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호[후속] 알파고와 교육 (강국진)

후속/ 인공 지능 시대 앞에 선 교육

 

알파고와 교육

- 과학의 시대에서 망의 시대로


강국진

kangkukjin@gmail.com

은퇴한 과학자. 기계 학습의 연구로 물리학 박사를 취득했고 이스라엘, 미국, 일본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뇌 과학과 정보 이론 등을 연구했습니다. 지금은 ‘나를 지키는 공간’이라는 블로그를 하면서 전주에서 가족과 삽니다.



과학의 시대

 

‘알파고와 교육’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제목이 왠지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되었다. ‘인공 지능과 교육’이라든가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이라고 바꿔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제목 자체가 뭔가 피할 수 없는 모순의 냄새가 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도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며 오늘날 교육을 말할 때 역시 학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도기란 과거가 미래를 만나는 시기를 말한다. 그러니 먼저 과거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것에 대해 말해 보자.  현대인들은 이제 과학 기술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설사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산다고 해도 그렇다. 일단 비료도 종자도 과학 기술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도 인공섬유로 된 옷과 신발을 입고 차를 타고 마트에 갈 것이다. 그들은 돌아올 때 비닐봉지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도 수돗물이 나오고 세탁기와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신문을 보고 TV를 보며 택배까지 받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과학 기술은 우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과학 기술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일을 해 내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과학 기술에 의존하며 사는 시대는 교육 없이 살기가 무섭다. 본인도 무섭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도 무섭다. 기계는 인간의 힘을 증폭하기 때문에 과학의 시대에는 무지한 인간, 시스템에 통합되지 않은 인간이 무서운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무교육을 통해 글을 배우고 지식을 배운다. 학교란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고 선전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바로 과학 시대를 살아갈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하철역에서는 철로로 뛰어들면 위험하다든가 주유소에서는 불장난을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파란불이 들어올 때만 길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교육받는다. 또한 한 사회 안에서 존경할 만한 시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교육받는다. 인간은 사회적인 협동을 통해서만 요즘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교육 시스템의 뿌리는 이렇게 시대적 요구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은 차별을 만들어 냈다. 바로 교육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구분이다. 닐 포스트먼은 《사라지는 어린이(The Disappearance of Childhood)》에서 서구에서 아이라는 개념은 바로 대중교육과 함께, 즉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일정 나이가 되면 학교에 가고 글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아는 것이 다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정 나이가 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구분이 생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제대로 살아갈 면허를 취득한 것과 같고, 오직 그런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시민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아동은 성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설혹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이라도 결정권에 제한이 있다. 투표권도 없고 재산권도 제한적이다. 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소위 학벌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뿌리가 같다.


이것은 단지 서구의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기본적 교육 수준에 대한 기대치는 점차 올라갔다. 나라마다 상황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어느 나라나 일정 수준 이하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개 기피의 대상이다. 그들은 세상을 사는 규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는 뜻이다. 한국은 교육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특히 높다. 아예 처음 본 사람에게 몇 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는지를 종종 물어 볼 정도다. 대학도 ‘명문대’를 졸업해야 한다. 국내가 아닌 미국 명문대라면 아마도 더 교육받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학벌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지식을 쌓은 것을 성취로 인정하고 학벌에 대한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학의 시대에 지식은 수학과 물리학을 모범으로 삼아 성장했다.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는 과학은 엄밀한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고 믿어졌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지식은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단계는 그 이전 단계를 토대로 해서 쌓아올려진다. 지식은 하나의 거대한 분류 체계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먼저 몇 가지 분야로 나눠지고 다시 세부 분야로 나눠진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계속 누적되고 토대가 완전히 교체되는 혁명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한 기존의 토대는 변하지 않으며 쉽게 흔들지 말아야 할 권위를 가진다. 이러한 특징을 특히 잘 보여주는 것은, 많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 기본적 도구로 사용되어 온 수학의 미적분이다.


과학은 단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전제한다는 뜻에서 배타적이다. 이 때문에 주어진 지식 시스템 바깥에는 전혀 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거나, 적어도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착각을 만들기 쉽다. 과학자들은 온갖 혼돈 끝에 논문을 쓰지만, 최종 결과물에서는 그 논리적 전개는 지극히 당연하며 고려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경우는 전부 다 고려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경험 있는 과학자들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지 않지만 지식 패러다임을 교육받고 전달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대개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에 빠진다.


지식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배타성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 혹은 세상의 대부분의 것은 지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적어도 대부분의 것은 지식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며,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작가나 화가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학교를 다녀서 지식을 늘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작가가 되는 법은 학교에서 가르쳐질 수 없으며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를 오래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가. 만약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지식의 문제였다면 우리는 진작 전 세계가 훌륭한 과학자로 가득 차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있는 나라를 왜 부러워해야 하겠는가. 자동차 만들듯이 만들면 되는데. 이게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한데도 아직도 정치가들이나 공무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화가나 작가와는 달리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그냥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가르쳐질 수 있는 부분과 그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럴 수 없는 부분은 누가 가르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체험에 의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이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에 역시 스스로 자기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전에는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단순한 법칙을 따르면 되는 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체계화되지 않은 것들을 만나고 있다.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제대로 지식화될 때까지 기다려서 글을 쓰겠다는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학교의 구조는 지식의 구조를 반영한다. 지식이 분류되듯 교육도 나눠지고 각 교과목에는 그것을 전공한 교사가 배정된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의 지식이 훨씬 커져도 기본이 되는 토대는 거의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는 놀랍도록 변하지 않는다. 사실 수십 년 전에 비하면 우리는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수십 년 전에 나온 수학 참고서가 여전히 중고등학교에서 쓰이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바로 미적분을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대학도 종종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은데 예를 들어 서점에 가서 요즘 물리학과 학부 수업에서는 어떤 교재를 쓰고 있는가 확인해 보면 상당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나온 책들이다. 백 년 전의 초등학교에서는 뭘 배웠을까. 결국 글쓰기와 산수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지식이 누적되어도 그 구조는 변하지 않으므로 지식을 유지하고 전달하는 학교도 그 기본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 누적되어 감에 따라 학교교육은 인간을 억압하게 되었다. 배워야 할 것은 점점 늘어만 가고 졸업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점점 줄어만 간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일제 시대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면 이미 대우받았고 고등학생이면 지식인 행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학생이면 순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특수 계층의 대접을 받았다. 요즘의 박사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요즘 한국에서는 70% 이상의 고등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수백 년 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그저 집안일을 거드는 것만으로도 생존에 필요한 교육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날마다 밤늦게 공부해야 하고 비싼 교육비를 내느라 빚까지 내야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어쩌면 미래인들은 발달한 과학 기술 덕분에 날마다 유유자적 살아 갈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꼬박 최소 16년을 공부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돈도 쓰지만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망의 시대

 

과학의 시대가 과거라면 이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망의 시대이다. 망의 시대는 정보의 수집과 기록 그리고 분석이 새로워지면서 시작된다. 과도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망의 시대에 진입했다. 요즘 차에는 대부분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다. 내비게이션들은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목적지들을 알고 있으며 현재 교통 상황도 고려해서 경로를 찾는다. 우리는 그냥 전화를 건다.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우리 휴대전화의 신호가 상대방과 연결될 수 있는 경로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최적의 경로를 기계가 찾아서 연결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검색 엔진을 이용하여 정보를 찾는 것에 익숙하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우리가 어떤 고객인가를 분석해서 우리에게 어떤 물건들을 광고로 보여줄지 자동적으로 결정한다.


정보가 수집되고 기록되는 그리고 분석되는 방법이 바뀐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사소한 일이지만,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 사소하게 볼 수가 없다. 인쇄술 같은 것을 통해 정보의 수집과 기록 그리고 분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때 인간의 학문은 폭발적인 성장을 달성했고 사회는 바뀌었다. 서구의 종교 개혁도 결국 대중이 직접 전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정보가 그렇게 기록되고 배포될 수 있을 때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쓰고 출판하는 시대가 아니라면 과학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다. 과학의 발전도 정보 누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정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수집되고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이제 망의 시대에는 기계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분석한다. 엄청난 수와 성능의 센서들이 개발되고 설치된다. 그리고 센서들이 실시간으로 모아 들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알파고 같은 인공 지능 프로그램들에 의해 분석될 것이다.


도구 없이 인간이 기억하고 구분할 수 있는 것에는 큰 제약이 있다. 우리 눈에는 세계가 자연스럽게 이분법이나 삼분법의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 능력과 기억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은 수학을 써서 이 한계를 극복했다. 수학 없이 볼 때는 세상은 혼돈에 가득 찬 것 같았는데 수학적 질서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 낸다. 수학 없이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수학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데이터 분석에 컴퓨터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특히 아주 큰 차원을 가지는 데이터를 처리하려고 하면 수학적 연구도 꼭 필요하지만 결국은 컴퓨터를 써야 한다.


알파고 같은 기계 학습을 통해 이뤄지는 인공 지능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보는 데 수학이라는 도구를 쓴다’는 한계를 넘어선다. 아주 큰 데이터에서 인간이 수학적인 도구를 써서 파악한 질서를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둑을 두는 법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파고는 데이터로부터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는 법을 찾아냈고 세계 최고수급인 이세돌을 이겼다. 이러한 데이터 분석은 하나의 토대 위에 또 하나의 토대를 쌓아가는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적분을 하려면 극한을 알아야 하고 극한을 하려면 수열을 알아야 하는 식으로 쌓아올린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바둑을 잘 두기 위한 이론을 기초부터 쌓아 가지 않고 곧바로 데이터와 행동의 관계를 질문한다. 어떻게 바둑알을 두는 것이 가장 이길 확률을 높이는 수인가?


또 다른 예를 위해 유전자 연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특정 유전자가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특정 유전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가를 전부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그들에게서 어떤 유전적 특징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왜?”라고 질문하기를 상당 부분 멈추고, 대신 그 관계를 발견하는 데 더 집중한다.


이러한 방식을 우리는 진지하지 못한 태도라거나 진짜 혁신을 가져올 수 없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어리석은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은, 정성적으로 말했을 때 갈릴레오나 뉴턴이 과학 혁명을 시작할 때도 비슷한 일을 했다. 뉴턴은 중력 법칙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질문하기를 멈췄다. 돌이 왜 바닥으로 떨어지는가를 묻지 않고 돌이 떨어지는 운동의 수학적 기술에 집중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중력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그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수학의 발전을 포함하는 지식의 누적량이 증가함에 따라 큰 성공을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논리적 이해를 포기하고 곧장 관계를 발견하는 데 눈을 돌리는 것은 또 다른 큰 발전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한 번 “왜?”를 포기하는 대신 많은 관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해서 그 안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알파고의 성공은 바로 우리가 그런 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망의 시대에서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관은 존재할 수 없다. 망의 시대라고 해서 우리가 논리적 연관성이나 일관성을 모두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기초적인 사실에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는 포기된다. 우리는 다만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가지며 그 안에서 우리의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찾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지는가를 답하는 것은 우리들의 우선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으면 대단히 좋겠지만 못 해도 좋다. 주가를 예측해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질서가 인간의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이해 못 해도 일단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전제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무책임하고 비효율적일 수 있다.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한다. 수학을 포함해 많은 섬세한 언어의 발전이 없이는, 데이터를 모아 봐야 그것은 그저 혼란만 가져왔을 것이다. 관찰이 바로 과학을 만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아주 빨리 수집되고 그 데이터를 다시 놀라운 속력으로 분석해 낼 능력 없이는 망의 시대의 접근 방식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그런데 알파고가 보여주듯 그런 능력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지만 우리가 과도기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본격적인 망의 시대가 내년이나 10년 뒤에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인 자동차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망의 시대가 본격화될 것이며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압력을 받을 것이다. 본격적 망의 시대에는 오늘날 인간이 과학과 결합하고 과학 없이 살 수 없듯이 망은 인간과 결합하고 인간은 망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망과 결합한 인간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기적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을 쓰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건물을 짓는 일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일을 망 속의 인공 지능이 저절로 처리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영감이 구체적 실체로 만들어지는 일이 거의 즉석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 시대에도 지금의 종교가 그러하듯 과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학벌을 따지지 않는 탈권위주의적 사회이며 지식의 발전과 유행의 변화가 그냥 빠르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이 일어나는 사회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진입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버드를 다니다가 중퇴한 빌게이츠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곳이다.


 

교육의 미래

 

모든 기관은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대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키우려고 하지 스스로 제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일단 망치를 든 사람은 모든 일을 망치로 해결하려고 하지 망치를 내려놓거나 연필을 든 사람이 일을 하도록 양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학교 개혁안은 학교가 받아들이기 참 힘든 것이다. 이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부분들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거나, 학교가 자기가 할 수 없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다른 분야들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학교는 과거와 미래가 가지는 차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학교의 구조와 권위는 지식의 구조와 권위를 반영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학교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신학교가 과학 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연구 중심 대학이 되겠다는 생각만큼이나 무리한 것일 수 있다. 종교가 무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과 과학이 가지는 근본적 원리의 차이가 있어서, 둘을 동시에 다루면 충돌을 낳고 따라서 그 둘을 하나의 기관에서 가르치려고 할 경우 얼마 가지 않아 그 충돌을 완화하는 것에 모든 자원이 낭비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망의 시대에 어울리도록 학교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지금의 학교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 될 뿐 새로운 이득은 뭐 하나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와 교사는 권위를 잃었는데, 그렇다고 학생들의 지식이 늘어나지도 창의력이 길러지지도 않는 이상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창의력 같은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학교에 대한 오해일 수 있다. 학교는 애초에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그것을 죽이기 위해 만든 곳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키우기 보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답들을 머릿속에 넣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를 위해 세상에 대한 지식을 분류하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구분을 만들고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분을 만들고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같은 등급을 만든 것이다. 이것을 절대 학교에 대한 비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나름의 가치가 있고, 창의성의 가치는 때로 지나치게 과장된다. 우리가 과도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지식 체계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것은 여전히 배울 만한 가치가 있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진짜로 강력한 인공 지능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오고 그 인공 지능과 우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 학교는 지금의 신학교와 같은 위치로 변할 것이다. 즉 여전히 존재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기관이며 미래를 열어간다기보다는 특정한 전통을 지키는 곳으로.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며 여전히 학교가 가장 중요한 교육을 제공한다. 물론 학교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면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고 남의 일을 방해만 하게 될 것이다. 뛰어난 인공 지능이 등장하는 시대에 학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겸손이다. 기존의 학교는 많은 가능한 교육기관 중의 하나로 남으려고 해야지, 시대적 과업을 모두 해결하는 단 하나의 교육기관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국의 대학교 교육이 지금의 고등학교 식으로 간소화, 평준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평준화된 대학교 시스템에서는 졸업에 필요한 지식을 확보하면 그것으로 졸업 학력을 인정받는다. 일정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모두가 가까운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들으면 되도록 해야 한다.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구분은 필요 없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인재를 골라내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 집착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대학 졸업장은 운전면허증이나 컴퓨터 기사 자격증 같은 증명서이기만 하면 된다. 교육과정은 더 많고 더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간소화되고 더 중심적인 분야로 축약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초·중·고 단계도 마찬가지지만 대학의 개편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기본적으로는 현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는 큰 변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오랜 시간동안 개선되어 온 것이다. 그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운다든가 뽑는다든가 창의력을 키운다든가 하는 일로 쓸데없이 교과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가르치는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을 큰 결과 없이 괴롭히는 일만 된다. 더 필요한 교육은 학교 말고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할 수 있도록 학교의 부담을 줄여 줘야 한다.


하지만 의무교육에서 강조했으면 싶은 것도 있다. 우선 수학과 과학 교육, 그리고 고전 인문학 작품에 대한 소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폭발의 시대에 오히려 보편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졌다. 비록 그런 지식들은 취업이나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계속해서 삶에 이득을 주는 지식들이다. 하지만 당장 뭘 주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대개 자율적으로 학습하게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무교육에서조차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의 삶은 지나치게 흔들리게 되고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도 서로 소통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또한 읽고 쓰는 버릇들이기도 중요하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는 두 번째 문제고, 일단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긴 글을 읽는 습관이 생기면 관심 있는 것들을 계속 읽어서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쓸 수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어릴 적에 의무적인 교육으로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영영 재미를 못 붙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쓰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사람은 내적인 일관성에 문제가 생긴다. 망의 시대에 자기를 지키는 것은 꼭 필요하므로 쓰기를 어느 정도라도 시키는 것이 옳다.


마지막으로는 가난한 삶 혹은 최소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자동차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의 다리를 약하게 하고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이 우리의 정신을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과학과 정보기기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과도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삶을 쓰레기통처럼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의 역할을 줄이면 사교육비가 증대되는 등 사회적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면 별도의 공공기관들을 만들면 될 것이다.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새로운 시대의 논리를 반영해야 한다.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지식에 의존해서 풀었고 따라서 학교는 지식의 구조를 반영했다. 학교의 기본 구조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았고 전체 지식 시스템을 전문 분야들로 분류한 구조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훨씬 더 즉흥적이어야 하며, 기존의 지식 분류, 학과의 구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미 학제 간 연구가 필요한 뇌과학과 같은 분야는 전통적인 학과 구분 때문에 한국에서 제대로 연구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그럴 것이다. 따라서 학과 분류에 얽매일 때 남는 것은 매우 시대에 뒤진 연구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되는 일뿐이다.


또한 이 교육기관들은 고정된 과정을 가지고 일단 만들어지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존재하면서 졸업생을 배출해서 학연을 만들어 주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는 평가도 없고 따라서 학점도 없으며 졸업장도 없다.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그때그때의 질문에 대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참석해서 토론하고 답을 찾는 워크숍이나 하나의 주제에 대해 어떤 사람이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테드같은 것이다. 새로운 교육이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모여서 여는 문제 풀이 모임 같은 것이다.


➊ TED는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기술, 오락, 디자인 등과 관련된 강연회이다. 최근에는 더 다양한 분야와 주제로 열리고 있다.



전통적인 학교교육은 분류된 답들을 중심에 둔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그 답들을 쓰게 될지 모르는 채 최대한 많이 남의 질문에 대한 답들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것을 연습한다. 새로운 교육은 질문 중심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질문이며, 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가져와야 한다. 게다가 심지어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제대로 된 질문을 가지게 된다면 답은 언젠가 나오게 되거나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올바르지 않으면 답이 아무리 멋져도 실상 쓸모나 의미가 별로 없다. 사회가 지원해야 하는 것은 도서관이나 논문 서비스 같은 정보 분야의 지원과 장소나 조직 분야의 지원일 것이다. 그런 서비스 속에서 학생들은 마치 어린 시절부터 벤처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것을 키워서 더 또렷한 답으로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업을 통해 배우고 실제적 성과를 내는 장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교육기관이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는 대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백 년 이상 이전의 과거 언젠가 유럽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은 대학, 아직 전문화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대학 말이다. 이는 곧 대학을 제대로 개혁하면 우리는 학교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프랭크 도나휴는 《최후의 교수들》에서 미국 대학의 실상을 그리고 오찬호는 《진격의 대학교》에서 한국 대학의 실상을 고발한다. 대학의 현실은 그런 이상과는 이미 한없이 멀어졌다. 미국과 한국에서 대학들이 가지는 문제는 당연히 같지 않고 한국의 상황이 더 나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결국 대학이 대가를 바라는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대학은 기업화되고 학문은 세속화되었다. 요즘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지만 당연한 것은 아니다. 학문이 이상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은 이미 말기(末期)적인 것이다. 지식의 최전선이나 앎과 무지의 경계에 서지 않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은 취업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곳이 되었다. 대학에는 분명 그렇지 않은 역할과 부분이 있지만 이런 부분은 이 취업 학교라는 부분과 아주 위선적인 동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교육적 측면에서건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 조건에서건 모순은 누적되었다. 등록금은 한없이 비싸지는데 그들이 받는 교육의 가치는 의문시되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상당수가 계약직 강사로 고등학교 교사보다 노동 조건이 나쁜 상황인 것이다. 교수들도 논문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여러 가지 관리 업무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종신 재직권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교수가 되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그렇다. 기업이 직원을 써서 일하는 것보다 대학원생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더 싸다는 것은 대학이 존재하는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며 대학은 그 안에서 일하는 훌륭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과 학계는 너무나 비대해지고 복잡해져서 마치 망하기 직전의 대제국을 연상시킨다. 사회적으로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이 지불되고 있는데 그 내부의 복잡함과 전통적 권위에 대한 허영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껍데기는 화려한데 속은 이미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나휴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교수’라는 것은 이제 멸종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 시스템은 상당 부분 이익과 형식 맞추기를 위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미국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인 한국에서 그 폐해가 훨씬 심각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관심에 따라 자유롭게 사고하기보다는 그저 시스템이 시키는 일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때, 과연 전체적으로 지식의 발전이라는 것이 더 빨라질까? 논문 인플레이션은 점점 심해져 왔고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면 논문을 요구하는 것이 시스템이고 논문을 써야 살아남는 것이 학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진짜 가치 있는 생각을 할 여유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대학은 이미 앞서 말한 과학 기술을 가르치는 연구중심대학이 되려는 신학교처럼 내적인 모순에 그 에너지를 상당부분 낭비하고 있다.


 

상상하며 과도기를 살기

 

오늘날 사업 분야를 보면, 인터넷을 통한 여러 가지 서비스들이 순간적으로 결합되어 새로운 비지니스가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제 시스템이나 택배 시스템 같은 것들을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와 순간적으로 조립하여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비지니스의 여러 부분들을 아웃소싱해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력으로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꿈꿔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중학생이 자신이 꿈꾸는 주택을 이야기하자 그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으로 돈을 모으고 실제로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기는 이득은 자동적으로 분배되고 참여한 각자의 이력서는 자동으로 갱신된다. 물론 지역 사회의 문제 해결이나 순수하게 돈을 벌기 위한 제품 판매 사업에서도 이런 과정을 꿈꿔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경쟁하기보다는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중학생이 상하수도 배관이나 금융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참여할 이유가 될 뿐이다. 일단 그런 식으로 집이 지어지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 중학생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이 많이 쌓이면 그는 훨씬 더 대단한 건물을 설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교사의 진로 상담이란 필요 없는 것이 되거나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뭘 할 수 있는가를 상담해 주는 시대가 아니라 학교에 있는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망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학교를 졸업하거나 어떤 직위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주 어설프고 부분적인 아이디어라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상당 수준까지 진행해 보거나 심지어 마지막 단계까지 실행해 볼 수 있다. 망 속에서 제품 디자인들이 만들어지고 3D 프린터로 출력되는 미래는 멀지 않았다. 그리고 미래의 교육이란 바로 그런 실행 그 자체이다. 이것은 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알파고 시대의 교육이다. 물론 그때가 본격적으로 올 때까지, 우리는 어설픈 과도기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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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