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나이주의를 넘어
‘병든 청소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필부
노원지역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thrwhldyd@naver.com
청소년일 때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늦게나마 일상을 제쳐 두고 청소년운동에 몰두했고, 일생의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요즘은 일상을 더 이상 마냥 제쳐 두진 못할 것 같아 고민 중입니다.
병리화
차별은 곧잘 대상을 병病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혐오를 생각해 보자.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동성애에 관한 논리를 예로 들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하다’, ‘불결하다’ 같은 단순한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를 하면 잠깐의 쾌락이 있을지 몰라도 계속 고통 받게 된다. 동성애는 질병이다. 우리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동성애를 치료해주려 한다.” 성적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병으로 규정하고 멋대로 개입하려 드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병적인 것으로, 소수자의 특성을 질병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병리화’라고 한다.
청소년들 역시 병리화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 양식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편견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청소년들의 언행이나 문화는 문제가 있고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며 더 나아가 일종의 질병처럼 취급된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뇌는 아직 발달이 덜 되었기에 충동적이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십대 뇌’ 담론은 아예 청소년 자체를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상태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병리화 논리는 의학과 과학의 권위를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나이주의 역시 많은 부분이 의학적 담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병리화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청소년들에 대한 많은 나이주의적 접근들이 ‘중독’이나 ‘중2병’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최근에 청소년들을 병리화하는 것은 단지 일각에서 거론되는 논의를 넘어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문제가 되고 있고, 일상적인 개념으로도 자리 잡아서 학교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나이주의의 한 양상으로서, 중2병 등의 병리화 담론을 돌아보려 한다.
중독은 누구의 기준인가?
청소년과 연관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병리적 개념이면서 실제로 제도적 영향을 미친 사례로 ‘중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13년에는 실제로 국회에서 〈인터넷 게임 중독 치유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이 발의되기도 했고, 청소년 게임 셧다운제를 도입하거나 청소년에 대한 스마트폰 규제 등을 주장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이 중독이라는 단어다. 한편 청소년 게임 규제 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독 대신 과몰입이라는 개념을 쓰자고 제안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병리적 개념 적용 자체가 논쟁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중독addiction이라는 개념 자체는 의학적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 등으로 오래 전부터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에 비해 청소년기의 큰 문제로 다뤄지는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은 비교적 최근에 제시되었으며, 게임 중독이나 스마트폰 중독 등은 아직 제대로 개념이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이것이 실제로 질병인지, 치료가 가능한지 등은 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문제겠지만, 청소년의 문화를 병리화하는 데 중독 개념이 섣불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에서는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이 대중화되어 있고, PC방 문화가 극도로 발달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은 경제력이 부족하고 여러 활동에 법적인 제약이 따를 뿐 아니라, 놀 만한 공간이나 지원이 부족하여 밖에서 놀기에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 및 게임의 접근성과 비용 대비 만족도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대부분의 청소년은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과 질 낮고 나이차별적인 노동 환경으로 인해 장시간의 공부나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의 여가나 놀이에 대한 적대적인 압력이 존재하며, 현재 청소년의 여가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터넷과 게임이 표적이 된다. 게임 중독 등의 담론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기준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다음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운영하는 스마트쉼센터에서 제공하는 청소년 대상 온라인 게임 중독 진단의 내용이다.
1. 게임을 하는 것이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더 좋다.
2. 게임 공간에서의 생활이 실제 생활보다 더 좋다.
3. 게임 속의 내가 실제의 나보다 더 좋다.
4. 게임에서 사귄 친구들이 실제 친구들보다 나를 더 알아준다.
5. 게임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더 편하고 자신 있다.
6.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7. 게임을 하느라 해야 할 일을 못한다.
8. 갈수록 게임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9. 점점 더 오랜 시간 게임을 해야 만족하게 된다.
10. 게임을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에도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 어렵다.
11. 게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12. 게임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도 다시 게임을 하게 된다.
13. 게임 생각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다.
14. 게임을 못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15.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게임 생각을 하게 된다.
16. 게임으로 인해 생활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게임을 해야 한다.
17. 게임을 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18. 다른 일 때문에 게임을 못하게 될까봐 걱정된다.
19. 누가 게임을 못하게 하면 신경질이 난다.
20. 게임을 못하게 되면 화가 난다.
항목을 살펴보면, 기존 중독 이론에서 다루는 중독 증상(의존성, 내성) 확인을 제외하면 공부나 “실제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하는 항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1, 4, 5번 항목은 게임 외의 생활에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항목들이다. 7, 10, 13번 항목은 공부 등 해야 할 일에 지장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항목들이다. 즉,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➊
➊ 보통 이런 자가 진단은 실제 의료에서 처음에 간단하게 진행하고 참고용 정도로만 쓰일 뿐이며, 자가 진단이 가지는 정확성이나 중요성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자가 진단의 내용을 분석한다고 해서 중독 이론의 정확한 관점을 확인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자가 진단이 대중적으로 유통·홍보되기 가장 쉬운 형식인 만큼, 자가 진단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가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정상적인 삶’은 무엇인가?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애초에 요구받는 정상성 자체가 비인간적인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면, 수많은 자연스러운 행동들이 비정상으로 중독으로 질병으로 몰아 붙여진다. 예컨대 평일 내내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다가 주말에 몇 시간 게임을 하는 것조차 게임 중독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중독 개념의 남용 뒤에는 공부하지 않고 게임을 하는 것, ‘어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갖는 것을 건강하지 않고 잘못된 것이라고 이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여기저기 떠도는 중2병
게임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이 기존의 중독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최근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중2병’에는 그런 기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중2병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서브 컬쳐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는 본래, 중학교 2학년 즈음에는 자의식이 강해지거나 자신만의 취향을 탐색하면서, 나중에 생각해 보면 좀 부끄러워지는 생각을 갖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한 적이 다들 있지 않느냐고 하는, 라디오 공감 사연 주제로 소비되던 말이었다.
예컨대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거나, 인디밴드나 영어 팝송을 듣는 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거나. 하지만 이것이 한국에 넘어오고 언론 등에 소개되면서는 예전보다 더욱 심한 공격성과 반항성, 과시욕을 보이는 ‘극심한 사춘기’ 같은 것으로 뜻이 변형되었다.
중2병에 대해 언급하는 언론사 기사들을 조사해 본 결과, 중2병이라는 단어가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즈음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갑자기 중2병이라는 말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8년 동안 작성된 기사들이 중점적으로 다룬 주제는 조금씩 달랐어도 방향과 대상은 모두 대동소이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중2병’이라는 신종 심리 증상을 소개하고는, 열심히 중2의 신체와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원인을 짚은 다음, 전문가들의 조언을 곁들여서, 고민에 차 있는 학부모들을 위한 기사를 내놓았다. 부모들은 기사 하나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도움이 되는 처방을 받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중2병은 마치 실재하는 병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과연 중2병은 병인가? 좀 더 정확한 진단과 명확한 처방을 기다리면 부모의 고민은 해결되는 것인가? 부모의 고민이 해결되면 그걸로 괜찮은 건가?
중2병 담론은 거의 장소와 분야를 막론하고 여기저기에서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여러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나 사회를 비판하거나 반항적인 의견을 남기면 ‘중2병이냐?’라는 조롱이 돌아오곤 한다. 학교에서도 ‘중2가 무섭다’ 같은 이야기를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며,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까다롭다고 교사들이 담임을 기피한다는 기사들이 난다. 심지어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는 ‘응답하라 중2병’이라는 이름의 강좌를 연달아서 열면서 중2병 의심 청소년 중 일부는 ADHD일 수 있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2병이란 말이 널리 퍼지고 마치 실재하는 병처럼 취급될수록 중학생들의 학교 부적응이나 저항 등은 학교 규율이나 교육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학생들의 ‘병’ 때문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 하필 ‘병에 걸렸다’고 할까?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을 병리화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로 중독과 중2병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을 병적인 것, 병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이런 개념을 사용하면, 사회 구조의 문제는 외면하고 병에 걸린 개인이나 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지목된 일부 물질이나 문화적 요소의 책임인 것처럼 만들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충분한 여가 시간과 시설을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는 가려지고, 게임과 인터넷, 스마트폰 등이 문제로 지목되고 미성숙하고 충동적인 청소년들이 그런 것들에 쉽게 중독되어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학교나 학제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진 않은가 고민할 필요 없이, “중2병이라서 그러는 것 같다”라는 한마디면 많은 문제가 설명된다. 즉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치유와 관리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병리화를 통해 청소년의 문화나 언행을 병적인 것으로 낙인찍음으로써 평가절하하고 억누름과 동시에 청소년을 구제‧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마치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자신들의 차별이나 폭력을 ‘동성애자들을 치료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는 자신들의 폭력성이나 통제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감을 가리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청소년의 문화를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많은 경우 청소년이 누리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해 주겠다고 설명하게 되면, 도덕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많은 규제나 통제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병리화를 통해서 청소년은 ‘보호 대상’에서 나아가 ‘치료 대상’으로 더욱 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의 위치에 서게 된다. 병이 든 청소년 본인이 스스로의 상태를 판단하고 개선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며, 어른, 특히 의사나 교사나 국가 등 전문가의 ‘적절한 개입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다. 보호주의와 병리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어차피 청소년이 스스로에 대해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청소년 당사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해도 별로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청소년의 삶은 왜 병리화될 수 있었을까?
청소년에 대한 병리화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청소년이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할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게임 중독 논리와 게임 규제 시도는 많은 반발에 부딪혔지만, 이는 게임 산업의 이해관계나 나이를 막론하고 널리 즐기는 게임이라는 놀이 양식의 특성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 실제 보호나 치료의 대상으로 거론된 청소년들은 인터넷 일각 말고는 거의 힘을 쓸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건전한 전자기기 사용 문화’ 운운하며 전자기기 사용을 대폭 규제하더라도 학생들의 반발은 거의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 중 상당수를 환자나 비정상적 존재로 만드는 논의가 진행되는데도, 거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제대로 끼어들 수도 없다. 여기에는 나이에 따른 권력의 차이가 크게 개입한다. 이 사회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이 더욱 공신력을 가진다. 청소년의 말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가볍게 여겨진다. 애초에 병리화 현상은, 권위를 가진 전문가에 의해 소수자들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청소년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청소년의 문화나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낯설게 여기는 기성세대의 반감과 편견이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나이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특정 연령대의 성인이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청소년이나 노인은 비정상이거나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나이주의 속에서 병리화 현상이 일어난다. 가령 청소년들이 욕설을 너무 많이 하거나 은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서적 심리적 질병 때문이라는 식이다. 청소년의 문화와 행동 양식은 나이주의에 의해 병리화되면서 더욱더 왜곡되는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어린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다”라고 했다. 청소년은 이 사회에서 타자의 위치에 서기 쉽고, 요즘이 아니더라도 청소년의 삶의 맥락을 무시한 채 어른의 기준과 관점으로 판단해 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말의 외피를 두르고 더 그럴듯하고도 전문적인 억압의 논리로 진화해 가고 있다. 좀 더 게임을 하고 싶은 청소년, 좀 더 인터넷을 하고 싶은 청소년, 좀 더 자율적으로 살고 싶은 청소년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갑갑한 현실에 발버둥을 치는 청소년들은 무서운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각종 ‘병’을 갖다 붙이는 사회에서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특집/ 나이주의를 넘어
‘병든 청소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필부
노원지역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thrwhldyd@naver.com
청소년일 때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늦게나마 일상을 제쳐 두고 청소년운동에 몰두했고, 일생의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요즘은 일상을 더 이상 마냥 제쳐 두진 못할 것 같아 고민 중입니다.
병리화
차별은 곧잘 대상을 병病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혐오를 생각해 보자.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동성애에 관한 논리를 예로 들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하다’, ‘불결하다’ 같은 단순한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를 하면 잠깐의 쾌락이 있을지 몰라도 계속 고통 받게 된다. 동성애는 질병이다. 우리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동성애를 치료해주려 한다.” 성적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병으로 규정하고 멋대로 개입하려 드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병적인 것으로, 소수자의 특성을 질병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병리화’라고 한다.
청소년들 역시 병리화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 양식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편견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청소년들의 언행이나 문화는 문제가 있고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며 더 나아가 일종의 질병처럼 취급된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뇌는 아직 발달이 덜 되었기에 충동적이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십대 뇌’ 담론은 아예 청소년 자체를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상태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병리화 논리는 의학과 과학의 권위를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나이주의 역시 많은 부분이 의학적 담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병리화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청소년들에 대한 많은 나이주의적 접근들이 ‘중독’이나 ‘중2병’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최근에 청소년들을 병리화하는 것은 단지 일각에서 거론되는 논의를 넘어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문제가 되고 있고, 일상적인 개념으로도 자리 잡아서 학교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나이주의의 한 양상으로서, 중2병 등의 병리화 담론을 돌아보려 한다.
중독은 누구의 기준인가?
청소년과 연관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병리적 개념이면서 실제로 제도적 영향을 미친 사례로 ‘중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13년에는 실제로 국회에서 〈인터넷 게임 중독 치유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이 발의되기도 했고, 청소년 게임 셧다운제를 도입하거나 청소년에 대한 스마트폰 규제 등을 주장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이 중독이라는 단어다. 한편 청소년 게임 규제 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독 대신 과몰입이라는 개념을 쓰자고 제안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병리적 개념 적용 자체가 논쟁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중독addiction이라는 개념 자체는 의학적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 등으로 오래 전부터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에 비해 청소년기의 큰 문제로 다뤄지는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은 비교적 최근에 제시되었으며, 게임 중독이나 스마트폰 중독 등은 아직 제대로 개념이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이것이 실제로 질병인지, 치료가 가능한지 등은 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문제겠지만, 청소년의 문화를 병리화하는 데 중독 개념이 섣불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에서는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이 대중화되어 있고, PC방 문화가 극도로 발달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은 경제력이 부족하고 여러 활동에 법적인 제약이 따를 뿐 아니라, 놀 만한 공간이나 지원이 부족하여 밖에서 놀기에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 및 게임의 접근성과 비용 대비 만족도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대부분의 청소년은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과 질 낮고 나이차별적인 노동 환경으로 인해 장시간의 공부나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의 여가나 놀이에 대한 적대적인 압력이 존재하며, 현재 청소년의 여가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터넷과 게임이 표적이 된다. 게임 중독 등의 담론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기준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다음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운영하는 스마트쉼센터에서 제공하는 청소년 대상 온라인 게임 중독 진단의 내용이다.
1. 게임을 하는 것이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더 좋다.
2. 게임 공간에서의 생활이 실제 생활보다 더 좋다.
3. 게임 속의 내가 실제의 나보다 더 좋다.
4. 게임에서 사귄 친구들이 실제 친구들보다 나를 더 알아준다.
5. 게임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더 편하고 자신 있다.
6.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7. 게임을 하느라 해야 할 일을 못한다.
8. 갈수록 게임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9. 점점 더 오랜 시간 게임을 해야 만족하게 된다.
10. 게임을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에도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 어렵다.
11. 게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12. 게임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도 다시 게임을 하게 된다.
13. 게임 생각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다.
14. 게임을 못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15.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게임 생각을 하게 된다.
16. 게임으로 인해 생활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게임을 해야 한다.
17. 게임을 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18. 다른 일 때문에 게임을 못하게 될까봐 걱정된다.
19. 누가 게임을 못하게 하면 신경질이 난다.
20. 게임을 못하게 되면 화가 난다.
항목을 살펴보면, 기존 중독 이론에서 다루는 중독 증상(의존성, 내성) 확인을 제외하면 공부나 “실제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하는 항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1, 4, 5번 항목은 게임 외의 생활에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항목들이다. 7, 10, 13번 항목은 공부 등 해야 할 일에 지장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항목들이다. 즉,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➊
➊ 보통 이런 자가 진단은 실제 의료에서 처음에 간단하게 진행하고 참고용 정도로만 쓰일 뿐이며, 자가 진단이 가지는 정확성이나 중요성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자가 진단의 내용을 분석한다고 해서 중독 이론의 정확한 관점을 확인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자가 진단이 대중적으로 유통·홍보되기 가장 쉬운 형식인 만큼, 자가 진단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가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정상적인 삶’은 무엇인가?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애초에 요구받는 정상성 자체가 비인간적인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면, 수많은 자연스러운 행동들이 비정상으로 중독으로 질병으로 몰아 붙여진다. 예컨대 평일 내내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다가 주말에 몇 시간 게임을 하는 것조차 게임 중독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중독 개념의 남용 뒤에는 공부하지 않고 게임을 하는 것, ‘어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갖는 것을 건강하지 않고 잘못된 것이라고 이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여기저기 떠도는 중2병
게임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이 기존의 중독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최근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중2병’에는 그런 기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중2병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서브 컬쳐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는 본래, 중학교 2학년 즈음에는 자의식이 강해지거나 자신만의 취향을 탐색하면서, 나중에 생각해 보면 좀 부끄러워지는 생각을 갖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한 적이 다들 있지 않느냐고 하는, 라디오 공감 사연 주제로 소비되던 말이었다.
예컨대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거나, 인디밴드나 영어 팝송을 듣는 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거나. 하지만 이것이 한국에 넘어오고 언론 등에 소개되면서는 예전보다 더욱 심한 공격성과 반항성, 과시욕을 보이는 ‘극심한 사춘기’ 같은 것으로 뜻이 변형되었다.
중2병에 대해 언급하는 언론사 기사들을 조사해 본 결과, 중2병이라는 단어가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즈음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갑자기 중2병이라는 말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8년 동안 작성된 기사들이 중점적으로 다룬 주제는 조금씩 달랐어도 방향과 대상은 모두 대동소이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중2병’이라는 신종 심리 증상을 소개하고는, 열심히 중2의 신체와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원인을 짚은 다음, 전문가들의 조언을 곁들여서, 고민에 차 있는 학부모들을 위한 기사를 내놓았다. 부모들은 기사 하나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도움이 되는 처방을 받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중2병은 마치 실재하는 병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과연 중2병은 병인가? 좀 더 정확한 진단과 명확한 처방을 기다리면 부모의 고민은 해결되는 것인가? 부모의 고민이 해결되면 그걸로 괜찮은 건가?
중2병 담론은 거의 장소와 분야를 막론하고 여기저기에서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여러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나 사회를 비판하거나 반항적인 의견을 남기면 ‘중2병이냐?’라는 조롱이 돌아오곤 한다. 학교에서도 ‘중2가 무섭다’ 같은 이야기를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며,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까다롭다고 교사들이 담임을 기피한다는 기사들이 난다. 심지어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는 ‘응답하라 중2병’이라는 이름의 강좌를 연달아서 열면서 중2병 의심 청소년 중 일부는 ADHD일 수 있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2병이란 말이 널리 퍼지고 마치 실재하는 병처럼 취급될수록 중학생들의 학교 부적응이나 저항 등은 학교 규율이나 교육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학생들의 ‘병’ 때문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 하필 ‘병에 걸렸다’고 할까?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을 병리화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로 중독과 중2병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청소년의 문화나 행동을 병적인 것, 병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이런 개념을 사용하면, 사회 구조의 문제는 외면하고 병에 걸린 개인이나 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지목된 일부 물질이나 문화적 요소의 책임인 것처럼 만들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충분한 여가 시간과 시설을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는 가려지고, 게임과 인터넷, 스마트폰 등이 문제로 지목되고 미성숙하고 충동적인 청소년들이 그런 것들에 쉽게 중독되어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학교나 학제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진 않은가 고민할 필요 없이, “중2병이라서 그러는 것 같다”라는 한마디면 많은 문제가 설명된다. 즉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치유와 관리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병리화를 통해 청소년의 문화나 언행을 병적인 것으로 낙인찍음으로써 평가절하하고 억누름과 동시에 청소년을 구제‧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마치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자신들의 차별이나 폭력을 ‘동성애자들을 치료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는 자신들의 폭력성이나 통제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감을 가리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청소년의 문화를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많은 경우 청소년이 누리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해 주겠다고 설명하게 되면, 도덕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많은 규제나 통제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병리화를 통해서 청소년은 ‘보호 대상’에서 나아가 ‘치료 대상’으로 더욱 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의 위치에 서게 된다. 병이 든 청소년 본인이 스스로의 상태를 판단하고 개선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며, 어른, 특히 의사나 교사나 국가 등 전문가의 ‘적절한 개입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다. 보호주의와 병리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어차피 청소년이 스스로에 대해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청소년 당사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해도 별로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청소년의 삶은 왜 병리화될 수 있었을까?
청소년에 대한 병리화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청소년이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할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게임 중독 논리와 게임 규제 시도는 많은 반발에 부딪혔지만, 이는 게임 산업의 이해관계나 나이를 막론하고 널리 즐기는 게임이라는 놀이 양식의 특성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 실제 보호나 치료의 대상으로 거론된 청소년들은 인터넷 일각 말고는 거의 힘을 쓸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건전한 전자기기 사용 문화’ 운운하며 전자기기 사용을 대폭 규제하더라도 학생들의 반발은 거의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 중 상당수를 환자나 비정상적 존재로 만드는 논의가 진행되는데도, 거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은 제대로 끼어들 수도 없다. 여기에는 나이에 따른 권력의 차이가 크게 개입한다. 이 사회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이 더욱 공신력을 가진다. 청소년의 말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가볍게 여겨진다. 애초에 병리화 현상은, 권위를 가진 전문가에 의해 소수자들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청소년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청소년의 문화나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낯설게 여기는 기성세대의 반감과 편견이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나이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특정 연령대의 성인이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청소년이나 노인은 비정상이거나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나이주의 속에서 병리화 현상이 일어난다. 가령 청소년들이 욕설을 너무 많이 하거나 은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서적 심리적 질병 때문이라는 식이다. 청소년의 문화와 행동 양식은 나이주의에 의해 병리화되면서 더욱더 왜곡되는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어린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다”라고 했다. 청소년은 이 사회에서 타자의 위치에 서기 쉽고, 요즘이 아니더라도 청소년의 삶의 맥락을 무시한 채 어른의 기준과 관점으로 판단해 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말의 외피를 두르고 더 그럴듯하고도 전문적인 억압의 논리로 진화해 가고 있다. 좀 더 게임을 하고 싶은 청소년, 좀 더 인터넷을 하고 싶은 청소년, 좀 더 자율적으로 살고 싶은 청소년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갑갑한 현실에 발버둥을 치는 청소년들은 무서운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각종 ‘병’을 갖다 붙이는 사회에서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