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지운 ‘나’를 찾기까지
- 보육원에서 유년을 보내고 홀로 청년을 살다
글
김은지
danmieunji@gmail.com
평범함이 부러웠던 특별한 시절의 10대,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던 20대를 지나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30대를 보내며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대안학교 교사로 살고 있습니다.
개천에 살다
흔히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환경에서 자랐지만 학업 성적이 좋거나 사회적 명예 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경우 ‘개천에서 용 났다’란 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곤 한다. 변변찮은 개천이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부모의 부재 등을 뜻한다면 나는 개천에서 자랐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두 돌이 지날 무렵,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엄마는 갑작스럽게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아빠를 속절없이 보냈다. 이후 엄마는 어린 딸을 키우며 돌봄 노동과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만 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가 우리 집을 찾았다. 이후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고 결국 엄마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엄마의 재혼으로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엔 새로운 서막이 열렸다. 존재만으로도 불편했던 아저씨는 아빠를 자처하며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 주길 바랐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내게 돌아온 건 미움과 폭력이었고 나는 더 이상 엄마와 살 수 없게 되었다.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이유로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눈치 보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더 이상 아저씨와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하지만 부모 없는 서러움은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내 것에 대한 욕망이 커질수록 결핍의 흔적은 짙어져 갔다. 보육원의 삶은 개인의 ‘선택’보다 ‘통제’ 와 ‘규칙’이 우선되는 곳이었고 개인의 소유와 욕구는 끊임없이 삼키고 누르는 연습과 단련이 필요한 곳이었다.
돌쟁이 아기부터 스무 살을 앞둔 고3까지 40명을 웃도는 아이들이 함께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이에 따라 4~5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한 방을 쓰는데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를 필두로 그 공간의 질서와 체계는 자연스레 잡힌다. 이런 체계 속에서 개인의 선호나 욕구가 반영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범이란 사치
‘밥종 땡땡’ ‘밥종 땡땡’
아침 해가 밝아 올 때면 쨍하게 울리는 밥종 소리로 하루를 시작 한다. 그 소리는 참 독특했는데 종을 누가 치는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도 했다. 빠른 종소리가 들리는 날은 급한 성격의 선생님이 아침밥 준비에 나오셨단 얘기다. 늦게 내려가면 혼날 것이 뻔했기에 다 큰 언니, 오빠들도 서둘러 식당을 향해 달려간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식당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밥 줄이 보인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맨 앞줄엔 작은 아이들이 서 있고 뒤로 갈수록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자리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동생들에게 양보하나 보다 하겠지만 실상은 밥 줄 하나 내 마음대로 설수 없는 수동적 삶의 단면인 것이다.
올해로 보육원에서 산 시간과 자립해서 산 시간이 같아졌다. 혼자 살림을 꾸리고 밥을 지으며 어릴 땐 미처 몰랐던 나의 취향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자립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의 원을 반영한 살림을 장만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릇과 유리컵’이었다. 10년을 넘게 스텐 식판을 쓰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훗날에서야 유독 친구 집에 가는 걸 좋아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왜 그렇게 친구 집에 가기를 집착하리만큼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친구 집에선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려 주곤 하셨는데 상 위엔 밥그릇엔 밥을 담고 국그릇엔 국을 담은 내 개인 자리가 있었다. 그렇게 차려진 밥을 먹을 때면 이 자리를 매일 누리고 있는 친구가 부러우면서도 순간의 평범함을 만끽하며 행복해했다. 나에게 개인 밥그릇과 국그릇은 일상의 평범함이면서도 누릴 수 없는 특별함이었던 것이다. 유리컵 역시 마찬 가지였다. 보육원에서는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나 사기 컵 대신 튼튼하고 가벼운 스텐 컵을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이상하게도 난 그 컵이 정말 싫었다. 한 입 대었을 뿐인데 괜히 쇠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에 부딪혀 칭-하는 쇳소리도 싫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스무 살 꿈은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컵에 시원한 우유 한잔 따라서 마시는 것이었다. 친구 집이 아닌 내 집에서.
밥 먹을 때 역시 개인을 고려할 순 없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밥을 떠야 했고 먹지 못하는 음식도 편식은 안 된다는 이유로 씹어 삼켜야 했다. 도저히 먹지 못하는 음식이 나왔을 땐 억지로 욱여넣은 뒤 한바탕 게워 내고 나면 먹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는데 나 역시 미역을 게워낸 후로 먹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난 평생 미역을 먹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생김, 버릇, 식성, 성향, 취향…… 각양각색의 다름이 있었지만 우리의 삶은 정해진 사이클에 똑같이 올라타야만 살아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내 꿈은 간호조무사가 아닌데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공통 과제라 볼 수 있는 진로, 진학 문제라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자기 앞길을 고민하는 고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고민의 끝자락이 보이던 졸업 즈음까지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여학생들은 간호조무사를 권유받았고 남학생은 상업고나 공업고 졸업 이후 공장을 찾아보거나 알아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간호조무사가 되거나 공장에 취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 내가 보았던 선배들 중 절반 이상이 가고 있는 길이었다. 보육원에서 간호조무사나 공장직을 제안한 건 오로지 ‘기술직이라 먹고살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는데 나는 간호조무사가 되고 싶지도 않거니와 당위를 들먹이며 들었던 제약 역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세상에 나가 연고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는 걱정스런 제안은 내게 위안이 되기보다 제약이었고 영원히 이 트랙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어릴 땐 나도 꽤나 많은 꿈이 있었는데 정작 현실은 그건 정말 ‘꿈’일 뿐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대학이 뭐길래
고등학생 무렵의 나는 대학에 정말 가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가난과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야겠다 생각했고 유일한 출구는 대학에 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성공 신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가난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거나 밤새 공부를 하다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 또는 환상 아니었을까.
사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됐다. 공부를 썩 잘해 학교 선생님께서 집(보육원)으로 전화를 할 만큼 공부에 열을 내던 언니가 원하는 입시 준비를 할 수 없어(보육원에서 할 수 없다 하여) 눈물을 쏟던 여러 날을 기억한다. 보육원에서는 ‘다른 애들 다 안 가는데 너만 가면 어떡하냐’며 불공평과 형평성 운운하며 만류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언니의 눈물은 대학만이 살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고 나 역시 대학엔 갈 수 없는 삶임을 인지하는 순간 패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살길을 잃은 것이었다.
결국 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살길을 잃었느냐 물으면 그렇지 않다. 도리어 가지 않은 것이 내 삶에 다행으로 자리 한다.
수천만 원의 학비를 들이며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쟁 체제에 굳이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것을 20대 중반을 넘어서야 깨닫게 됐다. 물론 이 문제를 이해하고 새롭게 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처음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 다음 건네는 말은 “무슨 과예요?”였고 그 물음에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디 대학을 다니는지, 무슨 과인지를 묻는 얘기는 드물어졌지만 “○○대학 출신이라 달라”, “역시 SKY” 등의 농담 섞인 이야기는 일상에 만연했고 “출신 대학=그 사람의 가치와 정체성”으로 여겨지곤 했다.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 만큼 노력해서 이뤄 낸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마땅하나 모든 성취를 대학을 잘 나왔기 때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옳다 할 수 있을까?
출신을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학이 아닌 다른 말로 나를 소개할 순 없었다. ‘모두가 가는 대학을 왜 가지 않았느냐’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에다 구구절절 상황을 읊으며 나의 초라함을 들추고 싶지도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다른 말로 넘기곤 했지만 속 끝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뜨거움은 열등감으로 쌓이기에 충분했다. 그깟 대학이 뭐라고 허덕였을까. 그깟 대학이 뭐라고 옭아맸을까.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겠단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꼬박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자립과 고립 사이에서
‘나는 먹고살 수 있을까?’ ‘병에 걸리거나 아프면 어떡하지?’ ‘혹시나 죽으면 며칠 안에 발견될까?’ ‘결핍이 빈곤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벅찬 고민과 함께 퇴소 시기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스무 살, 대학은 갈 수 없으니 무작정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울로 가야겠단 생각을 한 건 고3 무렵 교복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부터였다. 교복사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볼 때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서울에서 살겠단 다짐은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의 고행 길 시작이란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 했지만 ‘인서울’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성공에 다가선 양 뿌듯했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살이를 시작해 낸 것이다.
하지만 낯섦에서 오는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립이 아닌 고립임을 깨닫는 순간 지독한 향수병은 시작됐고 밥을 먹는지 눈물을 먹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밥엔 짠기가 서렸다.
눈물은 나지만 앉아서 향수병 타령만 하기엔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며 첫 번째로 시작한 알바는 동네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 일이었다. 계산대에서 마트 조끼를 입고 서 있을 때면 “아줌마, 봉투 좀 그냥 줘요”, “저기요, 잔돈 좀 바꿔 주세요”, “이모, 이거 왜 이렇게 비싸?”, “아가씨, 이거 좀 버려 줘”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 서 있는 자리와 입고 있는 옷만으로 아무렇게나 불릴 수 있음이 새삼 신기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줌마가 되고 이모가 되고 아가씨가 되어 “저기요”에 응하며 월급날을 기다렸다. 두번째 알바는 콜 센터였다. 단순 전화 업무라 생각했지만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걸 깨닫기까진 하루면 충분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는 항의부터 혼자 사는데 외롭다는 TMI,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하는 ‘요구왕’까지……. 남의 돈 쉽게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핍이 빈곤이 되지 않으려면
정해진 삶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겠단 명분을 내세우며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지만 일말의 기대와는 달리 서울살이는 내 삶이 얼마나 빈한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여기저기서 수저 타령이 유행처럼 번질 때 정작 내 손엔 수저조차 쥐어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가난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 아래 깔리듯 존재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될 일이었다.
보육원에서 십수 년을 살며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정서적 빈곤이었다. 방과 후 교실에서 운영하는 월 2만 원짜리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해 속상했던 경제적 빈곤보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마음 하나 들어 줄 이 없는 정서적 어려움은 철저하리만큼 나만의 몫으로 남겨졌다. 삶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고 대학만이 살길은 아니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어른, 나의 인생은 내 것으로 누구도 경계 지을 수 없음을 말해 줄 수 있는 어른…… 우리에겐 그런 어른이 필요했다. 시도하기도 전에 한계에 먼저 부딪히는 이들에게 세상을 보여 줄 수 있는 어른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상경 5년 차,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렸다. 나 역시 학원을 다니고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줄 알았던 생각과는 달리 엄혹한 현실엔 큰 변화가 없었다. 난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를 막막해하며 어려움을 곱씹곤 했다. 괜한 오기로 올라와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비진학 청(소)년 창업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 참가 인터뷰를 위해 발을 내딛은 곳은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청소년 센터였다. 이곳은 상호 존중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별칭을 쓴다고 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로그램 기획자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의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들은 왜 나를 궁금해하지?’ ‘자본금도 내놓지 않고 창업을 할 수 있다고?’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하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나의 수많은 의문들은 이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했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나의 환경에 물음을 던지거나 함께 고민해 준 적 없었기에 이들의 관심은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의 삶을 함께 고민해 주는 어른을 눈앞에서 만났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낯섦이 익숙함이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청(소)년 창업 프로젝트를 통해 ‘밥은 굶지 않을 수 있게 하자’란 슬로건으로 친환경 도시락 가게를 열었다. 자격증과 스펙으로만 자신을 증명하는 사회에 조금 일찍 나온 이들을 위한 ‘배움이 있는 일터’를 만든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의 손길과 눈길 속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내 평생의 숙제였던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렸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 내야만 했던 급급함을 덜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부어 내 삶에 비빌 언덕이 되어 준 어른은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 얘기해 주었고 나의 삶은 보통의 삶과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라 일깨워 주었다.
이 공간에서의 일과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금 나는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대안학교 교사로 삶을 살고 있다. 혹여나 내 어릴 적 불안과 닮은 아이가 있다면, 또는 언제고 달려와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면, 난 그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자리하려 한다.
얼마 전, 한 교육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한편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성 얘기는 수년에 걸쳐 기사로 다뤄졌으나 여전히 OECD 국가 중 상대적으로 이른바 ‘개천용지수’ ❶ 가 낮다는 자평만이 난무했고 빈곤에 대한 무지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잘되는 아이는 자랑이었고 안 되는 아이는 남의 일이었다. 공교육의 보편성이 교육의 평등함으로 착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쪽으로 굽어진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다면 누구든 그 열매에 손을 뻗을 수 있도록 다양한 높낮이와 형태의 사다리를 두어야 한다. 저 열매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알려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개천 용 찾기는 그만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부터 챙길 때가 되었다.
❶
최상위 학업 성적을 낸 학생 중 저학력 부모를 둔 학생의 비율을 통해 계산하는 지수로, 기회불평등지 수라고도 한다. 0에 가까울수록 부모의 학력에 따른 기회 불평등이 작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크다.
가난이 지운 ‘나’를 찾기까지
- 보육원에서 유년을 보내고 홀로 청년을 살다
글
김은지
danmieunji@gmail.com
평범함이 부러웠던 특별한 시절의 10대,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던 20대를 지나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30대를 보내며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대안학교 교사로 살고 있습니다.
개천에 살다
흔히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환경에서 자랐지만 학업 성적이 좋거나 사회적 명예 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경우 ‘개천에서 용 났다’란 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곤 한다. 변변찮은 개천이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부모의 부재 등을 뜻한다면 나는 개천에서 자랐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두 돌이 지날 무렵,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엄마는 갑작스럽게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아빠를 속절없이 보냈다. 이후 엄마는 어린 딸을 키우며 돌봄 노동과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만 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가 우리 집을 찾았다. 이후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고 결국 엄마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엄마의 재혼으로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엔 새로운 서막이 열렸다. 존재만으로도 불편했던 아저씨는 아빠를 자처하며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 주길 바랐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이후 내게 돌아온 건 미움과 폭력이었고 나는 더 이상 엄마와 살 수 없게 되었다.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이유로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눈치 보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더 이상 아저씨와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하지만 부모 없는 서러움은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내 것에 대한 욕망이 커질수록 결핍의 흔적은 짙어져 갔다. 보육원의 삶은 개인의 ‘선택’보다 ‘통제’ 와 ‘규칙’이 우선되는 곳이었고 개인의 소유와 욕구는 끊임없이 삼키고 누르는 연습과 단련이 필요한 곳이었다.
돌쟁이 아기부터 스무 살을 앞둔 고3까지 40명을 웃도는 아이들이 함께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이에 따라 4~5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한 방을 쓰는데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를 필두로 그 공간의 질서와 체계는 자연스레 잡힌다. 이런 체계 속에서 개인의 선호나 욕구가 반영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범이란 사치
‘밥종 땡땡’ ‘밥종 땡땡’
아침 해가 밝아 올 때면 쨍하게 울리는 밥종 소리로 하루를 시작 한다. 그 소리는 참 독특했는데 종을 누가 치는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기도 했다. 빠른 종소리가 들리는 날은 급한 성격의 선생님이 아침밥 준비에 나오셨단 얘기다. 늦게 내려가면 혼날 것이 뻔했기에 다 큰 언니, 오빠들도 서둘러 식당을 향해 달려간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식당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밥 줄이 보인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맨 앞줄엔 작은 아이들이 서 있고 뒤로 갈수록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자리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동생들에게 양보하나 보다 하겠지만 실상은 밥 줄 하나 내 마음대로 설수 없는 수동적 삶의 단면인 것이다.
올해로 보육원에서 산 시간과 자립해서 산 시간이 같아졌다. 혼자 살림을 꾸리고 밥을 지으며 어릴 땐 미처 몰랐던 나의 취향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자립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의 원을 반영한 살림을 장만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릇과 유리컵’이었다. 10년을 넘게 스텐 식판을 쓰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훗날에서야 유독 친구 집에 가는 걸 좋아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왜 그렇게 친구 집에 가기를 집착하리만큼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친구 집에선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려 주곤 하셨는데 상 위엔 밥그릇엔 밥을 담고 국그릇엔 국을 담은 내 개인 자리가 있었다. 그렇게 차려진 밥을 먹을 때면 이 자리를 매일 누리고 있는 친구가 부러우면서도 순간의 평범함을 만끽하며 행복해했다. 나에게 개인 밥그릇과 국그릇은 일상의 평범함이면서도 누릴 수 없는 특별함이었던 것이다. 유리컵 역시 마찬 가지였다. 보육원에서는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나 사기 컵 대신 튼튼하고 가벼운 스텐 컵을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이상하게도 난 그 컵이 정말 싫었다. 한 입 대었을 뿐인데 괜히 쇠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에 부딪혀 칭-하는 쇳소리도 싫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스무 살 꿈은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컵에 시원한 우유 한잔 따라서 마시는 것이었다. 친구 집이 아닌 내 집에서.
밥 먹을 때 역시 개인을 고려할 순 없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밥을 떠야 했고 먹지 못하는 음식도 편식은 안 된다는 이유로 씹어 삼켜야 했다. 도저히 먹지 못하는 음식이 나왔을 땐 억지로 욱여넣은 뒤 한바탕 게워 내고 나면 먹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는데 나 역시 미역을 게워낸 후로 먹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난 평생 미역을 먹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생김, 버릇, 식성, 성향, 취향…… 각양각색의 다름이 있었지만 우리의 삶은 정해진 사이클에 똑같이 올라타야만 살아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내 꿈은 간호조무사가 아닌데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공통 과제라 볼 수 있는 진로, 진학 문제라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자기 앞길을 고민하는 고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고민의 끝자락이 보이던 졸업 즈음까지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여학생들은 간호조무사를 권유받았고 남학생은 상업고나 공업고 졸업 이후 공장을 찾아보거나 알아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간호조무사가 되거나 공장에 취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 내가 보았던 선배들 중 절반 이상이 가고 있는 길이었다. 보육원에서 간호조무사나 공장직을 제안한 건 오로지 ‘기술직이라 먹고살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는데 나는 간호조무사가 되고 싶지도 않거니와 당위를 들먹이며 들었던 제약 역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세상에 나가 연고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는 걱정스런 제안은 내게 위안이 되기보다 제약이었고 영원히 이 트랙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어릴 땐 나도 꽤나 많은 꿈이 있었는데 정작 현실은 그건 정말 ‘꿈’일 뿐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대학이 뭐길래
고등학생 무렵의 나는 대학에 정말 가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가난과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야겠다 생각했고 유일한 출구는 대학에 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성공 신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가난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거나 밤새 공부를 하다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 또는 환상 아니었을까.
사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됐다. 공부를 썩 잘해 학교 선생님께서 집(보육원)으로 전화를 할 만큼 공부에 열을 내던 언니가 원하는 입시 준비를 할 수 없어(보육원에서 할 수 없다 하여) 눈물을 쏟던 여러 날을 기억한다. 보육원에서는 ‘다른 애들 다 안 가는데 너만 가면 어떡하냐’며 불공평과 형평성 운운하며 만류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언니의 눈물은 대학만이 살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고 나 역시 대학엔 갈 수 없는 삶임을 인지하는 순간 패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살길을 잃은 것이었다.
결국 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살길을 잃었느냐 물으면 그렇지 않다. 도리어 가지 않은 것이 내 삶에 다행으로 자리 한다.
수천만 원의 학비를 들이며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쟁 체제에 굳이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것을 20대 중반을 넘어서야 깨닫게 됐다. 물론 이 문제를 이해하고 새롭게 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처음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 다음 건네는 말은 “무슨 과예요?”였고 그 물음에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디 대학을 다니는지, 무슨 과인지를 묻는 얘기는 드물어졌지만 “○○대학 출신이라 달라”, “역시 SKY” 등의 농담 섞인 이야기는 일상에 만연했고 “출신 대학=그 사람의 가치와 정체성”으로 여겨지곤 했다.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 만큼 노력해서 이뤄 낸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마땅하나 모든 성취를 대학을 잘 나왔기 때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옳다 할 수 있을까?
출신을 물어보는 이들에게 대학이 아닌 다른 말로 나를 소개할 순 없었다. ‘모두가 가는 대학을 왜 가지 않았느냐’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에다 구구절절 상황을 읊으며 나의 초라함을 들추고 싶지도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다른 말로 넘기곤 했지만 속 끝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뜨거움은 열등감으로 쌓이기에 충분했다. 그깟 대학이 뭐라고 허덕였을까. 그깟 대학이 뭐라고 옭아맸을까.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겠단 확신을 가지기까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꼬박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자립과 고립 사이에서
‘나는 먹고살 수 있을까?’ ‘병에 걸리거나 아프면 어떡하지?’ ‘혹시나 죽으면 며칠 안에 발견될까?’ ‘결핍이 빈곤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벅찬 고민과 함께 퇴소 시기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스무 살, 대학은 갈 수 없으니 무작정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울로 가야겠단 생각을 한 건 고3 무렵 교복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부터였다. 교복사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볼 때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이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서울에서 살겠단 다짐은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의 고행 길 시작이란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 했지만 ‘인서울’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성공에 다가선 양 뿌듯했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살이를 시작해 낸 것이다.
하지만 낯섦에서 오는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립이 아닌 고립임을 깨닫는 순간 지독한 향수병은 시작됐고 밥을 먹는지 눈물을 먹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밥엔 짠기가 서렸다.
눈물은 나지만 앉아서 향수병 타령만 하기엔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며 첫 번째로 시작한 알바는 동네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 일이었다. 계산대에서 마트 조끼를 입고 서 있을 때면 “아줌마, 봉투 좀 그냥 줘요”, “저기요, 잔돈 좀 바꿔 주세요”, “이모, 이거 왜 이렇게 비싸?”, “아가씨, 이거 좀 버려 줘”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 서 있는 자리와 입고 있는 옷만으로 아무렇게나 불릴 수 있음이 새삼 신기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줌마가 되고 이모가 되고 아가씨가 되어 “저기요”에 응하며 월급날을 기다렸다. 두번째 알바는 콜 센터였다. 단순 전화 업무라 생각했지만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걸 깨닫기까진 하루면 충분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는 항의부터 혼자 사는데 외롭다는 TMI,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하는 ‘요구왕’까지……. 남의 돈 쉽게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핍이 빈곤이 되지 않으려면
정해진 삶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겠단 명분을 내세우며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지만 일말의 기대와는 달리 서울살이는 내 삶이 얼마나 빈한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여기저기서 수저 타령이 유행처럼 번질 때 정작 내 손엔 수저조차 쥐어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가난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 아래 깔리듯 존재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될 일이었다.
보육원에서 십수 년을 살며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정서적 빈곤이었다. 방과 후 교실에서 운영하는 월 2만 원짜리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해 속상했던 경제적 빈곤보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마음 하나 들어 줄 이 없는 정서적 어려움은 철저하리만큼 나만의 몫으로 남겨졌다. 삶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고 대학만이 살길은 아니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어른, 나의 인생은 내 것으로 누구도 경계 지을 수 없음을 말해 줄 수 있는 어른…… 우리에겐 그런 어른이 필요했다. 시도하기도 전에 한계에 먼저 부딪히는 이들에게 세상을 보여 줄 수 있는 어른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상경 5년 차,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렸다. 나 역시 학원을 다니고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줄 알았던 생각과는 달리 엄혹한 현실엔 큰 변화가 없었다. 난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를 막막해하며 어려움을 곱씹곤 했다. 괜한 오기로 올라와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비진학 청(소)년 창업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 참가 인터뷰를 위해 발을 내딛은 곳은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한 청소년 센터였다. 이곳은 상호 존중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별칭을 쓴다고 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로그램 기획자를 바라보는 내 눈은 의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들은 왜 나를 궁금해하지?’ ‘자본금도 내놓지 않고 창업을 할 수 있다고?’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하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나의 수많은 의문들은 이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했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나의 환경에 물음을 던지거나 함께 고민해 준 적 없었기에 이들의 관심은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의 삶을 함께 고민해 주는 어른을 눈앞에서 만났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낯섦이 익숙함이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청(소)년 창업 프로젝트를 통해 ‘밥은 굶지 않을 수 있게 하자’란 슬로건으로 친환경 도시락 가게를 열었다. 자격증과 스펙으로만 자신을 증명하는 사회에 조금 일찍 나온 이들을 위한 ‘배움이 있는 일터’를 만든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의 손길과 눈길 속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내 평생의 숙제였던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렸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 내야만 했던 급급함을 덜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부어 내 삶에 비빌 언덕이 되어 준 어른은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 얘기해 주었고 나의 삶은 보통의 삶과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라 일깨워 주었다.
이 공간에서의 일과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금 나는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대안학교 교사로 삶을 살고 있다. 혹여나 내 어릴 적 불안과 닮은 아이가 있다면, 또는 언제고 달려와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면, 난 그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자리하려 한다.
얼마 전, 한 교육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한편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성 얘기는 수년에 걸쳐 기사로 다뤄졌으나 여전히 OECD 국가 중 상대적으로 이른바 ‘개천용지수’ ❶ 가 낮다는 자평만이 난무했고 빈곤에 대한 무지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잘되는 아이는 자랑이었고 안 되는 아이는 남의 일이었다. 공교육의 보편성이 교육의 평등함으로 착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쪽으로 굽어진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다면 누구든 그 열매에 손을 뻗을 수 있도록 다양한 높낮이와 형태의 사다리를 두어야 한다. 저 열매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알려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개천 용 찾기는 그만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부터 챙길 때가 되었다.
❶
최상위 학업 성적을 낸 학생 중 저학력 부모를 둔 학생의 비율을 통해 계산하는 지수로, 기회불평등지 수라고도 한다. 0에 가까울수록 부모의 학력에 따른 기회 불평등이 작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