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호[특집] 나이주의, 왜? (공현)

특집/ 나이주의를 넘어


나이주의, 왜?


공현 기자

gonghyun@gmail.com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과 함께 토론을 하며, 학생이 아닌 청소년으로 사는 것의 고충을 정리해 본 적이 있다. 그때 거론됐던, 일상에서 가장 신경 쓰인다고 했던 것 중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다. 평일 낮 시간에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는 일이 눈치 보인다고 했던 이야기였다. 왜 청소년이 이 시간에 학교에 있지 않은지, 낯설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심할 때는 ‘학교를 땡땡이 친 불량한 청소년’이라거나 ‘가출 청소년’이라는 식의 오해를 받아서 곤란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청소년, 10대를 초·중·고등학생으로 간주하는 것은 각종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사실 특정한 나이대의 사람을 특정한 사회적 역할에 연결시키는 데 매우 익숙하다. 20대 초반이라면 대학생이라고 생각한다거나 40대 여성이라면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어머니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나아가 각종 정책이나 제도를 설계할 때도 나이를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이나 사회 활동과 연결시키는 관념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나이는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제도권 교육제도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 적정한 연령을 정해 두고 어린이·청소년을 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만드는 것은 학교교육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이다. 또한 학교는 나이에 따라 ‘발달 단계’가 달라진다는 것에 근거하여 학년을 나누며 이에 맞는 교육과정을 편성하여 운영된다. 세월호 참사 직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교양학부) 교수 184명이 스승의 날에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때 그들은 “교육은 한마디로 ‘어른의 말’”이라고 규정했다. 교육이란, 나이가 많은 어른이 나이가 적은 아이에게 말하고 전달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육, 특히 학교교육의 중심에는 바로 나이와 나이에 대한 이데올로기, 즉 ‘나이주의’가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공부를 해야 하니까 사회 문제나 정치에 관심 갖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때, 청소년들을 곧 학교 다니고 공부해야 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낀 적은 없는가? 혹은 명절날 친척들을 만났을 때 나이에 따라 나오는 대학-취업-결혼-출산 등으로 이어지는 질문 공세가 불편할 때는 없었나? 나이가 적은 사람은 아랫사람 대접을 받는 문화가 우리의 말문을 가로막은 적은 없나? 늙는 것은 추하고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느끼고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진 않은가? 나이주의가 낳는 차별과 억압은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교육의 문제점을 짚고 변화를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나이주의 문제를 더 명료하게 해석하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나이주의 개념의 뿌리

 

‘나이주의’는 나이에 따른 차별, 그리고 나이에 따라 사람을 규정하며 사회적 규범을 요구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 넓게는 사회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개념의 뿌리는 에이지즘Ageism에서 찾을 수 있다. 에이지즘은 1970년대에 미국 사회에서 제안된 개념으로, 그 당시에는 노인에 대한 차별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969년 로버트 닐 버틀러가 이 개념을 제안하면서 이야기한 “에이지즘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이은 제3의 차별주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피부색과 젠더를 이유로 그러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행사되는 체계적인 고정관념과 차별의 과정”과 같은 설명을 보면 이 조어가 탄생한 맥락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연령주의나 연령차별주의 등의 표현이 사회복지 관련 논문이나 정책에 등장하곤 한다. 노인 또는 고령자에 대한 차별 문제는 주로 노동과 경제 영역에서 많이 거론되며, 노인과 나이 드는 과정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 이미지도 대표적인 문제이다.


➊ 이처럼 현재 한국의 학계 등에서 '연령주의'나 '연령차별주의'는 주로 고령자나 노인에 관해서 쓰이는 개념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편의상 이를 포함하면서도 더 확장된 개념으로 나이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나이주의의 개념을 더 풍부하고 폭넓게 사용한 사례로 페미니즘 운동과 연구들을 들 수 있다. 페미니즘은 나이주의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며 여성의 나이 듦과 남성의 나이 듦이 사회적으로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젠더-나이체제’와 같은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젊은 여성은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나이 든 여성은 여성성을 잃은 것으로 간주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나이주의는 훨씬 가혹하고 복합적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는 한국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오빠’라는 말이 성별과 나이의 권력관계 속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취재한 기사나, 나이주의 때문에 세대 간에 의사소통 문제와 위계적 질서가 생긴다는 지적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나이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사람 중 한 명도 페미니스트 정희진이다. 정희진은 한 칼럼에서 연령주의가 작동하는 세 가지 차원을 이렇게 정리했다.


➋ 전희경(2012), <'젠더-나이체제-와 여성의 나이>, 여성학 박사 논문.

➌ "'오빠'라고 불러", <일다>, 2003년 8월 25일.

➍ "[기자의 눈] 한국 '나이주의'의 딜레마", <일다>, 2007년 4월 6일



첫째는, 젊은이 중심주의(거의 숭배에 가깝다)나 연장자주의처럼 나이가 적거나 많음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경우다.

둘째는, 결혼·취업 적령기처럼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거나 나이가 들어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식의 ‘생애 주기life coures’ 언설에 의한 차별이다.

셋째는, 차별의 연령화aged이다. 이는 서구는 남성으로, 아시아는 여성으로 재현되는 서구 중심주의의 성별화性別化의 원리와 비슷하다.

사회적 약자가 성별에서 약자인 여성의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나이가 차별과 타자화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실패·비참함·추함·경멸이 노망老妄, 노추老醜 등으로 비유되거나, 사회적 약자를 어린 사람 취급하는 것이다.

- 정희진(2005), 〈몸에 새겨지는 계엄령, 나이〉, 월간 《인권》 제17호

 

에이지즘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을 때 주로 노인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한 것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나이주의’라는 말에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나이 많은 것이 권력이 되고 나이에 따라 위아래가 나뉘는 문화일 때가 많다. 이러한 나이주의에서는 주로 연소자, 특히 어린이·청소년이 차별 받는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나이주의에 대한 논의도 좀 더 복합적이다.


2002년 4월 《한겨레21》은 “나이 먹은 게 죄냐”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나이주의와 나이 차별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 특집은 고령자에 대한 노동에서의 차별이나 나이에 따른 위계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중 한 기사에서는 나이주의 속에서 대개 사람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연장자의 고압적인 태도를 불쾌해 하면서도 자신은 연소자에게 윗사람으로 대접 받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다.


➎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한겨레21》, 2002년 4월 17일



청소년운동도 2000년대까지는 나이주의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간혹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는 현상이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나이와 학년에 따라서 위계를 만들고 폭력을 가하는 현상 등을 가리킬 때 나이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청소년운동이 발전하면서 나이주의에 대한 문제의식도 점점 더 넓어지고 체계적으로 변해갔다. 청소년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것뿐 아니라, 예를 들어 청소년들이 거리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예외적이고 기특한 모습으로 보고 칭찬하는 것이나 청소년을 미래의 희망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 것 역시 나이주의적 현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참정권 등의 문제에서도 청소년들이 어리고 미성숙하기 때문에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맞서면서, 나이주의는 청소년인권 침해를 유발하고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로 인식되었다.


최근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가 청소년 억압의 근간이 되는 이데올로기이자 사회 구조이며, 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국가는 국민을 관리하면서 나이를 정확하게 셈하고, 이에 따라 각종 제도를 만들며 관리한다. 연령에 따라 교육, 취업이나 승진, 혼인, 출산이나 육아 등 생애 주기 틀에 따른 사회적 책무가 부과된다. 경제 활동 인구에 포함되는 연령은 주로 20~50대 정도까지이다. 20세 미만인 미성년자, 즉 청소년과 60세 이상의 노인은 이러한 나이주의 체제에서 특히 더 가시적으로 차별 받는 존재들이다. 나이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다.

 


나이주의는 자연적인가?

 

사람들은 나이가 생물의 노화, 그리고 시간에 의한 개념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나이 역시 사회 제도에 의해서 규정되며, 나이주의도 사회 제도에 의해서 실체를 가진다. 대표적으로, 나이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 같은 것은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또한 계급에 따라, 성별에 따라, 나이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나이주의도 다르게 적용된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나이에 대한 여러 관념들도,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 제도와 구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정희진은 아동과 노인이 온전한 ‘인간’이 아닌 ‘인간의 전후’에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핵가족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청소년과 노인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것도 남성 가장 중심의 핵가족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핵가족은 보호받고 훈육되어야 하는 아이와 이 아이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부모라는, 나이주의 체제의 중요한 요소인 하나의 원형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모든 비청소년들이 부모의 마음으로 ‘미래 세대’인 아이들을 보호하고 기르자는 흔히 듣게 되는 구호는 이러한 모델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➏ 정희진(2005), 앞의 글.



또한 현대의 청소년이라는 개념은 학교 제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10대의 연애나 성적 관계를 터부시하고 규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애나 성적 관계, ‘이성 교제’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주로 청소년이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는 ‘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한국에서 청소년 이성 교제에 대해 우려하는 기사가 증가하는 시기는 주로 1970년대 후반 이후인데, 이는 그 무렵부터 중·고등학교 취학률이 크게 증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사회에서 ‘학생’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며, 학생이 아닌 노동자인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대우도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학교라는 제도 때문에 청소년에 대한 나이주의가 실체를 가지고 작동하게 된다.


노인과 청소년에 대한 차별 담론 역시 대개가 경제 구조나 제도와 연관해서 만들어진다. 노인과 청소년은, 흔히 경제 활동을 하고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무능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노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 발언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가 대중교통 요금 면제 제도이다. 예컨대 어버이연합의 활동을 비판하면서 노인들이 전철·버스가 무료니까 나와서 그런 일이나 한다고 비꼬는 식이다. 그러나 활동 내용의 문제와 그들이 경제적 약자로서 이동권 보장을 위해 지원을 받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여기에는 노인들이 사회적 ‘무임승차자’이므로 적극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보기 싫다는 심리가 섞여 있다.


청소년에 대한 비난과 혐오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인터넷상에서는 초중고등학생들을 가리키는 말로 ‘급식충’, ‘급식이’ 등의 표현이 확산되고 있다. 이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13~2014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때가 무상급식 정책이 사회적으로 첨예한 쟁점이 되고 난 뒤, 초등학교 무상급식 등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되고 중학교로까지 확대되던 때 즈음이라는 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실증하려면 좀 더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급식’이 청소년에 대한 멸칭의 핵심 요소가 된 것은 무상급식이 청소년에 대한 복지의 상징이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법하다.


나이주의는 유교 문화의 잔재로 여겨지곤 한다. 나이주의가 작동하고 정당화되는 양상에 유교 문화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의 나이주의는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실제로 유교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도 나이주의는 존재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이주의는 매우 제도적이고 사회 구조적인 결과물이다.


나이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1차적으로 나이주의는 곧 국가가 인구를 관리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한 체제이자 그 결과물이다. 새로운 세대는 가르치고 사회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생애 주기에 따라 노동이나 결혼, 출산, 육아 등의 과업을 설정함으로써 사회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한다. 연소자보다 연장자에게 더 큰 사회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기성 사회의 보수적인 가치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밖에도, 자본주의 안에서의 임금노동과 경제적 능력에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청소년이나 노인은 복지의 무임승차자로만 보게 되는 등,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나이주의적 현상도 있다.


한국에서 유달리 나이주의가 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화적 양상도 있겠지만 사회 구조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다. 나이주의는 대표적으로 학교나 가족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작동하고 유지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학교 제도는 아주 경직되어 있고 학력 등의 영향력도 크다. 또한 한국의 가족 제도는 매우 경직되어 있고, 국가는 각종 재생산과 돌봄의 책임을 개별 가족에 지우고 있다. 이 때문에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식 간 권력관계의 밀도가 높아지고, 당장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청소년이나 노인은 더욱 큰 부담으로 여겨진다. 잔여적인 복지 시스템 그리고 능력주의적이고 경쟁적이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회 문화와 환경은 이러한 약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정서를 부추기기도 한다. 연공서열 같은 제도 역시 노인 복지나 양육 등의 비용을 개인에게 부담시키는 것을 노동자에 대한 임금 인상으로 가능케 하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이주의와 교육

 

내가 학교에 다닐 적, 많은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말도 안 된다며 싸웠던 일 중 하나가 선후배 관계 문제였다. 먼저 입학한 학년에게는 존댓말을 쓰고 먼저 목례를 해야 했고, 기숙사 등에서는 먼저 입학한 학생들이 나중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분위기가 안 좋다든지 예의가 없다든지 하는 막연한 이유로 ‘기합’을 주었다. 학년, 입학 순서는 곧 나이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나이가 많고 먼저 입학한 사람들은 윗사람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이처럼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나이주의는 학교 안에서 선명하게 전수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한 살 차이에도 민감하게 상하를 나누려 드는 사회적 관습은 학교의 경직되고 수직적인 학년 제도가 없었다면 안 나타나지 않았을까?


나는 고등학교 때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다른 해결책을 찾기 힘들어 ‘학교 폭력’으로 신고를 했었고, 가해자들은 주의를 받았다. 교사의 체벌에도 매우 관대했던 그 시대에는 비교적 신속한 처리였기에 다소 놀라웠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나 폭력은 정당하고 공적이라고 봤지만, 학년이 다르더라도 학생과 학생 사이의 위계나 폭력은 부당하고 사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의 나이주의는 교사와 학생, 어른과 청소년 사이의 나이주의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학교나 교사에 의해 묵인되거나 조장된다는 의미에서이든, 성인(연장자)과 청소년(연소자)의 위계가 연장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든 말이다. 조금 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 더 성숙하고 우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이주의 체제와 현상을 나이 구간별로 끊어서 보지 말고 통합적으로 보면서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처럼 나이주의가 다양한 폭력과 차별을 낳으며 평등한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요소라는 점은 학교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명백하다. 더 나아가서, 나이주의적인 교육은 청소년을 미성숙하며 배우는 위치에, 비청소년을 유능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놓으면서 청소년과 교육을 그 밖의 삶이나 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는 청소년들이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게 만드는 교육이며, 학교에 교육적 자원이나 지위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부작용도 낳는다.


나이에 따른 학년 구분은 과연 적절한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세상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학교에서는 왜 같은 나이의 사람끼리만 모여 있게 만들까? 우리는 무리한 선행학습이 청소년의 나이와 발달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그 나이에 정해 놓은 발달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부진하고 미달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오자와 마키코는 발달이라는 개념 대신 ‘생명의 변화’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발달’이라고 말이 바뀐 순간에 …… 합/불합격, 적응/부적응, 정/부정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상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우열과 경쟁이 우리 의식에 착 달라붙기 시작하였다”라고 비판한다.


➐ 오자와 마키코(2010), 박동섭 옮김,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서현사, 34쪽.)



흔히 10대 초중반에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키도 크고 빨리 성장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여성과 남성은 한 학년으로 구분되고 교육과정상 같은 내용을 배운다. 이런 모습만 보더라도 교육과정이나 학년 구분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발달에 맞춘 것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학년 체제는 전 사회적으로 나이에 따라 사람들의 기록을 관리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대략적인 순서나 수준은 정해 놓더라도, 학년이 아닌 한 명 한 명의 상황에 맞춘 교육이 더 교육적이지 않을까.


나이주의는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각자가 겪는 나이주의적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저항하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은 나이주의가 가장 짙게 배어 있으면서 나이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교육과 학교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방식에 나이주의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해 보자. 나이주의를 넘어선 교육이 과연 가능하겠냐고? 나이주의를 넘어선 삶과 나이주의를 넘어선 사회가 가능하다면,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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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