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호[특집]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 몫/목소리가 소멸된 학교, 모두가 돌보는 민주주의로 | 조진희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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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몫/목소리가 소멸된 학교, 모두가 돌보는 민주주의로



조진희  

cham1003@hanmail.net

서울 초등 교사




그와 다시 재회한 것은 10여 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그와 나는 같은 교사노조의 조합원이었다. 어느 동료 조합원이 호소한 고통에 응하기 위해, 나는 노조 활동가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갔다. 관리자와 노조 활동가로서 대면해야 하는 그 자리는 어색하고도 불편했다. 2시간여의 대화와 토론을 했지만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답답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마을 길을 걸으며 숙고했다. 결론은 그는 “교장으로서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였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관리자의 직간접적인 리더십이 누군가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2023년 7월 18일 알게 되었다.


37호봉 경력인 나는 비혁신학교(일반 학교)에 반, 찐혁신학교에 반 정도를 근무했다. 찐혁신학교라 함은 추가적인 예산과 교사 초빙권의 이익만 취하고 학교 구조와 문화는 비혁신학교와 다르지 않은 이른바 ‘무늬만 혁신학교’와 달리 진짜 혁신학교라는 뜻이다. 학교장도 1표의 의결권을 가지며 엄격한 인사 규정과 투명한 예산 운용이 찐혁신의 기본이다. 또한 교육과정과 학교 운영에서 교사, 직원, 학생, 학부모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찐혁신의 두 번째 조건이다.


그러나 비혁신학교, 무늬만 혁신학교, 찐혁신학교 등 모든 학교의 민주주의 실현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자기 통치(자치), 평등,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서 볼 때, 학교의 첫 번째 장벽은 한 명의 낙하산 관리자와 다수의 구성원이 있다는 점이다. 학생의 보호자들까지 보통 규모의 학교는 수백수천 명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다. 교사가 하루에 2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는데, 이때 사유가 ‘수업 연구’면 안 되고 ‘학교 업무’여야 하는 게 보통 학교들의 기준이다. 반면 찐혁신학교는 수업 연구도 초과 근무로 인정한다. 모두 교사의 업무인데 찐혁신학교에서는 초과 근무로 인정되고 다른 학교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한 달에 한 번씩 교직원들은 자기 연수와 업무 협의를 위해 근무 시간 중에 연수를 할 수 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무, 행정, 과학, 전산, 상담, 특수보조, 사서, 늘봄 등의 교직원들도 점심시간 이후에 출장을 신청해서 ‘자율연수’를 하면서 업무 협의와 친목을 다진다. 그런데 이러한 학년이나 부서 연수를 허락하는 것도 한 명의 교장이다. 다른 학교로 전출 간 선생님이 “왜 우리 학교는 월 1회 연수가 없을까요?”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같은 공립 초등학교인데도 근무 환경과 조건이 다르고 차별이 생기면 교육의 질 또한 격차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왕을 원한 개구리’는 없다


학교 교육과정과 운영에서 법적으로 해야 할 업무는 관료적 공문에 의해 표준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업무의 세부 내용과 방식은 학교장이 재량권을 발휘하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 사이에 차이가 크다. 자치, 자유, 평등은 권위주의적인 문화, 1인 독재 체제에서는 발휘될 수 없다. 토론 안건이 미리 공지되지 않으며, 관리자의 아바타인 교무부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업무를 지시하고 지시받기만 하는 교사 회의 문화는 상당수의 학교에서 온존한다. 질문이나 제안을 하여 시간이 늘어지면 시계만 보는 회의 문화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표적이 된다. 둘러앉아 생각의 차이를 교류하는 비생산적인 ‘토론이 있는 회의’는 효율적이고 빠른 독재 시스템을 당해 내지 못한다. 저항하지 않고 구성원들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학교장의 교육철학과 방침”대로 학교의 시계는 돌아간다.


학교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장벽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학교장을 그 구성원들의 손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솝우화에 나오는 ‘왕을 원한 개구리’가 아니다. 학교는 근대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원리인 대의제에서도 열외인 상황이다. 치열한 경쟁과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여 차곡차곡 점수를 모아 교장 자격증을 따고,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아 교육감이 내리꽂은 관리자가 교장이 되는 시스템 속에서 학교는 생래적으로 불평등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비민주적 공학 전환, 사학 비리, 재단의 무차별적 고소와 악의적 기사에 맞서 싸운 동덕여대 학생들이 국회에 ‘총장 직선제 의무화 청원’을 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다.


물론 학교민주주의가 제도 개혁만으로 거저 주어지진 않을 것이다. 민주적인 인사권과 예산권,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을 갖는 찐혁신학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 역시 험난했기 때문이다. 개교 때부터 둘러앉아 회의 규정과 인사 규정을 만들고, 규정을 바꾸려면 TF팀을 구성하고 다른 학교 사례를 모으고 몇 번의 회의를 거듭해야 만족스러운 안이 만들어졌다.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고 때론 옆길로 새는 회의를 지루하게 견디고 나서야 평등하고 자유로운 회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다. 또 누구라도 안건을 낼 수 있고 자유로운 토론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고, 안건에 관한 정보 접근의 평등과 학교장도 1인 1표인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학교장의 원스톱 결정이 아닌 다수의 교육철학이 경합하고 불화하면서 지그재그로 결정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교사들끼리는 자유롭고 평등한가


“평등에 기초하며, 자유를 뒷받침하는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학교에 실현하려는 교사 문화는 존재하는가? 교사들의 일상에서 자유와 평등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수업, 생활교육, 학교 업무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교육활동을 자유롭게 제안하고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다. 학교 일은 학년 및 부서 보직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보직 교사를 뽑고 임명하는 과정인 인사 규정은 대다수 학교에 앞서 이야기한 1인 체제에 의해 좌우되거나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애덤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2024)에서 개인의 선호를 고려한 최대 다수의 자유로운 집단적 의사 결정 체제는 4개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하였다. ‘① 모든 참여자는 집단적 의사 결정에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② 모든 참여자는 집단적 의사 결정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③ 집단적 의사 결정은 그 결정을 실행하도록 선출된 사람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 ④ 법적 질서 아래에서 부당한 간섭 없이 안전한 협력 관계가 가능해야 한다.’


지금 근무 중인 학교는 보직 교사를 순환하거나 호선하지만, 대개는 학교장과 교감의 일방적인 설득과 종용에 의해 ‘간택’된다. 1인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이른바 미운털 박힌 교사는 부장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 학교 교육과정과 업무는 민주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자유롭고 안전한 교사들의 협력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이는 교사들 개개인의 탓이 아니며 비민주적 인사 시스템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사 규정과 업무분장을 정비하고 실행하는 것이 학교민주주의의 두 번째 단추다. 자유롭고 안전하며 협력적인 교사 문화의 길은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얼마 전에 독서 모임에서 만난 중학교 초임 교사는 교감 선생님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며칠씩 하는 초임 교사를 위한 직무 연수를 받으라며 함께 발령받은 7명의 초임 교사들에게 종용했기 때문이다. 연수 내용에 ‘공문 작성하기’, ‘사업 계획서 쓰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미 발령 전에 연수에서 들은 내용이고, 근무하면서 다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잘 모르면 AI에게 물어서 해결하기도 한다.) 


저경력 교사들은 상대적으로 학교에서 가장 배려하고 경청해야 할 집단이다. 교육청은 연수를 기획할 때 초임 교사들의 니즈와 특성을 파악하긴 한 것일까? 한편 학교 업무의 주축인 4050 세대 교사들은 금요일 방과 후에 메신저가 꺼져 있는 교사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교사의 노동이 어떻게 재구조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학교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분석이 필요하다.



이성애 중심주의와 나이주의


한편 이성애 중심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보이지 않게 재생산하는 학교에서 목소리를 잃은 집단으로 성소수자 교사들이 존재한다. 성소수자 동료들이 존재함에도 가시화되지 못하는 학교에서는 누구나 선량한 차별과 혐오를 할 가능성이 있다. 교사들의 상황이 이러한데 학생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여 전교조 성평등특별위원회는 성소수자교사모임QTQ와 함께 ‘무지개 배움 꾸러미’를 제작 배포했다.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성소수자 학생들은 차별로 인한 학업 중단이 아닌 성소수자 포용적인 교육과정, 성별이분법적인 학교 문화 개선, 모두에게 안전한 학교와 상담실을 간절히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민과 학교 구성원이 성적 주체로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포괄적 성교육 법제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끝까지 연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정체성 차이 가운데 나이 요소가 있다. 학교는 앞 세대의 먼저 배운 사람이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학생의 관계를 주축으로 한다. 학문과 교과의 전문가인 교사가 성취와 발달을 아직 이루지 못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학교의 존재 이유이다. 나이와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기울어진 관계는 학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교육적이거나 반인권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른바 ‘미성숙한 학생에 대한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며, 소수의 성인 교사와 다수의 미성년 학생들이 함께 살아가는 학교 구조에서 ‘훈육을 위한 보호와 통제’가 당연시된다. 


공현(2024)은 “어린이·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는 그들을 평등한 인간이자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면서 “보호는 보호하는 주체와 보호받는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학교는 가르치고 돌봄을 하는 자와 배우고 돌봄을 받는 자라는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다. 교장과 교사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로 ‘복붙’된다. 모두가 만족하는 좋은 교육은 어쩌면 헌법 조문에나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긴장. 이것이 키워드다. 노예제도와 식민주의부터 파시즘의 출현까지, 핵전쟁 공포부터 기후변화 위기까지 민주주의의 어두운 역사를 되돌아보자. (……) 나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치는 그런 거다. 이상이자 원칙이며, 항상 멀리 있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지평선에 걸려 있는 것, 우리가 계속 손을 뻗지만 잡히지 않는 것이다. 


교사-학생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라는 ‘이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학교 구조와 문화라는 ‘현실’의 간극을 좁히려는 과정 자체가 학교민주주의의 여정이다. 몇 년간 내 학교의 학생들은 체험학습으로 놀이공원을 가게 해 달라고 학교장과의 간담회에서 주장하고 설문 조사를 도배했다. 성인인 내가 먹기엔 맛난 급식이 맛이 없다며 더 나은 메뉴를 촉구한다. 체육 교과를 지금보다 더 많이 해 달라고도 한다. 강압적인 학원 수강과 부실한 편의점에는 순종하면서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학교는 일회적인 자본주의적 소비 공간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공간이다. 민주주의의 약속은 권력자가 만들고 깨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부단한 각성, 창의, 그리고 투쟁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 그것은 학교 구성원들이 결국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긴장 속에서 쟁취해 나가는 것임을 우리는 지난 12월 3일부터 6월 3일까지의 경험에서 터득하지 않았는가?



배제와 혐오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라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며 푸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학생과 학생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더욱 느껴질 것이다. 끔찍한 학교폭력이 기사화될 때마다 ‘어떻게 저런 일이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질까, 그 학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각해 본다. 학생들 간에는 교과 성적 외에도 사회경제, 젠더, 외모, 장애, 성격 등이 교차적으로 얽혀 능력주의적 서열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신경정신적인 질환이 있거나 사회정서적인 발달이 느린 학생들을 꺼리는 문화마저 생겨나고 있다. 학교와 학급 규칙을 쉽게 어기거나 불응하는 ‘부적응 학생’, 수업을 방해하고 놀이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교사 혼자 돌보는 ‘독박 교실’의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다.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누구도 서로 배제하고 혐오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데도 학생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차이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에서 비롯된 각자도생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학벌 만능주의 입시 체제는 이러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하는 관계 지향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교사 문화와 마찬가지로 효율성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교실에서 진도 빼고 평가하는 일을 반복하도록 설계된 것이 국가 교육과정에 종속된 학교 교육과정이고, 학교 안팎에서 발생하여 교실에 스멀스멀 들어온 혐오, 차별, 배제는 보이지 않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그나마 초등학교는 담임 중심의 수행평가를 통한 자율성의 여지가 있으나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수행 지옥’으로 불리는 내신 경쟁, 단 1회의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입시 경쟁이 심화된다. 몸과 영혼의 자유를 빼앗는 입시 경쟁 교육을 하면 할수록 학생들 사이의 차이를 존중하는 시민적 권리는 사라지고,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상품’이 대량 생산된다. 학교의 목적이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위한 시민성 함양은 실현되지 못하고 수능 등급 찍어 내기로 쪼그라든 현실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민주주의는 발붙이지 못하고 가르치지도 않은 혐오와 차별은 공기처럼 스며든다. 



몫/목소리가 소멸된 학교


내 석사 논문 〈스쿨미투운동이 학교민주주의에 주는 함의>(성공회대학교, 2020)에서 나는 학교민주주의를 데이비드 헬드(D. Held)의 ‘자치’에 초점을 맞춰 “학교 구성원들이 학교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면서 학교 자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교사들은 학교의 주인으로서 자각하고 있는가? 직원들은 사이드로 소외되어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학습 노예에 가깝지 않은가? 학부모들은 방임과 과잉의 극단에 서 있지 않은가? 결국 학교의 주인은 학교장뿐인가?


나는 몇 년 전 교사 회의에서 학교장과 보직 교사의 잘못을 지적하며 비난을 퍼붓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정보에서 배제된 평교사의 위치에서 그렇게 했음에도 그 사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교장은 나중에 ‘미안하다’고 했고 동료 교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후에 2~3번인가 잘못된 처사를 빌미로 회의를 보이콧했다. 사적으로 만난 동료 교사들은 내 행동을 두고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하면 안 되었다, 과격했지만 필요했다, 업무 담당 부장이 너무 곤란했다…….’ 손준종(2019)은 민주적 교육을 위한 “불화와 불일치에 대한 민감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합의’와 ‘불화’는 ‘삶의 질적 향상’과 ‘삶의 기회의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모두 중요하다. 민주적 교육은 ‘합의’와 ‘동의’를 추구하는 것과 ‘불화’와 ‘불일치’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자를 교육의 규범적 목표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를 교육의 비판적 및 해방적 목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 ‘합의’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 봉합이라는 것과 새로운 합의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갈등과 불화가 정상적인 민주적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합의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늘 흔들리고 새롭게 구성되는 불화의 다른 모습이다. 합의와 불화, 이 둘을 포괄하는 개념이,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는 합의하지만, 그 해석에서의 불일치를 의미하는 갈등적 합의이다. 이런 점에서 무엇이 자유와 평등을 위한 것이냐는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에 노출되지 않고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상호 존중과 관용은 가능하지 않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적어도 회의실에서 퇴장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불화와 불일치의 민감성을 주기보다 가슴 철렁한 ‘충격’을 주었다는 후회(?!). 나는 교장과 부장교사를 비판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다른 교사들에게서 스스로 폭넓은 이야기가 나오도록 유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학교교육과정의 주체로서 발언권을 가지고 찬성이건 반대건 자기 몫의 목소리를 내게 했어야 했다. 양창렬(2016)은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을 빌어 “민주주의는 원래 자연적 질서에 반하여 아무런 자격(몫)도 없는 민중이 권력을 요구하는 실천 과정 자체이며, 그러한 한에서 사회적 불화를 산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모두가 돌보는 민주주의로


학교 구성원들을 그저 객석에서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들 분량의 목소리를 배당해야 한다. 앞의 회의실 사례로 이야기하자면 회의실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관객이 아니라 배우임을 자각하고 플레이하게 해야 한다. 학교의 민주성은 모두가 평등한 실질적인 몫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몫을 고르게 가지고 있다면 그에 맞는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1표를 가지고 있지만 눈치 보여서, 비난받을까 봐, 보복이 두려워서 등 이후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면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다. 목소리의 파워와 격차를 줄여야 한다.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의 돌봄 실천 목록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파워의 격차와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돌봄민주주의는 사회에서 책임의 본질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진정한 평등(평등한 발언권, equality of voice)과 파워의 격차를 줄이는 것에 함께할 것(commitments)을 요구한다. 하지만 기존 민주주의 토론은 사회가 더 큰 평등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이론적 논의 없이 평등한 발언권을 단순하게 다루었다.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결정하건 이기고 지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토론과 표결 과정에서 너무 격차가 나면 그 주장을 하는 소수에게 무안하고 미안한 감정이 들고, 치열한 안건일수록 내 입장으로 결정될 때는 씁쓸하다 못해 ‘아, 다시 토론해야 하나?’ 하는 후회가 생기기도 한다. 회의실에서 혼자 떠드는 사람, 회의실에 오지 않는 사람, 회의실에서 나간 사람, 휴대폰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발언권과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목소리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 학교민주주의는 몫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그들이 느끼는 소외와 비통함을, 내 목소리가 우리 공동체에 한몫했다는 정치적 효능감으로 바꾸는 것이다. 몫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서로 목소리를 내면서 합의와 동의를 향해 갈 때 불화와 불일치는 필수적이며, 그러한 과정이 쌓여야 민주주의 근육을 튼튼하게 기를 수 있다. 



❶  교사단체들도 정치권에 수십 년째 ‘교장 직선제’를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 총선 때 좋은교사운동은 ‘학교 자율성 확대와 관료제 극복’을 위해 교장 직선제를 제안했다. ‘좋은교사운동은 “현행 교장 승진제는 교장의 실질적 역량을 갖추는 과정이라 보기 어렵다. 관료제 극복과 새로운 교장의 역할 모델로서 내부형 평교사 교장 공모제 확대가 필요하다”면서 “공모 교장 선발 과정에서 학교장 직선제 도입으로 학교 구성원의 참여를 높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좋은교사운동, 총선 공약으로 ‘학교장 직선제’ 제안”, 교육언론창, 2024년 3월 22일.)

❷  김재원·정바울(2018), 〈밀레니얼세대 초등 교사의 직업 동기, 직무 인식, 그리고 경력 전망에 관한 탐색적 연구〉, 《교육행정학연구》, 제36권, 제3호, 한국교육행정학회. “첫째, 밀레니얼세대 초등 교사들의 직업 선택 동기는 안정성이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직무 인식과 관련하여 밀레니얼세대 초등 교사들은 기성세대들과는 달리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지향성이 두드러졌고 이런 지향성이 직무 인식 전반에 투영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밀레니얼세대 교사들은 경력 전망과 관련하여 낮은 승진 열망과 이에 수반된 대안적 경력 궤도(예: 교사 리더, 전문상담사, 컨설턴트 등)를 모색하는 양상을 보였다.”

❸  이들의 경험을 연구한 김상래는 “성소수자 교원들은 이중적 마이크로어그레션(일상 속 미시적 차별과 혐오)에 따른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성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성소수자 교사로서 특수하게 겪는 어려움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참여자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이 거절당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를 은폐하였으며, 은폐를 지속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을 했다”고 하였다.(김상래(2023), 〈성소수자 교원의 학교 경험 연구 - 이중적 마이크로어그레션과 제한적 자기표현을 중심으로〉, 석사 학위 논문,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❹  https://bit.ly/무지개배움꾸러미

❺  공현 외(2025), 《노키즈존 한국사회》, 교육공동체 벗, 225쪽.

❻  우에노 치즈코는 “돌봄을 할 권리(돌봄을 하는 자가 돌봄을 하라고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돌봄을 받는 자가 부적절한 돌봄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는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돌봄을 받는 쪽이 1차적 니즈의 ‘당사자’이며 돌봄을 하는 쪽의 니즈는 ‘돌봄 관계’에 놓임으로써 발생하는 2차적인 것이라고 규정짓는다.”(우에노 치즈코(2024), 《돌봄의 사회학》, 오월의봄, 24~26쪽.)

❼  애스트라 테일러(2020), 《민주주의는 없다》, 반니, 24~25쪽.

❽  질병관리청과 여성가족부(2023) 자료에 따르면, 많은 한국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우울감과 고립감, 박탈감을 경험하고 있으며,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11년째 자살일 정도로 불안정한 정서를 경험하는 학생들이 급증하고 있다. 또한 2024년도 학생들의 자해나 학대, 학교폭력과 같은 문제로 초·중등학교에서 위기관리위원회의 개최 빈도가 2023년에 비해 29% 증가했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 동향 2023’에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는 사회정서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2024년 교육부는 ‘모든 학생의 사회정서역량 함양을 위한 지원 강화’를 위해 담당 부서 및 관련 법 제정을 통한 사회정서교육 확대 계획을 발표하였다.(“[교실 창가에서] 사회정서교육의 성공적인 학교 정착을 기대하며”,  〈에듀프레스〉, 2024년 11월 18.)

❾  조안 C. 토론토는 우리 인류가 경제적 삶을 제외하고 인간 존재의 다른 측면들을 백안시해 왔으며, 친밀한 돌봄의 관계 또한 경제의 세계로 쪼그라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민주적 삶의 가장 큰 과제는 불평등을 조성하는 경제적 산물을 생산하면서도(이것은 불평등을 야기한다) 동시에 우리 모두를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조안 C. 토론토, 김희강·나상원 옮김(2024), 《돌봄민주주의》, 박영사, 33~34쪽)

❿  손준종(2019), 〈적대주의에서 경합주의로: 민주적 교육을 위한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 탐색〉, 《한국교육학연구》, 제25권, 제4호, 97쪽.

⓫ 양창렬(2016), 〈자크 랑시에르: 제도도 이념도 아닌 민주주의론〉, 《진보평론》, 68, 59∼87쪽.

 

⓬ 조안 C. 토론토(2024), 앞의 책, 79쪽.

⓭ ‘민주주의 근육’이라는 용어는 자유 스콜레의 ‘민주주의 근육 키우기’ 프로그램에서 가져왔다. (www.jayuskole.net/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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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 가입서 작성시 ‘상호’에 재직 중인 학교나 회사명 또는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 교육공동체 벗 가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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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