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리뷰] 모든 상식적인 일들이 자연스러워지기를 (김보영) - 《유예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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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모든 상식적인 일들이 자연스러워지기를

공현 씀, 《유예된 존재들》, 교육공동체 벗, 2020



김보영

01demian@hanmail.net

소설가


상처를 들여다보며 싸우는 분에게 바치는 존경과 감사


‘평소 청소년운동에 관심과 애정이 있는 듯하다’는 인사와 함께 청탁을 받았다. 사실 나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로 그랬다면 내가 소설을 안 쓰고 현장에 있겠지’ 하는 자조적인 반문을 마음속으로 하곤 한다. 내 일상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기는 것으로 돌아가고,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 무엇도 비할 바가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온갖 기억이 몰아쳐서 견디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칼럼 하나를 읽을 때마다 책을 내려놓고 정신없이 방을 서성이다 겨우 도로 책을 들곤 했다. 내 이 어설픈 트라우마에 직면할 때마다 초라한 기분에 빠진다. 누군가는 인생을 바쳐 그 일을 하며 사는데, 나는 겨우 그 기록의 파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다니. 나는 소설가로 사는 동안 청소년 시절에 대한 단편을 딱 두 편 썼다. 웹진 크로스로드에 실린 〈0과 1사이〉와, 《다행히 졸업》에 실린 〈11월 3일은 학생의 날입니다〉였다. 나는 그 짧은 소설을 쓰는 동안 거의 까무러쳤다가 살아났다. 그래도 마감이 있다고 그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다니, 직업 정신 한번 대단하구나 하며 스스로에게 감탄했었다.


나는 내가 성년이 되던 날 밤을 기억한다. 온 세상에 대한 울분과 미움에 휩싸여, 째깍거리는 시계를 노려보며 내가 미성년을 지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선생들이 입이 닳도록 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고 지껄였던 집회·결사의 자유며 선거권이며 온갖 법적 권리가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을. 그러면서 초침이 바뀌는 순간에, 내 안에서 어떤 깨달음이, 성인으로서의 자각이, 어른들이 그토록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해 온 성숙한 현명함이 기적처럼 솟아나기를 기다렸다. 초침은 1초 전과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나는 패배감과 승리감을 같이 맛보면서 밤새 울었다.


나는 이런 무수한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떠올릴 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당연하게도 무심한 한탄과 비웃음을 받는 편이다. 그게 언제인데,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유치하게 무슨, 뭘 아직도, 그 정도는 어른스럽게 떨치고 나아가야지 등. 어린 날에 어른들은 네가 어른이 되기만 하면 곧 다 잊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일생 이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 것이 내 어린 시절에 바치는 최소한의 예의다. 하지만 치유되지 않기에 차마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싸우고 있다. 엇비슷하거나 더 깊은 고통이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피하지도 떠나지도 않고 거기에 남아 있다.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오늘 청탁을 받았다는 빌미로 당신이 싸워 온 날들의 기록에 감히 어설프게 말을 덧대는 것에도 용서를 빈다.



상식적인 권리를 얻기가 어째서 이리 어려운가


공현의 이름은 트위터에서 아수나로와 투명가방끈 계정을 팔로우 하는 가운데 흔하게 보았다. 가끔은 그게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아수나로처럼 활동 단체 이름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접했다. 무심히 청소년인가 생각했는데 가만 돌이켜보니 보아 온 세월이 이미 꽤 지나 있었다. 물론 안면도, 접점도 없었고 누군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공현은 전혀 모르지만 익숙한 사람이다.


《유예된 존재들》은 공현이 지난 15년간 활동하면서 쓴, 다방면의 주제에 대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공현은 ‘언제까지 청소년운동을 할 거야?’라는 말을 늘상 듣는다는 푸념으로 서문을 연다. 그러면서 청소년인권이 일시적인 문제로, 인생에서 한때 지나가 버리는 유령 같은 시간으로 취급되면서, 사소하고 단순한 것마저도 해결되지 못하고 유예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이러니한 점이다. 만약 청소년운동 활동가가 ‘언제까지 청소년운동을 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운동은 누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릴 때 선생님들은 내가 미성년이고 미성숙한 존재라,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온전한 주장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청소년이 미성숙하여 운동을 할 수 없다면, 성인이 된 다음에는? 성인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유치하게 집착하느냐’는 조롱을 받는다면? 그러면 이 시기의 인권은 누가 말할 수 있는 걸까.


한국의 살인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 교육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너는 혜택을 누리는데 뭐가 부족해서 말을 얹느냐?’고 조롱을 받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은 ‘너는 실패했고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열등감에 하는 말이지?’라는 조롱을 받는다면? 이런 말들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로, 공현의 글이 차근차근 지적하는 점들은 ‘성인’이나 ‘인간’으로 치환해서 보았을 때 평이하리만치 상식적이다. 왜 청소년은 어른과 달리 법정 노동 시간 이상으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청소년은 어른과 달리 휴가와 휴식이 제공되지 않는가? 왜 청소년은 어른과 달리 구타를 당하는가? 왜 머리 모양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가? ‘어린이’라고 바꾸어 생각했을 때에도 기괴한 일이 왜 교육 현장에서는 허용되는가? 생각해 볼수록 이상한 일이다.


공현은 청소년기가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전 단계로 희생되고 삭제되는 시기로 해석되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교육은 한 인간으로서 인격과 민주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을 선별하고 차별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된다. 이런 교육 하에서는 ‘현재’는 사라지고 ‘미래’만 남는다. 교육에서 ‘미래’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현재’의 희생은 무한대로 커진다.


‘현재’를 시간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체로 생각해 보자. 청소년기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성인기라는 나라의 주민을 위해 극한으로 수탈당하는 것이다. 식민지가 다 그렇듯이, 이런 구도에서는 실리적인 이득 이상의 수탈이 자행된다. 이상한 점은 이 ‘청소년기’ 주민과 ‘성인’ 주민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자신을 수탈하는가?


내가 어릴 때 선생들과 싸웠던 문제들도 차마 인간의 권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평이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여름에는 빨리 하복을 입게 해 달라고 했고 겨울에는 교복 위에 코트를 입게 해 달라고 했다.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 머리를 묶을 만큼 기를 수도, 아예 짧게 자를 수도 없다면 머리띠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선생들은 그 모든 요구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늘 이유는 ‘하나둘 허락하다 보면 버릇없이 기어오르게 되고 별 이상한 것까지 다 허락해 줘야 한다’였다. 말하자면 그 요구는 단지 ‘요구였기에’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가 인간으로서의 교육은 다 포기하고 대학에 보내는 가격표를 붙이기 위한 상품을 만들기 위한 공장을 가동시키는 것은,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대체 왜 이 선생들은 이토록 내 공부를 방해하는가? 한여름의 찌는 폭염 속에서, 작은 선풍기 하나 겨우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교실에서, 머리띠와 하복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공장이면 공장의 역할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비상식에 고착된 사회


공현은 나와 거의 10년 터울이 나는 사람이고, 그러고도 다시 15년째 이 활동을 해 오고 있는데, 공현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더해서 지금도,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기의 모든 문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계속 당혹스럽다.


변화가 이토록 더딘 이유는 이미 무엇인가가 고착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이한 교육 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이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제도가 고착되었고, 여기에 교육 장사라는 자본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버렸다. 나라가 소수에게 몰아준 이권을 선망하며,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 교육 자본에 재산을 털어 넣으며 매달리게 만들었다. 모든 괴이한 관습을 가진 다른 나라들을 보아도 그렇지만, 한번 무엇인가에 천착된 사회는 모든 면에서 곪고, 곪은 자리가 서로 엉겨 붙어서 거기에서 빠져나올 동력을 잃게 되는 듯하다.


실제로 이 사회에서는 많이 똑똑한 사람들마저도, 자신이 어릴 때 공부를 해서 이 자리에 있다고, 자신이 그보다 더 했다면 더 많은 무엇인가를 누릴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더 공부를 하여 내가 가진 것을 누리라고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가르쳐 주듯이 말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하다 못해 학대와 다름없는 수준이며, 심각한 결핍과 정신병을 유발한다고 국제 사회에서 입을 모아 말하는 나라에서, 학생들에게 지금보다 더 공부하라고 하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교육의 비효율성과 강도, 양면에서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가. 우주 1위쯤은 해야 직성이 풀리려는가.


더해서 공현의 말대로, 그것은 ‘공부’가 아니다. 대학 입학용으로 쓰이고 버려지고, 대학에 들어가면 다 사라지는 것을 공부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한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 그 막대한 교육을 받고 정작 가장 중요한 공부는 독학을 해야 한다. 이게 대체 뭔가.


나는 계속 알 수가 없다. 청소년은 다 어른이 된다. 그 학대를 받고 정신적인 결핍을 갖고 자란 아이들이 다 성인이 되는데, 이놈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가 말이다.



변하고 나면 자연스러워진다


공현은 청소년인권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를 말한다. 기본적인 것에서 첨예한 것까지. 너무 당연하게 아이들에게서 빼앗고 있다 보니 원래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 잊은 것들을 하나하나 일깨워 준다. 친권의 사회화, 종교의 자유, 아동수당, 성적 결정권의 문제를 지나 3부에서는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민주 사회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사회라지만, 실상 그 권리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과거에 그 권리는 가난한 사람, 흑인,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21세기에도 청소년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다. 민주 국가는 선거권이 없는 자를 위한 정책을 만들지 않는다. 아동과 청소년의 권리는 그들을 양육하는 ‘선거권을 가진’ 부모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실재하는 인간의 권리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 활동가들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진지하게 다뤄 온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2019년 말, 패스트트랙으로 선거권 연령을 18세로 낮추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때 기뻐하며 환호하던 청소년 활동가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총선에서 코로나19 때문에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투표를 하러 가는 풍경에는 가슴이 뛰었다.


모든 것은 이루어지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당연해서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일이 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마찬가지다.


나는 중학생 때 교복을 입지 않았다. 나는 늘 일본 만화 속의 아이들이 왜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자랐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복이 생겼고, 나는 선배들이 여름에는 시원한 반바지를, 겨울에는 따듯한 털옷을 입고, 추리닝 바지와 생활한복을 입고 뛰어다니며 사는 모습을 미친 듯이 부러워하며 지냈다. 대체 누가 이 몸에 쩍쩍 달라붙고 움직일 수도 없는 불편한 제복과 나일론 스타킹을 내게 입혔느냐고 정신없이 온 사방에 질문하며 다녔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 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교복은 내가 어릴 때에는 이상한 것이었다. 모든 이상한 일이 한번 생기고 나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사라지고 나면 그것도 당연한 것이 된다.


공현은 선거권의 나이를 낮추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 18세, 19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는 모든 국민에게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나이에 관계없는 권리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학교에서 배우기로, 본디 민주 사회의 기본은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단지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져서 선거를 통해 대리인을 두는 것이다.’ 이는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생각해 보면 우습다. 간접 정치를 하는 이유가 ‘단지 사회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라면, 왜 학교라는 좁고 단순한 사회에서는 직접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교실이라는 더 작은 사회에서는, 더 들어가서 동아리나 학생회 같은 작은 조직 안에서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불가능하지 않다.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부터 청소년들이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다수가 함께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 바로 그 방식을 배우기 시작할 때 세상은 변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어른들은 이를 가르치는 법도 또 배워야 할 것이다. 어른들도 이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은 많지만 이 또한 이루어지고 나면 자연스러워지리라 믿는다.


말하자면 한이 없고 생각하자면 끝이 없다. 이 책은 내게 모든 당연한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 당연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변한 것들은 다 자연스러워진다. 자연스러워진 나머지 누군가 그 작은 변화를 위해 오래 싸웠다는 사실마저도 잊히곤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온 힘을 다해 힘들게 노력하지 않는 이상 아주 작은 것도 변하지 않는 줄을 안다.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변화로도 많은 것이 변하는 줄을 안다. 공현이 당신의 삶이 가치 있다고 하는 말을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바보들의 말에 마음이 닳지 않기를 바란다. 계속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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