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78호(2024년 1+2월)
다들 잘 안다고 여기는 주제일수록 토론하기 어렵다. 대학 입시가 그렇다. 단지 할 말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강렬한 정념의 대상이다. 원망, 분노, 자아도취, 열패감이 얼룩진 주제다. 워낙 시끄러운 이야깃거리인 탓에, 작은 목소리는 묻히기 쉽다. 입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혹은 전력투구하지 않는 청소년도 많다. 고등학생 100명 가운데 약 16명이 직업교육을 받고 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취업하기를 희망한다. 입시 경쟁이 자기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 입시를 스스로 거부한 청소년도 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은 교육을 받았으나, 입시 경쟁을 거부하지도 몰입하지도 못했던 많은 학생들이 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대체로 작은 편이고, 일부러 귀를 기울여야만 들린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일부러 귀를 갖다 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입시를 특집으로 다룬 《오늘의 교육》 78호는 그래서 반가웠다. 난다의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게 된 것〉이 이처럼 작은 목소리를 담았다. 난다는 약함과 실패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경쟁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다. 약하면 창피해야 하고,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폭력적인 입시 경쟁 역시 그 뿌리에서 자라났다. 강해야 존중받는데, 누가 더 강한지를 판별하는 장치가 시험이었다. 그러니까 다수의 청소년이 한꺼번에 치른 시험 결과가 평생에 걸친 차별과 배제, 자아도취와 열패감의 근거가 됐다. ‘고3 때 공부 잘한 순서’가 사회에서 쓰이는 능력의 서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황세원의 〈입시에서의 성취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까〉가 이와 관련한 쟁점을 다뤘다. “중위값이나 최빈값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괜찮은 일과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수능 점수뿐 아니라, 소득 및 자산 등 모든 영역에서 우리 언론은, 그리고 대중의 눈길은 중간보다 훨씬 높은 쪽을 향하고 있다. 그저 가십에 불과한 수능 만점자 소식이 기사로 크게 다뤄지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이런 현실에선, 실제로는 중간에 속했으면서도, 스스로 가난하다거나 공부를 못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겸손과는 다른 차원이다. 실은 폭력에 가깝다. 중간에 미치지 않는 이들을 없는 존재 취급하는 논리인 탓이다. “중위값이나 최빈값”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야만, 그간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선명해질 수 있다. 대학 입시를 둘러싼 토론은 그렇게 목소리의 균형을 맞춘 뒤에 이뤄져야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소득과 처우가 그의 강하고 유능한 정도에 비례해야 공정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 능력을 드러내는 유일한 척도가 시험 점수라는 믿음이 겹치면서, 사교육 경쟁이 폭발했다. 그 정점에 의대 입시가 있다. 학원 밀집 지역에는 ‘초등 의대반’이 실제로 있다.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고학력 중산층 다수가 경제인으로 거듭났다. 비용 대비 효과, 흔히 하는 말로 ‘가성비’를 기준 삼아 모든 판단을 하게 됐다. 청소년의 진로 결정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다. 대학 입시 준비에 전력투구했을 때, ‘가성비’가 가장 좋은 선택이 의대 진학이다. 다른 전공을 택한다면, 수능 점수에 비례하는 생애 소득을 얻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직 의사인 문호진의 글이 의대 입시를 다뤘다. MMI(Mutiple Mini Interview) 등 의대 입시의 독특한 제도는 인성, 적성 등을 반영하여 선발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사교육을 받지 않고 이를 대비하기란 쉽지 않다. 좋은 의도로 도입한 제도가 부유층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하는 사례는 이미 흔하다. 실제로 의대 신입생 가운데 상당수가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지출하며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학생 개인의 노력에 더해, 학부모가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지출한 결과로 얻은 입시 결과에는 보상 심리가 따르기 쉽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의료계가 반발한 심리적 원인 가운데 하나일 테다. 경쟁 비용이 늘어날수록, 경쟁에서 앞섰던 이들은 지대 추구적인 성향을 갖기 쉽다. 경쟁이란, 더구나 돈이 많이 드는 경쟁이란 누구나 괴로운 일이므로, 일단 기득권 안에 들어온 뒤엔 벽을 높이 쌓아 배타적인 담합을 하게 된다.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은 정당한 보상이라고 믿고, 그에 대한 의심은 싹을 자른다. 기득권의 벽이 높아질수록, 성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 비용이 뛰어오른다. 성안에 들어간 이들의 보상 심리가 다시 팽창하는 악순환이다.
당초 시험이란, 배운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치르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교사와 학생이 점검하는 계기일 따름이다. 시험 점수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악순환에선, 성안에 들어갈 이를 거르기 위한 장치가 돼 버렸다. 그러므로 시험 본래의 목적보다 변별 그 자체에 초점을 둔 문제가 나온다. 이른바 킬러 문항이다. 최근 발표된 ‘2028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강태중과 구본창이 다룬 주제다.
《오늘의 교육》은 교육의 구조적인 모순과 한계에 대해 오랫동안 성찰해 왔다. 대학 입시에 대한 고민과 대안 모색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시가 그 자체로 목적이 돼 버린, 현행 교육 체제의 한계는 이미 어느 정도 공론화되어 있다. 이 한계는, 학교교육이 그 자체로 완결적 순환을 이룰 때만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시험 점수가 학교를 마친 뒤의 보상으로 맞교환되는 구조에선, 점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현상을 막기 힘들다. 일터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입시 결과로 보증된다는 믿음. 그리고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는 믿음, 이 두 가지를 허물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이를 위해선, 능력을 기르는 과정, 그보다 큰 차원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행복해야 한다. 배우고 깨우치고 익히는 시간 속에서 충분히 기쁨과 보람을 누렸고, 경제적 비용 역시 따로 들지 않았으므로, 학교 밖에서 굳이 남과 차별적인 보상을 구하려 할 이유가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행복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독실한 신앙에 대한 보상을 직장에서 구하려 할 리는 없다. 그에게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공동체다. 학교라고 해서 달라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입시 결과를 둘러싸고 평생 따라붙는 복잡한 정념은, 몇 가지 제도의 변화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입시 결과와 맞물린 한 가지 기득권을 깨고 나면, 배움에서 상처 입은 이들은 다른 기득권으로 몰려가 성을 쌓고 보상을 요구할 테다. 가르침의 보람과 배움의 기쁨만으로도 누구나 충분히 행복한 교육공동체, 비교육적인 입시 경쟁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 성현석(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78호(2024년 1+2월)
다들 잘 안다고 여기는 주제일수록 토론하기 어렵다. 대학 입시가 그렇다. 단지 할 말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강렬한 정념의 대상이다. 원망, 분노, 자아도취, 열패감이 얼룩진 주제다. 워낙 시끄러운 이야깃거리인 탓에, 작은 목소리는 묻히기 쉽다. 입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혹은 전력투구하지 않는 청소년도 많다. 고등학생 100명 가운데 약 16명이 직업교육을 받고 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취업하기를 희망한다. 입시 경쟁이 자기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 입시를 스스로 거부한 청소년도 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은 교육을 받았으나, 입시 경쟁을 거부하지도 몰입하지도 못했던 많은 학생들이 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대체로 작은 편이고, 일부러 귀를 기울여야만 들린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일부러 귀를 갖다 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입시를 특집으로 다룬 《오늘의 교육》 78호는 그래서 반가웠다. 난다의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게 된 것〉이 이처럼 작은 목소리를 담았다. 난다는 약함과 실패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경쟁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다. 약하면 창피해야 하고,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폭력적인 입시 경쟁 역시 그 뿌리에서 자라났다. 강해야 존중받는데, 누가 더 강한지를 판별하는 장치가 시험이었다. 그러니까 다수의 청소년이 한꺼번에 치른 시험 결과가 평생에 걸친 차별과 배제, 자아도취와 열패감의 근거가 됐다. ‘고3 때 공부 잘한 순서’가 사회에서 쓰이는 능력의 서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황세원의 〈입시에서의 성취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까〉가 이와 관련한 쟁점을 다뤘다. “중위값이나 최빈값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괜찮은 일과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수능 점수뿐 아니라, 소득 및 자산 등 모든 영역에서 우리 언론은, 그리고 대중의 눈길은 중간보다 훨씬 높은 쪽을 향하고 있다. 그저 가십에 불과한 수능 만점자 소식이 기사로 크게 다뤄지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이런 현실에선, 실제로는 중간에 속했으면서도, 스스로 가난하다거나 공부를 못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겸손과는 다른 차원이다. 실은 폭력에 가깝다. 중간에 미치지 않는 이들을 없는 존재 취급하는 논리인 탓이다. “중위값이나 최빈값”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야만, 그간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선명해질 수 있다. 대학 입시를 둘러싼 토론은 그렇게 목소리의 균형을 맞춘 뒤에 이뤄져야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소득과 처우가 그의 강하고 유능한 정도에 비례해야 공정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 능력을 드러내는 유일한 척도가 시험 점수라는 믿음이 겹치면서, 사교육 경쟁이 폭발했다. 그 정점에 의대 입시가 있다. 학원 밀집 지역에는 ‘초등 의대반’이 실제로 있다.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고학력 중산층 다수가 경제인으로 거듭났다. 비용 대비 효과, 흔히 하는 말로 ‘가성비’를 기준 삼아 모든 판단을 하게 됐다. 청소년의 진로 결정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다. 대학 입시 준비에 전력투구했을 때, ‘가성비’가 가장 좋은 선택이 의대 진학이다. 다른 전공을 택한다면, 수능 점수에 비례하는 생애 소득을 얻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직 의사인 문호진의 글이 의대 입시를 다뤘다. MMI(Mutiple Mini Interview) 등 의대 입시의 독특한 제도는 인성, 적성 등을 반영하여 선발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사교육을 받지 않고 이를 대비하기란 쉽지 않다. 좋은 의도로 도입한 제도가 부유층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하는 사례는 이미 흔하다. 실제로 의대 신입생 가운데 상당수가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지출하며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학생 개인의 노력에 더해, 학부모가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지출한 결과로 얻은 입시 결과에는 보상 심리가 따르기 쉽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의료계가 반발한 심리적 원인 가운데 하나일 테다. 경쟁 비용이 늘어날수록, 경쟁에서 앞섰던 이들은 지대 추구적인 성향을 갖기 쉽다. 경쟁이란, 더구나 돈이 많이 드는 경쟁이란 누구나 괴로운 일이므로, 일단 기득권 안에 들어온 뒤엔 벽을 높이 쌓아 배타적인 담합을 하게 된다.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은 정당한 보상이라고 믿고, 그에 대한 의심은 싹을 자른다. 기득권의 벽이 높아질수록, 성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 비용이 뛰어오른다. 성안에 들어간 이들의 보상 심리가 다시 팽창하는 악순환이다.
당초 시험이란, 배운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치르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교사와 학생이 점검하는 계기일 따름이다. 시험 점수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악순환에선, 성안에 들어갈 이를 거르기 위한 장치가 돼 버렸다. 그러므로 시험 본래의 목적보다 변별 그 자체에 초점을 둔 문제가 나온다. 이른바 킬러 문항이다. 최근 발표된 ‘2028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강태중과 구본창이 다룬 주제다.
《오늘의 교육》은 교육의 구조적인 모순과 한계에 대해 오랫동안 성찰해 왔다. 대학 입시에 대한 고민과 대안 모색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시가 그 자체로 목적이 돼 버린, 현행 교육 체제의 한계는 이미 어느 정도 공론화되어 있다. 이 한계는, 학교교육이 그 자체로 완결적 순환을 이룰 때만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의 시험 점수가 학교를 마친 뒤의 보상으로 맞교환되는 구조에선, 점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현상을 막기 힘들다. 일터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입시 결과로 보증된다는 믿음. 그리고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는 믿음, 이 두 가지를 허물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이를 위해선, 능력을 기르는 과정, 그보다 큰 차원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행복해야 한다. 배우고 깨우치고 익히는 시간 속에서 충분히 기쁨과 보람을 누렸고, 경제적 비용 역시 따로 들지 않았으므로, 학교 밖에서 굳이 남과 차별적인 보상을 구하려 할 이유가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행복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독실한 신앙에 대한 보상을 직장에서 구하려 할 리는 없다. 그에게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공동체다. 학교라고 해서 달라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입시 결과를 둘러싸고 평생 따라붙는 복잡한 정념은, 몇 가지 제도의 변화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입시 결과와 맞물린 한 가지 기득권을 깨고 나면, 배움에서 상처 입은 이들은 다른 기득권으로 몰려가 성을 쌓고 보상을 요구할 테다. 가르침의 보람과 배움의 기쁨만으로도 누구나 충분히 행복한 교육공동체, 비교육적인 입시 경쟁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는다.
- 성현석(교육공동체 벗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