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기획] 교육화 시대의 교육 ‘교육 구국론’과 ‘교육 망국론’을 넘어 | 이명훈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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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으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교육화 시대의 교육 

- ‘교육 구국론’과 ‘교육 망국론’을 넘어


이명훈  zer0lab@naver.com

전 중등 교사, 

현 독립연구자·강사.

《반란의 매춘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역자.



구국의 교육, 망국의 교육


교육에 대한 말과 글 속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다. 교육이 한국 사회의 가장 고질적 문제라는 말[ref]우린 모두 한국 교육의 불행한 자식이라는 말, ‘가정 교육’을 못 받아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 ‘자녀 교육’ 탓에 등골이 휜다는 말, ‘기초 교육’이 부족해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 등이 여기에 속한다.[/ref], 국토가 작고 자원이 희소한 한국의 유일한 성장 동력이라는 말[ref]국난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건 한국의 ‘교육열’ 덕분이라는 말,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해외 인사들이 “한국 교육을 배우자”라며 부러워하는 게 한국의 ‘수학교육’, ‘과학교육’ 덕분이라는 말 등이 여기에 속한다.[/ref], 좁게는 내 자녀, 넓게는 한국과 전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어[ref]매년 1월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주요 업무·정책 추진 계획에서 교육부가 제시한 비전, 목표는 2023년에는 “교육 개혁, 대한민국 재도약의 시작”,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교육”, 2024년에는 “교육 개혁으로 사회 난제 해결”, 2025년에는 “기회의 사다리가 되는 공정한 교육 실현”이었다.[/ref] 반드시 긴 계획을 세워 전 국가적·지구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해야 할 백년지대계 또는 미래의 온실이라는 말. 우리가 ‘헬조선’에 머무르는 망국(亡國)의 이유도, 거기서 탈출할 구국(救國)의 해법도 모두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는 듯한 과대 포장의 말들이다. 그 안에서 교육은 세속의 온갖 기대를 충족하는 좋은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가, 반대로 그 기대를 좌절시키는 나쁜 것의 대명사도 된다. 내가 이런 말들을 곱씹게 되는 건 교육의 중요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의심스러운 건 교육이 사회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고, 또 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부푼 포장을 걷어 내고 알맹이만 남기면, 교육에 정말로 이런 엄청난 힘이 있기는 한 걸까? 교육에 거는 지나친 기대와 낙관이 오히려 교육의 개선을 막거나 그 병폐를 더 키워 온 것은 아닐까? 이상적 교육이 실현된 에듀토피아(edutopia)가 정녕 우리에게 유토피아(utopia)를 보장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실제로 교사와 학교는 수많은 사회 문제에 연루된 범인이자 해결사로서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고 있고, 그동안 교육은 다른 활동과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거나 정치적 필요나 이해관계에 따라 제멋대로 규정되어 왔다. 영토·역사 문제, 기후 위기, 팬데믹과 재난, 저출생, 높은 이혼율·자살률, 각종 중독, 혐오·차별·폭력, 영끌·채무 등이 긴박한 의제로 떠오를 때면,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낀 학교 관계자들이 이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한국사교육, 환경교육, 재난·안전교육, 성교육, 알코올·마약 예방 교육, 평화교육, 경제·재테크 교육 같은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관련 자격 취득 과정을 만들어 ‘전문가’를 양성하는 모습에 익숙하다.[ref]장상호(2005), 〈당신은 교육학자인가?〉, 《교육원리연구》, 10(2); 양미경(2014), 〈사회문제의 교육문제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의의와 한계〉, 《교육원리연구》, 19(1).[/ref]


최근에는 10대 남성들을 극단주의와 파시즘에서 구출하기 위해 토론과 글쓰기 중심의 수업과 입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어느 교육학자의 ‘아들 교육론’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권정민, “내 아들을 ‘극우 유튜브’ 세계에서 구출해 왔다”, 〈오마이뉴스〉, 2025년 1월 21일.[/ref]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잡아내고 “건전하고 민주적 가치관”을 설파하는 학교 수업이 늘어나기만 하면, 비판적 능력을 갖춘 시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일까?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양, 교육을 사회적 병폐의 만병통치약이나 의식화의 열쇠인 것처럼 미화하다가, 제 기능과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면 그 이유를 교육이 부재·부족한 탓, 교육자·교육학자들이 잘못된 교육을 시도한 탓으로 몰아가고, 또다시 ‘진정한 교육’으로의 개혁, 쇄신, 혁신을 외치는 분위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렇게 교육을 찬양하는 ‘교육 복음’이나 ‘교육 이상화’의 흐름, 그리고 교육을 비난하는 ‘교육 경멸’이나 ‘교육 원흉화’의 흐름[ref]Grubb & Lazerson(2004), The education gospel, Harvard University Press; Ricken(2007), Eine einführung, Über die verachtung der pädagogik, VS Verlag.[/ref]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를 ‘교육화(educationalization)’[ref]교육화는 사회 문제 해결의 책임을 교육에 과도하게 부과하는 현상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교육을 임시방편 삼아 학교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책임을 전가하는 문제를 드러낼 때 주로 쓰인다. 유럽에서는 ‘pedagogization’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된다.(Bridges(2008), Educationalization : On the appropriateness of asking educational institutions to solve social and economic problems, Educational Theory, 58(4))[/ref], ‘교육주의(pedagogism)’[ref]헬무트 쉘스키는 교육주의(pädagogismus)를 사회적 요구에 맞는 인간을 양성하고자 교육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적 전체주의의 일종”이라고 평가한다.(Schelsky(1961), Anpassung der widerstand?, Quelle&Meyer)[/ref], 교육의 ‘경계 이탈(transgressing)’[ref]Lüders, Kade & Hornstein(2002), Entgrenzung des pädagogischen, Einführung in grundbegriffe und grundfragen der erziehungswissenschaft, VS Verlag.[/ref], 교육의 ‘가명화(false naming)’[ref]조용환은 교육 문제가 엉뚱한 이름으로 다루어지고 되레 교육 밖의 문제가 교육 문제로 불리는 현상을 “이름이 바뀐 문제”라고 표현하고, “교육 문제의 교육 문제화”를 주장한다.(조용환(2021), 《교육다운 교육》, 바른북스, 272쪽)[/ref] 등의 말로 표현한다. 각종 사회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은 교육이 실패를 거듭한 결과, 이에 실망한 대중의 환멸과 질타가 학생, 부모, 교직 종사자, 교육운동 단체, 교육 기관 등의 교육 행위체(actant)들과 그들이 입안하고 실행하는 교육 활동, 교육 연구, 교육 제도에 집중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말들이다. 이 글에선 교육적 수단이나 의미론이 정치, 경제 등 다른 삶의 형식에 확대되거나 담론적 효과를 유발하여 교육 및 교육 행위체들을 향한 과도한 기대와 실망을 조장하는 메커니즘을 ‘교육화’로 통칭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교육화의 시대


교육화의 양상은 특정 사안에 대해 공동체 성원들이 과잉 반응을 일으키는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의 모습과 일면 유사하다. 바실 베른슈타인은 이 개념을 교육화에 적용하여 ‘교육적 공황(pedagogic panic)’의 발생을 설명한 바 있다.[ref]Berstein(2001), From pedagogies to knowledges, Towards a sociology of pedagogy. Peter Lang.[/ref] 도덕적 공황은 ① 대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 ② 과도한 적대감, ③ 구성원의 일탈 행위가 위협을 준다는 사회적 인식, ④ 대상에 대한 경험적 증거와 관심 정도의 불균형, ⑤ 그러한 반응들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휘발성을 특징으로 한다.[ref]Cohen(1972), Folk devils and moral panics : The creation of the mods and rockers, Routledge.[/ref] 이는 찬양과 비난의 감정이 강하게 표출되는 교육화의 양상에 무리 없이 적용된다. 가령 현대 사회는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적대감이 공존하고 있으며, 잘못된 교육과 행위체들이 사적 지위 및 국가 경쟁력 하락 같은 개인적·사회적 위협을 초래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고, 교육 문제로 지목된 사태의 중요성과 위험성이 실제보다 과장되는 측면이 있으며, 이 모든 반응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ref]전상진(2011), 〈누가 왜 교육을 경멸하는가? : ‘교육 경멸’ 논법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의 모색〉, 《문화와 사회》, 10(1), 357쪽.[/ref] 교육으로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어 왔던 사람들이 불안정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과민한 정서를 분출하는 교육적 공황의 출현은 교육에 대한 찬양과 비난이 교차·순환하는 교육화의 한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이름을 붙인 무수한 개혁들이 열렬한 기대 속에서 즉각적·일회적·산발적으로 시행되고, 그 패턴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역사, 새롭게 주목받는 개혁 요구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개혁이 동력을 잃고 사라지는 세태, 그로 인해 한정된 자원과 노동이 엉뚱한 곳에 낭비되는 문제는 이런 교육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결핍된 인간을 훈육하고 계몽해야 한다는 주형(鑄型)적 교육관, 피교육자에 대한 윤리적 연민, 학교의 병영화가 보편화된 건 교육이 인간과 사회를 의도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전능의 환상이 작용한 결과이며[ref]우정길(2025), 《전지전능 판타지와 교육의 길》, 피와이메이트.[/ref], 무력감에 시달리는 부모, 교사, 교육학자의 등장은 그 환상이 무너진 결과로 볼 수 있다.[ref]전상진(2011), 앞의 글, 333쪽.[/ref] ‘교육의 실패’, 나아가 ‘사회의 실패’의 원인을 제공한 교직 종사자들에게 업무 스트레스 및 실직의 공포를 주어 자기 과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압박하는 정책(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이 정당화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ref]Lucey & Reay(2002), A market in waste, Discourse, 23(3); Dworkin(2007), School reform and teacher burnout, Gender and education, Sage; McDermott(2007), “Expanding the moral community” or “Blaming the victim”?, American educational research journal, 44(1).[/ref] 모순적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교육 행위체들은 일부 과제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는데[ref]니클라스 루만과 칼-에버하드 쇼어는 학교가 성장·발달/평가·선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이중적·양면적 모습을 보이는 까닭에 비판을 키울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에 처해 있다고 분석한다. 데이빗 라바리, 데이빗 타이악, 래리 큐반, 미리암 벤-페레즈 역시 교육에 거는 다양한 기대(형평성/수월성, 접근성/효율성, 민주주의/자유주의 등)가 빈번히 충돌하는 까닭에 교육 개혁이 일회적·비체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면서, 경합하는 요구들 사이의 마찰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모두 해내지 못한 책임을 교육에 미루는 건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Luhmann & Schorr(2000), Problems of reflection in the system of education, Waxmann; Ben-Peretz(2001), The impossible role of teacher educators in a changing world, Journal of teacher education, 52(1); Labaree(2008), The winning ways of losing strategy : Educationalizing social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Educational Theory, 58(4), pp. 447-460.; 데이비드 타이악  외, 권창욱·박대권 옮김(2011), 《학교 없는 교육 개혁》, 럭스미디어)[/ref], 이로 인한 빈틈, 허점이 보일 때마다 새로운 개혁이 추진되고, 또다시 한계에 봉착한 그들이 후속 개혁을 맞이해야 하는 끝없는 굴레가 이어지는 것이다.[ref]Cuban(1990), Reforming again, again, and again, Educational researcher, 19(1).

  Ricken(2007), Op. cit.[/ref] 


교육에 대한 깊은 충정과 진정성에서 나온 ‘비판’들이라 해도, 이러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 교육의 기능과 규범을 폭넓게 설정한 뒤, 이를 감당할 교육 행위체들의 전문성과 책무성을 준엄히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할 수 없는 일, 할 수는 있으나 규범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일, 해야 할 의무는 있으나 다른 의무보다 우선하지 않는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질책하는 것은 건강한 비판이 아니다. 이는 실현 불가능한 당위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사례나 일부 활동에서 성공적으로 해낸 일을 모든 교육 활동이나 전체 교육 체계가 해낼 수 있는 일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게다가 교육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에 관심을 쏟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효과 또한 이롭지 않다.


릭켄이 ‘교육 경멸’이란 말로 표현하려 했듯, 대개 사람들은 문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비판을 넘어, 특정 교육 행위체들을 조롱하고 공격할 의도로 교육의 실패를 추궁하는 모습을 보인다.[ref]Ricken(2007), Op. cit.[/ref] 이러한 반응이 부모, 교사, 교육학자 등을 향한 부당한 평가나 대우로 이어진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교육화의 영향이 단지 ‘교육계’에 대한 경멸과 부담을 가중하는 찻잔 속 태풍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군의 학자들은 현대 사회가 강압보다 동의에 기반한 교육적 양식을 통해 국가적 통제·규제·거버넌스를 수행하는 ‘총체적으로 교육화된 사회(totally pedagogised society)’로 진입했다고 설명하면서 교육이 특정한 의식, 정체성, 욕망을 형성·확산하는 상징적 통제의 도구로서 일상과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담론적 효과를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ref]Bernstein(2000), Pedagogy, symbolic control, and identity, Rowman & Littlefield; Singh(2025), Pedagogic governance : theorising with/after Bernstein,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of education, 38(2).[/ref] 이들에 따르면, 지배 권력은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누구든 지속적 변신을 꾀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자기 계발이라는 내·외적 명령에 따라 삶의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생(the whole of life) 및 평생(whole life)의 학습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관리함으로써 담론적·정동적 통제력을 행사한다.[ref]이와 유사하게, 얀 물리에 부탕은 현대의 인지 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 체제에서 자본과 권력이 인간의 활동을 효율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지적 욕구(libido sciendi)를 불러일으키는 체계적 착취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Boutang(2012), Cognitive capitalism, Polity; Singh(2014), Performativity and pedagogising knowledge: Globalising educational policy formation, dissemination and enactment, Journal of education policy, 30(3))[/ref] 그러나 정상, 유능, 성공을 향한 지속적 변신이라는 교육의 약속은 모두에게 지켜지지 않는다. 국가와 자본은 개인이 자유 의지와 능력을 발휘하여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호도하지만, 정작 개인은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려 소진되고, 그로 인한 고통과 상실은 개별화·원자화되며, 교육과 사회의 문제는 공적 해결에서 멀어져 탈정치화된다. 로런 벌랜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육은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ref]잔혹한 낙관은 대상이 제공하는 약속이 너무 절실해서, 그 낮은 실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중독적 낙관을 놓지 못한 채, 현재의 삶과 상실의 애도를 유예하려는 욕망을 뜻한다.(로런 벌랜트, 박미선·윤조원 옮김(2024), 《잔인한 낙관》, 후마니타스)[/ref]을 유포하고 개인에게 역량과 책임을 부여하여 자발적 규제를 가능케 하는 통치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그 흔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부정적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빈곤, 홈리스, 범죄 등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는 견해가 힘을 얻으면서 자존감 운동(self-esteem movement)처럼 개인의 정신적 특성을 가정과 학교의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는 캠페인이 확산됐다.[ref]Cruikshank(1999), Revolutions within: Self-government and self-esteem, The will to empower: Democratic citizens and other subjects, Cornell University Press.[/ref] 정부의 자금 지원과 심리학자·교육학자들의 이론적 지지로 성장한 이 운동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한국의 자존감 열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식사하는 것, 소위 ‘밥상머리 교육’이 가진 효과를 과장하는 것도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같이 밥 먹는 행위만으로도 수많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정말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일상의 교육을 강조하는 프로그램들은 그 효과도 불분명하거니와, 개별 교육 활동에 대한 과도하고 왜곡된 기대를 유발하여 각종 사회 문제의 원인이 (인기 없는 경제적·정치적 해법 대신 생색 내기 쉬운 학교 정책을 펼친 정부가 아니라)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을 잘못 지도한 부모나 교사, 혹은 좋은 교육 방법이나 원리를 제시하지 못한 교육학자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ref]Furedi(2008), Paranoid parenting, Continum.[/ref]



다시 교육으로


2011년에 “피곤은 간 때문이야”라는 어느 광고의 노랫말이 유행한 적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시청자가 피로의 모든 원인을 간으로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시정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런 선전이 상업 광고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피곤’을 ‘사회 문제’로, ‘간’을 ‘교육’으로 바꾸어, “사회 문제는 교육 때문이야”라고 되뇌는 광고들은 교육 비판의 단골 소재다. 이 역시 사회 문제의 (‘어떤’ 아닌) ‘모든’ 원인을 교육이라고 오인하게끔 만드는 허위·과장 광고지만,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다. ‘모든’과 ‘어떤’이 교묘히 뒤섞여 교육에 대한 찬양과 비난의 패턴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교육은 간과 달리 누명을 벗을 길이 없다.


그러나 교육은 사회 변화에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이라 할 수 없다.[ref]파울로 프레이리, 교육문화연구회 옮김(2000), 《프레이리의 교사론》, 아침이슬, 111쪽.[/ref] 개인, 교육,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무시하고, 광범위한 사회 문제의 책임을 교육에 따져 묻는 건 엉뚱한 일이다. 교육 비판이란 무엇보다 본연의 가치에 비추어 교육을 음미하고 평가하는 작업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교육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교육의 역할 및 한계를 분명히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교육이 할 수 있는 일,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해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교육을 비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교육화의 흐름을 벗어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다. 교육화가 단지 정치·경제 등 삶의 여러 형식을 총체적으로 규율하고, 교육 행위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조장하는 억압으로만 기능했다면, 그 흐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들 수도 없는 짐을 떠넘기는 물결을 거스르기보다 기어이 짐을 짊어지고 그 물결을 따르려는 습속에 더 이끌린다. 교육의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청산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부모, 교사, 교육학자들에게서 자주 터져 나오는 역설이야말로 교육화의 핵심 요건이다.


교육화의 동력은 교육 행위체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지 않는 데 있다. 교육화된 사회는 교육 행위체가 자신의 권한·권위·권력을 확대하고, 교육적 이상을 실현·실험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지지를 얻고 강화된다.[ref]헤르만 기섹케, 조상식 옮김(2002), 《근대교육의 종말》, 내일을여는책; Bridges(2008), Op. cit., p. 462.[/ref] 그들이 당위와 현실의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건 교육화의 흐름이 외부의 힘으로만 강제되지 않고, 권력 의지와 이상적 신념을 지닌 행위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ref]전상진(2011), 앞의 글, 347쪽.[/ref] 사회 문제에 대한 외부의 책임 전가, 그리고 사회 문제에 자발적으로 대처하려는 내부의 의지가 모두 교육화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교육 행위체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휘둘리는 희생양일 수도, 교육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을 메꾸기 위해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동적 주체일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화의 책임을 통제의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하는 지배 권력, 또는 교육 외부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사회 문제의 책임을 교육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불공평한 일이다.


우리는 교육 실천, 교육 연구, 교육운동 등 이른바 ‘교육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활동과 논의들이 교육의 내포와 외연, 그 역할과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건너뛴 채 교육 관련 용어들을 각기 다른 의미와 의도로 사용하면서 ‘교육 구국론’과 ‘교육 망국론’에 갇힌 소모적 논쟁을 지속하게끔 은연중 방관하고 동조해 온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교육의 문제라고 말해 왔던 게 실상 거기에 쓰인 어휘조차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f]장상호(2005), 앞의 글; Biesta(2011), Disciplines and theory in the academic study of education, Pedagogy culture & society, 19(2); Biesta (2015), Improving education through research?, Policy futures in education, 14(2).[/ref] 당면한 문제 해결이 절실하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의 영향력과 신념을 퍼뜨리기 위한 요량으로, 교육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원론적 물음을 생략한 채 교육의 수단적 기능을 강조하고 즉각적인 개입을 요청해 왔던 일상의 말들을 곱씹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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