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호[기획] ‘남성’과 페미니즘이 만나야 할 때 (마쯔)

201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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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페미니즘과 교육

 

‘남성’과 페미니즘이 만나야 할 때

  

마쯔

mazz9878@gmail.com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노동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입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고 싶었는데, 이 말에 어떤 의미가 담길까 고민되는 요즘입니다. 다시 이 단어에 신뢰와 희망을 담는 것은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밝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난 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남성성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의 목표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남성/남성성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며 ‘남성’이라는 위치와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온라인 공간을 통해 등장하고 있는 ‘남성 위기론’과 ‘역차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 한국에서 남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국에서의 남성성이 어떤 변천을 겪어 왔는지를 훑어보고, ‘남성’이라고 간주될 뿐 질문되지 않고 있는 남성들 내부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현재 연애/결혼 각본에서의 ‘남성’에 관해 논의함으로써 남성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5주간의 남성성 수업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분명 여러모로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부족했던 것은 단순히 시간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부족했던 것은 ‘말하기’ 그 자체였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수업에 참여했던 남학생들 상당수는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었던 다른 페미니즘 수업과 비교할 때 ‘말하기’의 양적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나에게 이 말하기의 거부, 침묵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내 경험상 남성이 페미니즘과 마주쳤을 때, 가장 주된 첫 반응은 침묵이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라는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지 긴장하며 입을 굳게 다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동의도 부정도 아닌 침묵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곤 했다. 아마 수업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의 침묵 또한 이런 종류의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조우를 수차례 경험한 남성들 중에는 좀 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짜증, 적개심,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며 페미니스트와 논쟁을 하려고 하거나, 애당초 페미니즘을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주장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무시해 버리고자 시도했다. 물론 가끔은 이런 적대적 발화들이 고마울 때도 있다. 침묵만이 있는 곳에선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차라리 적대적이더라도 논쟁의 씨앗을 뿌려 주고 그걸 통해 계속해서 서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지만 논쟁을 하더라도 이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는 쉽게 해소되지 않으며,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처럼 남성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정적이고 다루기 힘든 감정적 장벽 또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특히 많은 남성들이 인터넷과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런 반응들을 끊임없이 학습하며 그래도 괜찮다고 공인받는 상황은 페미니즘 교육의 어려움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이렇다 보니 연애 경험이 없지만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가상의) 여성에 대해 화를 내고 있거나, 아직 징병당하지 않았지만 군대를 가지 않는 (가상의) 여성에게 화를 내고 있는, 이런 촌극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교육의 대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의 적개심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남성성 수업이 이런 여러 장벽을 우회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우선 지정 성별이 남성인 내가 강사였다는 점이 첫 번째 우회로였고, 남성/남성성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페미니즘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이 두 번째 우회로였다. 이 방법이 효과적이었는지, 이후에도 계속해서 필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해지는 것은 남성들에게 효과적으로 페미니즘 교육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많은 우회로를 동원해야 할 만큼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 페미니스트는 계속해서 ‘등장’하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질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남성에게 페미니즘을 교육시키는 좀 더 올바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남성 페미니스트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양성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이유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➊ 사회적·제도적으로 지정받은 성별

➋ 최근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이들의 성폭력이 폭로되고 있는 상황은 이에 대해 회의를 안겨 준다. 하지만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하다.



 

교육보다 선행하는 적대

 

남성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한다는 것이 왜 어려운가를 묻는 것은 한편으로 의아한 질문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페미니즘이 ‘여성 권익 신장’만을 위한다는 편견이 팽배한 한국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남성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며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부정되어서도 안 되는 페미니즘의 핵심적 의제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젠더 이분법에 의해 고통 받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며, 실제로 많은 남성들 또한 이 때문에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규정하는 ‘이상적 남성’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소외되고, 어떤 남성들은 ‘남성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제당한다. 페미니즘은 이런 고통과 차별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이론이자 정치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친절한 설명은 그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수도 없이 반복해왔다. 문제는 이런 설명들이 많은 남성들에게 언제나 소귀에 경 읽기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이런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거부하는가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은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기도 전에 ‘꼴페미’ 혹은 ‘메갈’과 같은 말들로 페미니즘에 대한 적개심을 유희적으로 습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온라인에서의 ‘유머’와 ‘여성혐오(misogyny)’의 결합은 일상 곳곳에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를 배치하며 남성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있다. “나는 일베 혹은 오유에 그냥 유머 글만 보러 간다”와 같은 말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그 유머 자체가 다양한 혐오와 비하로 오염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들 대부분은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은 사실들에 기반하고 있다. 심지어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하나하나 논박한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논박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하기까지 한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예의가 없다”라고, 그래서 “자신의 KIBUN이 상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논리와 사실의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이전시켜 끝없는 적대의 소용돌이에 머무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➌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인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 유래했다. "Many cultures value a person's dignity over the truth. In Korea, they actually call it KIBUN.(많은 문화권에선 진실보다 상대방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국에선 그걸 기분이라고 부르죠.)" 한국어 '기분'을 'KIBUN'이라고 고유의 문화적인 개념으로 옮긴 점이 독특하다. 막연하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이유로 정당한 문제제기를 비난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행태를 비꼬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이와 같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페미니즘 교육이 마주하는 주요한 장벽은 단순히 ‘무지’만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가장 큰 문제일 때가 많다. 따라서 단순히 ‘올바른 지식’을 전달해 주는 방식만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 적대를 해결하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 이런 접근으로는 남성들이 이런 적대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파악하기 어렵다. 왜 이렇게 페미니즘이 많은 남성들의 감정을 건드리고,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분노와 적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 여기에 남성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이 어려워지는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성혐오를 필요로 하는 젠더 : 남성

 

페미니즘에 대한 분노와 적대를 다른 말로 하면 여성혐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어는 아니지만 최소한 유사어로서 쓰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근거이자 감정이면서 정동이다. 남성들은 왜 여성을 혐오하는 것일까? 남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성을 혐오하라는 명령어가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는 그런 명령어 따위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잘 방증해 준다. 그렇지만 마치 유전자에 여성혐오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이론과 설명들이 존재하지만, 내가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이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 더 나아가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혐오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흔히 ‘남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어 불변하는 인간의 본질로 여겨진다. 하지만 간성(intersex)의 성을 결정하는 기준의 모호성, 성별의 근대적 재구성과 관련된 담론과 ‘성전환’을 하는 트랜스젠더의 등장 등은 남성을 포함한 젠더라고 하는 것이 생물학적 본질이라는 가정에 계속 문제를 제기해 왔다. 성별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며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라는 이런 주장들에 따르면, ‘남성’은 특정한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은 구성되는 것이며, 각 시대와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르게 구성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때 ‘남성’은 ‘남성성’과 크게 구분될 수 없는 모호한 것이 되며, 남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증명해야 되는 무언가가 된다.


➍ 루인(2011), 〈의료 기술 기획과 근대적 남성성의 발명〉,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63~93쪽.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남성은 무엇을 재료로 주조되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여성혐오야말로 남성이 ‘남성’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 중 하나다. 여성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남자가 남자로 인정한 남자들끼리의 유대/관계를 의미하는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의 남성 연대(homosocial)란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남성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남성은 서로를 동질적 구성원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남성이 아닌 존재, 즉 남성의 타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타자를 만들어 내는 주된 방식이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라고 그는 말한다. 흔히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남성이라고 하는 것 또한 하나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동질적 집단을 상정할 때 가능해지는 개념이다. 남성이라고 하는 호명은 개인 고유의 독립성을 확보해 준다기보다는 ‘남성’인 ‘우리’라는 소속감을 확보해 준다. 하지만 ‘우리’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닌 사람들’, 즉 타자가 필요하며, 이때 여성혐오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현재의 남성이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여성혐오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 남성은 ‘남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왜 수많은 남성들이 단지 무지해서라기엔 설명되지 않는 강한 적대와 분노를 페미니즘에 품고 있는가가 드러난다. 만약 페미니즘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남성 페미니스트가 된다면 그 남성은 남성 연대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남성’이 아닌 타자가 되는 것이다. 최소한 타자에 한없이 근접하는 무언가, ‘비(非) 남성’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남성이 ‘남성’으로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적대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남성들은 ‘남성’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남성’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각 사회의 역사와 문화, 구조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여 형성된다는 측면에서 우연적이며, 따라서 사회가 변화하면 이 ‘남성’ 또한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남성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제한적으로나마 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문제는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이다.

 

 

‘젠더 배신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남성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그리고 남성 페미니스트를 양성하는 것이 어려운 마지막 이유는 페미니즘이 남성들에게 ‘젠더 배신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남성 연대로부터 스스로 물러날 것, 자신의 남성 젠더에 거리를 둘 것, 더 나아가 남성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선언하면서 받게 되는 억압과 차별에 비교하면 남성들이 경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손쉬워 보인다. 그리고 여성들 또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젠더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남성들이 요구받는 것과 유사한 것들을 요구 받는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이 여성에게 더 쉬운가, 남성에게 더 쉬운가와 같은 비교는 앓는 소리를 하는 남성의 입을 닫게 하는 수단 이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일상적으로 남성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며 계속적으로 싸워 나갈 수 있도록 어떻게 교육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➎ 샌드라 바트키, 톰 디그비 엮음, 김고연주·이장원 옮김(2004), 《남성 페미니스트》, 또하나의문화, 15쪽.



만약 ‘남성’이 질문되지 않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남성에게 ‘젠더 배신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남성인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먼저 남성이 무엇인지, 남성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남성이라고 하는 위치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남성이 여성혐오에 기반을 두어 구성된 ‘남성’인 이상 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여성혐오의 가장 주요한 기반을 건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나는 남성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할 때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성에 관한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남성들이 페미니즘적 교육을 받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좀 더 ‘다정한’, ‘사려 깊은’, 그리고 ‘매너 좋은’ 남성에 불과하다. 이것은 젠더 간 권력 관계를 전혀 해치지 않으며 젠더 이분법에 조금의 흠집도 내지 못한다. 따라서 질문을 남성에게로도 향하게 할 필요가 있다. 남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남성성이란 무엇이며 당신은 어떤 남성인지를 말이다.


의식하기도 전에 여성혐오를 이미 체화한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욕망, 권력, 위치, 자기를 둘러싼 지형에서 물러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남성으로서의 자기 위치와 인지하지 못했던 권력을 인식하는 것, 자신이 남성으로 구성되는 과정에 대해 이해하는 것, 이를 토대로 남성에 대해 남성에게 더 많은 이야기와 질문을 던지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에 보탬이 될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젠더를 효과적으로 ‘배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더 필요하다. 성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젠더 이분법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사회로 한 발 더 나가기 위해 ‘남성’은 싸워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히도) 연대해야 할 사람들이다. 스스로 잠재적 동지 운운하며 자신들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연대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자들은 분명 투쟁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남성’으로서의 자신과 거리 두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페미니스트로 나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호의를 담아 만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페미니즘의 편으로,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법을 고민하는 것은 언제나 유효하며 필요하다. 결국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젠더를 배신하는 이 ‘젠더 배신자’들은 가장 근본적으로 젠더 이분법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집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성이면서 이 사회가 규정하는 ‘남성’과 갈등을 벌이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는 결국 가장 이야기되지 않아 온 남성 젠더 자체에 대한 담론을 촉진시킨다. 젠더 이분법을 해체시키고자 하는데, 남성 젠더가 침묵 속에 있다면 우리는 아마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이 젠더 간 갈등에서 젠더 자체와 갈등을 일으키는 국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고민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


남성성 수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학생들을 보았기에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남학생들이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만큼 ‘남성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소위 ‘남성 당사자’인 그들이 왜 남성 혹은 남성성에 관한 관심을 적게 가진 듯 보였던 것일까? 아마 그것은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에서 여성의 결핍은 오랫동안 페미니즘이 부딪혀온 큰 장애물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과연 남성에 관한 언어는 풍족했던 것일까? 남성의 언어 자체는 분명 넘쳐흐르며 언제나 과잉 상태였다. 그렇지만 정작 그 남성이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한 언어는 여성의 언어처럼 결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남성/남성성에 대한 언어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여성 문제’ 뿐만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남성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페미니즘 교육은 결국 ‘매너 좋은’ 남성을 만드는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고, 이런 ‘매너 좋은’ 남성이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순간 최근 벌어진 예술계 성폭력 고발6에서 보았던 일들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과 사유 없이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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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