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을 열며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점점 더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
2023년 2월, 교육공동체 벗 총회에서 《오늘의 교육》 편집 기조를 발표하면서 ‘3중 위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후/생태 위기, 핵/전쟁 위기, 금융/부채 위기, 하나도 엄청난데, 셋이 함께 닥쳐오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할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가. 총회가 끝나고 한 조합원이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고.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기후 재난의 규모와 강도는 눈에 띄게 커졌고, 지구상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일어나 우리는 매일 최악의 인종 학살을 목격한다. 세계적으로 고조되는 전쟁 위기는 대만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고조시키고 있다. 내가 사는 강원도 인제 접경지대에서는 올겨울 혹한기 훈련 기간 동안 전례 없이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금융 위기는 어떤가. 총회가 끝나자마자 3월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는 뉴욕커뮤니티뱅코프(NYCB)에서 시작된 상업용 부동산 투자 위기가 확산될까 봐 은행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국내에선 전세 사기 사건이 잇따랐고,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청년들의 학자금 대출 연체와 주택 담보 대출 연체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고, 모두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살얼음 위에 세워진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정치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극우파의 약진이 예상된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독일 농민 시위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까지 번져 대규모 유럽 농민 시위로 번지고 있다. 농민들은 자유 무역과 싸우면서도, ‘우리나라 농민부터 보호하라’며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보호주의를 주창한다. 부자들에겐 감세해 주면서 농민에게 유류세를 인상하고 보조금을 삭감하며 기후 위기 책임을 부과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환경 정책을 후퇴시키고 있다.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육의 불가능성을 선언하고도, 교육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교육/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월 16일,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카이스트 졸업식장에서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일어나 삭감된 연구 개발(R&D) 예산을 복원하라고 소리쳤다. 그의 행동은 대통령 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에 의해 곧바로 제지당했고, 경호원들은 그 학생을 힘으로 완전히 제압하여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붙잡고 몸을 들어 올려 바깥으로 끌어냈다. 자신의 졸업식이었지만 그는 다시 식장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총을 들지도, 칼을 들지도 않았고, 종이 한 장을 들었을 뿐인데. 경호원들은 시민을 테러범처럼 취급했다. 아니 위험한 물건처럼 다루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장면은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인간성이 밑바닥인 재벌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을 향해 “저거 치워!” 하는 장면과 흡사했다. 물론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고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벌이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인데, 모두가 보는 가운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걸 하고 있었다. 사설 경비 업체 용역 직원이나 대통령 경호실 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나서서 행동을 저지하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입을 막느냐고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는 그 얼굴에 가슴이 무너졌다. 들려 나간 학생이 외친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요구였다. 연구 개발비 삭감은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고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교수도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이 그런 꼴을 당해 짐짝처럼 들려 나가고 있는데도, 그만하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전교 1등 수능 1등 수재들이 모인, 전국 최상위권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는 학교라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표정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는 듯이 멀뚱멀뚱한 표정이었다. 소란이 일어나고 고개를 돌리는 그 와중에도 두 손은 무릎 위에 얌전하게 올려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서워졌다. 파시즘은 한 명의 미치광이 정치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방관하는 이들의 공모가 없이는 파시즘은 수립될 수 없다. 앞서 살펴본 저 세 가지 위기에 더하여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 깊은 수렁이다. 재난 자체보다 그 재난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의 확산이 더 두려운 일이다. 문제 자체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의 위기는 더욱 치명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교육의 문제가 놓여 있다. 민주시민교육도, 혁신교육도 완전히 실패했다. 언제부턴가 교육운동은 정치적 투쟁을 방기했다. 싸워야 할 것과 싸우지 않았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교육과 그에 대응한 교육운동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 없이 우리는 대안의 경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교육 불가능성은 현실에 대한 진단이었고,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사회의 구축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운동이 적극 가담하거나 협력하고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조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성과 평가를 제대로 하였는가. 신자유주의가 망가뜨린 사회와 인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교육운동의 굴절과 쇠퇴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 평가와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용기와 끈기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는 올해 편집 기조를 ‘용기와 끈기’라는 단어로 요약하였다. 용기란 금지된 것을 발화하고, 불편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끈기는 어떤 것을 단번에 이루고자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고 꾸준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요샛말로 용기가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정신이라면 끈기는 ‘꺾그마(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정신이겠다. 또한 이것은 ‘대안은 없다’, ‘자본주의 이후는 없다’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 교육운동 안에도 지난 30년간 깊이 스며들어 주체를 무력화해 온 ― 에 봉쇄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는 태도이며,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만들어 내라는/내야 한다는 투자자 주체성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투자의 시간’에 맞서 ‘교육과 돌봄의 시간’을 탈환하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금융 자본주의가 가한 공간과 시간성의 변형, 즉 ‘단기와 장기의 충돌’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손상된 것이 농(農)의 시간이고 교육과 돌봄의 시간이다. 1년이라는 회계 주기, 수익 회수라는 투자 주기와 교육의 시간은 전혀 맞지 않는다. 학교도 농사도 모두 투자의 시간에 종속되어 균질화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무엇보다도 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다시 되찾는 것이고, 그 점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문명의 농생태적 전환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1990년대 이후, 이전의 반체제운동에서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분출되어 나오면서 사회운동의 성격은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에서 다양성과 정체성 중심의 운동으로 변모하였고 이 과정은 사회운동의 계급적 분화를 촉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30년의 실험이 실패로 입증된 2008년의 파산 선고 이후, 그리고 결정적으로 팬데믹을 겪으면서 세계 도처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역풍과 반동이 다시 불어오고 있다. 사회운동 또한 다시 반체제운동으로 재조직되고 있으며, 부문 운동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함께 변혁하고자 하는 ‘체제전환운동’의 흐름은 이와 같은 정세의 반영이라 하겠다.
교육공동체 벗 또한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교육운동의 전망을 세워 나가야 한다. 언론은 민영화되어 종편은 혐오와 차별의 발신지가 되었고, 공영 방송은 공공성이 ‘0’인 방송이 되어 가고 있으며, 소위 진보라 하는 언론들은 상위 중산층을 대변하는 리버럴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수많은 진보 매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폐간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노동자, 민중,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줄 매체를 잃어버린다. 진보적 교육 담론지로서 《오늘의 교육》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좋은 교육 담론지가 되어야 한다. 적당한 교양지가 아니라 반교육에 맞서는 교육의 담론 투쟁을 전개하는 저항 매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교육》은 점점 더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도 그럴수록 더 용기를 내고, 저항하며, 실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무너져 가는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키고 돌보는 연대와 돌봄의 연결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 글은 ‘2024년 《오늘의 교육》 편집 기조’로 지난 2월 17일 교육공동체 벗 정기 총회에서 공유한 바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을 열며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장
점점 더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
2023년 2월, 교육공동체 벗 총회에서 《오늘의 교육》 편집 기조를 발표하면서 ‘3중 위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후/생태 위기, 핵/전쟁 위기, 금융/부채 위기, 하나도 엄청난데, 셋이 함께 닥쳐오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할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가. 총회가 끝나고 한 조합원이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고.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기후 재난의 규모와 강도는 눈에 띄게 커졌고, 지구상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일어나 우리는 매일 최악의 인종 학살을 목격한다. 세계적으로 고조되는 전쟁 위기는 대만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고조시키고 있다. 내가 사는 강원도 인제 접경지대에서는 올겨울 혹한기 훈련 기간 동안 전례 없이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금융 위기는 어떤가. 총회가 끝나자마자 3월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는 뉴욕커뮤니티뱅코프(NYCB)에서 시작된 상업용 부동산 투자 위기가 확산될까 봐 은행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국내에선 전세 사기 사건이 잇따랐고,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청년들의 학자금 대출 연체와 주택 담보 대출 연체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고, 모두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살얼음 위에 세워진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정치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극우파의 약진이 예상된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독일 농민 시위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까지 번져 대규모 유럽 농민 시위로 번지고 있다. 농민들은 자유 무역과 싸우면서도, ‘우리나라 농민부터 보호하라’며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보호주의를 주창한다. 부자들에겐 감세해 주면서 농민에게 유류세를 인상하고 보조금을 삭감하며 기후 위기 책임을 부과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환경 정책을 후퇴시키고 있다.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육의 불가능성을 선언하고도, 교육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교육/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월 16일,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카이스트 졸업식장에서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일어나 삭감된 연구 개발(R&D) 예산을 복원하라고 소리쳤다. 그의 행동은 대통령 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에 의해 곧바로 제지당했고, 경호원들은 그 학생을 힘으로 완전히 제압하여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붙잡고 몸을 들어 올려 바깥으로 끌어냈다. 자신의 졸업식이었지만 그는 다시 식장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총을 들지도, 칼을 들지도 않았고, 종이 한 장을 들었을 뿐인데. 경호원들은 시민을 테러범처럼 취급했다. 아니 위험한 물건처럼 다루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장면은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인간성이 밑바닥인 재벌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을 향해 “저거 치워!” 하는 장면과 흡사했다. 물론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고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벌이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인데, 모두가 보는 가운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걸 하고 있었다. 사설 경비 업체 용역 직원이나 대통령 경호실 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나서서 행동을 저지하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입을 막느냐고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는 그 얼굴에 가슴이 무너졌다. 들려 나간 학생이 외친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요구였다. 연구 개발비 삭감은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고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교수도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이 그런 꼴을 당해 짐짝처럼 들려 나가고 있는데도, 그만하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전교 1등 수능 1등 수재들이 모인, 전국 최상위권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는 학교라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표정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는 듯이 멀뚱멀뚱한 표정이었다. 소란이 일어나고 고개를 돌리는 그 와중에도 두 손은 무릎 위에 얌전하게 올려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서워졌다. 파시즘은 한 명의 미치광이 정치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방관하는 이들의 공모가 없이는 파시즘은 수립될 수 없다. 앞서 살펴본 저 세 가지 위기에 더하여 정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 깊은 수렁이다. 재난 자체보다 그 재난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의 확산이 더 두려운 일이다. 문제 자체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의 위기는 더욱 치명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교육의 문제가 놓여 있다. 민주시민교육도, 혁신교육도 완전히 실패했다. 언제부턴가 교육운동은 정치적 투쟁을 방기했다. 싸워야 할 것과 싸우지 않았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교육과 그에 대응한 교육운동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 없이 우리는 대안의 경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교육 불가능성은 현실에 대한 진단이었고,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사회의 구축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운동이 적극 가담하거나 협력하고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방조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성과 평가를 제대로 하였는가. 신자유주의가 망가뜨린 사회와 인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교육운동의 굴절과 쇠퇴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 평가와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용기와 끈기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는 올해 편집 기조를 ‘용기와 끈기’라는 단어로 요약하였다. 용기란 금지된 것을 발화하고, 불편한 언어로 말하고, 행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끈기는 어떤 것을 단번에 이루고자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고 꾸준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요샛말로 용기가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정신이라면 끈기는 ‘꺾그마(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정신이겠다. 또한 이것은 ‘대안은 없다’, ‘자본주의 이후는 없다’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 교육운동 안에도 지난 30년간 깊이 스며들어 주체를 무력화해 온 ― 에 봉쇄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는 태도이며,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만들어 내라는/내야 한다는 투자자 주체성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투자의 시간’에 맞서 ‘교육과 돌봄의 시간’을 탈환하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금융 자본주의가 가한 공간과 시간성의 변형, 즉 ‘단기와 장기의 충돌’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손상된 것이 농(農)의 시간이고 교육과 돌봄의 시간이다. 1년이라는 회계 주기, 수익 회수라는 투자 주기와 교육의 시간은 전혀 맞지 않는다. 학교도 농사도 모두 투자의 시간에 종속되어 균질화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무엇보다도 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다시 되찾는 것이고, 그 점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문명의 농생태적 전환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1990년대 이후, 이전의 반체제운동에서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이 분출되어 나오면서 사회운동의 성격은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에서 다양성과 정체성 중심의 운동으로 변모하였고 이 과정은 사회운동의 계급적 분화를 촉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30년의 실험이 실패로 입증된 2008년의 파산 선고 이후, 그리고 결정적으로 팬데믹을 겪으면서 세계 도처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역풍과 반동이 다시 불어오고 있다. 사회운동 또한 다시 반체제운동으로 재조직되고 있으며, 부문 운동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함께 변혁하고자 하는 ‘체제전환운동’의 흐름은 이와 같은 정세의 반영이라 하겠다.
교육공동체 벗 또한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교육운동의 전망을 세워 나가야 한다. 언론은 민영화되어 종편은 혐오와 차별의 발신지가 되었고, 공영 방송은 공공성이 ‘0’인 방송이 되어 가고 있으며, 소위 진보라 하는 언론들은 상위 중산층을 대변하는 리버럴 기관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수많은 진보 매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폐간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노동자, 민중,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줄 매체를 잃어버린다. 진보적 교육 담론지로서 《오늘의 교육》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좋은 교육 담론지가 되어야 한다. 적당한 교양지가 아니라 반교육에 맞서는 교육의 담론 투쟁을 전개하는 저항 매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교육》은 점점 더 나빠져 가는 세상에서도 그럴수록 더 용기를 내고, 저항하며, 실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무너져 가는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키고 돌보는 연대와 돌봄의 연결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 글은 ‘2024년 《오늘의 교육》 편집 기조’로 지난 2월 17일 교육공동체 벗 정기 총회에서 공유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