의 안과 밖을 분리하고 교육을 교육 문제로만 바라보는 사유에 익숙하다. 분리의 선은 교육과 사회, 교육과 가정, 교육과 노동, 교육과 돌봄 사이에 쉽게 그어진다. 분리의 선을 긋고 나면, 나눠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하나의 체제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 이 분리의 선은 ‘생산과 재생산, 노동과 돌봄, 착취와 수탈(남반구와 북반구), 사회와 자연, 경제와 정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등을 가르는 근대적 분리에서도 나타난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전자를 중심에 놓고 사회를 배치하며 후자의 영역을 축소하고 은폐하며 수탈해 온 것이 서구 자본주의 역사이고 성장 체제다. 환경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개수대의 비유’는 이 분리의 모순을 보다 쉽게 설명한다. 개수대가 ‘시장 경제’라고 불리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내부를 상징한다면, 외부는 그 바깥에 있는 훨씬 광대한 진짜 생산의 영역이다. 마리아 미즈는 지구가 생산하는 것 중에서 시장이 생산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비유하며 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자연, 여성, 식민지의 노동과 생산이라고 설명한 적 있다.[ref]마리아 미즈, 최재인 옮김(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 축적》, 갈무리.[/ref] 에코 페미니스트와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외부화, 무상화, 비가시화한 진짜 생산의 영역을 드러내고, 생산을 생산하는 재생산 노동을 정의하였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재생산에 대한 무상의 전유와 수탈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공식화된 임노동 체제로부터의 착취보다 비공식 경제로부터의 수탈이 성장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ref]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 - 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장석준 옮김(2023), 책세상)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다.[/ref]
자본주의 체제는 수도를 틀면 언제나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다 쓰고 난 물을 배수구로 흘려보내면 그 물이 어디선가 정화되어 다시 수도꼭지에서 콸콸 흘러나올 것이라는 가정하에 맘껏 쓰고 버리면서 생산 영역(개수대) 안에서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 매진했던 체제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꼭지에서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거나, 더러운 물이 나오거나,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지금 기후 위기, 생태 위기가 바로 그 난리다. 그런데도 자본은 여전히 이것을 지구의 뭇 생명들이 처한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위기로 본다. 강이 마르고 썩어 가는데, 수돗물이 제때 안 나오는 것만 걱정하는 꼴이다.
개수대의 비유는 노동과 돌봄, 교육과 돌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공장에 노동자들이 콸콸 쏟아져 들어와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콸콸 쏟아져 나가면 다음 날 어디선가 다시 정화되고 재생되어,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할 수 있는 몸이 되어 회사로 돌아온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음 날 다시 누군가가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서 학교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여겨 왔다. 우리는 이런 가정-학교-사회 모델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기며, ‘어디서, 누가, 어떻게’ 그들을 돌봐 왔는지 묻지 않았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개수대의 위기가 개수대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듯이, 지금 학교의 위기, 교육의 위기도 학교 안에서 교육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없는 상태이다. 우리는 고장 난 수도 고치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교육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교육 바깥으로 외부화했던 것들을 적극 교육운동의 장으로 가져와야 하고, 교육 영역이라 불리는 좁은 틀을 벗어나 더 넓은 관점에서 교육운동의 과제를 보아야 한다. 현재 체제 위기는 시장의 실패나 제도의 실패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님에도, 외국인 가사 도우미나 늘봄학교 같은 대안은 여전히 노동 시장, 돌봄 시장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려는 협소한 시각에서 해결책을 찾는 사례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노동 체제와 가부장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대안이다.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재생산 문제를 해결하라는 자본의 명령, 생산과 성장 중심주의, 체제 유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대안인 것이다.
개수대 바깥의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개수대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전’이 시작된다. ‘학교폭력’, ‘교실 붕괴’라 부르는 사태는 내전의 격돌이자 계급 전쟁의 단면이다. 오히려 문제를 계속 학교 안으로 불러들이는 저 이름이 사태의 본질을 축소하고 단순화한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양식을 대표하는 3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ref]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정기현 옮김(2024), 장석준 해제,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원더박스.[/ref] 체제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봉쇄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들이 된다. 그 ‘몫’이 20세기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에서처럼 더 큰 이익이나 분배의 몫, 인정의 몫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일 때, 사회적 투쟁은 개인들의 투쟁으로 파편화되고, 더 잘 살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된다.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의 양상은 분배 투쟁이나 정체성 투쟁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 투쟁이 펼쳐지는 신자유주의적 내전 상황에 이미 돌입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바깥도 없고 다음도 없으니, 체제 안에서만 대안을 찾으라는 것은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구호가 만들어 낸 정신의 감옥이다. 그 감옥은 ‘현실적 대안, 실현 가능한 대안, 제도화할 수 있는 대안, 동의 가능한 대안(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동의할 수 있는 대안)’ 등으로 표현된다.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자본주의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만든다. 사적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그럴수록 보호, 안전, 질서에 대한 요청도 함께 높아지지만, 그 요구를 감시와 통제, 그리고 폭력을 진압하는 폭력으로 잠식시킨다. 구성원들의 대화, 토론, 조정, 합의는 모두 당사자 간의 강제적인 법적 절차로 흡수되고,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 역량을 완전히 말살시킨다. 스튜어트 홀은 1970년대 영국에서 발생한 노상강도 사건을 계기로 폭력 예방을 위해 국가가 법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영국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고찰한 바 있다. 각종 ‘보호법’과 ‘예방법’은 피해를 당하는 약자와 민중을 보호하기보다는 체제의 질서와 안녕을 보호하고, 저항을 폭력으로 규정하여 진압하는 법적 근거로 사용된다.[ref]스튜어트 홀 외, 임영호 옮김(2023), 《위기 관리 – 노상강도, 국가, 법과 질서》, 박영사.[/ref]
무너지는 성장 신화와 교육 신화
현재의 노동-교육-돌봄의 삼중 위탁 체제는 성장 체제를 지탱해 온 체제이며, 성장 체제에 의해 지탱되어 온 체제이다. 그러니 성장 체제의 근본적 위기가 도래한 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체제이다. 근대 국가 교육은 국가 엘리트 양성, 노동자 양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복무했다. 전자는 인재 개발, 후자는 인력 보급이라고 불린다. 교육과정에서 분류되는 관리 계급과 생산 계급은 인문계와 실업계 같은 이원화된 진로에 따라 또는 성적에 따라 나눠지고, 이 과정에서 ‘시험’이 후자에 대한 전자의 지배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적 장치가 되어 왔다. 이런 차별적 구조 속에서도 과거의 교육은 하나의 신화에 의해 지탱되어 왔는데, 그것은 ‘제대로 배워야 제대로 된 직업을 얻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교육은 필요하다고 믿어졌다. 특히 인재 개발론이 경제 성장론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던 한국 사회에서 교육 신화는 성장 신화와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다. 고도 성장기에 사람들은 20대 초반에 사회로 나오면 졸업장을 가지고 직업을 얻고 그것으로 평생 제 앞가림은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교육 수준은 직업, 임금, 소득, 지위, 인정, 처우 등과 대체로 비례했고, 문화 자본, 상징 자본으로서의 학력·학벌 자본은 다른 사회적 자원과 호환 가능했다. 성장 신화가 지속되는 동안은 교육 신화도 함께 유지되었다.
그러나 성장 신화가 붕괴했다. 1990년대 이후 성장을 추동해 온 금융 호황기도 막을 내리고, 중산층 자산 기반이었던 주식, 아파트도 불안정해지고, 학력과 학벌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위 소득 보장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청년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고학력 실업자들도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전문직도 고용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퇴직할 수 없는 노년층과 실업 잉여군의 진입으로 하층 저임금 불안정 노동 시장도 경쟁이 치열하다. 이제 어지간한 대학을 나와도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래로부터 시작된 일자리 박탈과 몰락의 도미노가 점점 상층 계급을 향해 오면서, 중간 계급의 계급 재생산 위기와 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도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상층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하방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의대 쏠림’ 현상은 중간 계급 상층부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입시 전쟁은 특정 계급의 전쟁이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교육 의제이고 정책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그 끝은 삼포·사포·오포요, ‘모쏠’에, ‘무직’에, ‘무능’한, 직장도 없고 집도 없는 어른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고, 그 공포감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20년 정도 교육과정을 거쳐 사회로 나오면 제 힘으로 먹고살 수 있기는커녕, 배운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선배들처럼 곧 자신들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학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지금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교사 자신도 믿지 않는 환상과 망상을 심어 준다. 거대한 거짓말의 향연장이 되어 버린 학교에서 진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앎과 삶의 괴리’는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지만, 지금의 상황은 ‘실천교육학’이 제기한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세상에서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재난과 참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청년/학생들은 그것을 매일 보고 듣고 있으며, 그런 세상에서 자신들은 미래가 봉쇄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학교에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수업을 하고, 숙제를 내고, 시험을 본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토론은 사라지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해진 진도만 나간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계속 4.16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배가 침몰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라’ 했던, 참사를 보면서도 ‘가만히 있으라’ 했던. 과거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주권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부장적 책임감을 과시적으로 보여 줘야 했다면, 현대의 통치자들은 우주선을 개발하고 지하 벙커를 만들면서 재난이 닥치면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과거 군부 독재의 가부장제 통치는 무서운 아버지의 얼굴로 내 가족, 내 국가를 호령하며 내가 먹이고 살리니 내 말을 들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부장들은 나는 내가 알아서 살겠으니 너희도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30년을 거쳐 오는 동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국가의 역할과 통치 양식의 변화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재난과 참사의 과정에서 등장했던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정치공동체의 부재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학부모, 학생에게 눈앞의 교사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국가와 통치 권력의 표상이며, 체제의 인격화된 존재다. 진리의 체계가 작동하던 시대의 교사는 ‘지식 전달자’ 행세라도 할 수 있었지만,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의 교사는 쓸모없는 ‘교과서적 지식’이나 읽어 주는 우스운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교권 추락’이라 부르는 사태가 어떤 사회 변동 속에서 출현한 것인지 역사적 관점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식과 학문의 생산과 전달이 이뤄지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청소년들은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는 유튜브가 더 낫고, 입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일타 강사’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신적 스승도 사교육 강사가 담당한다. 성적대로 줄 세우면서도 타인을 도우라고 말하는 위선적인 교사보다, 너만 생각하라고 따끔하게 조언하며 ‘멘탈을 잡아 주는’ 사교육 강사들이 차라리 더 솔직하고 자신을 위해 주는 참스승처럼 보인다. 위선은 구리고 위악은 멋져 보이는 시대가 됐다. 교사들이 정치적 발언으로 봉변을 당할까 봐 입단속을 하는 사이, 스타 강사, 셀럽들은 혐오 발언을 내뱉어도 사이다 발언으로 영웅이 된다. 상위권 학생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실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학교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온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교사가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교실 붕괴’란 수업을 정상적으로 못 할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실 붕괴는 정상성의 붕괴가 문제가 아니고, 정상성의 회복이 교육의 회복이 될 수도 없다. 구체제의 정상성을 되찾는 것이 진보적 교육운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정상적으로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위계화된 직업을 얻고, 정상적으로 임금을 받는 대신 정상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던 그런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좋은 체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회가 너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자, 지금보다는 덜 나빴던 체제를 그리워하는 ‘과거 지향’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그린 뉴딜’ 같은 녹색 케인즈주의는 계급 타협 시대를 그리워하는 서구 리버럴 좌파의 보수주의적 퇴행이다. ‘그런 시절’도 없었던 한국에서는 ‘그게 어디냐, 그거라도 해 보면 좋겠다’가 미래로의 퇴행을 이끄는 단골 멘트이다. 20세기 성장 체제에 조응했던 복지 체제는 앞으로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교육 체제도 마찬가지다. 그 체제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고, 무너져야 한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무너뜨리느냐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더 이상 체제 유지냐, 체제 전환이냐가 아니다. 우리는 무질서와 혼돈 속의 몰락이냐, 전망과 계획을 가진 체제 전환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된 저항
저항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항자들의 모습은 점점 가시화되고 커져 가고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소리 높여 위기를 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레타 툰베리는 수요일의 학교 파업을 시작했다. ‘청소년 기후행동’의 구호는 “체제 전환(system change)”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체제 전복(uproot the system)”이다. 이것이 전 세계적인 기후운동의 씨앗이 되어 번져 나간 과정을 생각해 보라. 조직된 시민들의 모범적 시위만이 저항인 것은 아니다. 나는 학교에서 자는 학생들도 온몸으로 체제를 거부하는 잠재적 저항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수업이야말로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했던 그 ‘불쉿 잡(bullshit jobs)’이 아닌가. 정당한 대가 없이 과도한 업무를 부과하거나, 시간 낭비인 무의미한 일을 반복적으로 시키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태업과 작업 방해로 소극적 불복종을 표출해 온 것은 오랜 전통이다. 그러니 일탈 행위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학교 거부도 학교에서 시위를 배우고 조직해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의 자발적 불복종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콧이 민중의 은닉 대본[ref]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2020),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 후마니타스.[/ref]을 통해 밝히려고 했던 것처럼, 민중의 행동에서 숨겨진 마음속 이야기를 발견하듯이 학생들의 거부에서 체제에 대한 거부를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로부터 유발된 폭력을 학교에 가둬 놓고 학교 안에서만 해결하라는 지침을 따르는 대신, 폭력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켜 체제 거부자들을 체제 전환의 동지들로 만들 수는 없을까. 위기에 대한 감각, 봉쇄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억울함, 헛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반항심, 이 모든 억압된 감정들이 뒤엉켜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터져 나오고 폭력적인 형태로 서로에게 분사되고 있는 것이라면, 분리와 격리 조치, 법적 제재란 아무런 개선도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추방과 배제, 감시와 통제를 통해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그것이 두려워 꼼짝 못 하게 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죄수복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현장을 너무 모르고 하는 순진한 소리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약자의 공격과 혐오는 지금 다른 현장에서도 수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현상이다. 켄 로치가 영화 〈나의 올드 오크〉에서 보여 주는 영국의 몰락한 노동 계급과 시리아 난민 사이의 갈등과 혐오의 양상은 최근 한국의 건설 노동자 탄압과 이를 이주 노동자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시킨 사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켄 로치가 건네는 질문은 ‘약자들의 연결된 위기를 연결된 저항으로 직조할 수 없는가’이다.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몰면서 탄압한 것은 1970년대 영국 정부의 전략과 똑같다. 대처 정부가 노동자 투쟁이나 학생 시위를 훌리건이나 노상강도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몰아갔듯이, 가장 강성 노조인 탄광노조를 본보기로 분쇄하고자 했듯이, 윤석열 정부는 건설노조를 찍어 눌렀다. 영국 탄광 노동자의 몰락과 노동조합운동의 쇠퇴도, 시리아에서 발발한 내전도, 모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전쟁의 결과다. 여기에 대한 분노가 집단적 혐오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위기를 연결하는 용기와 연대, 저항이 필요하다고 켄 로치는 말한다. 각자의 위기를 연결할 때 우리는 그 위기를 일으킨 공통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고, 함께 맞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최근 유럽에서 ‘EU 환경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농민 시위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한다. 그 누구보다 기후 위기에 고통받고, 그리하여 더 적극적으로 전환을 희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최일선 당사자들이 기후 정책의 열렬한 반대자로 나타나는 ‘그린 백래시’를 우리는 당혹스럽게 마주한다. 이것은 도시 중산층이 주도하는 ‘녹색 시민’이라는 정체성운동과 PC운동적 성격으로 변모해 간 녹색운동에 대한 소외된 계급의 누적된 반감의 표출이다. 또한 말만 ‘정의로운 전환’을 앞세울 뿐 실효적인 대책은 내놓지 않은 채, 자본에겐 녹색 시장, 녹색 산업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면서, 노동자 민중과 농민에게 탄소세, 기후세로 책임을 전가하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기후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격이다. 이번 트랙터 시위는 과거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으로 촉발되었던 화물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어 돌봄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까지 확산되었던 노란조끼 시위의 농민판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의 저항을 ‘반환경주의’, ‘반기후 세력’이라는 납작한 언어로 불러서는 적대와 갈등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EU가 있는 브뤼셀에 집결한 농민 시위대에는 여성 소농이 중심이 된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비아 캄페시나도 있지만 네덜란드 농민당 같은 극우 정당 지지자들도 있었다. 스페인 농민들은 유럽으로 수입되는 길목에서 모로코 농민들의 농산물을 실은 트럭을 공격하기도 했다. 아마 그들은 EU와 자본주의 농식품 체제에 퍼부을 욕을 눈앞의 화물 노동자에게 퍼부었을 것이다.
우리는 농민 시위, 노동자 투쟁의 이유를 지지할 수 있지만, 인종 차별의 언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판하고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인종주의자 딱지를 붙이고 백안시하는 것으로는,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조 탄압, 대량 해고 사태와 건설 현장의 사망·사고 사건을 막아 낼 수 없으며, 건설 노동자 문제도 이주 노동자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건설·농업 분야 에너지 전환도 기후 위기 앞에서 후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 대책이 없이는 계속 갈등이 심화될 것이고, 정의로운 노동 전환도 에너지 전환도 모두 어렵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표출되는 교육 노동자와 돌봄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의 적대와 갈등도 마찬가지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라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양식을 지금의 학교만큼 잘 보여 주는 곳도 없다.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을 향해 연대하기보다 서로를 적대화하며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지점도 모두 법적 절차로 이전된다. 이처럼 서로를 향해 적대와 혐오를 표출하게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점점 더 불신하고 조롱하게 만드는 ‘대중 혐오’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적대의 전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위기를 연결하는 선들에 의해서만 다시 그려질 수 있다.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를 동일하게 하고, 이주 노동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고 단결권, 교섭권, 파업권을 동등하게 가질 때,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은 인종을 넘어 정부와 사측의 차별 정책에 함께 저항할 수 있다. 농업 현장도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위기를 연결하고 공동의 대안과 목표를 만들 때만 우리는 보편적 정의와 권리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자신도 이미 단일 정체성의 존재가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오가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교차로의 존재다. 나무 베기 작업을 하는 이주 노동자에게 한국인인 내가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었듯이 말이다. 각자의 피해와 자기의 권리 속에 갇힐 때 연결된 이들의 권리는 나의 권리와 상충하는 것이 되고, 혐오와 폭력을 역사적 맥락에서 도려내어 각각의 분리된 사건으로 보게 되면 그 사건 속의 가해자를 ‘괴물’로밖에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괴물을 죽여도, 괴물을 만드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괴물은 금방 다시 나타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누구나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건이 일어난 전체 구조를 함께 볼 때이다. 그때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각자의 삶 속에 각자의 목소리로 터져 나오는 위기들은 상관없어 보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교육 현장에서 날마다 마주치는 존재들도 그러하다. 학교에는 마트 앞에서 오이를 들고 망설이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어머니의 간병이나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돌봄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발을 구르는 교사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에는 입시 제도나 평가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육 경쟁’에서 완전히 ‘열외’인 학생들,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온 어린이, 생활비나 대출금 때문에 벌어진 부모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잠든 청소년이 있을 것이다. ‘불법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위축되고 불안해지는 이주 배경 가정의 자녀와, ‘외국인 노동자 불법 고용 때문에’ 일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설 노동자의 자녀가 함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 그 속에서 그어진 온갖 적대와 혐오와 차별의 선들이 뒤엉키는 곳이기도 하다. 이 다양한 취약성들이야말로 연대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취약성을 잇는 선들을 연대와 저항의 선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
체제를 전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운동’을 시작하자
‘체제 전환’이란 말이 운동의 과제로 대두하고 있는 이유는, 각각의 운동으로 각각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 체제가 일으킨 현재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 또한 같은 판단 속에서 만들어진 교육운동의 방향 전환을 제시하는 말일 것이다. 최근 체제 전환이라는 판단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전국의 여러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모여, 각 부문별 의제별로 분리된 사회운동을 가로질러 연결하기 위한 ‘체제전환운동 포럼’(2024년 2월 1~3일)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2024년 3월 23일)를 개최했는데, 체제 전환 운동을 제안하는 발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의 얼굴로 여성을, 농민의 얼굴로 이주 노동자를, 빈민의 얼굴로 청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운동의 가로지르기를 요약하는 이 문장을 나는 참 좋아한다.
체제 전환을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체제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당연히 자본주의 체제라고 대답하면, ‘혁명이라도 하자는 것이냐’는 말이 돌아온다. 혁명이라면 혁명이다. 그러면 왜 혁명이 아니고 ‘전환’이냐 묻는다. 나는 전환이 혁명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어느 날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의미가 ‘전환’이란 말 속에 담겨 있다. 전환이 그냥 될 리 없기에, ‘전환 운동’이 필요하다. 현 체제의 주인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기에 전환 운동은 곧 저항 운동이기도 할 것이다. 체제 전환 운동에는 위급할수록 근본적 변화를 위한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회운동을 해 나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현 사태는 지난 30년간 전 세계적 자본주의 축적 위기에 대응했던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이제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20세기 후반에 잠깐 나타났던 고도 성장도, 수출 신화도, 흥청망청 풍요롭던 시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강대국들의 전쟁과 대공황과 대감염병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이전보다 훨씬 나쁜 형태로. ‘세계의 끝’에 도달했음을 누구나 감지한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위기는 점점 더 분명하게 감지되지만, 위기의 실체는 점점 복잡해지고 모호해진다. 그럴수록 더욱더 위기의 단면들에만 주목하기보다, 위기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위기를 다 막아 내지 못할지라도,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대비하면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닥치는 것과,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채로 막연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기후 정의’는 환경 정책의 방향을 가리키는 담론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기후 정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체제 전환’ 역시 위기의 징후에만 매몰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해결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구호로 등장해서 구체적인 사회 변혁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인식과 실천을 촉구한 교육 혁명의 화두요 담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담론에서 보다 실천적인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던 노동 체제, 교육 체제, 돌봄 체제는 연결되어 무너지고 있다. 각 체제들의 붕괴는 체제 전체의 붕괴를 예고한다. 그러나 체제의 끝은 다른 세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낡은 체제의 붕괴가 곧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자동으로 열어 주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교육 혁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다양한 운동들이 모이고 엮이며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체제 전환 운동의 물결에 합류하고, 교육운동의 장 안으로 체제 전환 운동을 적극 펼쳐 내자. 저항의 교육학, 해방의 교육학으로서의 페다고지 운동을 생태적 페다고지 운동으로 다시 재구성하고 확장해 나갈 방법을 체제 전환 운동 속에서 함께 찾아 가 보자고, 교육운동의 동지들에게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