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교육이 직면해야 할 과제
에코포비아를 넘어
기후 시민 교육으로
- 기후 돌봄의 주체로 세우는 ‘에코페다고지’를 상상하다
조진희
cham1003@hanmail.net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서울하늘숲초 교사
2024년 봄과 가을은 너무 짧았고 여름은 매우 습하고 뜨거웠으며 게다가 길었다. 11월에 역대급 큰 눈이 왔지만, 해가 바뀌고 1월 현재까지는 예년 기온보다 높은 편이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살기 좋은 온난한 기후라고 했지만, “여름은 뜨겁고 습하며 봄과 가을은 스쳐 지나가는 기후”가 어린이·청소년에게는 기본값이 되었다.
시·도교육청 또한 생태전환교육[ref]생태전환교육은 “기후 위기 비상 시대,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개인의 생각과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 및 시스템까지 총체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교육”이다.(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기본 계획〉, 2024년 2월)[/ref]을 강조하며, ‘기후행동 365 학생단’을 구성하고 ‘에코마일리지와 탄소 발자국’을 실천하며,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과의 연계를 강조한다. 교육농협동조합 10여 년의 실천을 통해서 농업을 통한 생태적 시민성 함양을 실천해 온 나로서는 이런 교육청의 지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학교와 교육청에서 요청한 강의를 할 때마다 이제 “생태전환교육, 기후 위기 교육은 주류화되었다”며 교사들에게 은근히 종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전교조 서울지부 참교육실천한마당에서 ‘환경에 책임이 생겨 버린 고등학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듣고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과학에 관심을 갖고 밀양 할머니들의 원전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환경 문제를 공부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그 학생은, 또래 친구들의 마음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환경 위기의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다는 생각도 꽤 많이 해 봤습니다. 저도 친구들도 미래에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사고 싶은 것투성이인데, 살기 위해서는 이제 그만 구매해야 하는 현실이 짜증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2022년 폭우로 학교가 무너지고 친구의 집이 잠기고, 반지하에 사는 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내가 살아갈 미래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라고 토로하였다.
불안하고 위험한 기후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대량 생산·소비·폐기라는 이전의 삶을 버리고 환경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금욕적인 생활 양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자각했다’는 것이다. 생태전환교육, 기후 위기 대응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학생상을 본 듯한 착각도 잠시, ‘우리 세대가 지금 뭘 어떻게 한 것이지?’ 하고 ‘현타’가 왔다.
다행히 이 학생은 환경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페인에 나가고 기후 행진도 참여하지만, 간혹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편과 금욕을 감수해야 하는 ‘억울함과 짜증’을 안고 기후 위기고 나발이고 그냥 이렇게 계속 살겠다는 학생들도 만나게 된다. 한편 하도 들어서 ‘기후 위기’의 ‘ㄱ’ 자도 듣고 싶지 않다, 기성세대들이 망친 지구를 왜 우리가 되살려야 하느냐는 불만도 교실에는 공존한다.[ref]프랑스의 여론 조사 업체 오피니언웨이에 따르면 18~35세 프랑스 성인 4명 중 1명은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믿지 않는 것부터, 내 탓이 아니라 부자들 탓이며, 과학 기술의 혁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미리앙 다망 외, 정미애 옮김(2023), 《기후 변화를 둘러싼 가짜 뉴스 10가지》, 두레아이들)[/ref] 어떤 학생들은 지금 지구가 일촉즉발의 위기인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고기를 즐기고 새벽 배송을 주문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당장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10여 년 동안 학교 텃밭·텃논을 공유지 삼아 기후 시민을 기르기 위해 달려왔지만, 어린이·청소년들의 입장을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이 밀려왔다. 도시농부 선생님, 실과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 “A4 한 장짜리 케이지에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나오는 닭을 위해 치킨 좀 적게 먹을 수 있죠?”, “열대 우림에 사는 오랑우탄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팜유로 만든 과자 말고 건강 간식은 어때요?”, “우리가 버린 옷이 아프리카 가나를 옷 쓰레기로 뒤덮고 있으니 꼭 필요한지 따져 보고 사면 어떨까요?”라면서 “나는 많이 살았지만 여러분이 생존할 지구별을 위해서”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시간들이 “너희, 참 안됐구나” 하는 뉘앙스로 다가간 것은 아닐까 회한도 밀려왔다.
내가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학생 지향(학습자 이익 지향)”의 원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교화하고 주입하고 종용해서 마침내 “에코포비아[ref]‘에코포비아(ecophobia)’는 환경 문제나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의미한다. 캐나다 밴쿠버 교육청은 환경 ‘재해(disasters)’를 어린이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과의 관계를 단념시킬 수 있으며, ‘에코포비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교육정책네트워크, “캐나다의 지속가능발전교육 현황”, 〈해외교육동향〉, 2023년 2월 8일)[/ref]”가 되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조차 엄습했다. 이 글은 나와 같이 기후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해 왔던 교육자들에게 엄습한 안일함, 반성, 회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해방시켜 보고자 하는 초보적인 생각이다.
기후 위기를 믿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기후 불평등에 관한 학자나 연구자들은 현실화되고 있는 기후 재난을 계급, 젠더, 인종, 장애, 지역 등의 교차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할수록, 비백인일수록, 비남성일수록, 장애인일수록, 남반구에 거주할수록 기후 재난에 큰 영향을 받으며 취약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기후 변화 전문가 조지 마셜은 “세상에는 기후 변화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누구를 신뢰하는지,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서 ‘호모 크레덴스(homo credens, 확신하는 사람들)’와 ‘호모 네가토르(homo negator,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분했다.[ref]조지 마셜, 이은경 옮김(2018), 《기후변화의 심리학》, 갈마바람, 42~43쪽[/ref] 전자는 “대학교육을 받았고 진보적 성향을 띤 중년의 민주당 지지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성들은 기후 변화를 믿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는 여성들이 건강과 안전, 재정, 윤리에 대한 위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 관찰 결과와도 일치한다”고 하였다. 후자는 “거의 예외 없이 보수적 성향이 매우 강하며(그렇지 않은 이는 극소수이다) 비교적 부유하고 유력한 사회 집단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다른 영역에서도 위험을 인식하는 수준이 대체로 낮다. 이들은 위험 연구자에게 친숙한 집단이다. 이 집단에 속한 남성들은 사회 조사를 심각하게 왜곡할 위험이 있으며, 위험 연구자들은 그런 위험을 일컬어 ‘백인 남성 효과(white man effect)’라고 부른다”고 서술한다.
요컨대 조지 마셜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기후 변화가 유발하는 불안과 그것이 요구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피하고 싶기 때문”[ref]조지 마셜(2018), 앞의 책, 326쪽.[/ref]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변화’는 앞서 말한 고등학생의 표현대로 “(책임감이 생겨 버려) 살기 위해서는 이제 뭘 그만 구매해야 하는 짜증 나는 현실”인 것이다.
정상성 편향과 기후 우울증
세대 관점에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면, 10년도 살지 않은 어린이가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기후 악당들이 배출한 탄소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정의’다. 그런 점에서 ‘아기기후소송’은 이 세대들이 “우리가 온전히 살 수 있도록 국가는 법과 제도를 구축하라”는 호소이다. 그래서 기후 시민 교육은 선세대가 기후 악당임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책임의 짐을 지우기보다 기성세대들이 책임지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송희일 감독도 기후 위기의 심리학에 대해 “기후 위기를 둘러싼 인류의 심리적 지도는 지리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경계들에 따라 다른 풍경으로 형상화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공포와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회피하는 심리적 패턴으로 ‘정상성 편향’[ref]‘정상성 편향(normalcy bias)’은 ‘그런 재난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생존심리학을 연구하는 존 리치에 의하면, 재앙에 맞닥뜨렸을 때 70%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15%의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며, 나머지 15% 사람들만이 미리 재난을 대비한다고 하였다.(이송희일(2024),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삼인, 61쪽)[/ref]이 나타나며, 장기적 걱정보다 단기적 걱정을 더 우려하는 ‘인지 편향’이 배양된다고 하였다. 즉 지구 종말보다 당장 월말이 발등의 불인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죽은 후에 대홍수가 나든 세상이 망하든,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당장의 ‘먹고사니즘’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각자도생 시대에는 불안과 공포에 의한 기후 우울증과 더불어 개인 책임에 대한 과중한 무게와 개인적 실천의 무력감도 기후 우울증을 부추긴다고 하였다. 즉 85%의 사람들은 재난을 대비하고 대응하면서 불의에 맞서 ‘저항’하기보다, 현실에 압도당해서 외면하고 무기력해져 ‘얼음’이 되거나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지 편향을 단단히 하며 ‘믿지 않는 호모 네가토르’가 되어, 큰 변화 없이 평소의 생활 양식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구조에 대한 통찰, 기후 시민의 출발점
기후 우울증과 정상성 편향의 심리를 교육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이송희일은 개인의 양심과 책임에 호소하는 프로파간다는 ‘부자들의 환경주의’임을 직시하고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호명되어 스스로 주체화하여 시선을 들어 다른 이의 눈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 채식 실천은 착한 소비에 머무르게 되지만 시민적인 채식 실천은 먹거리의 자급화와 농촌의 재지역화까지 사유하게 만든다”고 한다. “개인의 책임화는 외롭고 우울하게 하는 반면, 체제의 책임화는 자연과 남반구를 착취하는 대가로 영위하는 제국적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풍경을 스케치할 가능성을 제공한다”[ref]이송희일(2024), 앞의 책, 113쪽. ‘제국적 생활 양식’ 개념이 초등학생에게는 다소 어려워 나는 ‘1.5℃ 라이프 스타일’(지구 온난화를 1.5℃ 넘지 않게 유지하는 생활 양식)이라는 대체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개념이건 학생들에게 교육할 때는 대량 생산, 소비, 폐기의 반생태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실천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개념이면 될 것이다.[/ref]는 것이다.
개인에서 시민으로, 내 책임에서 체제 책임으로의 변화는 어린이·청소년 기후 시민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한 번 입고 버릴 옷을 소비한 나의 책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도 모르게 패스트 패션 의류를 소비하게 만드는 인스타그램 뒤의 현실 사회를 보는 것이다. 장시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지구 건너편 어린 노동자들의 값싼 임금으로 만든 20달러짜리 SPA 브랜드 청바지가 윤리적인가 토론해 보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지는 물류를 실어 나르는 택배 노동자들 덕분에 오늘 모임의 드레스 코드를 맞출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종일 농장에서 유해한 농약을 뒤집어쓰면서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목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한겨울에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가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패딩에는 산 채로 털이 뽑히고, 그러다가 까무러치며 생명을 잃은 오리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가나에 버려진 옷이 사막의 모래를 파고들고 땅과 지하수,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 지구를 떠돌다가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내 식탁으로 귀환하는 순환을 인식하는 것이다.
비인간 광물·생물로부터 시작하여 내 옷장으로 오기까지 단계 단계마다 소외된 노동이 있고, 옷을 만들고 팔아 이윤을 챙기려는 ‘제국적 생활 양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보게 하는 통찰을 주는 교육은 ‘책임에 어깨가 무거워 짜증 나는 개인’에서 ‘체제에 저항하는 시민’으로 어린이·청소년을 주체화하는 출발선이 된다.
비인간 존재와 친족 만들기, 난잡하게 돌보기
에코포비아로 이어지지 않는 교육을 위해서 데이비드 소벨은 “아이들이 잘 자라나길 원한다면, 지구를 구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자연과 연결되고 지구를 사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왜 그들을 구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밴쿠버교육청은 그 예로 체험 학습을 통한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감사를 기초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캐나다 원주민의 전통, 문화, 지식에 연결되는 것을 예로 들었다.[ref]교육정책네트워크, “캐나다의 지속가능발전교육 현황”, 〈해외교육동향〉, 2023년 2월 8일.[/ref] 학생들이 집-학교-학원의 삼각지대를 오가며 휴대전화로 보는 쇼츠에 잠시 한숨 돌리는 인생에서 벗어나 ‘지구 타자들을 직접 만나고 접하여 그들의 삶을 느끼는’ 진정한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비인간 존재[ref]비인간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 맺기에 대한 사유는 신유물론에 의지하고 있다. 신유물론은 인류세 담론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지금까지 불활성 물질로 간주되었던 비인간 존재의 행위 능력을 구성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으로 신유물론의 선구적 역할을 한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성이 생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이원론적 존재론(비인간/인간 = 객체/주체 = 자연/사회)에서 찾는다. 즉 비인간, 물질은 기존의 유물론처럼 ‘주체’의 대립항으로서 행위성이 없는 ‘객체’가 아니라 행위성 있는 ‘사물’이다. 그는 “지구는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얽혀 공생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또는 어셈블리지)”로 본다. 그리고 근대주의가 무시 또는 부정해 온 비인간들의 행위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제도화하는 공동 세계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김환석, 〈신유물론으로서의 브뤼노 라투르 사상〉, 몸문화연구소(2022), 《신유물론 : 몸과 물질의 행위성》, 필로소픽, 20~50쪽)[/ref]를 인간과 분리하고 마음껏 이용하고 이윤을 창출해도 된다고 생각해 온 서구 근대 자연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자연, 남성/여성, 이성애/퀴어, 이성/감성, 서구/비서구, 문명/비문명 등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철학적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 기후 위기로 인해 삶 또는 자기실현이 어려워진 비인간 약자들이 무너진다면 인간도 기후 재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에 연결된다”는 것은 기후 재난으로 인해 취약해진 인간/비인간 존재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돌봄 선언》의 저자 더 케어 컬렉티브는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을 제안한다. 난잡한 돌봄이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을 의미하며 돌봄 대상을 친밀감 기준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2020년 여름 52일 동안의 장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붕 위에 올라가 울부짖는 소들도 구조해야 할 친족으로 만들었다.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생명애(biophilia)를 재호출해서 생물 친족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생물 전체를 확장된 친족으로 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안녕이 비인간 생물과 맺는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 살아가기》의 저자 도나 해러웨이도 생물 전체(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심지어 기계까지), 즉 인간과 비인간 존재 전체를 ‘친족’의 대상으로 삼자며 인간들만의 친족 개념을 허물어뜨린다.[ref]우석영, 〈인류세의 비인간 돌봄〉, 신지혜 외(2024), 《기후 돌봄》, 산현글방, 129~131쪽.[/ref]
“인간을 생태적 존재로, 비인간을 윤리적 존재로 (재)위치”시키는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용어를 만든 호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플럼우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 타자들을 ‘관계적 자아’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서로의 신체를 먹고 먹히면서 몸성으로 얽힌 존재이고, 공기와 물,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서로의 신체를 횡단하며 관계를 맺어 가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비인간 지구 타자들은 행위자성, 소통 능력, 의도성을 가지고 서로의 삶을 공동 구성하고 공동 생산하는 반려자라고 주장한다.[ref]그레타 가드, 김현미 외 옮김(2024),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창비, 11쪽.[/ref]
어머니에서 연인 지구로의 메타포 전환
기후 재난 때문에 사고 싶은 것도 못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가고 싶은 곳도 못 가면서 짜증 나고 불안하며 우울한 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억울한 세대. 그 세대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인간-비인간 지구 타자들은 서로 먹고 먹히며 관계를 맺어 가는 반려자라는 인식론의 전환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불쌍한 북극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비인간 존재로 친족 개념을 확장하고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며 비인간과 물질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일 뿐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은 버려야 할 낡은 세계관이다.
여기에 에코페다고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에코페다고지는 에코페미니즘과의 교류를 필요로 한다.[ref]대표적인 에코페미니스트이자 과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시각에서는 재생력의 터전으로서 종자와 여성의 육체가 최후의 식민지가 되는 셈이다. 자연, 여성, 유색인들은 다만 ‘원료’를 제공할 뿐이다. 여성과 자연의 공헌에 대한 평가절하는 식민 행위에 개발과 진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맞물려 행해진다”면서 자연, 여성, 비백인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다.(마리아 미즈·반다나 시바, 손덕수·이난아 옮김(2020), 《에코페미니즘》, 창비, 85쪽) 에코페미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인 마리아 미즈도 “이 식민 구조의 경제적 근거는 결국 이러한 분리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공간, 시간 지평 바깥으로 비용이 전가되는 것 - 비용의 외부화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가정주부화되어 GNP 계산에 빠지는 여성들은 이 체제의 ‘내부 식민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마리아 미즈·반다나 시바(2020), 앞의 책, 131~132쪽)[/ref] 제국주의적 생활 양식으로 기후 재난을 가져온 헤게모니적 반생태적 남성성으로 표상되는 특권화된 북반구 백인 남성의 눈으로 지구와 관계 맺지 않는 ‘대안적인 생태적인 남성성’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종말보다 월말이 급한 취약한 저임금 노동자들은 지구의 반려자,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될 수 없다. 앞선 에코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어머니 지구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기후 위기의 원인임을 증언했다면, 최근의 비판적인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에코남성성’의 재구성과 해체에 더욱 주목한다. 합리성, 환원주의, 권력과 통제, 자만심, 이기심, 경쟁심, 정력 등과 같은 지배적인 남성적 가치를 ‘돌봄의 윤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예 헤게모니적 남성성 구성의 핵심인 이성애주의 자체를 통찰하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이다. 그리고 지구를 여성인 어머니로 묘사하며 젠더화하는 이전의 에코페미니즘은 유럽 중심의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영속화하는 것이며, 오히려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 남성/여성 이원론을 재현하다는 비판이다. 99%의 덜 지배적인 남성과 여성, 아이, 동물과 환경을 희생시켜서 1% 엘리트 남성들만이 성공하는 기후 부정의 정치를 생명 정치로 바꾸기 위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f]그레타 가드(2024), 앞의 책, 320~327쪽.[/ref]
푸른 별 지구는 ‘어머니’로 표상되어 온 여성성을 포함하여 제국주의 남성성에 착취당해 온 식민지 노예의 역사를 뒤로하고, 상호간에 취약해진 비인간과 인간들이 “서로 연민을 느끼며 돌보고 사랑하는 연인”[ref]그레타 가드(2024), 앞의 책, 12쪽. 그레타 가드의 ‘어머니 지구에서 연인 지구로 메타포 전환’은 ‘종간 정의(interspecies justice)’ 논의를 인식론적 관점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식량 체제와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고, 동식물과 흙, 물, 바위 등을 포함한 자연물과의 에로틱한 연결성을 이론화하며 섹슈얼리티 논의 또한 확장하고 있다.[/ref]으로 메타포가 전환된다. 그래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독점적으로 지구를 소유해 온 1%의 인간종을, 99%의 인간과 비인간이 난잡한 친족 관계망을 만들어 포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하는 에코페다고지
“다양한 상호의존의 관계망, 난잡한 친밀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다르게 살아도 괜찮은, 그것 자체로 존중받을 권리를 말했다. 우리가 꿈꾸고, 실천하고 만들고자 하는 세계는 계속해서 이상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낯설게 남을 수 있는 사회, 지속적인 탐색이 가능한 세계다.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는 낯선 욕망들은 여러 갈래의 네트워크형 관계를 지향하며 주거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 서로를 돌보는 것은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서로가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은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f]김순남(2022),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131~132쪽.[/ref]
2024년, 10년 만에 3학년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학기 초 3~4월 옷을 모아서 한살림에 보내는 ‘옷되살림’ 활동을 시작으로, 6월 5일 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한마당 기후행동 피케팅, 한여름 동네 하천 주변 플로깅, 9월 기후정의행진 주간 식당 앞 캠페인, 12월 아나바다 장터 수익금 NGO 구호 단체 기부 등 다양한 기후 시민 교육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태전환교육 프로그램은 지구 건너편 빈곤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시아 친구들에게 식수를 보내고, 포탄이 떨어지는 죽음의 전장에 고립된 난민들에게 한 끼 식사를 보장하도록 구호하는, ‘북반구 시민의 불쌍한 시선’이었음을 성찰하자.
이윤을 좇는 조폭 카르텔의 협박 때문에 피눈물로 아보카도를 재배한 멕시코 농부들이 있어 우아한 과카몰리 브런치를 먹을 수 있다. 변변한 도구도 없는 콩고의 어린 노동자들이 맨손으로 캔 콜탄에 의존해야만 휴대전화로 쇼츠를 보면서 방과 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휴대전화를 보면서 먹는 감자 과자는 오랑우탄을 서식지에서 쫓아내고 만든 팜유 플랜테이션 때문에 값이 싸다. 자본주의는 북반구에 있는 내가 그들을 돕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비인간 존재와 남반구 시민들이 나의 하루를 지탱해 주지 않고서는 제국적 스타일을 누릴 수 없다.
2024년 12월 23일 아나바다 장터 수익금(수익금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돈도 추가로 기부한 어린이들도 있었다)을 전하기 위해 학급 대표들과 함께 구호 활동을 하는 NGO 단체를 찾았다. (이 단체는 어린이들에게는 참새 방앗간 같은 학교 앞 편의점과 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 나와 10명의 학생들은 단체 이사장님을 만나고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사무실 공간을 투어하고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며 박수도 받았다. 또한 해외 어린이들에게 한국의 후원자들이 보내는 손수 만든 애착 인형을 포함하여 푸짐한 선물을 받는 환대를 경험했다. 그분들은 우리 학생들이 한 행위가 지구 건너편의 빈곤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주는 메신저와도 같았다.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돌봄과 환대의 관계망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우리의 세계 시민적 감각이 깨어나도록, 취약한 감수성이 성장하도록 돕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관계망 속에서 99%의 지구 타자들이 나를 돌보는 친족임을 인지하고 나와 친족의 안녕을 위해 정의롭게 행동하는, 에코포비아를 넘어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하는 에코페다고지가 더 풍성하게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기후 위기 교육이 직면해야 할 과제
에코포비아를 넘어
기후 시민 교육으로
- 기후 돌봄의 주체로 세우는 ‘에코페다고지’를 상상하다
조진희
cham1003@hanmail.net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
서울하늘숲초 교사
2024년 봄과 가을은 너무 짧았고 여름은 매우 습하고 뜨거웠으며 게다가 길었다. 11월에 역대급 큰 눈이 왔지만, 해가 바뀌고 1월 현재까지는 예년 기온보다 높은 편이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살기 좋은 온난한 기후라고 했지만, “여름은 뜨겁고 습하며 봄과 가을은 스쳐 지나가는 기후”가 어린이·청소년에게는 기본값이 되었다.
시·도교육청 또한 생태전환교육[ref]생태전환교육은 “기후 위기 비상 시대,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개인의 생각과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 및 시스템까지 총체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교육”이다.(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기본 계획〉, 2024년 2월)[/ref]을 강조하며, ‘기후행동 365 학생단’을 구성하고 ‘에코마일리지와 탄소 발자국’을 실천하며,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과의 연계를 강조한다. 교육농협동조합 10여 년의 실천을 통해서 농업을 통한 생태적 시민성 함양을 실천해 온 나로서는 이런 교육청의 지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학교와 교육청에서 요청한 강의를 할 때마다 이제 “생태전환교육, 기후 위기 교육은 주류화되었다”며 교사들에게 은근히 종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전교조 서울지부 참교육실천한마당에서 ‘환경에 책임이 생겨 버린 고등학생’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듣고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과학에 관심을 갖고 밀양 할머니들의 원전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환경 문제를 공부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그 학생은, 또래 친구들의 마음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환경 위기의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다는 생각도 꽤 많이 해 봤습니다. 저도 친구들도 미래에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사고 싶은 것투성이인데, 살기 위해서는 이제 그만 구매해야 하는 현실이 짜증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2022년 폭우로 학교가 무너지고 친구의 집이 잠기고, 반지하에 사는 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내가 살아갈 미래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라고 토로하였다.
불안하고 위험한 기후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대량 생산·소비·폐기라는 이전의 삶을 버리고 환경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금욕적인 생활 양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자각했다’는 것이다. 생태전환교육, 기후 위기 대응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학생상을 본 듯한 착각도 잠시, ‘우리 세대가 지금 뭘 어떻게 한 것이지?’ 하고 ‘현타’가 왔다.
다행히 이 학생은 환경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페인에 나가고 기후 행진도 참여하지만, 간혹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편과 금욕을 감수해야 하는 ‘억울함과 짜증’을 안고 기후 위기고 나발이고 그냥 이렇게 계속 살겠다는 학생들도 만나게 된다. 한편 하도 들어서 ‘기후 위기’의 ‘ㄱ’ 자도 듣고 싶지 않다, 기성세대들이 망친 지구를 왜 우리가 되살려야 하느냐는 불만도 교실에는 공존한다.[ref]프랑스의 여론 조사 업체 오피니언웨이에 따르면 18~35세 프랑스 성인 4명 중 1명은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믿지 않는 것부터, 내 탓이 아니라 부자들 탓이며, 과학 기술의 혁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미리앙 다망 외, 정미애 옮김(2023), 《기후 변화를 둘러싼 가짜 뉴스 10가지》, 두레아이들)[/ref] 어떤 학생들은 지금 지구가 일촉즉발의 위기인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고기를 즐기고 새벽 배송을 주문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당장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10여 년 동안 학교 텃밭·텃논을 공유지 삼아 기후 시민을 기르기 위해 달려왔지만, 어린이·청소년들의 입장을 안일하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이 밀려왔다. 도시농부 선생님, 실과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 “A4 한 장짜리 케이지에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나오는 닭을 위해 치킨 좀 적게 먹을 수 있죠?”, “열대 우림에 사는 오랑우탄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팜유로 만든 과자 말고 건강 간식은 어때요?”, “우리가 버린 옷이 아프리카 가나를 옷 쓰레기로 뒤덮고 있으니 꼭 필요한지 따져 보고 사면 어떨까요?”라면서 “나는 많이 살았지만 여러분이 생존할 지구별을 위해서”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시간들이 “너희, 참 안됐구나” 하는 뉘앙스로 다가간 것은 아닐까 회한도 밀려왔다.
내가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학생 지향(학습자 이익 지향)”의 원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교화하고 주입하고 종용해서 마침내 “에코포비아[ref]‘에코포비아(ecophobia)’는 환경 문제나 기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의미한다. 캐나다 밴쿠버 교육청은 환경 ‘재해(disasters)’를 어린이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과의 관계를 단념시킬 수 있으며, ‘에코포비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교육정책네트워크, “캐나다의 지속가능발전교육 현황”, 〈해외교육동향〉, 2023년 2월 8일)[/ref]”가 되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조차 엄습했다. 이 글은 나와 같이 기후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해 왔던 교육자들에게 엄습한 안일함, 반성, 회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해방시켜 보고자 하는 초보적인 생각이다.
기후 위기를 믿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기후 불평등에 관한 학자나 연구자들은 현실화되고 있는 기후 재난을 계급, 젠더, 인종, 장애, 지역 등의 교차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할수록, 비백인일수록, 비남성일수록, 장애인일수록, 남반구에 거주할수록 기후 재난에 큰 영향을 받으며 취약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기후 변화 전문가 조지 마셜은 “세상에는 기후 변화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누구를 신뢰하는지,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서 ‘호모 크레덴스(homo credens, 확신하는 사람들)’와 ‘호모 네가토르(homo negator,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분했다.[ref]조지 마셜, 이은경 옮김(2018), 《기후변화의 심리학》, 갈마바람, 42~43쪽[/ref] 전자는 “대학교육을 받았고 진보적 성향을 띤 중년의 민주당 지지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성들은 기후 변화를 믿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는 여성들이 건강과 안전, 재정, 윤리에 대한 위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 관찰 결과와도 일치한다”고 하였다. 후자는 “거의 예외 없이 보수적 성향이 매우 강하며(그렇지 않은 이는 극소수이다) 비교적 부유하고 유력한 사회 집단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다른 영역에서도 위험을 인식하는 수준이 대체로 낮다. 이들은 위험 연구자에게 친숙한 집단이다. 이 집단에 속한 남성들은 사회 조사를 심각하게 왜곡할 위험이 있으며, 위험 연구자들은 그런 위험을 일컬어 ‘백인 남성 효과(white man effect)’라고 부른다”고 서술한다.
요컨대 조지 마셜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기후 변화가 유발하는 불안과 그것이 요구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피하고 싶기 때문”[ref]조지 마셜(2018), 앞의 책, 326쪽.[/ref]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변화’는 앞서 말한 고등학생의 표현대로 “(책임감이 생겨 버려) 살기 위해서는 이제 뭘 그만 구매해야 하는 짜증 나는 현실”인 것이다.
정상성 편향과 기후 우울증
세대 관점에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면, 10년도 살지 않은 어린이가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기후 악당들이 배출한 탄소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정의’다. 그런 점에서 ‘아기기후소송’은 이 세대들이 “우리가 온전히 살 수 있도록 국가는 법과 제도를 구축하라”는 호소이다. 그래서 기후 시민 교육은 선세대가 기후 악당임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책임의 짐을 지우기보다 기성세대들이 책임지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송희일 감독도 기후 위기의 심리학에 대해 “기후 위기를 둘러싼 인류의 심리적 지도는 지리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경계들에 따라 다른 풍경으로 형상화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공포와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회피하는 심리적 패턴으로 ‘정상성 편향’[ref]‘정상성 편향(normalcy bias)’은 ‘그런 재난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생존심리학을 연구하는 존 리치에 의하면, 재앙에 맞닥뜨렸을 때 70%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15%의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며, 나머지 15% 사람들만이 미리 재난을 대비한다고 하였다.(이송희일(2024),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삼인, 61쪽)[/ref]이 나타나며, 장기적 걱정보다 단기적 걱정을 더 우려하는 ‘인지 편향’이 배양된다고 하였다. 즉 지구 종말보다 당장 월말이 발등의 불인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죽은 후에 대홍수가 나든 세상이 망하든,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당장의 ‘먹고사니즘’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각자도생 시대에는 불안과 공포에 의한 기후 우울증과 더불어 개인 책임에 대한 과중한 무게와 개인적 실천의 무력감도 기후 우울증을 부추긴다고 하였다. 즉 85%의 사람들은 재난을 대비하고 대응하면서 불의에 맞서 ‘저항’하기보다, 현실에 압도당해서 외면하고 무기력해져 ‘얼음’이 되거나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지 편향을 단단히 하며 ‘믿지 않는 호모 네가토르’가 되어, 큰 변화 없이 평소의 생활 양식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구조에 대한 통찰, 기후 시민의 출발점
기후 우울증과 정상성 편향의 심리를 교육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이송희일은 개인의 양심과 책임에 호소하는 프로파간다는 ‘부자들의 환경주의’임을 직시하고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호명되어 스스로 주체화하여 시선을 들어 다른 이의 눈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 채식 실천은 착한 소비에 머무르게 되지만 시민적인 채식 실천은 먹거리의 자급화와 농촌의 재지역화까지 사유하게 만든다”고 한다. “개인의 책임화는 외롭고 우울하게 하는 반면, 체제의 책임화는 자연과 남반구를 착취하는 대가로 영위하는 제국적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풍경을 스케치할 가능성을 제공한다”[ref]이송희일(2024), 앞의 책, 113쪽. ‘제국적 생활 양식’ 개념이 초등학생에게는 다소 어려워 나는 ‘1.5℃ 라이프 스타일’(지구 온난화를 1.5℃ 넘지 않게 유지하는 생활 양식)이라는 대체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개념이건 학생들에게 교육할 때는 대량 생산, 소비, 폐기의 반생태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실천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개념이면 될 것이다.[/ref]는 것이다.
개인에서 시민으로, 내 책임에서 체제 책임으로의 변화는 어린이·청소년 기후 시민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한 번 입고 버릴 옷을 소비한 나의 책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도 모르게 패스트 패션 의류를 소비하게 만드는 인스타그램 뒤의 현실 사회를 보는 것이다. 장시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지구 건너편 어린 노동자들의 값싼 임금으로 만든 20달러짜리 SPA 브랜드 청바지가 윤리적인가 토론해 보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지는 물류를 실어 나르는 택배 노동자들 덕분에 오늘 모임의 드레스 코드를 맞출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종일 농장에서 유해한 농약을 뒤집어쓰면서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목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한겨울에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가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패딩에는 산 채로 털이 뽑히고, 그러다가 까무러치며 생명을 잃은 오리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가나에 버려진 옷이 사막의 모래를 파고들고 땅과 지하수,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 지구를 떠돌다가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내 식탁으로 귀환하는 순환을 인식하는 것이다.
비인간 광물·생물로부터 시작하여 내 옷장으로 오기까지 단계 단계마다 소외된 노동이 있고, 옷을 만들고 팔아 이윤을 챙기려는 ‘제국적 생활 양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보게 하는 통찰을 주는 교육은 ‘책임에 어깨가 무거워 짜증 나는 개인’에서 ‘체제에 저항하는 시민’으로 어린이·청소년을 주체화하는 출발선이 된다.
비인간 존재와 친족 만들기, 난잡하게 돌보기
에코포비아로 이어지지 않는 교육을 위해서 데이비드 소벨은 “아이들이 잘 자라나길 원한다면, 지구를 구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자연과 연결되고 지구를 사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왜 그들을 구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밴쿠버교육청은 그 예로 체험 학습을 통한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감사를 기초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캐나다 원주민의 전통, 문화, 지식에 연결되는 것을 예로 들었다.[ref]교육정책네트워크, “캐나다의 지속가능발전교육 현황”, 〈해외교육동향〉, 2023년 2월 8일.[/ref] 학생들이 집-학교-학원의 삼각지대를 오가며 휴대전화로 보는 쇼츠에 잠시 한숨 돌리는 인생에서 벗어나 ‘지구 타자들을 직접 만나고 접하여 그들의 삶을 느끼는’ 진정한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비인간 존재[ref]비인간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 맺기에 대한 사유는 신유물론에 의지하고 있다. 신유물론은 인류세 담론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지금까지 불활성 물질로 간주되었던 비인간 존재의 행위 능력을 구성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으로 신유물론의 선구적 역할을 한 브뤼노 라투르는 근대성이 생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이원론적 존재론(비인간/인간 = 객체/주체 = 자연/사회)에서 찾는다. 즉 비인간, 물질은 기존의 유물론처럼 ‘주체’의 대립항으로서 행위성이 없는 ‘객체’가 아니라 행위성 있는 ‘사물’이다. 그는 “지구는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얽혀 공생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또는 어셈블리지)”로 본다. 그리고 근대주의가 무시 또는 부정해 온 비인간들의 행위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제도화하는 공동 세계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김환석, 〈신유물론으로서의 브뤼노 라투르 사상〉, 몸문화연구소(2022), 《신유물론 : 몸과 물질의 행위성》, 필로소픽, 20~50쪽)[/ref]를 인간과 분리하고 마음껏 이용하고 이윤을 창출해도 된다고 생각해 온 서구 근대 자연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자연, 남성/여성, 이성애/퀴어, 이성/감성, 서구/비서구, 문명/비문명 등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철학적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 기후 위기로 인해 삶 또는 자기실현이 어려워진 비인간 약자들이 무너진다면 인간도 기후 재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에 연결된다”는 것은 기후 재난으로 인해 취약해진 인간/비인간 존재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돌봄 선언》의 저자 더 케어 컬렉티브는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을 제안한다. 난잡한 돌봄이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을 의미하며 돌봄 대상을 친밀감 기준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2020년 여름 52일 동안의 장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붕 위에 올라가 울부짖는 소들도 구조해야 할 친족으로 만들었다.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생명애(biophilia)를 재호출해서 생물 친족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생물 전체를 확장된 친족으로 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안녕이 비인간 생물과 맺는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 살아가기》의 저자 도나 해러웨이도 생물 전체(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심지어 기계까지), 즉 인간과 비인간 존재 전체를 ‘친족’의 대상으로 삼자며 인간들만의 친족 개념을 허물어뜨린다.[ref]우석영, 〈인류세의 비인간 돌봄〉, 신지혜 외(2024), 《기후 돌봄》, 산현글방, 129~131쪽.[/ref]
“인간을 생태적 존재로, 비인간을 윤리적 존재로 (재)위치”시키는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용어를 만든 호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플럼우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 타자들을 ‘관계적 자아’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서로의 신체를 먹고 먹히면서 몸성으로 얽힌 존재이고, 공기와 물,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서로의 신체를 횡단하며 관계를 맺어 가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비인간 지구 타자들은 행위자성, 소통 능력, 의도성을 가지고 서로의 삶을 공동 구성하고 공동 생산하는 반려자라고 주장한다.[ref]그레타 가드, 김현미 외 옮김(2024), 《비판적 에코페미니즘》, 창비, 11쪽.[/ref]
어머니에서 연인 지구로의 메타포 전환
기후 재난 때문에 사고 싶은 것도 못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가고 싶은 곳도 못 가면서 짜증 나고 불안하며 우울한 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억울한 세대. 그 세대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인간-비인간 지구 타자들은 서로 먹고 먹히며 관계를 맺어 가는 반려자라는 인식론의 전환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불쌍한 북극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비인간 존재로 친족 개념을 확장하고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며 비인간과 물질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일 뿐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은 버려야 할 낡은 세계관이다.
여기에 에코페다고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에코페다고지는 에코페미니즘과의 교류를 필요로 한다.[ref]대표적인 에코페미니스트이자 과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시각에서는 재생력의 터전으로서 종자와 여성의 육체가 최후의 식민지가 되는 셈이다. 자연, 여성, 유색인들은 다만 ‘원료’를 제공할 뿐이다. 여성과 자연의 공헌에 대한 평가절하는 식민 행위에 개발과 진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맞물려 행해진다”면서 자연, 여성, 비백인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다.(마리아 미즈·반다나 시바, 손덕수·이난아 옮김(2020), 《에코페미니즘》, 창비, 85쪽) 에코페미니스트이자 사회학자인 마리아 미즈도 “이 식민 구조의 경제적 근거는 결국 이러한 분리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공간, 시간 지평 바깥으로 비용이 전가되는 것 - 비용의 외부화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가정주부화되어 GNP 계산에 빠지는 여성들은 이 체제의 ‘내부 식민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마리아 미즈·반다나 시바(2020), 앞의 책, 131~132쪽)[/ref] 제국주의적 생활 양식으로 기후 재난을 가져온 헤게모니적 반생태적 남성성으로 표상되는 특권화된 북반구 백인 남성의 눈으로 지구와 관계 맺지 않는 ‘대안적인 생태적인 남성성’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종말보다 월말이 급한 취약한 저임금 노동자들은 지구의 반려자,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될 수 없다. 앞선 에코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어머니 지구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기후 위기의 원인임을 증언했다면, 최근의 비판적인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에코남성성’의 재구성과 해체에 더욱 주목한다. 합리성, 환원주의, 권력과 통제, 자만심, 이기심, 경쟁심, 정력 등과 같은 지배적인 남성적 가치를 ‘돌봄의 윤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예 헤게모니적 남성성 구성의 핵심인 이성애주의 자체를 통찰하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이다. 그리고 지구를 여성인 어머니로 묘사하며 젠더화하는 이전의 에코페미니즘은 유럽 중심의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영속화하는 것이며, 오히려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 남성/여성 이원론을 재현하다는 비판이다. 99%의 덜 지배적인 남성과 여성, 아이, 동물과 환경을 희생시켜서 1% 엘리트 남성들만이 성공하는 기후 부정의 정치를 생명 정치로 바꾸기 위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f]그레타 가드(2024), 앞의 책, 320~327쪽.[/ref]
푸른 별 지구는 ‘어머니’로 표상되어 온 여성성을 포함하여 제국주의 남성성에 착취당해 온 식민지 노예의 역사를 뒤로하고, 상호간에 취약해진 비인간과 인간들이 “서로 연민을 느끼며 돌보고 사랑하는 연인”[ref]그레타 가드(2024), 앞의 책, 12쪽. 그레타 가드의 ‘어머니 지구에서 연인 지구로 메타포 전환’은 ‘종간 정의(interspecies justice)’ 논의를 인식론적 관점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식량 체제와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고, 동식물과 흙, 물, 바위 등을 포함한 자연물과의 에로틱한 연결성을 이론화하며 섹슈얼리티 논의 또한 확장하고 있다.[/ref]으로 메타포가 전환된다. 그래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독점적으로 지구를 소유해 온 1%의 인간종을, 99%의 인간과 비인간이 난잡한 친족 관계망을 만들어 포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하는 에코페다고지
2024년, 10년 만에 3학년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학기 초 3~4월 옷을 모아서 한살림에 보내는 ‘옷되살림’ 활동을 시작으로, 6월 5일 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한마당 기후행동 피케팅, 한여름 동네 하천 주변 플로깅, 9월 기후정의행진 주간 식당 앞 캠페인, 12월 아나바다 장터 수익금 NGO 구호 단체 기부 등 다양한 기후 시민 교육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태전환교육 프로그램은 지구 건너편 빈곤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시아 친구들에게 식수를 보내고, 포탄이 떨어지는 죽음의 전장에 고립된 난민들에게 한 끼 식사를 보장하도록 구호하는, ‘북반구 시민의 불쌍한 시선’이었음을 성찰하자.
이윤을 좇는 조폭 카르텔의 협박 때문에 피눈물로 아보카도를 재배한 멕시코 농부들이 있어 우아한 과카몰리 브런치를 먹을 수 있다. 변변한 도구도 없는 콩고의 어린 노동자들이 맨손으로 캔 콜탄에 의존해야만 휴대전화로 쇼츠를 보면서 방과 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휴대전화를 보면서 먹는 감자 과자는 오랑우탄을 서식지에서 쫓아내고 만든 팜유 플랜테이션 때문에 값이 싸다. 자본주의는 북반구에 있는 내가 그들을 돕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비인간 존재와 남반구 시민들이 나의 하루를 지탱해 주지 않고서는 제국적 스타일을 누릴 수 없다.
2024년 12월 23일 아나바다 장터 수익금(수익금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돈도 추가로 기부한 어린이들도 있었다)을 전하기 위해 학급 대표들과 함께 구호 활동을 하는 NGO 단체를 찾았다. (이 단체는 어린이들에게는 참새 방앗간 같은 학교 앞 편의점과 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 나와 10명의 학생들은 단체 이사장님을 만나고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사무실 공간을 투어하고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며 박수도 받았다. 또한 해외 어린이들에게 한국의 후원자들이 보내는 손수 만든 애착 인형을 포함하여 푸짐한 선물을 받는 환대를 경험했다. 그분들은 우리 학생들이 한 행위가 지구 건너편의 빈곤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주는 메신저와도 같았다.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돌봄과 환대의 관계망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우리의 세계 시민적 감각이 깨어나도록, 취약한 감수성이 성장하도록 돕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관계망 속에서 99%의 지구 타자들이 나를 돌보는 친족임을 인지하고 나와 친족의 안녕을 위해 정의롭게 행동하는, 에코포비아를 넘어 기후 시민으로 주체화하는 에코페다고지가 더 풍성하게 논의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