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 비자발적 자발성으로서의 빈곤
글
정용주
edcom234@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초등 교사
좋은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가?”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지역 주민’이 될 수 있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사는가?’ 하는 문제는 거주 이전의 자유의 문제이지만) 전국의 많은 교사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 살지 않는다. 퇴근 시간이면 자신이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같은 지역에 살며 지역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삶의 동지’ 는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넘어 사회·경제적 구조의 불평등이 지역에 반영된다.
교육과 입시가 동일시되는 한국에서 초·중·고 과정은 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기르는 시간이 아니라 곧 대입 준비 기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입 준비에 최적화된 사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과 학교가 밀착하게 된다. 교사 역시 이러한 인프라가 구축된 지역에서 자녀를 키우기를 희망하기에 이런 지역의 학교가 좋은 학교가 된다. 여기에 더해 대입에 더 다양한 평가 지표를 반영하고 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다변화할수록, 더 많은 지역 자원과 부모 자원을 가진 학교 학생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격차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학교가 놓인 사회·경제·지리적 구조는 교육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separate but equal’이라는 용어는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미국의 주법인 짐 크로 법Jim Crow laws에서 유래했다. 짐 크로 법은 미국 흑인의 인권과 자유를 제한했던 19세기의 흑인 단속법과 비교할 때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는 사회적 지위를 갖게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지만 공립 학교, 공공장소, 대중교통, 화장실, 식당, 식수대에서의 백인과 흑인 격리를 합법화하였다는 점에서 인종 차별 자체는 지속시켰다. 합법적으로 인종 간 분리를 하도록 함으로써,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경제적 후원, 주거지, 학교생활 등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이는 곧 경제, 교육, 사회 등에서의 불평등을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짐 크로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신분 세습과 상승의 통로로서 기능하면서 동시에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가장 큰 영역 중 하나가 교육이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이라는 원칙을 교육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짐 크로 법은 생명을 다했지만 한국의 교육은 그렇지 못했다.
학교, 선진화된 주변성의 공간
완벽하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부모의 자원과 성별 등에 상관없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이라는 매개 변수를 통해서만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라면 학교는 평등과 공존하게 된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능력보다 가족의 계층 배경, 부의 세습, 특권의 대물림 등이 영향을 미친다면 학교는 불평등과 공존하게 된다.
지금의 학교는 점점 더 학생들이 마음껏 성장할 수 없게 만드는 인권 침해 장치로서 불평등과 강한 결합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학교가 과거에는 배제했던 이들에게까지 점차 문을 열고 무상으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범위를 넓혀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높은 수준의 개방성이라는 민주적 이상이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자치와 자율화 담론이 곧 소비자 담론과 시장 담론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교육과정이 학교가 속해 있는 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운영되고, 부모들이 자녀의 좋은 교육을 위해 배타적으로 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 강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사회 해체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민주적이며 불평등한’, 다시 말해 ‘민주적이지만 포용적이지 않은’ 학교의 ‘선진화된 주변성’을 강화시켰다. 학교에서 빈곤은 사라졌고 민주주의와 능력만 남았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지 않았어. 학교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배제했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이 똑똑하지도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야.”
불평등과 빈곤
3루에서 태어난 학생들과 홈에서 태어난 학생들의 결과는 같을 수없다. 스스로 안타를 치고 3루까지 진출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고 앞선 위치에 있는 학생들의 존재는 (부모의 능력이라는) 장벽이나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학교 안에서 누구나 계발할 수 있는 역량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불평등은 다양한 층위에서 작동하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빈곤은 건강 악화, 무기력, 불안, 자존감 결여, 학습 부진, 기회 박탈 등의 연쇄 효과를 내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그 안으로 한번 굴러 떨어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 가난한 사람이 계속해서 가난할 확률이 높다.
마치 볼링에서 1번 핀을 맞추지 않고는 스트라이크가 불가능하듯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평등한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불리한 가족 배경을 가진 아이들에게 보다 균등한 기회를 주는 적극적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생존과 건강, 무능한 부분에 대한 지원, 자신의 인생 경로를 선택하는 데 필요한 지식(교육)을 습득할 자유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할 자원을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모든 학생이 하나의 인간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의 평등이 구현되도록 해야 한다.
학교를 주변화시키는 제도 - 가족
두 가지 사고 실험을 해 보자.
사고 실험 1 : 모든 가구에 국가가 집을 한 채씩 주면 부동산 문제가 해결될까?
사고 실험 2 : 모든 학교가 특목고·자사고가 된다면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까?
첫 번째 사고 실험에서 국가로부터 집을 받은 사람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사를 생각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국가로부터 받은 집의 자산 가치가 다른 지역의 집을 받은 사람과 비교해 오르지 않자 자산 불평등에 예민해지고 대출을 얻어 이사할 것을 결심할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주택 문제가 실수요의 문제만큼이나 자산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고 실험에서 학부모들은 서열화의 정점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일제식 평가에 대한 대안적인 입시 제도로 학생부 종합 전형이 도입되었음에도 이 제도를 운영하는 비용을 개인에게 부과함으로써 사실상 “학종=금수저”라는 현상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사교육은 공교육의 종속 변수가 아니라 임금 불평등과 입시 제도의 종속 변수이며 공교육에 대해서는 독립 변수로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아니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교육이 사교육의 종속 변수이다.
두 사고 실험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제도로서 가족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장과 국가가 대표적인 불평등 제도라는 데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 곧 강력한 불평등의 기제라는 것은 쉽게 잊는다. 제도로서 국가와 시장은 어느 정도 부침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현재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불평등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전동 벨트이다.
한국의 불균등한 산업화 과정은 가족이 국가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행위 주체가 개인이 아니고 가족이 되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수준의 자원 결속과 지원, 동원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되면서 특별히 ‘헬리콥터 맘’과 같은 현상으로 대표되는 온 가족이 동원되는 입시 문화가 나타났다.
가족 제도가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되며 문제는 심화되었다.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결혼(계급 내 결혼)하여 끼리 끼리 모여 사는 것(도시의 계급화)이 구조화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사교육 시장을 강화시켰다. 출산과 양육에서 드러나는 계층 간의 격차도 계속 해서 벌어지고 있다. 중상류층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같이 놀아 주고 발레나 음악 교습, 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직업이 불안정한 부모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 가족 제도가 사회로 확장되면서 보다 좋은 삶을 위한 사회적 연대를 해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울리히 백이나 앤서니 기든 스는 개인화 테제를 주장했지만, 가족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강력해지고 있다.
가족주의가 강화되면서 부유층들은 약자들을 적대시하고 별도의 경호 체계를 수립하며 특권화된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를 구축한다. 사설 보안 산업은 번창하고 사회 분열은 사회 폭력으로 이어진다. 특권화된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는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불평등에 대한 참을 수없는 증오를 조장한다.
학교의 ‘마리 앙투아네트 효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이 표현은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이 빵을 요구한다는 말을 들은 앙투아네트 왕비가 대신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던 일화에 등장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이 표현은 상황 또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의미하는 ‘마리 앙투 아네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
빈곤에 대해 앙투아네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는 국내외적으로 다양하다. 외국을 예로 들면 스웨덴에서는 PISA에서 저소득층 학생의 성적이 떨어지자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사람을 구하는 부모들에게 세금을 돌려주는 정책을 실행했다. 스웨덴 정부는 특정한 자격이 되는 부모 중 자녀의 학교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에게 “숙제 도우미를 고용하고 세금 감면 신청서를 제출하라”는 마리 앙투아네트식 정책을 실행했다. 한국에서 앙투아네트식 처방은 보다 정교하게 작동한다. 교육과정의 실행에서 학교는 빈곤과 학생의 수행을 분리시키면서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 “가난하지만 배우려는 열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빈곤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학교에 보내도 되나요?”와 같은 언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학교가 빈곤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평등하지만 빈곤한’을 넘어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빈곤에 대한 다차원적 관점을 복원해 빈곤과 불평등을 보다 급진화시켜야만 유의미한 실천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빈곤은 주로 ‘물질적으로 결핍된 상황’이라는 정태적인 현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빈곤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이라는 현상을 넘어서서 다차원적인 불리함의 확대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소득 이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복지 프로그램이 교육에서 격차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던 이유의 일단을 알 수 있다. 한 학생의 교육 비용을 공적 예산으로 지원해 주면 학교에서의 다양한 격차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체험 학습비를 대 주고, 밥을 공짜로 주고, 돈을 내지 않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정책은 빈곤이 발생시키는 2차 빈곤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빈곤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 학생이 현재 배가 고프거나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부진 상태나 부모의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전망이 부재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의 부재는 바로 빈곤의 세대 간 전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빈곤이 세대 간 전승된다는 것은 빈곤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개인이나 가구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잃어 가고, 그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와 단절됨으로써 지역 사회에 대한 결속감을 상실하고, 따라서 이들로부터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빈곤의 경험은 배제로 이행하게 된다. 그 중심이 학교다. 학교라는 사회화 기관을 통해 빈곤을 확인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체계적으로 박탈과 배제를 경험한다. 그 방식은 빈곤을 주변화 하는 방식, 즉 능력주의를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의 전면화
앞에서 예로 든 “학교는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지 않았어. 학교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배제했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이 똑똑하지도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야”라는 표현을 상기해 보자. 이 표현은 리처드 리브스가 그의 책 《20 VS 80의 사회》에서 인용한 가상의 전사 사회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을 각색한 것이다. 가상의 전사 사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사 계급에 막대한 권위가 부여되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전사의 일은 굉장히 강한 신체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전사 계급에 부유층 가문 자제만 들어올 수 있었지만 평등주의적 개혁으로 규칙이 달라져 사회의 모든 계급, 모든 계층에서 합당한 경쟁을 통해 전사가 뽑힐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도 여전히 전사들은 거의 대부분 부유층에서 배출된다. 다른 계층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 못한 나머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고 자랄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신체적 능력이 열등하기 때문이다. 개혁가들은 기회의 평등이 진정으로 달성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부유층은 기회의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응수한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도 전사가 될 기회를 갖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운이 없어 신체적 능력이 시험을 통과하기에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부유층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가난하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체적 능력이 약한 사람들을 배제했다. 가난한 사람이 신체도 약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 리처드 리브스, 김승진 옮김, 《20 VS 80의 사회》, 민음사, 126쪽
이처럼 학생의 수행과 빈곤을 분리하면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학습 활동과 수행 과정, 평가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기반한 것이 되고 만다. 교육과정 실행 과정은 이러한 믿음을 공고하게 한다.
영재 학급에 진학하는 학생, 지자체와 교육청의 청소년 위원회 활동, 각종 외부 프로젝트, 리더십 프로그램, 학생회 임원 선거 등에서 빈곤한 학생보다 부유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이유는 빈곤 때문이 아니라 능력 때문이 된다. 가난한 학생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가졌지만 능력이 부족해 각종 평가에서 통과하지 못했거나 낮은 수행성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학교는 개인의 노력에 기초하여 성취를 이루는 곳으로 출생, 성장 환경과 같이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개입될 수 없다는 논리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의 불평등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더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하는 공정한 자원 배분의 과정으로 용인하게 된다. 이러한 체제 정당화 기제가 작동하면 학생들은 현재의 경쟁 체제가 공정하다고 믿게 되고, 차별에도 둔감해진다.
그러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 결합한 학교는 무형의 상속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대학 입학에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 부모의 적극적인 개입과 양육 태도, 학교의 질적 차이가 직업과 소득의 차이로 연결된다. 부동산의 상속과 증여와 달리 교육이라는, 부모의 살아생전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상속과 증여의 과정이 학교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학생들은 능력의 부족으로 현재의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결론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이렇게 비자발적 조건이 구조적 덫에 빠지게 하여 능력의 발달을 막고 있다는 것은 은폐된다.
분배 기제 자체를 다양화하고 실력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기
빈곤한 학생에게 학교는 아직 재능에 따라 엘리트가 선발되는 제퍼슨식 자연 귀족정natural aristocracy이 구현되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은 자격 없는 엘리트들을 몰아내고 자격 있는 엘리트로 채우는 기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 귀족정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빈곤한 학생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는 것은 모든 기본권의 종국적 목적이자 기본 이념이지만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불평등과 빈곤을 스스로 짊어지게 되었다.
당장의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해결 전망은 이미 나와 있다. 보편의 삶이 보편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가 99%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99%가 1%를 가지기 위해 싸우는 사회에서는 양보하는 순간 경쟁에서 밀려 자신의 몫은 챙기지 못하게 된다는 공포의 공동 토대를 부숴야 한다. 빈곤이 한 개인이 혹은 한 집단이 어떤 사회적 관계와 위치와 의식, 경제적 배경 위에 있는가의 문제라면 빈곤이 만들어 내는 현상은 수천, 수만 개가 존재한다. 이러한 빈곤의 다차원성으로부터 빈곤이 만들어 내는 ‘실력’이 무엇인지, ‘기여’가 무엇인지, ‘자기 책임’이 무엇인지를 두고 싸워야 한다.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책에서 우리에게는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다고 말한다. 가난은 수천 년 동안 줄곧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가난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대단한 해결책이 있는 듯이,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좋은 의도를 품은 세계 전역의 수백만 명과 함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무궁무진 개발하자고 제안한다.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기 때문에 학교를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공간에서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공간으로 만드는 작은 실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물질적 지원을 넘어 교육과정의 수행과 평가, 학생 활동 등 학생들의 삶 속에서 빈곤 문제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파악하면서 빈곤한 학생들이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창조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가 개발되고 실천되길 바란다.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 비자발적 자발성으로서의 빈곤
글
정용주
edcom234@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초등 교사
좋은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가?”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지역 주민’이 될 수 있는가?’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사는가?’ 하는 문제는 거주 이전의 자유의 문제이지만) 전국의 많은 교사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 살지 않는다. 퇴근 시간이면 자신이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같은 지역에 살며 지역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삶의 동지’ 는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넘어 사회·경제적 구조의 불평등이 지역에 반영된다.
교육과 입시가 동일시되는 한국에서 초·중·고 과정은 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기르는 시간이 아니라 곧 대입 준비 기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입 준비에 최적화된 사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역과 학교가 밀착하게 된다. 교사 역시 이러한 인프라가 구축된 지역에서 자녀를 키우기를 희망하기에 이런 지역의 학교가 좋은 학교가 된다. 여기에 더해 대입에 더 다양한 평가 지표를 반영하고 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다변화할수록, 더 많은 지역 자원과 부모 자원을 가진 학교 학생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격차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학교가 놓인 사회·경제·지리적 구조는 교육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separate but equal’이라는 용어는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미국의 주법인 짐 크로 법Jim Crow laws에서 유래했다. 짐 크로 법은 미국 흑인의 인권과 자유를 제한했던 19세기의 흑인 단속법과 비교할 때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는 사회적 지위를 갖게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지만 공립 학교, 공공장소, 대중교통, 화장실, 식당, 식수대에서의 백인과 흑인 격리를 합법화하였다는 점에서 인종 차별 자체는 지속시켰다. 합법적으로 인종 간 분리를 하도록 함으로써,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경제적 후원, 주거지, 학교생활 등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이는 곧 경제, 교육, 사회 등에서의 불평등을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짐 크로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신분 세습과 상승의 통로로서 기능하면서 동시에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가장 큰 영역 중 하나가 교육이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이라는 원칙을 교육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짐 크로 법은 생명을 다했지만 한국의 교육은 그렇지 못했다.
학교, 선진화된 주변성의 공간
완벽하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부모의 자원과 성별 등에 상관없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이라는 매개 변수를 통해서만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라면 학교는 평등과 공존하게 된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능력보다 가족의 계층 배경, 부의 세습, 특권의 대물림 등이 영향을 미친다면 학교는 불평등과 공존하게 된다.
지금의 학교는 점점 더 학생들이 마음껏 성장할 수 없게 만드는 인권 침해 장치로서 불평등과 강한 결합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학교가 과거에는 배제했던 이들에게까지 점차 문을 열고 무상으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범위를 넓혀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높은 수준의 개방성이라는 민주적 이상이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자치와 자율화 담론이 곧 소비자 담론과 시장 담론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교육과정이 학교가 속해 있는 지역에 따라 차별적으로 운영되고, 부모들이 자녀의 좋은 교육을 위해 배타적으로 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 강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사회 해체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민주적이며 불평등한’, 다시 말해 ‘민주적이지만 포용적이지 않은’ 학교의 ‘선진화된 주변성’을 강화시켰다. 학교에서 빈곤은 사라졌고 민주주의와 능력만 남았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지 않았어. 학교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배제했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이 똑똑하지도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야.”
불평등과 빈곤
3루에서 태어난 학생들과 홈에서 태어난 학생들의 결과는 같을 수없다. 스스로 안타를 치고 3루까지 진출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고 앞선 위치에 있는 학생들의 존재는 (부모의 능력이라는) 장벽이나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학교 안에서 누구나 계발할 수 있는 역량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불평등은 다양한 층위에서 작동하는데 그중에서 빈곤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빈곤은 건강 악화, 무기력, 불안, 자존감 결여, 학습 부진, 기회 박탈 등의 연쇄 효과를 내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그 안으로 한번 굴러 떨어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 가난한 사람이 계속해서 가난할 확률이 높다.
마치 볼링에서 1번 핀을 맞추지 않고는 스트라이크가 불가능하듯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평등한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불리한 가족 배경을 가진 아이들에게 보다 균등한 기회를 주는 적극적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생존과 건강, 무능한 부분에 대한 지원, 자신의 인생 경로를 선택하는 데 필요한 지식(교육)을 습득할 자유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할 자원을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모든 학생이 하나의 인간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의 평등이 구현되도록 해야 한다.
학교를 주변화시키는 제도 - 가족
두 가지 사고 실험을 해 보자.
사고 실험 1 : 모든 가구에 국가가 집을 한 채씩 주면 부동산 문제가 해결될까?
사고 실험 2 : 모든 학교가 특목고·자사고가 된다면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까?
첫 번째 사고 실험에서 국가로부터 집을 받은 사람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사를 생각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국가로부터 받은 집의 자산 가치가 다른 지역의 집을 받은 사람과 비교해 오르지 않자 자산 불평등에 예민해지고 대출을 얻어 이사할 것을 결심할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주택 문제가 실수요의 문제만큼이나 자산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고 실험에서 학부모들은 서열화의 정점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일제식 평가에 대한 대안적인 입시 제도로 학생부 종합 전형이 도입되었음에도 이 제도를 운영하는 비용을 개인에게 부과함으로써 사실상 “학종=금수저”라는 현상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사교육은 공교육의 종속 변수가 아니라 임금 불평등과 입시 제도의 종속 변수이며 공교육에 대해서는 독립 변수로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아니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교육이 사교육의 종속 변수이다.
두 사고 실험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제도로서 가족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장과 국가가 대표적인 불평등 제도라는 데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 곧 강력한 불평등의 기제라는 것은 쉽게 잊는다. 제도로서 국가와 시장은 어느 정도 부침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현재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불평등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전동 벨트이다.
한국의 불균등한 산업화 과정은 가족이 국가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행위 주체가 개인이 아니고 가족이 되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격렬한 경쟁에 돌입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수준의 자원 결속과 지원, 동원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되면서 특별히 ‘헬리콥터 맘’과 같은 현상으로 대표되는 온 가족이 동원되는 입시 문화가 나타났다.
가족 제도가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되며 문제는 심화되었다.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결혼(계급 내 결혼)하여 끼리 끼리 모여 사는 것(도시의 계급화)이 구조화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사교육 시장을 강화시켰다. 출산과 양육에서 드러나는 계층 간의 격차도 계속 해서 벌어지고 있다. 중상류층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같이 놀아 주고 발레나 음악 교습, 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직업이 불안정한 부모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 가족 제도가 사회로 확장되면서 보다 좋은 삶을 위한 사회적 연대를 해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울리히 백이나 앤서니 기든 스는 개인화 테제를 주장했지만, 가족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강력해지고 있다.
가족주의가 강화되면서 부유층들은 약자들을 적대시하고 별도의 경호 체계를 수립하며 특권화된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를 구축한다. 사설 보안 산업은 번창하고 사회 분열은 사회 폭력으로 이어진다. 특권화된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는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불평등에 대한 참을 수없는 증오를 조장한다.
학교의 ‘마리 앙투아네트 효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이 표현은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이 빵을 요구한다는 말을 들은 앙투아네트 왕비가 대신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라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던 일화에 등장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이 표현은 상황 또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의미하는 ‘마리 앙투 아네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
빈곤에 대해 앙투아네트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는 국내외적으로 다양하다. 외국을 예로 들면 스웨덴에서는 PISA에서 저소득층 학생의 성적이 떨어지자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사람을 구하는 부모들에게 세금을 돌려주는 정책을 실행했다. 스웨덴 정부는 특정한 자격이 되는 부모 중 자녀의 학교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에게 “숙제 도우미를 고용하고 세금 감면 신청서를 제출하라”는 마리 앙투아네트식 정책을 실행했다. 한국에서 앙투아네트식 처방은 보다 정교하게 작동한다. 교육과정의 실행에서 학교는 빈곤과 학생의 수행을 분리시키면서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 “가난하지만 배우려는 열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빈곤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학교에 보내도 되나요?”와 같은 언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학교가 빈곤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평등하지만 빈곤한’을 넘어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빈곤에 대한 다차원적 관점을 복원해 빈곤과 불평등을 보다 급진화시켜야만 유의미한 실천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빈곤은 주로 ‘물질적으로 결핍된 상황’이라는 정태적인 현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빈곤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이라는 현상을 넘어서서 다차원적인 불리함의 확대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소득 이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복지 프로그램이 교육에서 격차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던 이유의 일단을 알 수 있다. 한 학생의 교육 비용을 공적 예산으로 지원해 주면 학교에서의 다양한 격차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체험 학습비를 대 주고, 밥을 공짜로 주고, 돈을 내지 않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정책은 빈곤이 발생시키는 2차 빈곤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빈곤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 학생이 현재 배가 고프거나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부진 상태나 부모의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전망이 부재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의 부재는 바로 빈곤의 세대 간 전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빈곤이 세대 간 전승된다는 것은 빈곤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개인이나 가구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잃어 가고, 그가 속해 있는 지역 사회와 단절됨으로써 지역 사회에 대한 결속감을 상실하고, 따라서 이들로부터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빈곤의 경험은 배제로 이행하게 된다. 그 중심이 학교다. 학교라는 사회화 기관을 통해 빈곤을 확인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체계적으로 박탈과 배제를 경험한다. 그 방식은 빈곤을 주변화 하는 방식, 즉 능력주의를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의 전면화
앞에서 예로 든 “학교는 가난하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지 않았어. 학교는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배제했어. 나같이 가난한 사람이 똑똑하지도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야”라는 표현을 상기해 보자. 이 표현은 리처드 리브스가 그의 책 《20 VS 80의 사회》에서 인용한 가상의 전사 사회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을 각색한 것이다. 가상의 전사 사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사 계급에 막대한 권위가 부여되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전사의 일은 굉장히 강한 신체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전사 계급에 부유층 가문 자제만 들어올 수 있었지만 평등주의적 개혁으로 규칙이 달라져 사회의 모든 계급, 모든 계층에서 합당한 경쟁을 통해 전사가 뽑힐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도 여전히 전사들은 거의 대부분 부유층에서 배출된다. 다른 계층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 못한 나머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고 자랄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신체적 능력이 열등하기 때문이다. 개혁가들은 기회의 평등이 진정으로 달성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부유층은 기회의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응수한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도 전사가 될 기회를 갖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운이 없어 신체적 능력이 시험을 통과하기에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부유층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가난하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체적 능력이 약한 사람들을 배제했다. 가난한 사람이 신체도 약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 리처드 리브스, 김승진 옮김, 《20 VS 80의 사회》, 민음사, 126쪽
이처럼 학생의 수행과 빈곤을 분리하면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학습 활동과 수행 과정, 평가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기반한 것이 되고 만다. 교육과정 실행 과정은 이러한 믿음을 공고하게 한다.
영재 학급에 진학하는 학생, 지자체와 교육청의 청소년 위원회 활동, 각종 외부 프로젝트, 리더십 프로그램, 학생회 임원 선거 등에서 빈곤한 학생보다 부유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이유는 빈곤 때문이 아니라 능력 때문이 된다. 가난한 학생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가졌지만 능력이 부족해 각종 평가에서 통과하지 못했거나 낮은 수행성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학교는 개인의 노력에 기초하여 성취를 이루는 곳으로 출생, 성장 환경과 같이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개입될 수 없다는 논리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의 불평등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더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하는 공정한 자원 배분의 과정으로 용인하게 된다. 이러한 체제 정당화 기제가 작동하면 학생들은 현재의 경쟁 체제가 공정하다고 믿게 되고, 차별에도 둔감해진다.
그러나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 결합한 학교는 무형의 상속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대학 입학에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 부모의 적극적인 개입과 양육 태도, 학교의 질적 차이가 직업과 소득의 차이로 연결된다. 부동산의 상속과 증여와 달리 교육이라는, 부모의 살아생전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상속과 증여의 과정이 학교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학생들은 능력의 부족으로 현재의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결론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이렇게 비자발적 조건이 구조적 덫에 빠지게 하여 능력의 발달을 막고 있다는 것은 은폐된다.
분배 기제 자체를 다양화하고 실력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기
빈곤한 학생에게 학교는 아직 재능에 따라 엘리트가 선발되는 제퍼슨식 자연 귀족정natural aristocracy이 구현되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은 자격 없는 엘리트들을 몰아내고 자격 있는 엘리트로 채우는 기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 귀족정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빈곤한 학생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는 것은 모든 기본권의 종국적 목적이자 기본 이념이지만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불평등과 빈곤을 스스로 짊어지게 되었다.
당장의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해결 전망은 이미 나와 있다. 보편의 삶이 보편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가 99%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99%가 1%를 가지기 위해 싸우는 사회에서는 양보하는 순간 경쟁에서 밀려 자신의 몫은 챙기지 못하게 된다는 공포의 공동 토대를 부숴야 한다. 빈곤이 한 개인이 혹은 한 집단이 어떤 사회적 관계와 위치와 의식, 경제적 배경 위에 있는가의 문제라면 빈곤이 만들어 내는 현상은 수천, 수만 개가 존재한다. 이러한 빈곤의 다차원성으로부터 빈곤이 만들어 내는 ‘실력’이 무엇인지, ‘기여’가 무엇인지, ‘자기 책임’이 무엇인지를 두고 싸워야 한다.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책에서 우리에게는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다고 말한다. 가난은 수천 년 동안 줄곧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가난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대단한 해결책이 있는 듯이,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좋은 의도를 품은 세계 전역의 수백만 명과 함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무궁무진 개발하자고 제안한다.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기 때문에 학교를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공간에서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공간으로 만드는 작은 실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물질적 지원을 넘어 교육과정의 수행과 평가, 학생 활동 등 학생들의 삶 속에서 빈곤 문제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파악하면서 빈곤한 학생들이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창조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가 개발되고 실천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