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기획] 나의 ‘동료’ 시민을 어떻게 찾을까? | 하승우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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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으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나의 ‘동료’ 시민을 어떻게 찾을까?


하승우  anar00@hanmail.net

이후연구소 소장



얼마 전에 우리 집 청소년과 각시가 말다툼해서 가 봤더니, 청소년이 대뜸 “아빠도 페미니즘을 지지해?”라고 묻는다. “아빠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데”라고 답하자 살짝 실망한 눈초리다. 논쟁은 영화 〈파일럿〉으로 가볍게 시작해서 여자 축구에 대한 지원으로 맥락 없이 흘렀던 것 같다. 남자 축구에 대한 지원도 부족한데 왜 실력이 부족한 여자 축구를 지원하느냐는 불만과, 축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제한받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청소년의 불만은 평등한 사회를 부정하거나 약자를 차별해야 한다는 의도보다는,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에 가까웠다. 집에서 여성 차별의 현실을 잘 겪어 보지 못한 청소년에게 각시의 이야기는 와닿지 않았고, 남자 중학교에서 또래들이 유튜브로 공유하는 정보는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게 했다.


일단은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선에서 논쟁을 끝냈고, 우리는 다시 같이 농담하고 밥 먹고 껴안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건 아니다. 청소년은 아빠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청소년이 어떤 이야기들 속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와 청소년 모두 서로가 처한 현실에 관해 더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서로 합의를 볼 시간이 빨리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그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계급에 대한 자각과 대화


작년 12월,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실패한 이후 그를 지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극우 세력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갑작스런 등장은 아니었지만 서울서부지방법원 난입 사건은 폭력에 대한 공포까지 자극했고, 사회의 관심이 커진 만큼 분석과 처방에 관한 이야기도 늘어났다. 그 처방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공교육이나 민주시민교육의 강화인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지금의 현상은 새로운 극우의 등장이 아니라 극우의 결집과 정치 세력화, 혐오를 공유하는 정치와 종교의 결탁, 양당 구조의 고착화처럼 고질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되었는데, 교육이 정말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변화의 계기는 필요하지만 그것을 교육의 ‘강화’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마을공동체, 주민 자치, 사회적 경제, 민주시민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많은 교육과정들이 진행되었음에도 왜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 소통과 관계, 신뢰와 공동체를 강조하는 교육들이 극단적인 혐오나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을 왜 막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학’(《페다고지》)을 쓴 파울로 프레이리는 우파와 기득권의 세계관을 비판했지만 좌파의 분파주의도 비판했다. 자신들만의 확실성을 주장하며 논리를 진리로 바꾸려는 좌파의 분파주의도 우파의 논리만큼 위험하다고 봤다. 프레이리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건 새로운 내용으로 민중을 의식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역사의 과정에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봤다.


책임 있는 주체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말을 건네는 사람부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다. 프레이리는 《희망의 교육학》에서 그 고백으로 글을 시작한다. 자녀를 때리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강연을 하던 프레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이나 희망을 꿈꿀 권리가 없는 삶,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에 관해 아는지를 묻는 농부의 질문을 받고 ‘계급적 지식’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자들의 세계를 수용하게 되는 구체적인 현실을 파악하지 않고 당위적인 주장으로 그들의 침묵을 설득하려는 좌파의 시도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정치를 방해한다. 극우의 등장을 막겠다는 이런저런 처방전이 불편했던 이유는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없이 당위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서였다.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윤석열의 논리나, 극우의 세계관을 계몽의 빛으로 선도해야 한다는 논리는 얼마나 다를까?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극우 논리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좌경화된 교육 헤게모니를 탈환해야 한다는 우파의 주장과 또 얼마나 다를까?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알려 주마’ 하며 음모론을 설파하는 유튜버들과는 또 무엇이 다를까?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없이 뱉어지는 말들이 새로운 세계를 열긴 어렵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피억압자는 억압자의 견해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거나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는데, 대화는 그것을 억누르거나 피하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가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와 나를 다른 존재라고 분리시키지 않고 우리가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함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참된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발견해 내려는 시도가 바로 대화이다. 프레이리는 이런 수평적 관계에서 이 세계를 새롭게 이름 지으며 비판적 사고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대화라고 봤다.


일방적인 교육보다 대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공통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상식’은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각과 배경지식인데, 지금은 그 상식이 무너졌다.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언어, 해석의 기준, 가치 지향,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는데,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통해 인식과 세계관의 차이를 바로잡겠다는 발상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지금 우리는 세계를 새롭게 이름 지으며 서로의 공통성을 찾아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 안의 허약한 민주주의


“내란에서 내전으로”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감 있는 구절로 다가올 줄 누가 알았을까? 내전은 적대적인 두 세력이 체제의 주도권을 놓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대화가 실제로 가능할까? 대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데 협상이나 타협, 화해가 가능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부터 차분히 돌아볼 때이다. 몇 년 전부터 태극기 부대의 집회를 볼 때마다 ‘저거 예전에 우리가 썼던 방식인데’, ‘저런 건 또 언제 베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국민 저항권’까지 언급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논리가 어디까지 따라올까 하는 걱정과 함께 우리의 방법이 차별성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언어도 비슷해졌다. 우리가 그들을 기득권이라 불렀다면 그들 역시 ‘좌파 기득권’이라는 언어를 따라 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용한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듯이 그들도 격려하고 지지하고 있을 것이다. 깃발을 보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거리에 나오는 태극기 부대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사람들도 아니다. 어쩌면 같은 학교, 직장, 마을 내에 공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같이 지내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어느 선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까? 그 경계선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세계는 다른 듯 닮아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곤란함이 우리의 가능성일지 모른다. 안팎의 구분 없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다만 우리 안의 민주주의가 극우를 설득하고 바꿔 낼 수 있을 만큼 정말 단단할까? 1인 1표의 민주주의, 형식적인 민주주의 운영 구조, 영향력 있는 인물에 의존하는 활동 방식, 성과 중심의 평가 방식은 일정한 성취를 거뒀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민주화 이후 일상과 생활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약해진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주민 자치, 마을공동체, 사회적 경제 등을 봐도 그 어디에서도 민주주의가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곤 한다. 서로의 관계가 두터워지거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바탕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며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지는 건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더딘 점도 있지만 일상과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극우나 보수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재구성한 이론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니 교육에 앞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강화시키는 것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길이기도 하다.



수용소로 향하지 않을 방법


서울서부지방법원 난입 사건 이후 많은 사람이 파시즘의 출현을 언급했다. 나 역시 파시즘과 관련된 책을 자꾸 뒤적거리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파시즘의 동력이 되었던 ‘분노한 대중’의 출현에 주목했다. 근대로 들어선 대중은 자신들의 신분과 정체성을 규정하던 봉건 질서가 해체되고 홀로 경쟁과 불안에 노출되면서 점점 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잃고 사적인 욕망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자신과 국가를 이어 줄 관계와 조직을 잃어버린 대중은 국가에 대한 위협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분노했다. 파시즘에게 필요했던 아래로부터의 동력은 이렇게 불안과 분노에 떨며 언제든지 국가의 부름을 받을 준비가 된 대중이었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된 분열과 엄청난 경쟁에 노출된 대중을 동원해 기성 질서를 공격했다.


아렌트가 이 대중에서 자기 중심적인 비통함(self-centered bitterness)이란 감정에 주목했다. 타자를 상실하고 공적인 세계에서 밀려난 개인은 결정을 내리거나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고통을 피하려 하고, 타인과 논쟁할 때도 감정이 받은 상처에 울컥해 논리를 무시하곤 했다. 뭉쳐져 있지만 자기 안에 갇힌 개인들, 그래서 매우 활동적이지만 무리가 없으면 무기력하고 약한 존재들이다. 아렌트는 대중을 홀로 놓아두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얼마나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지가 금방 드러난다고 봤다. 이 대중의 모습은 지금 좌와 우 모두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를 대면하려는 용기를 내기가 어렵고, 우리 역시 끊임없이 뭉쳐 있으려 한다.


물론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했던 당시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997년 IMF 경제 위기와 대규모 구조 조정, 그 이후 재벌 중심의 하청 구조와 사회 양극화의 심화, 2008년의 금융 위기, 2020년의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 사회는 자신을 보호해 줄 공동체를 잃고 불안에 떨며 분노를 표출할 약한 상대를 찾고 혐오를 뿜어내는 대중을 만들어 냈다.


만일 이 불안하고 분노한 대중이 파시즘으로 향한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당시 아렌트는 ‘수용소’라는 장소에 주목했다. 아렌트에게 수용소는 물리적인 공간인 동시에 우리가 타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을 뜻하는 장소였다. 사람들을 강제로 감금하는 수용소는 전체주의의 실험실이자 수용소 밖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개성, 다양성을 잃고 삶에만 집착하게 된 수용소 내부의 존재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죽은 존재인 ‘산송장(the living dead)’, 요즘 말로는 좀비가 된다. 수용소 밖의 사람들도 그 수용소를 보며 두려움에 타자의 존재를 하나씩 지우며 산 자의 세계를 산송장의 세계로 만든다.


이 수용소에 이르기 전에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지만 가장 쉽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어렴풋이 그 답을 알고 있다. 나의 동료, 동료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어떤 모험을 떠나야 할까?


중요한 점은 그 과정에서 어떤 존재를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다양한 속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때론 위협적이고 때론 호혜적이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사회 위기가 더욱더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존재의 모순은 더욱더 심하게 드러날 것이고 매순간마다 불안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수용소로 향하지 않도록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함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시대의 민주시민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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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