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가치’는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 제이슨 W. 무어 씀, 김효진 옮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농사는 올해도 망했다. 강원도 산촌에서 과수 농가 5년 차.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려고 시작한 농사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한 경제’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5월까지 눈이 오던 작년과 재작년엔 냉해가 나무를 얼려 죽이더니, 겨울에 눈도 오지 않고 강도 얼지 않던 이상하게 따뜻했던 올해는 해충이 나무를 말려 죽인다. 앞으로 벌어도 뒤로 나가는 게 더 많은 농사는 지으면 지을수록 적자다. 나간 돈, 들어온 돈이 맞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러고 나면 내 노동의 값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없다. 차라리 내 밭에서 무상 노동을 할 시간에 남의 밭에 품삯 일꾼으로 일 다니는 것이 나을 판이다. 열심히 일하고 빚과 병만 남는 농사는, 동네에서 같이 공부하는 모임에서 항상 묻지만 풀지 못하는 비밀로 남는다.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알고 싶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인지, 답해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이슨 W.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이론이나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녹색 담론은 그게 지구 온난화 때문에 일어난 ‘기후 위기’라고 설명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원인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이 지구가 왜 뜨거워졌나 알아보니 원인이 탄소가 너무 많아서라고 한다. 지금 같은 속도대로 탄소 배출량이 늘어나면 머지않아 지구 온도가 2℃ 이상 상승하고, 지상의 많은 곳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답은? 탄소를 줄이는 것이다. 탄소를 줄이는 방법은 에너지를 바꾸는 것이다. 탄소를 내뿜는 화석 연료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로. 이 에너지 전환을 중심으로 사회 경제를 다시 설계하는 것을 ‘그린 뉴딜’이라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적색 담론은 이런 식의 관점이 원인을 ‘탄소’로 환원시켜 실제로 지구 온난화를 초래해 온 기업과 금융 자본 등 주요 행위자와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권력, 지식, 문화의 연결망으로서 사회 경제적 구조를 뒤로 감춘다고 비판한다. 농민과 농업의 파탄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기후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농업은 그 어떤 산업 분야보다 세계 경제 체제에 깊숙이 예속되어 국제 유가와 국제 투기 자본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산업이 되었다. 영어를 몰라도 WTO세계무역기구와 FTA자유무역협정는 아는 농민들은 분석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직관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다. 30년 전에 배운 사람들이 대세라고 했던 ‘세계화’가 어떻게 우리들의 논과 밭을 집어삼켰는지를.
녹색과 적색의 통합
그동안 녹색과 적색 담론은 접합 지점을 잘 찾지 못했다. 녹색 담론은 자연 생태계 안에서 설명하고, 적색 담론은 사회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한쪽은 문제를 ‘자연의 회로’ 속으로 소급시켜 자연의 회복과 인류의 반성을 요구하고 한쪽은 ‘사회의 구조’로 환원시켜 구조의 철폐와 인간의 의지를 요청한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라는 이분법을 계속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녹색 사상도 자연 회복이나 생태 보호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로 귀착된다.
무어는 말한다. 데카르트 식으로 양적 물체res extensa로 환원될 수 있는 그런 자연은 없다고. ‘인간 사회’에 대해 ‘자연 전체’로 나타나는 그런 단일 실체로서의 자연은 관념상의 표상일 뿐이다. 인간 존재가 ‘정신 더하기 육체’가 아니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사회 더하기 자연’ 같은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자연’, ‘사회’ 이렇게 각각의 단일한 실체로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서는 수량화, 획일화, 균질화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표상화 작업에는 권력과 과학과 문화가 동원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세계 지도는 북구의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다. 남구의 관점에서라면 그 지도는 거꾸로 뒤집혀서 남극이 위에 가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다. 대양의 남쪽에선 북극성이 아니라 남극성을 좌표로 삼아 ‘위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그 지도는 북구의 항구에서 출발한 상선이 남구의 신대륙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글 어스는 훨씬 더 균질화된 공간을 생산한다. 구글 어스는 우리의 위치를 대양이 아니라 대기권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을 창조한다. 이런 시점은 인간의 감각에 ‘지구의 관리인’으로서 조절자의 관점을 부지불식간에 각인시킨다. 이런 문제는 ‘탄소 환경주의’에서도 나타난다. 각 나라를 탄소 배출량으로 계량화하고, 세계를 탄소량으로 균질화하면, 데이터로 균질화된 세계에서 탄소의 계산은 계급, 젠더, 인종, 식민주의 같은 문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은폐한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나 탄소 국경세와 같은 발상은 탈정치화된 탄소의 기술주의적 지구 공학이 어떤 식으로 ‘대기권 인클로저’를 통해 북구와 남구 간의 계급과 인종의 글로벌 격차를 재생산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자연과 자본의 변증법적 관계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은 계속 새로운 자연으로 ‘만들어진다’. 거기에는 계급 투쟁과 권력관계와 정치 지리학 및 여타의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반영된다. 그렇게 ‘생산된 자연’을 무어는 ‘역사적 자연’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한 자연은 ‘역사 없는 자연’이다.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산은 거기 있었고, 강은 거기 있었다. 인간 사회의 ‘외재성’으로서 자연의 존재론은 ‘실체론’에 토대한다. 무어는 외생적이고 실체론적인 자연관을 관계적 개념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이 단순 위계의 전복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적인 것으로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 사상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처럼 인간 중심주의를 자연 중심주의로, 또는 지구 생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우위를 전도시켜 자연 속 생물의 한 종으로 겸손하게 도치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호 변증법적 관계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그물 속에서 자본주의도 부단히 재형성되고 재창조된다. 자본은 자연을 산출하고, 자연은 자본을 산출하는 이 변증법적 과정을 무어는 ‘자연 속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속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변증법을 통해 만들어져 온 자본주의 역사를 무어는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연이 단일 실체가 아니듯이 자본주의도 단일한 경제 체제가 아니다. 자연은 자본의 경제에 가만히 불려 와서, 시키는 대로 순순히 착취당하고 전유당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들)은 자본에 길들여질 뿐 아니라 길들이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의 생명의 흔적인 석탄과 석유는 얼마나 자본주의 경제를 길들여 왔는가. 지금 기후 위기만 봐도 기후가 다른 경제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 생명의 일(노동)/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화에 저항했다가, 프롤레타리아로서 저항하고, 다시 탈프롤레타리아화(재자연화, 호모 사케르)에 저항한다. 인간/비인간 자연이 다른 자연으로 계속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자본도 여기에 대응하며 다른 자본주의로 계속 탈주해 나가야 한다. 이 ‘전환’은 상호적이다. 신자유주의로, 신경제로, 뉴 노멀로, 포스트 자본주의로의 끝없는 전환은 자본의 축적을 지속하기 위한 ‘자본의 탈자본주의’ 전략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로 변신하고 있을 뿐이다. ‘탈탄소 자본주의’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린 뉴딜’을 ‘탈탄소 경제 사회 대전환’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후 위기를 ‘탄소 문제’로 협소화시키는 대표적인 탈정치와 몰역사의 레토릭이다.
저렴한 자연
다시 돌아가자. 기후 위기와 금융 자본이, 지구 온난화와 자본 축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토지와 농민의 생명(일/에너지)을 연료로 삼아 이뤄진다는 것인가? 비밀은 ‘저렴한 자연’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어는 가치의 셈법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통상 가치는 노동 생산성으로 설명된다. 주류 경제학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기술 혁신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도약을 이룬 것은 기술 발달에 따른 ‘산업 혁명’이라는 것이 상식화된 논리다. 서구의 과학 기술 혁명이 경제 발전과 사회 진보를 이룬 토대라는 것이다.
무어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대신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자고 말한다. 자본의 ‘논리’에서는 가치의 ‘법칙’이 나타나지만 자본의 ‘역사’에서는 ‘패턴’이 드러난다. 그 패턴을 따라가면 자본의 축적에는 반드시 저렴한 자연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시장 가격이 결정된다든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는 식의 ‘가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사회’라는 진공 상태의 관념 공간 안에서 가설과 논리에 의해 추출된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패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기서 무어는 ‘가치 법칙’을 ‘가치 관계’로 프레임을 전환한다. 이것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이겠다. 그것은 자본의 ‘가치’가 바로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에서 기술 혁신에 따른 노동 생산성의 향상보다 이 ‘무상의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자본주의 가치 법칙은 곧 ‘저렴한 자연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무어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생산성을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에서 강조해 온 무상/일 에너지와 다음과 같이 결합한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짜나 싼값으로 식량, 노동력, 에너지, 원료를 산출해 내야 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에서 가치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은 악순환적으로 재생산된다. 저렴한 식량은 저렴한 노동력을, 저렴한 노동력이 저렴한 에너지와 원료를, 다시 저렴한 에너지가 저렴한 식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 축적의 위기는 저렴한 자연의 상실에 따른 위기다. 21세기의 신자유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생산해 온 자본 회로 외부의 개척지frontier가 폐쇄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자본의 마지막 ‘대약탈극’이었다. 20세기의 서구에 마지막 저렴한 자연을 공급했던 중국과 인도도 대규모의 경쟁적 약탈자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영토적으로는 더 이상 프런티어가 남아 있지 않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하늘에서 바다까지, 전 지구를 통틀어 이제 자본주의 외부는 없다. 남은 것은 인간/비인간 동물의 ‘신체’뿐이다. 새끼를 낳는 한 그것은 영원히 재생하고 지속 가능하므로. 노동 유연화는 이 신체를 ‘싸게 쓰고 쉽게 버리는 몸’으로 생산하는 기술이다.
프런티어
프런티어는 ‘역사적 자연’을 생산하며 이는 ‘식민지’의 다른 이름이다. 프런티어라는 용어는 ‘식민지’가 갖는 국민 국가적 영토성의 구획을 넘어 전유의 지대를 여성, 동물, 원주민의 몸oikos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의 생명의 일/에너지가 생산되고 전유되는 모든 곳이 ‘프런티어’라고 불릴 수 있겠다.
농촌과 농민도 마찬가지다. 공장식 축사도, ‘산 고기’로 전유되는 동물도 프런티어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1492년 신대륙 침략 이후로 자본에 의해 끝없이 갱신된 프런티어의 팽창이 이제 지리적 공간적으로는 더 이상 개발할 곳이 없이 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위기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 축적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상의 자연을 계속 생산해 냄으로써만 지속 가능한 체제다. 그런 점에서 무어는 생태주의적 서사가 말하듯이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동력을 가졌다고 본다.
지금까지 반신자유주의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으로 불러들여 상품화하고 있다는 ‘자본화의 법칙’이다. 그런데 무어는 반대로 자연을 자본화하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동력이 자본 축적의 원리에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화되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지금까지 무상으로 누렸던 생명의 일/ 에너지에 대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가내 노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본은 돌봄 노동을 ‘저렴한 노동’으로 상품화하면서 동시에 ‘무상의 일/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연의 영역으로도 남겨 놓는다. 이러한 이중 착취는 여성에게는 동일한 일이 무상 노동과 유상 노동의 2교대 근무로 강제 되게 만든다. 노동 시장에선 저임금의 청소 노동자나 가사 도우미로 착취 당하고, 가내 노동에서는 무상으로 전유당하며 저임금 노동 시장을 다시 떠받친다.
농민이나 소자영업자들의 노동도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와 전유의 이중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농촌과 농민도 자본의 산업적 회로 속으로 (저임금 농업 노동자로) 완전히 흡수하는 것보다는 일부는 무상 전유 지대로, 프런티어로 만드는 것이 자본으로서는 더 ‘저렴한’ 것이다.
이런 착취와 전유 사이의 2교대, 3교대 노동은 결국 시간을 착취하는 기술이다. 무어는 이것이 지리적, 공간적 포화에 도달한 프런티어가 찾아낸 ‘시간의 식민지’ 라고 말한다. 이제 남은 것은 생명의 일/에너지에서 ‘시간’을 추출하는 것이다. 강제적 노동과 자발적 노동, 임금 노동과 무상 노동, 공적 업무와 사적 업무의 끊임없는 전환과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출된다. 자본은 시간을 압축하고, 미래를 담보로 잡는다. 투자 자본주의는 생명으로부터 미래의 일/에너지를 채굴하는 방식이나 다름없다. M-C-M′이 M-M′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시간의 연금술’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오늘날 자본의 축적은 자본화보다는 자연화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자연화란 녹색 사상에서 말하는 생태주의적 회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모든 신체를 ‘사케르sacer’의 의미로서 신성하게(자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플랫폼 노동’에서 나타나는 자유 노동의 형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무어의 자본화는 자본의 회로로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농민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것이 자본화라면, 자본과 노동의 임노동 관계를 해소하여 프롤레타리아를 자연인의 기업적 신체corporation-corpus로 전환시키는 것은 대표적인 자연화 방식이다. 이제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자기의 사장인 자신에게 착취당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노동을 외부의 자본에 전유당한다. 농민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상품 생산자로서 자본의 회로 안에서 착취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로 계약이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자연인)로서 자연의 회로 안에서 노동을 전유당한다. 생산물은 자본화(상품화)되지만 노동은 자연화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은 프런티어가 빠르게 폐쇄되면서 자본의 착취와 전유의 이중 전략도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다. 싼 식량도, 싼 토지도, 싼 노동력도, 싼 에너지도 더 이상 없다.
무어는 지금까지는 금융화와 재생산 영역에서 자본화의 심화(돌봄, 식품, 의료, 교육의 자본화)가 자본주의의 파국을 지연시키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책은 물음으로 끝난다.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이 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지연된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명의 일/에너지가 계속 고갈되어 간다는 뜻이고, 자본의 지연 출구로서 ‘혁신’은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 모두에게 새로운 지옥이 지속됨을 의미한다. 탄소를 탈탄소로, 화석 연료를 재생 에너지로, 노멀을 뉴 노멀로 ‘바꿔 끼우는’ 것이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본의 운동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 역시 새로운 자연의 매트릭스를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 인터내셔널 운동으로 연대하고 저항했듯이,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연대를 ‘인터-스피시즈inter-species’ 즉 ‘종 간 연대’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내셔널 워커스를 인터스피시즈 워커스로 확장·재구성하는 상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누가 노동자workers인가? 무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치 관계 안에서 ‘일을 하는’ 모든 생명 활동”(본문 354쪽)이라고. 노동을 이렇게 재정의할 때 전유당하기만 했던 일/에너지와 그 가치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나는 연재하고 있는 ‘워커스 사전’에서 ‘동물’ 개념을 다루면서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돼지와 단결하자.” 책 속에서 인용하는 “동물은 노동 계급의 일원인가?”라는 질문도 그런 맥락과 연결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영토주의의 논리를 넘어 일국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와 단결할 수 있었다면,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동물(생명)들이 자본에 맞서 함께 생명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법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을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의 논리, 해방의 논리로 재구성하는 지식, 과학, 문화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어의 이 책도 그것을 위한 중요한 학문적 성취일 것이다.
자본의 ‘가치’는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 제이슨 W. 무어 씀, 김효진 옮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농사는 올해도 망했다. 강원도 산촌에서 과수 농가 5년 차. 생명을 살리고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려고 시작한 농사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한 경제’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5월까지 눈이 오던 작년과 재작년엔 냉해가 나무를 얼려 죽이더니, 겨울에 눈도 오지 않고 강도 얼지 않던 이상하게 따뜻했던 올해는 해충이 나무를 말려 죽인다. 앞으로 벌어도 뒤로 나가는 게 더 많은 농사는 지으면 지을수록 적자다. 나간 돈, 들어온 돈이 맞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러고 나면 내 노동의 값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없다. 차라리 내 밭에서 무상 노동을 할 시간에 남의 밭에 품삯 일꾼으로 일 다니는 것이 나을 판이다. 열심히 일하고 빚과 병만 남는 농사는, 동네에서 같이 공부하는 모임에서 항상 묻지만 풀지 못하는 비밀로 남는다.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알고 싶다고 한다. 왜 그런 것인지, 답해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이슨 W.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이론이나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녹색 담론은 그게 지구 온난화 때문에 일어난 ‘기후 위기’라고 설명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원인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이 지구가 왜 뜨거워졌나 알아보니 원인이 탄소가 너무 많아서라고 한다. 지금 같은 속도대로 탄소 배출량이 늘어나면 머지않아 지구 온도가 2℃ 이상 상승하고, 지상의 많은 곳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답은? 탄소를 줄이는 것이다. 탄소를 줄이는 방법은 에너지를 바꾸는 것이다. 탄소를 내뿜는 화석 연료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로. 이 에너지 전환을 중심으로 사회 경제를 다시 설계하는 것을 ‘그린 뉴딜’이라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적색 담론은 이런 식의 관점이 원인을 ‘탄소’로 환원시켜 실제로 지구 온난화를 초래해 온 기업과 금융 자본 등 주요 행위자와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권력, 지식, 문화의 연결망으로서 사회 경제적 구조를 뒤로 감춘다고 비판한다. 농민과 농업의 파탄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기후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농업은 그 어떤 산업 분야보다 세계 경제 체제에 깊숙이 예속되어 국제 유가와 국제 투기 자본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산업이 되었다. 영어를 몰라도 WTO세계무역기구와 FTA자유무역협정는 아는 농민들은 분석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직관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다. 30년 전에 배운 사람들이 대세라고 했던 ‘세계화’가 어떻게 우리들의 논과 밭을 집어삼켰는지를.
녹색과 적색의 통합
그동안 녹색과 적색 담론은 접합 지점을 잘 찾지 못했다. 녹색 담론은 자연 생태계 안에서 설명하고, 적색 담론은 사회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한쪽은 문제를 ‘자연의 회로’ 속으로 소급시켜 자연의 회복과 인류의 반성을 요구하고 한쪽은 ‘사회의 구조’로 환원시켜 구조의 철폐와 인간의 의지를 요청한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라는 이분법을 계속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녹색 사상도 자연 회복이나 생태 보호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로 귀착된다.
무어는 말한다. 데카르트 식으로 양적 물체res extensa로 환원될 수 있는 그런 자연은 없다고. ‘인간 사회’에 대해 ‘자연 전체’로 나타나는 그런 단일 실체로서의 자연은 관념상의 표상일 뿐이다. 인간 존재가 ‘정신 더하기 육체’가 아니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사회 더하기 자연’ 같은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자연’, ‘사회’ 이렇게 각각의 단일한 실체로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서는 수량화, 획일화, 균질화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표상화 작업에는 권력과 과학과 문화가 동원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세계 지도는 북구의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다. 남구의 관점에서라면 그 지도는 거꾸로 뒤집혀서 남극이 위에 가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다. 대양의 남쪽에선 북극성이 아니라 남극성을 좌표로 삼아 ‘위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그 지도는 북구의 항구에서 출발한 상선이 남구의 신대륙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글 어스는 훨씬 더 균질화된 공간을 생산한다. 구글 어스는 우리의 위치를 대양이 아니라 대기권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을 창조한다. 이런 시점은 인간의 감각에 ‘지구의 관리인’으로서 조절자의 관점을 부지불식간에 각인시킨다. 이런 문제는 ‘탄소 환경주의’에서도 나타난다. 각 나라를 탄소 배출량으로 계량화하고, 세계를 탄소량으로 균질화하면, 데이터로 균질화된 세계에서 탄소의 계산은 계급, 젠더, 인종, 식민주의 같은 문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은폐한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나 탄소 국경세와 같은 발상은 탈정치화된 탄소의 기술주의적 지구 공학이 어떤 식으로 ‘대기권 인클로저’를 통해 북구와 남구 간의 계급과 인종의 글로벌 격차를 재생산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자연과 자본의 변증법적 관계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은 계속 새로운 자연으로 ‘만들어진다’. 거기에는 계급 투쟁과 권력관계와 정치 지리학 및 여타의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반영된다. 그렇게 ‘생산된 자연’을 무어는 ‘역사적 자연’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한 자연은 ‘역사 없는 자연’이다.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산은 거기 있었고, 강은 거기 있었다. 인간 사회의 ‘외재성’으로서 자연의 존재론은 ‘실체론’에 토대한다. 무어는 외생적이고 실체론적인 자연관을 관계적 개념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이 단순 위계의 전복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적인 것으로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 사상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처럼 인간 중심주의를 자연 중심주의로, 또는 지구 생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우위를 전도시켜 자연 속 생물의 한 종으로 겸손하게 도치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호 변증법적 관계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그물 속에서 자본주의도 부단히 재형성되고 재창조된다. 자본은 자연을 산출하고, 자연은 자본을 산출하는 이 변증법적 과정을 무어는 ‘자연 속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속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변증법을 통해 만들어져 온 자본주의 역사를 무어는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연이 단일 실체가 아니듯이 자본주의도 단일한 경제 체제가 아니다. 자연은 자본의 경제에 가만히 불려 와서, 시키는 대로 순순히 착취당하고 전유당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들)은 자본에 길들여질 뿐 아니라 길들이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의 생명의 흔적인 석탄과 석유는 얼마나 자본주의 경제를 길들여 왔는가. 지금 기후 위기만 봐도 기후가 다른 경제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 생명의 일(노동)/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화에 저항했다가, 프롤레타리아로서 저항하고, 다시 탈프롤레타리아화(재자연화, 호모 사케르)에 저항한다. 인간/비인간 자연이 다른 자연으로 계속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자본도 여기에 대응하며 다른 자본주의로 계속 탈주해 나가야 한다. 이 ‘전환’은 상호적이다. 신자유주의로, 신경제로, 뉴 노멀로, 포스트 자본주의로의 끝없는 전환은 자본의 축적을 지속하기 위한 ‘자본의 탈자본주의’ 전략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로 변신하고 있을 뿐이다. ‘탈탄소 자본주의’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린 뉴딜’을 ‘탈탄소 경제 사회 대전환’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기후 위기를 ‘탄소 문제’로 협소화시키는 대표적인 탈정치와 몰역사의 레토릭이다.
저렴한 자연
다시 돌아가자. 기후 위기와 금융 자본이, 지구 온난화와 자본 축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토지와 농민의 생명(일/에너지)을 연료로 삼아 이뤄진다는 것인가? 비밀은 ‘저렴한 자연’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무어는 가치의 셈법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통상 가치는 노동 생산성으로 설명된다. 주류 경제학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기술 혁신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도약을 이룬 것은 기술 발달에 따른 ‘산업 혁명’이라는 것이 상식화된 논리다. 서구의 과학 기술 혁명이 경제 발전과 사회 진보를 이룬 토대라는 것이다.
무어는 이 상식을 뒤집는다. 대신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자고 말한다. 자본의 ‘논리’에서는 가치의 ‘법칙’이 나타나지만 자본의 ‘역사’에서는 ‘패턴’이 드러난다. 그 패턴을 따라가면 자본의 축적에는 반드시 저렴한 자연이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시장 가격이 결정된다든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는 식의 ‘가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사회’라는 진공 상태의 관념 공간 안에서 가설과 논리에 의해 추출된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패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기서 무어는 ‘가치 법칙’을 ‘가치 관계’로 프레임을 전환한다. 이것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이겠다. 그것은 자본의 ‘가치’가 바로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에서 기술 혁신에 따른 노동 생산성의 향상보다 이 ‘무상의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자본주의 가치 법칙은 곧 ‘저렴한 자연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무어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생산성을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에서 강조해 온 무상/일 에너지와 다음과 같이 결합한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짜나 싼값으로 식량, 노동력, 에너지, 원료를 산출해 내야 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에서 가치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 네 가지 저렴한 것은 악순환적으로 재생산된다. 저렴한 식량은 저렴한 노동력을, 저렴한 노동력이 저렴한 에너지와 원료를, 다시 저렴한 에너지가 저렴한 식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 축적의 위기는 저렴한 자연의 상실에 따른 위기다. 21세기의 신자유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생산해 온 자본 회로 외부의 개척지frontier가 폐쇄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자본의 마지막 ‘대약탈극’이었다. 20세기의 서구에 마지막 저렴한 자연을 공급했던 중국과 인도도 대규모의 경쟁적 약탈자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영토적으로는 더 이상 프런티어가 남아 있지 않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하늘에서 바다까지, 전 지구를 통틀어 이제 자본주의 외부는 없다. 남은 것은 인간/비인간 동물의 ‘신체’뿐이다. 새끼를 낳는 한 그것은 영원히 재생하고 지속 가능하므로. 노동 유연화는 이 신체를 ‘싸게 쓰고 쉽게 버리는 몸’으로 생산하는 기술이다.
프런티어
프런티어는 ‘역사적 자연’을 생산하며 이는 ‘식민지’의 다른 이름이다. 프런티어라는 용어는 ‘식민지’가 갖는 국민 국가적 영토성의 구획을 넘어 전유의 지대를 여성, 동물, 원주민의 몸oikos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의 생명의 일/에너지가 생산되고 전유되는 모든 곳이 ‘프런티어’라고 불릴 수 있겠다.
농촌과 농민도 마찬가지다. 공장식 축사도, ‘산 고기’로 전유되는 동물도 프런티어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1492년 신대륙 침략 이후로 자본에 의해 끝없이 갱신된 프런티어의 팽창이 이제 지리적 공간적으로는 더 이상 개발할 곳이 없이 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위기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 축적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상의 자연을 계속 생산해 냄으로써만 지속 가능한 체제다. 그런 점에서 무어는 생태주의적 서사가 말하듯이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동력을 가졌다고 본다.
지금까지 반신자유주의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으로 불러들여 상품화하고 있다는 ‘자본화의 법칙’이다. 그런데 무어는 반대로 자연을 자본화하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동력이 자본 축적의 원리에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화되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지금까지 무상으로 누렸던 생명의 일/ 에너지에 대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가내 노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본은 돌봄 노동을 ‘저렴한 노동’으로 상품화하면서 동시에 ‘무상의 일/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연의 영역으로도 남겨 놓는다. 이러한 이중 착취는 여성에게는 동일한 일이 무상 노동과 유상 노동의 2교대 근무로 강제 되게 만든다. 노동 시장에선 저임금의 청소 노동자나 가사 도우미로 착취 당하고, 가내 노동에서는 무상으로 전유당하며 저임금 노동 시장을 다시 떠받친다.
농민이나 소자영업자들의 노동도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와 전유의 이중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농촌과 농민도 자본의 산업적 회로 속으로 (저임금 농업 노동자로) 완전히 흡수하는 것보다는 일부는 무상 전유 지대로, 프런티어로 만드는 것이 자본으로서는 더 ‘저렴한’ 것이다.
이런 착취와 전유 사이의 2교대, 3교대 노동은 결국 시간을 착취하는 기술이다. 무어는 이것이 지리적, 공간적 포화에 도달한 프런티어가 찾아낸 ‘시간의 식민지’ 라고 말한다. 이제 남은 것은 생명의 일/에너지에서 ‘시간’을 추출하는 것이다. 강제적 노동과 자발적 노동, 임금 노동과 무상 노동, 공적 업무와 사적 업무의 끊임없는 전환과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출된다. 자본은 시간을 압축하고, 미래를 담보로 잡는다. 투자 자본주의는 생명으로부터 미래의 일/에너지를 채굴하는 방식이나 다름없다. M-C-M′이 M-M′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시간의 연금술’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오늘날 자본의 축적은 자본화보다는 자연화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자연화란 녹색 사상에서 말하는 생태주의적 회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모든 신체를 ‘사케르sacer’의 의미로서 신성하게(자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플랫폼 노동’에서 나타나는 자유 노동의 형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무어의 자본화는 자본의 회로로 편입시킨다는 뜻이다. 농민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것이 자본화라면, 자본과 노동의 임노동 관계를 해소하여 프롤레타리아를 자연인의 기업적 신체corporation-corpus로 전환시키는 것은 대표적인 자연화 방식이다. 이제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자기의 사장인 자신에게 착취당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노동을 외부의 자본에 전유당한다. 농민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상품 생산자로서 자본의 회로 안에서 착취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로 계약이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자연인)로서 자연의 회로 안에서 노동을 전유당한다. 생산물은 자본화(상품화)되지만 노동은 자연화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은 프런티어가 빠르게 폐쇄되면서 자본의 착취와 전유의 이중 전략도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다. 싼 식량도, 싼 토지도, 싼 노동력도, 싼 에너지도 더 이상 없다.
무어는 지금까지는 금융화와 재생산 영역에서 자본화의 심화(돌봄, 식품, 의료, 교육의 자본화)가 자본주의의 파국을 지연시키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책은 물음으로 끝난다.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이 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지연된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명의 일/에너지가 계속 고갈되어 간다는 뜻이고, 자본의 지연 출구로서 ‘혁신’은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 모두에게 새로운 지옥이 지속됨을 의미한다. 탄소를 탈탄소로, 화석 연료를 재생 에너지로, 노멀을 뉴 노멀로 ‘바꿔 끼우는’ 것이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본의 운동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 역시 새로운 자연의 매트릭스를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 인터내셔널 운동으로 연대하고 저항했듯이,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연대를 ‘인터-스피시즈inter-species’ 즉 ‘종 간 연대’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내셔널 워커스를 인터스피시즈 워커스로 확장·재구성하는 상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누가 노동자workers인가? 무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치 관계 안에서 ‘일을 하는’ 모든 생명 활동”(본문 354쪽)이라고. 노동을 이렇게 재정의할 때 전유당하기만 했던 일/에너지와 그 가치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나는 연재하고 있는 ‘워커스 사전’에서 ‘동물’ 개념을 다루면서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돼지와 단결하자.” 책 속에서 인용하는 “동물은 노동 계급의 일원인가?”라는 질문도 그런 맥락과 연결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영토주의의 논리를 넘어 일국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와 단결할 수 있었다면, 자본에 의해 전유되는 동물(생명)들이 자본에 맞서 함께 생명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법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을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의 논리, 해방의 논리로 재구성하는 지식, 과학, 문화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어의 이 책도 그것을 위한 중요한 학문적 성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