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호[특집] 통합, 삶과 배움을 일치시키는 교육 (김민중)

특집/ 나이주의를 넘어

 

통합, 삶과 배움을 일치시키는 교육


김민중

광명YMCA 볍씨학교 교사

Kmymca@hanmail.net

볍씨학교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며 지내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아이들 덕분에 내가 훌쩍 자라 있었다. 요즘은 자전거에 푹 빠져서 아이들과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꾼다.



《오늘의 교육》에 볍씨학교의 연령 통합 교육과정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이 많았다. 나이주의에 대한 논의를 형성하는 데 볍씨가 제일 좋은 사례는 아닐지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이다. 볍씨학교가 전면적인 무학년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우리보다 더 급진적으로 전 학년을 통합해서 지내는 현장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볍씨학교의 교육과정 안에 녹아있는 연령 통합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이 서로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러 나이가 섞여 지내는 일상

 

“정수가 자꾸 나한테 까불어요.”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툼이 일어났을 때 자주 듣는 말로, 동생이 언니에게 ‘건방지게’ 군다는 뜻이다. 반말을 하거나 말을 잘 안 듣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때 쓰인다. 아이들 사이에 존대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반말을 했다고 기분이 나쁜 건 호칭을 빼고 그냥 이름을 불렀을 경우다. 대장 노릇이 하고 싶은 아이는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다. ‘한 살 많은 게 벼슬이야?’ 하는 눈빛으로 언니에게 덤벼든다. 언니는 힘이 약하지만, 그래도 한 살 위인데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자존심으로 버티며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모두 반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볍씨에서 연령 통합이 확대되기 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볍씨 아이들은 한 반에 2개 또는 3개 학년이 섞여서 지낸다. 이렇게 지낸 것이 몇 년 되었는데, 그 전에는 보통 한 학년이 한 반으로 지냈다. 학년이 곧 반이었을 때에도 시간표는 있었지만 종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니어서 반마다 생활리듬이 제각각이었다. 위아래 학년끼리는 서먹하고 어색했다. 약간은 배타적이기도 했다.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두 학년이 섞이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을 정도로 다른 학년 사이에 거리감이 있었다. 통합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는 지금은 서로 다투는 것도 일상이 되었을 만큼 언니 동생이 섞여 지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볍씨학교에서의 연령 통합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다. 하나는 두세 개의 학년이 통합된 ‘생활반’이고, 또 하나는 4학년부터 8학년까지 모두 5개의 학년이 함께 지내는 ‘큰모임’이다. 그밖에도 많은 영역에서 위아래 학년들이 서로 섞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단오, 추석 등 교내 절기 행사에서 모둠을 지을 때는 가능하면 1학년부터 8학년까지 모든 학년을 골고루 섞는다. 유아 대안학교 풀씨와 행사를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5, 6, 7세도 모둠에 들어와서 언니들을 따라다닌다.

 

 

좁은 범위의 연령통합 : 생활반

 

학교가 막 문을 열었던 해에 들어왔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볍씨에서도 오랫동안 연령에 따라 학년을 나누어 지내왔다. 여러 시도를 거쳐서 지금은 1~3학년, 4~5학년, 6~8학년이 각각 통합을 했고, 9학년은 따로 제주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두 개 학년을 합쳐 보기도 하고, 합치는 학년을 바꾸기도 하고, 더 늘리기도 했다. 학년 통합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시작되었다. 어느 해, 위아래로 접해 있는 두 학년의 성비가 정반대로 안 맞았다. 윗반은 남자에 비해 여자가 소수였고, 아랫반은 반대로 남자가 적었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통합의 명분이 섰다.


성비의 불균형 외에도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관계를 다양하게 맺기 어렵다는 한계였다. 적은 수의 친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장점이 있지만, 한 번 굳어진 관계의 구도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줄곧 느껴 오던 어려움이었다. 아이들이 더 건강한 관계를 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개입을 해 보지만, 한 반으로 9년을 지내면서 관계는 더 굳어질 뿐이었다. 연령 통합은 고착된 관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볍씨에서의 연령 통합은 앞서 본 것과 같이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 안에 통합을 지향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통합된 배움이라는 아이디어는 우리의 삶이 통합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볍씨에서는 다양한 통합을 이야기한다. 장애 통합, 교과 통합, 연령 통합의 세 가지 주제는 꾸준하게 논의되고 있으며 그 결과가 교육과정에 반영된다. 볍씨에서 지속적으로 통합을 추구하는 이유는 삶과 배움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볍씨 교사들이 교육과정의 전면적 전환을 위해 토론을 하던 중에 1학년부터 9학년까지 모두 통합해서 지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한창 통합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 보자는 마음들이 뭉쳐서 분위기가 달아오르던 참에 전체 학년의 통합을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때를 돌아보면 교사들 사이에 학교의 틀을 최대한 벗어 보자는 욕구가 있었다. 당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연령 통합과 관련된 흐름은 이러했다.


왜 나이에 따라 학년을 나누고 그 친구들은 똑같은 과정을 배워야 하는 거지? 매시간 교사들은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같은 내용을 배워 가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나? 발달의 속도는 모두가 다르다. 개개인의 발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너희들은 같은 수준의 발달을 해야 해’라며 아이들을 구분 지으면 집단에 적용되는 기준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평균의 개념이 생긴다. 평균 이하의 아이는 좌절을 겪는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발달의 수준을 연령에 따라 구분하는 이유는 나누기에 편리하다는 것 말고는 없다. 게다가 그 구분이 성취의 기준을 만들고, 아이들 각자에게 맞지 않는 옷을 강요한다면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그 틀을 깨보자!


이런 이야기들이 9개 학년의 통합으로까지 우리를 이끌었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교육과정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함께 생활하는 연령의 폭을 넓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교육과정 변화의 방향을 틀었다.


연령 통합의 폭을 줄인 이유는 이 시기에 연령에 따른 발달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청소년 또래들이 여럿 뭉쳤을 때와 그 사이에 꼬맹이들이 섞였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차이가 있다. 초등 저학년과 고학년은 즐기는 놀이도 다르다. 볍씨에서는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나눔이 중요한 배움의 통로인데, 청소년의 고민이 1, 2학년 꼬마들에게도 의미 있게 전달되기는 어렵다고 봤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어린 동생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하기에 청소년 과정의 아이들은 너무 컸다. 쉽게 말해 서로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거다.


한편, 연령의 구분이 인위적이라는 점에서 통합의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아이들과 지내면서 교사들은 여전히 연령에 따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접근한다. 예를 들면 내가 지내는 4~5학년 통합 반에서 4학년에게는 5학년에 비해 조금 낮은 수준의 능력을 기대한다. 5학년은 4학년에 비해 더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고, 함께 활동할 때에도 언니 역할을 맡는다. 다른 통합 학년들도 마찬가지로 학년에 따라 중심이 다르다. 5학년에게 주어지는 언니 역할의 수준은 1~3 통합 학년에서 3학년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높다. 그러나 5학년이 4학년의 선배이듯, 3학년은 1, 2학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언니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이른바 역할 기대는 아이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장을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교사들은 아이가 노력하기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나이를 들먹이기도 한다. “내년엔 원석이도 6학년인데, 언니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지?”


다만 학년에 따라 성취해야 할 과업을 다르게 설정했지만, 꼭 그 학년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교사들이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5학년보다 어려운 공부를 척척 해내는 4학년도 있다. 그 친구에게는 따로 수준에 맞는 과제를 내준다. 그래서 때로 교사들은 학년 대신 단계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꼭 그 나이가 됐다고 해서 모두가 해야 할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이마다 자기 속도에 맞춰 발달의 단계를 밟아 나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통합된 생활반에서 아이들이 지내는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관계가 조금 더 넓어지고 편안해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품이 컸다. 어느 곳에나 상처 입은 아이들이 있다. 상처 받은 경험 때문에 매우 방어적이거나 반대로 매우 공격적이다. 이 아이들을 치유하는 데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품는 것이 답이지만 교사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끙끙대며 일 년 내내 씨름을 하던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통합 반으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서로를 감싸 안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상한 아이, 뭔가 뒤처지고 떨어지는 아이라고 보았을 상황도 그냥 그 친구의 특성이라고 받아들여 주었다.


초반에 교사들이 자꾸 통합 반을 만들어 내자 부모님들이 불안해했다. 언니들은 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향평준화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동생들은 언니들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할까 하는 염려를 내비쳤다. 그러나 통합의 목적은 아이의 발달 수준에 집중해서 각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평준화가 아니라 개별화에 가깝다. 언니들의 기에 눌린다는 것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에게는 나이로 가른 집단이 만나는 것으로 보였지만, 아이들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 서로를 만나서 각자의 기운대로 살아냈다. 센 녀석은 세게, 부드러운 녀석은 부드럽게.이제 볍씨의 구성원들은 연령 통합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적어도 처음 시도했을 때만큼 막연하게 느끼거나 긴장과 두려움을 갖고 있지는 않다.

 

 

경계를 넘나들며 배움 : 큰모임

 

볍씨학교 교육과정은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꾼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교육과정에 적용해볼 수 있다는 비인가 대안학교의 장점을 볍씨에서는 적극 활용한다. 교육과정의 지속성이 확보될 수 있느냐는 우려가 섞인 시선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볍씨 교육은 일정한 맥락을 유지하며 다양한 방법을 적용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양한 변화 속에서 지켜온 교육과정의 핵심을 자기 학습 조직력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곧 볍씨 교육의 목표라고 본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배운 지식의 내용은 불과 십수 년 내에 쓸모가 없어진다. 볍씨학교는 9년제인데, 9년간 아이들이 배운 내용이 평생 유효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반학교처럼 바짝 공부해서 써먹을 만한 시험을 준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가르쳐야 할까?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할까?


평생을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울 줄 아는 힘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이고, 그 배움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없다. 볍씨를 졸업한 아이들이 배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 힘이 자기 학습 조직력이다. 아이들에게는 배움이 삶 그 자체이기에 배움의 주도성을 경험한 아이들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주도적인 배움의 경험은 주도적인 삶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주도성을 몸에 익힌다.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울지 결정해서 실행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익혀 나간다. 이것이 자기 학습을 조직하는 과정이고 경험이 쌓이면 언제나, 어디서나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자기의 학습을 조직해 낼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진통을 겪으며 만들어 낸 교육과정이 ‘큰모임’이다. 큰모임에는 4학년부터 8학년까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생활반에는 연령과 성별이 고르게 포함되도록 구성하는 반면, 큰모임은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나의 모임에 인원이 너무 많거나 적으면 충분히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모임의 최대, 최소 인원을 정해 둘 뿐이다. 큰모임은 원칙적으로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기가 원하는 주제를 제안하고 각자 공부하고 싶은 주제로 모여서 한 학기 동안 무엇을 할지 계획을 짠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자발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도성을 ‘하고 있는 일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해석한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필요성을 느껴서 하는 일이라야만 주인 의식을 갖고 덤벼들 수 있다. 이 일이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출발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한 학기 동안 지낼 큰모임을 구성하는 시간이 가장 역동적인 이유는 내가 원하는 주제로 모임이 만들어지느냐 마느냐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해당 학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큰모임의 수는 큰모임을 담당할 수 있는 교사가 몇 명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주제를 큰모임으로 만들 수 없다. 40~50명의 아이들이 내놓은 100여 개의 주제 중에서 큰모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5~6개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살려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열변을 토한다. 어린아이들은 울기도 하고, 선택을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학기가 시작되어 큰모임이 진행되면 자발성만으로는 아이들의 주도성을 꾸준히 담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언제든지 게으를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도 자발성은 여전히 주인 의식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동기다.


자발성 외에 큰모임을 구성한 목적 가운데 특히 연령 통합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관계의 확장이다. 교사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구상하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렸던 말이 ‘확장’이다. 모두 네 가지 영역의 확장을 상상하며 총체적인 배움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관계, 시공간, 방식, 내용 면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어놓은 경계를 넘나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배움이 그 동안 네 가지 경계에 의해 갇혀 있었다고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시간표대로), 정해진 공간에서(교실), 정해진 내용을(교과서), 정해진 방식대로(일 대 다), 정해진 역할(전달하는 교사와 수용하는 학생)에 따라 배우는 과정은 살아가는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다. 배움의 장면이 보다 삶의 모습과 가까울 때 온전한 배움이 일어난다.


보통 교실에 들어서면 교사와 학생은 역할이 분명하게 나뉜다. 교사는 가르칠 내용을 미리 조직해서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학생은 그것을 수용할 때 서로의 역할이 잘 수행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삶에서 일어나는 배움도 그러한가? 실제의 삶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역할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교사와 학생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수행한다. 삶의 무수한 경험에서 뭔가를 배울 때 학생이 되고, 내 경험을 남들과 나눌 때 선생이 된다.


큰모임에서는 아이들에게 작은 교사 역할을 주문할 때는 하나의 목적이 더 추가된다. 남에게 가르칠 때 가장 큰 배움이 일어난다. 배운 내용을 혼자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을 만큼 소화해서 정리하라는 것이다. 자기화라고 부르는 이 과정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배움을 습득한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이 함께 일어나는 것, 교실 안팎의 여러 사람에게 배우고, 또 내가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펼쳐 내는 것이 큰모임을 통해서 바라는 관계의 확장이다.

 

 

삶을 사는 교육과정

 

살아가는 동안 동일한 연령으로 구성된 집단 안에서 지내는 일은 거의 없다. 오직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만 그런 경험을 한다. 삶과 분리된 배움은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삶은 통합적이고 총체적이다. 배움은 삶의 방식대로 일어나야 하며, 그것이 온전한 배움이다. 볍씨에서 고민하는 연령 통합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볍씨에서의 연령 통합은 전면적인 배움을 형성하는 여러 줄기 중 하나이다.


끝으로 꼭 짚어야 할 게 있다. 아무리 통합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을 꾸려도 ‘학교’에서 삶을 전면적으로 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배움은 머리로 아는 것을 자기 몸에 익혀서 생활로 이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생활하는 것을 연습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실천하지 않는다. 결국은 “함께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볍씨의 대답은 바로 제주에 있다.


볍씨학교는 9년 교육의 마침표로 제주살이 1년 과정을 운영한다.(지금 거기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교육과정을 운영한다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기회가 된다면 볍씨학교 제주학사의 한 해 살이를 나누고 싶다. 제주학사의 선생님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말이다. 이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와서 살아보지 않으면 실체를 알 수 없단다.


제주에서 지내는 볍씨 청소년들이 얼마 전에 멋진 말을 했다. 언니들이 우리에게는 교사라고. 성인 교사가 2명에서 1명으로 줄어든 게 아쉽지 않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이자 학생이 되어 주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연령 통합을 시도하며 그렸던 바로 그 상상이 실제로 구현되고 있음을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의 희열이란. 괜히 어깨가 으쓱거리고 어딘가에 우리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마침 지면이 허락되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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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