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호[특집] 보호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하지 않는다 (호야)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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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이주의를 넘어

 

보호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하지 않는다

 

호야

neojacobin@naver.com

청소년활동가. 어린년으로 살기가 영 녹록지 않습니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는 나이주의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이데올로기이다. 나이주의의 연소자 차별, 나이와 경험-능력이 비례한다는 편견 등은, 나이가 어린 사람은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며 가진 능력도 자본도 부족하기에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만든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보호되기 때문에 ― 정확히는 다양한 경험을 차단당하기 때문에 ―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이는 ‘미성숙의 악순환’이라 불리는 굴레가 되어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뿌리로 작동한다. 이 견고한 나이주의 체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어린이·청소년이 보호해야 할 존재라는 데에 동의한다.


보호가 안전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 개념이라면 보호는 비단 어린이·청소년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할 것이다. 허나 일상에서 보호는 유독 어린이·청소년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만 강조된다. 어린이·청소년 스스로 “우리는 보호 받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 대상’으로 위치 짓고 보호 받기를 바라는 건 재난이 닥쳤을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딘가 공허한 이유다. 보호는 권력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중립적인 개념이 아닌 것이다.

 

 

보호의 본질


보호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그림으로 나는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의 한 장면을 꼽는다. 그림에서 보이듯 보호는 보호 대상을 가둔 창살과 같은 형태로, 실상 ‘차단·박탈·통제·구속’에 가깝게 작동한다. 이 구조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 16화에서


첫째, 보호하는 자와 보호 받는 자가 나뉘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둘 사이의 위계,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유지된다. 보호하는 자는 보호 받는 자가 무엇을 해도 되거나 하면 안 되는지를 검열하고 결정하여 차단, 박탈, 통제, 구속을 실행한다. 보호 받는 자는 행위에 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보호의 특성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과는 뒤바뀌어야 한다. 약자이므로 보호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 때문에 약자로 남는 것이다. 이를 김성윤은 《18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보호론의 궁극적 효과는, 기본적으로 보호하는 자와 보호 받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유지함은 물론이거니와, 보호 받는 자로 하여금 ‘보호 받는다’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를 거의 항구적으로 정치적 약자로만 머물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강조는 필자)

- 김성윤(2014), 《18세상》, 290쪽


국가는 청소년에 대한 비청소년의 권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아직은 인간이 ‘되어 가는’ 단계인 어린이·청소년을 ‘바람직하고 건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나서서 관리하는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나이를 기준으로 구획된 법제도, 이를테면 청소년보호법과 같은 관리 틀이 동원된다.


 

표에서 보이듯 국가 정책으로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보호의 내용은 보호가 ‘차단·박탈·통제·구속’하는 것에 가깝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흔히 약한 존재를 지키고 감싸 안는 것을 보호라고 생각하지만 폭력, 학대 등에 노출된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는 공식 정책으로는 보호가 아니라 ‘자립 지원’의 영역에 해당된다. 국가 정책으로서의 ‘보호’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이 무엇인지를 심의하고 점검, 단속, 규제하는 것이다. 이 심의는 권력을 가진 비청소년의 입맛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기준이 모호하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흔히 받는다.


청소년 참정권에 반대하는 이유도 아직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을 정치의 더러움(?)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식으로, 동성애에 반대하는 이유도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게임을 규제하는 이유도 청소년(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이쯤 되면 보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쓰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 효과만큼은 굉장해서 일단 유해하다는 딱지를 붙여 놓으면 어린이·청소년은 그것에 접근하기 어려워지는 동시에 왜 유해하지 않은지를 증명하라는 부당하며 무리한 요구를 받게 된다. 여기에 말려들면 어린이·청소년이 항구적 정치적 약자 신세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호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를 짚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➊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연극이나 이야기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로 이끌어 가는 수법. 온갖 문제를 다 해결하는 데 쓰이는 만능의 장치라는 비유적 의미.



둘째로, 보호는 특정 존재를 보호하게끔 만드는 원인, 배경을 변화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작동한다. 이는 보호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는 밤늦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딸을 걱정하는 부모가 딸의 귀가 시간이나 옷차림을 단속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성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위험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인 사회적인 여성혐오와 젠더 불평등, 성폭력 가해자에 초점을 맞추고 그 변화에 힘쓰는 것은 보호의 본질이 아니라 ‘옵션’이다. 특정 존재를 위험하게 하는 요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차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건 본질적이지 않고 미봉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당사자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제약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인 권력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보호 대상이 유해한 것에 접근하는 행위를 차단, 박탈, 통제, 구속하는 것으로 보호는 그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된다. 보호 대상이 이를 따르지 않고 유해한 것에 접근할 경우 그 책임은 온전히 보호 대상의 몫으로 여겨진다. 위의 예시로 말하자면 밤길을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했음에도 통금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닌 딸의 행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본질에 닿지 않는 보호의 근본적인 한계나 가해자의 가해 사실 자체와 폭력을 낳는 사회 구조보다도 ‘보호의 틀을 어기고 돌아다닌’ 딸의 행위가 주목 받는다니!


보호의 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약자 스스로가 “세상의 악의를 감당하며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악의적인 확대해석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마치 부모가 말 안 듣는 자식에게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라. 잘 먹고 잘 사는지 보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가 아닌가? 정치‧사회적 약자가 가진 권력과 자원이 현저히 적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지지‧지원하지 않은 채로 망하기를 지켜보겠다는 그 태도. 그리고 망하고 절망해서는 고분고분하게 ‘가진 자’인 내 밑으로 기어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가학적인 태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망함에 대한 책임은 결코 약자가 무언가를 잘못했거나 못한 것에 있다고만 말할 수 없다. 가진 자가 그에 대한 지지나 지원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거부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보호는 보호하는 자에 의한 폭력, 가해를 은닉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가정폭력 및 학대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같은 사례를 보라. 특히나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폭력은 대개 보호와 사랑, 훈육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다. ‘부모는 모름지기 아이를 보호할 것이다, 남자는 모름지기 여자를 보호할 것이다’와 같은 생각은 통계만 살펴봐도 부정이 가능할 만큼 허황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견고하다. 이는 보호가 보호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위계와 권력관계를 공고히 유지시켜 온 동시에 그 권력 차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은닉하는 것에도 충실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폭력을 막으려면 이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라든지 “아동학대를 막으려면 자식으로부터 부모를 격리시켜야 한다”라는 주장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사회적으로 수용될 방법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➋ 아동학대의 가해자 구성을 보면,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상담 전체 1,308건 중 피해자의 92.2%가 여성이었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85% 이상이 지인 관계였다.



폭력과 혐오 이야기를 할 때 남성들이 “내가 여자 ― 여자친구와 어머니와 여자 형제 등의 구체적 예시를 동반하며 ― 를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항변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라는 그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에 우습다. 마찬가지로 비청소년이 자식이나 여타 어린이·청소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며 자신이 저지르는 폭력을 부인하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폭력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평등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앞서 썼듯 보호는 권력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구조에서 약자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보호 ‘대상’으로 바라보며, 보호하는 자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이상 ― 이는 ‘혐오’의 본질이기도 하다 ― 보호자는 학대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한 존재다. 요컨대 “사랑해서 그래”, “너를 위해서 그래”와 같은 말은 어린이·청소년이 아니라 폭력을 저지르는 비청소년을 비호하는 표현임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민낯을 들여다보면 실상 그 사랑과 위함은 비청소년 자신(의 권력)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보호주의의 확산 : ‘우리 아이들’을 ‘부모의 마음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보호는 본질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개념이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는 나이주의 체제 속에서 비청소년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충실히 돕는다. 그리고 보호주의의 사회적 확산을 돕는 것은 바로 ‘가족주의’이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는 부모-자식 관계를 원형으로 하고 있는 만큼 가족주의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가족주의는 그러한 관계를 전 사회적 어린이·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에 적용시키며 보호주의를 확산시킨다. 이 속에서 비청소년은 불특정 다수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부모 역할을 수행할 것을 내면화한다. 실제로 그가 누군가의 부모인지 여부와도 상관없이 말이다.


2013년, 프로 농구 선수 이현호는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던 청소년을 폭행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청소년의 흡연이 합법적이냐는 문제와 별개로 누군가를 때린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이때의 기사나 여론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를 빙자한) 폭력이 얼마나 쉽게 용인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비청소년이 ‘부모의 마음’을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사는 이현호 선수의 폭력이 ‘머리를 쥐어박는 정도’로 약소했다는 것과 흡연 청소년들의 ‘발랑 까짐’과 ‘버릇없음’을 강조한다. 당시 그에게 폭행당한 청소년들의 부모 대부분은 오히려 자기 자식을 훈계해 줘서 고맙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며, 대다수 여론 또한 그의 폭행을 정당한, 게다가 오히려 무서운 청소년의 반격을 감내하고 행한 용기 있는 훈육으로 바라보며 그를 지지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방식이 너무 ‘과격’했다는 것 정도이다. 생면부지 청소년의 행실을 부모의 마음으로 통제하는 것은 정당하며 바람직한 일이라는 데에 여론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이현호 선수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표창감이라는 평을 얻으며 ‘어른’으로 추앙되었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식의 슬로건을 건 마을공동체 사업에도 ‘부모의 마음’이 녹아 있다. 이는 ‘내 가족’의 틀을 벗어나 마을 단위로 관계와 관심을 확장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자기 자식 이외의 어린이·청소년과 관계 맺는 방식이 가족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부모-자식’ 관계라는 것이다. 이때 어린이·청소년의 입장에서 마을공동체란, 자신에게 부모에 준하는 권력으로 통제를 행하는 사람들이 마을 단위로 늘어난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안식을 얻기는커녕 단지 억압이 확장되는 것이다. 학교도 유사하다. 학교는 부모로부터 자녀를 위탁 받아 보호하고 훈육한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장소다. 부모가 교사를 만나면 하는 말이 “부모의 마음으로 훈육해 주십사…”이지 않던가. 이때 갈등이 생긴다면 (이현호 선수의 폭행 사례와 유사하게) 그 원인은 ‘부모의 마음’이 과하거나 약하거나에 있지 어린이·청소년을 ‘훈육’한다는 것 자체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각종 보호-규제 정책은 ‘부모의 마음으로’ 시행된다. 온라인게임 셧다운제와 같은 게임 규제, 그 이름에서조차 가족주의의 영향이 짙게 배어나오는 ‘아이스마트키퍼’ 같은 스마트폰 규제 등이 그러하다. 부모 역할을 강조했을 때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승인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것이 인권적인지, 정당한지 여부는 심심찮게 간과된다.


➌ 아이스마트키퍼는 스마트폰의 이용을 잠그거나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여러 지역의 교육청들이 학교에 보급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운동사회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 내려 할 때 “(우리)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활용해 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피켓 문구나, 탈핵운동의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나, 세월호 희생자 추모에서 등장한 “아이들아 미안하다”라는 구호를 보라. 이들은 공통적으로 비청소년의 사회적 부모 역할에 호소하여 해당 의제에 대한 광역적 관심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제껏 나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일조해 온 보호주의 담론의 강력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논쟁을 뛰어넘고 도덕적 정당성을 선점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 구호들이 실제로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여기서 아이들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보호하는 자로서의 권력, 비청소년으로서의 나이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이 구호를 외치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존재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차별적 구호라는 점에서 이 구호들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숱한 문제 제기와 공론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이주의-보호주의-가족주의가 엮어낸 촘촘한 체계의 일상성과 보편성을 깨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보호는 필요 없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일단 단언컨대 보호는 필요 없다. 그 누구에게도. 보호가 위계를 전제하는 이상 그 누구도 보호 대상이 된다 해서 안전해지지 않는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관련 토론회에서 등장한 “평등해야 안전하다”라는 표어는 어린이·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존재가 항구적 정치적 약자로 남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이다. “~주세요”와 “~도 돼요?”의 화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그 결정권자의 폭력을 거부하고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권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맘대로 하게 두는 게 안전해지는 거냐는 반박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데 보호로 안전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보호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어린이·청소년이 위험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은 무엇이 위험하냐 안전하냐를 결정하려 하거나 위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위험과 안전을 판단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권한을 왜 특정 존재는 가질 수 없냐고 말하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놀이에서 위험을 감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위험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생존에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엔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법과 다른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법,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성장한다는 것은 공포를 다루고 적절한 결정에 도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위험한 놀이를 함으로서 아이들은 효과적으로 노출 치료에 자신들을 드러내 놓게 된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 아이들이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두려움은 공포증이 된다.

- Hanna Rosin, 〈과잉보호되는 아이들The overprotected kid〉,

《The Atlantic》 2014년 4월호 칼럼니스트 윤지만의 번역에서 인용. yoonjiman.net/2014/07/04/the-overprotected-kid


부모의 보호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 위 글에 따르면, 애초에 위험은 결코 완벽하게 예측하거나 제거할 수 없으며 삶의 일부분에 가깝다. 이때 필요한 것은 위험의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위험을 마주했을 때의 대응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대응력은 당연하게도 위험을 마주해 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보호가 이 힘을 기를 기회를 ‘보호의 이름으로’ 차단해 존재를 항구적 약자에 머무르게 한다면, 권리는 이 힘을 기를 기반이 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만을 우선으로 고집할 때, 많은 교육적 활동과 가능성이 차단당하고 만다.


누군가 진정으로 안전하기를 바란다면 그가 안전할 권리를 누리고자 하고 그에 필요한 무언가를 요청할 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면 된다. 그가 기어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더라도, 충분히 선택하고 경험하고 그 결과를 감내하도록 존중하자. 오로지 그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냉소를 퍼붓고 조롱하는 게 아니라) 충실하게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이다.


부모가 위험하고 나쁘다고 판단한 것들로부터 대부분 고분고분 ‘보호 받던’ 나는 얼마 전 부모에게 생애 처음으로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는데?”라고 말하고 연을 끊었다. 내가 그간 보호 받으며 유예해 온 ‘위험한’ 욕망들이 내게 너무나 간절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나답게 존재하는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로막아 온 부모의 책임을 묻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지지와 지원 없는) “해 봐라!”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어린이·청소년 시절의 나 자신에게 너무나 미안할 것 같았다.


청소년운동을 하고 그 담론을 발굴하는 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자기 치유 과정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온전하게 존중되지 못한 선택들, 짓밟혔던 스스로의 의지들이 잠 못 드는 새벽에 하나둘씩 떠오르면 나는 그것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고, 다시 떠나 보낸다. 〈과잉보호되는 아이들〉에서 말한 것과 같이 두려움을 마주할 경험이 차단되어 공포증으로 변해 버린 것들이 나에게도 존재한다. 그것을 뒤늦게 마주하고 적당히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 지금의 내가 떠안은 과제이고, 청소년운동은 그에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주고 있다.


보호는 필요 없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하고자 한다면 실질적인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끔 지지하고 지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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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