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5 1·2 vol.84
탄핵 정국으로 뜨겁던 2024년 연말, X(구 트위터)에서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ref]아동의 생존권 보호를 목표로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이트다. 예전에는 ‘배드파더스’로 불렸다.[/ref] 계정이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글을 공유했다. 한 사용자가 공유를 취소하라고 항의하자 “그쪽 지지와 인정 필요 없습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문제를 지적하자 사과 없이 계정을 폭파했다.
이후 X 내에서 ‘#젠더퀴어를_지지하는_시스[ref]시스젠더(cisgender)의 줄임말. 출생 시 지정된 성별(지정 성별)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ref]_여성_여기_있음’과 ‘#배드파더스_지지하는_여성_여기_있음’ 해시태그가 돌았다.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글에는 무조건 터프[ref]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TERF)를 칭한다. 여성 의제를 앞세워 트랜스젠더를 증오하는 견해를 보이는 이들을 일컫는다.[/ref]의 인용 글이 달렸고, 심각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모순적이지만 남태령을 시작으로 광장에서 성정체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이 늘어난 시기도 이때였다.
그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무지개 깃발을 올리기 무섭다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인권을 중시하는 이들이 같은 광장을 공유하는 이들을 밀어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이기주의로 칭하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 고민이 생긴 친구들이 모였다. 그리고 젠더를 공부하여 무기로 삼자, 편견을 깨부수자는 의미로 ‘무지개 도끼’라는 모임이 탄생했다. 첫 책으로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를 읽었다.
최예훈이 〈삶의 경험이 공유되고 반영되는 트랜지션〉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젠더가 가족, 주거, 교육, 노동, 의료 환경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결정하는 세상은 이상”(218~219쪽)하다. 《젠더 무법자》는 ‘진짜 여자는 무엇이고, 진짜 남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질문하며 견고한 젠더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작가 특유의 유머와 예술 감각을 발휘하여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표현한다.
우리는 모여 앉아 책을 읽고, 젠더를 가지고 놀며 ‘젠더 법칙 수호자’를 농락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스스로 성별을 지정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웠고, 남성성과 여성성 대신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한 방법을 익혔다. 진지하고 어두운 분위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시간을 웃으며 보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웃다가 시간이 다 간 걸 인지하는 순간이 많았다.
트랜스젠더와 다른 취약성을 가진 집단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젠더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본격적인 문제를 꺼내기도 전에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논의하는 자체가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된다.(208쪽)
《젠더 무법자》에서도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으로 문화를 지적했다.
이 문화는 트랜스 섹슈얼리티를 질병으로, 침묵으로만 치료될 수 있는 병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재지정 수술의 과정을 진행하려면 상담가를 찾아가서 수술을 허가하는 의학 서류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이 문화에서 치료에 자기를 맡긴 트랜스 섹슈얼은 자신을 병에 걸린 사람들로 분류하는 체제의 경로를 통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상담은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하기 위한 것이 된다.[ref]케이트 본스타인 씀, 조은혜 옮김(2015),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108쪽.[/ref]
트랜지션 수술이 강제되는 현실이라는 점과 이에 대해 의료계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결국 젠더가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버리는 결과”(217쪽)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한 존재가 철저하게 의료 기술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한다.
또 다른 진입 장벽에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 성별 불쾌감)’가 있었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출생 시 지정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된 성별 규범에 자신의 느낌이 조화롭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208쪽) 이는 트랜스젠더에 관한 의학적 진단 기준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사람들이 곧 트랜스젠더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젠더 무법자》를 다 읽고 책거리로 내가 얼마나 트랜스한지 여러 질문으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여러 질문이 범주가 넓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가슴이 없으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는 질문에 동의하면 트랜스 성향을 띤다고 볼 수 있지만, 성희롱을 당할 수 있다거나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기 싫다는 이유도 들 수 있다. “다음 생에는 남자/여자로 태어날 거야 같은 말을 해 본 적 있다”라는 질문에도 월경을 하는 게 싫다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기 싫다는 등의 이유로 동의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젠더를 다양한 차원과 방식으로 경험한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은 있을 수 없다.”(211쪽) 그렇기에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낀다는 이유로 모두를 트랜스젠더로 가정하는 것과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스젠더로 가정하는 것은 모두 섣부른 판단이다. 그렇기에 최예훈의 글과 케이트 본스타인의 글은 모두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젠더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여겨 왔다면 더더욱 질문해야 한다.”(211쪽) 《젠더 무법자》는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2015년에 한국에서 초판이 나왔다. 쓰인 지 30여 년 차이 나는 두 글이 전하는 이야기와 질문이 같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담으로 무지개 도끼는 비수도권인 전북 전주시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으로 지역 의제를 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느 날엔 지역 거주민으로서 비수도권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말했다. 지역 광장이 다채롭지 못하다고 한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엔 열린 광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시민 동의 없이 덕진공원에 사는 나무를 자른 전주시장을 맹렬히 비난했다. 나는 고등학교 기간제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바라보는 교복 착용 강제 실태가 젠더에 근거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야기했다.
그래서일까. 최예훈의 글을 보고 반가운 한편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필요할 때 병원을 안전하게 갈 권리”(218쪽)는 지역 거주민에게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수도권에 가려면 늘 “장거리 이동을 감수”(218쪽)해 왔다.
매년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또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다. 이때마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이 펼쳐진다. 이후에도 《오늘의 교육》에서 트랜지션에 대해 더 많은 글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ref]케이트 본스타인(2015), 앞의 책, 136쪽.[/ref] 그렇기에 누구라도 이 세상에 도끼를 던질 수 있다.
- 서희(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읽은 이야기
오늘의 교육
2025 1·2 vol.84
탄핵 정국으로 뜨겁던 2024년 연말, X(구 트위터)에서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ref]아동의 생존권 보호를 목표로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이트다. 예전에는 ‘배드파더스’로 불렸다.[/ref] 계정이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글을 공유했다. 한 사용자가 공유를 취소하라고 항의하자 “그쪽 지지와 인정 필요 없습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문제를 지적하자 사과 없이 계정을 폭파했다.
이후 X 내에서 ‘#젠더퀴어를_지지하는_시스[ref]시스젠더(cisgender)의 줄임말. 출생 시 지정된 성별(지정 성별)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ref]_여성_여기_있음’과 ‘#배드파더스_지지하는_여성_여기_있음’ 해시태그가 돌았다.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글에는 무조건 터프[ref]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TERF)를 칭한다. 여성 의제를 앞세워 트랜스젠더를 증오하는 견해를 보이는 이들을 일컫는다.[/ref]의 인용 글이 달렸고, 심각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모순적이지만 남태령을 시작으로 광장에서 성정체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이 늘어난 시기도 이때였다.
그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무지개 깃발을 올리기 무섭다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인권을 중시하는 이들이 같은 광장을 공유하는 이들을 밀어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이기주의로 칭하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 고민이 생긴 친구들이 모였다. 그리고 젠더를 공부하여 무기로 삼자, 편견을 깨부수자는 의미로 ‘무지개 도끼’라는 모임이 탄생했다. 첫 책으로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를 읽었다.
최예훈이 〈삶의 경험이 공유되고 반영되는 트랜지션〉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젠더가 가족, 주거, 교육, 노동, 의료 환경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결정하는 세상은 이상”(218~219쪽)하다. 《젠더 무법자》는 ‘진짜 여자는 무엇이고, 진짜 남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질문하며 견고한 젠더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작가 특유의 유머와 예술 감각을 발휘하여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표현한다.
우리는 모여 앉아 책을 읽고, 젠더를 가지고 놀며 ‘젠더 법칙 수호자’를 농락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스스로 성별을 지정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웠고, 남성성과 여성성 대신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위한 방법을 익혔다. 진지하고 어두운 분위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시간을 웃으며 보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웃다가 시간이 다 간 걸 인지하는 순간이 많았다.
《젠더 무법자》에서도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으로 문화를 지적했다.
트랜지션 수술이 강제되는 현실이라는 점과 이에 대해 의료계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결국 젠더가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버리는 결과”(217쪽)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한 존재가 철저하게 의료 기술에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한다.
또 다른 진입 장벽에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위화감, 성별 불쾌감)’가 있었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출생 시 지정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된 성별 규범에 자신의 느낌이 조화롭지 않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208쪽) 이는 트랜스젠더에 관한 의학적 진단 기준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사람들이 곧 트랜스젠더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젠더 무법자》를 다 읽고 책거리로 내가 얼마나 트랜스한지 여러 질문으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여러 질문이 범주가 넓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가슴이 없으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는 질문에 동의하면 트랜스 성향을 띤다고 볼 수 있지만, 성희롱을 당할 수 있다거나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기 싫다는 이유도 들 수 있다. “다음 생에는 남자/여자로 태어날 거야 같은 말을 해 본 적 있다”라는 질문에도 월경을 하는 게 싫다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기 싫다는 등의 이유로 동의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젠더를 다양한 차원과 방식으로 경험한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은 있을 수 없다.”(211쪽) 그렇기에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낀다는 이유로 모두를 트랜스젠더로 가정하는 것과 젠더 디스포리아를 느끼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스젠더로 가정하는 것은 모두 섣부른 판단이다. 그렇기에 최예훈의 글과 케이트 본스타인의 글은 모두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젠더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여겨 왔다면 더더욱 질문해야 한다.”(211쪽) 《젠더 무법자》는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2015년에 한국에서 초판이 나왔다. 쓰인 지 30여 년 차이 나는 두 글이 전하는 이야기와 질문이 같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담으로 무지개 도끼는 비수도권인 전북 전주시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으로 지역 의제를 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느 날엔 지역 거주민으로서 비수도권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말했다. 지역 광장이 다채롭지 못하다고 한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엔 열린 광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시민 동의 없이 덕진공원에 사는 나무를 자른 전주시장을 맹렬히 비난했다. 나는 고등학교 기간제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바라보는 교복 착용 강제 실태가 젠더에 근거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야기했다.
그래서일까. 최예훈의 글을 보고 반가운 한편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필요할 때 병원을 안전하게 갈 권리”(218쪽)는 지역 거주민에게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수도권에 가려면 늘 “장거리 이동을 감수”(218쪽)해 왔다.
매년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또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다. 이때마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이 펼쳐진다. 이후에도 《오늘의 교육》에서 트랜지션에 대해 더 많은 글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ref]케이트 본스타인(2015), 앞의 책, 136쪽.[/ref] 그렇기에 누구라도 이 세상에 도끼를 던질 수 있다.
- 서희(교육공동체 벗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