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호[후속]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 너희가 만든 규칙이라는 말의 함정 | 최유경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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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너희가 만든 규칙’이라는 말의 함정

‘대안’을 넘어 ‘민주주의’의 학교로



최유경  dbrud_06@naver.com

청소년인권활동가




‘그래도 대안학교는 좀 낫지 않냐’는 말


돌이켜 보니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6년가량이 지났다. 학교를 다니고 또 졸업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학교에 입학하겠느냐는 거였다. 나는 중·고등 과정을 통합한 6년제 대안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아직 누군가에겐 생소할 대안교육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 아니었을까 싶다. 그럴 때 보통은 잘 모르겠다며 얼버무리고 넘기곤 했던 것 같지만, 속으로는 대안교육이 공교육과 어떤 차별점을 가지는지 나 자신에게 되묻고는 했다. 학교를 다니며 과연 대안교육이 공교육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다르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 시기가 종결된 이후에야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되며, 특히 학교를 어떤 경험으로 내 안에 남길지에 대한 고민은 커져만 갔다.


사실 청소년기를, 그러니까 학교를 돌아보면 현재로서 가장 크게 느끼게 되는 건 무력감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나의 청소년기를 돌이켜 보는 건 과거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와 문제의식을 명쾌히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느낀 감정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이들에 대한 부채감이었고 그때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였다. 내가 학교 안에 있을 때 더 목소리를 내어서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졸업한 이후에도 내가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의 현실에 대해 외면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들 말이다. 물론 내가 졸업한 학교는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곤 하는 복장 규제나 체벌 같은 것은 (표면적으론) 없었다. 게다가 사복을 입을 수 있었고,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 일과 시간을 보다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었으며, 해외 체험 학습이나 외부 인턴처럼 도전적인 교육 일정들을 경험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학교가 자유롭고 인권적이었느냐고 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학생인권이나 자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그래도 대안학교는 좀 낫지 않냐는 기대나 관념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다. 대안교육 자체가 공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탄생한 만큼, 공교육에서 쉬이 제기되는 문제들은 덜하리라는 기대는 당연하다. 그렇지만 체벌이나 복장 규제 같은 가시적 문제가 없다고 해서 곧 학생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보기에 아무리 아름답고 인권적인 가치라도,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이 그렇지 않다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걸 배웠다. 



아무도 미안하지 않은 사과 시간


중학교 1학년으로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아마 지금은 학교도 많이 바뀌었을 수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규칙이 꽤 많았다. 한살림 같은 유기농 브랜드가 아닌 곳에서 판매하는, 일명 “일반 음식”은 아예 교내 반입이 불가했고 휴대전화를 비롯한 노트북이나 패드 같은 전자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샴푸나 비누 등 하수구에 흘러 들어가는 모든 건 유기농 제품을 사용해야 했고, 가족들의 허락 없이 학교 밖으로 외출할 수 없는 등 다른 크고 작은 규칙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당시에 가장 크게 느껴졌던 건 전자기기와 일반 음식에 관한 규제였다.


입학 이후 교사들로부터 규칙에 대해 가장 강조받었던 것은, 그것들이 “너희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라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끊임없이 일반 음식에 들어간 GMO가 얼마나 해로운지, 전자기기가 얼마나 함께 살아가는 서로의 소통을 부재하게 만들지 이야기하면서도, 꼭 너희가 만든 규칙이기 때문에 너희가 지켜야 한다며 이야기를 끝맺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든 우리의 규칙들’은 왜인지 완벽히 지켜지지 않았다. 기숙사 입소 날이면 일반 슈퍼에서 파는 간식들을 이리저리 몰래 들여왔고, 새벽에는 배가 고프니 같은 방 언니들과 철로 된 기숙사 간식 통에 봉지 라면을 불려 먹었다. 학년마다 방을 섞어서 쓰니 신입생이 들어오면 같은 방 선배들과 ‘몰래 과자와 라면을 먹는 일’은 꼭 한 번씩 경험시켜 줘야 하는 일종의 문화 같은 거였다. 심지어 꼭 1년에 3, 4번씩 몇 남학생들은 새벽에 기숙사에서 학교로 내려가 식당에 있는 음식을 훔쳐 먹고 컴퓨터실에서 게임을 하는 “식당털이”와 “새벽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컴퓨터실은 하루에 1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외 외부와의 연락은 모두 공중전화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게 너무 답답해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도 알음알음 몰래 썼던 것 같다.


사실 더 중요한 건 규칙을 어긴 것이 발각되는 경우였다. 기숙사 사감 교사에게, 교내 규칙에 관한 학생 자치 기구 구성원들에게, 혹은 서로가 서로에게.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기숙형 대안학교에는 전 구성원이 참여하는 주간 회의가 있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가족회의’였고 다른 학교의 경우 ‘식솔회’, ‘식구회의’ 등 그 명칭은 다양했다. 우리 학교의 가족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사, 학생이 모두 강당에 모여 다양한 학교 운영과 논의, 결정 사항들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 중엔 ‘고백합시다’ 코너가 있었다. 바로 규칙을 어겨 신고당한 학생들이 나와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구하는 시간이었다.


고백하고 사과하는 사유는 다양했다. 일반 음식 반입, 전자기기 사용, 흡연, 음주 등……. 앞서 말했듯 우리가 함께 약속했기 때문에, 지키지 않았을 경우 가족 앞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상세히 이야기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명목의 시간이었다. 보통은 흡연을 끊지 못하는 남학생들, 새벽에 기숙사 방에서 라면이나 과자를 먹다가 걸린 학생들이 나왔다. 누구든 매주 나왔고, 매주 사과를 했다. 하다못해 언젠가는 누군가 학교에 옛날 뻥튀기를 들고 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나누어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 뻥튀기에 유기농이 아닌 조미료(사카린)가 들어 있었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 수십 명이 앞에 나와 사과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언제나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제보했고 가족들 앞에서 ‘고백’하고 사과하는 방식으로 엄벌했다. ‘판옵티콘’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나는 우리 학교가 꼭 그렇다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규제와 감시를 내면화하게 되는 공간 말이다.


나중에서야 조금 놀랍기도 두렵기도 했던 것은, 나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이 모든 규제와 그 방식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학교에 있었던 시기의 나는 항상 페미니즘을 비롯한 인권 문제에 관심이 높았고, 그를 기반으로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의 변화를 상상해 내고 싶었지만, 두 흐름은 좀처럼 내 안에서 맞닿지 못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내가 학교의 규제들을 이미 생활 양식으로서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변명 같지만, 내가 입학하기도 전부터 이어져 왔던 규칙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는 감각을 발견해 내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단초만 품어도 곧장 일반 음식과 전자기기의 유해함에 대해 듣게 되고, 우리가 스스로 정한 대안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문제아가 되는 그 아주 작은 사회 속에서 나는 되도록 미움받거나 이탈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백합시다’ 시간에 나가게 되고 싶지 않았고, 매주 그 앞에 서 있는 이들을 ‘꼴통’이라고 얕봤다. 하지만 그런 나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러 번 잘못을 사과했으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얕봤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재학한 6년간 학교에 늘 동일한 규칙이 동일한 방식으로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매주 열 댓 명씩 나와서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을 3년 내내 했을 때쯤 잠시간의 변화가 있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출범한 학생회가 교내 규칙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와 공감이 매우 저조함을 이유 삼아 ‘규칙 전면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순탄하지 않았고 많은 이들의 반대와 우려 역시 있었으나, 결국은 학내 구성원 2/3 이상의 찬성을 기반으로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이 짧은 반란도 고작 1~2년을 가지 못했다. 특히 뜨거운 감자였던 결국 전자기기는 다시 학교 일과 시간 외에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학습 시간’에는 각자 전원을 끄고 사물함에 넣어 두거나 학급별로 수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대안교육


내가 이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건 꼬박 6년을 살았던 학교를 졸업하기 거의 직전이었다. 우리 학교는 6학년(고등학교 3학년) 때는 1학기를 각자 외부 인턴 과정으로 학교 바깥에서 보냈기 때문에, 6학년들은 2학기가 되어서야 그해의 첫 입교를 했다. 입교 후 첫 가족회의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족회의를 준비하는 학생회 측에서 다시 전자기기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자는 안건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교사회가 아니고, 학생회가 말이다. 나는 당시에 한 학기 정도를 외부에서 보내다 온 상태였기에 전보다는 학교의 규제나 논의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내가 학교를 다닌 6년 동안 쭉 이어져 온 것이었는데도,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당시 학생회는 규칙 백지화 이후 규칙에 대한 고민이 우리 공동체에 없었다며 전자기기 금지에 대한 규제를 제시했다. 무분별한 전자기기 사용이 학내 구성원들의 소통을 방해하고 학생들의 수면권과 학습권을 침해한다는 고루한 학생인권 침해의 논리가, 교사들이 아니라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왜 학생들이 스스로 본인들의 전자기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도무지 감도 안 왔다. 몇 번 손을 들고 전자기기 사용에 대한 규제는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고, 학습권과 수면권이라는 게 그런 방식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발언했더니 그 자리에서 한 교사는 거의 내게 윽박을 지르듯 화를 냈다. 처음엔 자신은 나와 달리 전자기기 규제에 찬성한다고 발언하더니, 내가 연속적으로 그럼에도 반대한다고 이야기했더니 내 발언이 너무 잦으니 제지해 달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그 논의가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회의가 끝나고 또 다른 교사는 나에게 아까의 다툼을 언급하며 “어른들이랑 싸우려고 들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어떤 속뜻을 가지고 했던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대부분의 교사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과 싸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 최소한 내가 곧 떠날 곳이라고 해서 부당한 일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과 싸워야 한다면 그것 역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주장을 하는 어른과 싸울 수 없는 학교야말로 진정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나? 나는 그제서야 학교의 규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또 유지되어 왔는지 깨달았다. 규칙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교사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으므로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규제하는 요지의 안건을 발의했다는 점이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학교의 일상 전반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이 전자기기나 일반 음식 규제에 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라치면 ‘학교의 가치에 동의하는 서약서를 쓰고 들어오지 않았느냐’, ‘대안적 가치에 반대하는 거냐’는 요지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을 도리어 문제화해 왔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사들이 규칙에 대해 가장 많이 한 말은 ‘너희가 만든 규칙이니 너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규칙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결국 규칙이 생기고 유지되는 구조적 배경은 지운 채 표면적 책임만을 묻는 방식이기도 했다. 규제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권력관계는 묵인한 채, 학교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가족’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은 민주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규제이므로 ‘너희가 만들었다’며 규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이러한 논리는 학교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질서가 되어 학생들이 직접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의 규제에 동의하고, 더 나아가 주장하게 만들었다.

 

최근엔 국가인권위원회가 경기도 소재의 한 기숙형 고등학교에 대해 “기숙형 학교 특수성이 학생 인권 침해로 이어져선 안 된다”며 “학교에 학생의 자율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강제적인 자율학습을 중단하고 휴대전화 제한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학교 측에선 “휴대전화 제한은 교육 방해와 사이버 폭력 예방 차원“이라고 해명했다던데, 그 규제 논리는 교육의 종류와 표방하는 가치를 넘어 우리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소년 시기에 인문학 교육을 접했을 때, 우스갯소리로 공교육에서는 ‘학생에게 이렇게 해’라며 명령하는 반면, 대안교육에서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며 결국 그렇게 할 때까지 계속 되묻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아주 나중까지도 줄곧 생각나곤 했다.



‘대안’을 넘어 민주주의의 학교로


왜 학교에서 강조하는 ‘대안적 가치’와 학교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의 권리가 상충하게 되었을까? 학생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학교가 대안을 제시하고 실현하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대안교육이 언제까지나 ‘공교육의 대안’ 정도로만 기능하고자 한다면, 변화가 부재한 것은 당연하다. 학교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대안’이란 무엇인지, 그 대안이 구성원들의 논의와 토론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통찰하지 않는 학교에서, 그 대안은 쉽사리 교사와 어른 들이 전유하는 규제와 금기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대안학교는 그래도 좀 낫지 않냐는 기대에 대안학교는 최소한의 방식으로만 부응해 왔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동등한 발언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학교 내 위계를 기반으로 한, 엄밀히는 교사회의 뜻대로 흘러가는 가족회의 같은 방식으로. 특히 ‘가족회의’, ‘식솔회’ 등의 명칭은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일이기에 어떤 폭력과 금기도 쉬이 합리화되는 가족주의적 질서에 기대어 온 학교의 운영 방식을 보여 주기도 한다.


공교육 내에도 현장을 변화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있듯, 대안교육 내에 머무는 모두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교사와 학생 등 역할을 넘어 모두에게는 각자의 개별성, 특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에겐 좋은 교사를 만나기를 막연히 기대하기보단, 누군가의 말이 틀렸을 때 그 말은 틀렸으며 나는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의 규칙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학생만이 아니다. 대안교육을 하니 좋은 교사일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와 낡은 관념은 과감히 버리고, 어떤 교사라도 학교의 논의와 문화 속에서 좋은 교육을 경험해 나가며 확장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학내 구성원들과 학교가, 또 우리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경합과 논의가 이어지는 현장을 만드는 것이 교사에게 과하게 쏠려 있는 책임과 역할을 다른 학내 구성원들과 나누어 가지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대한 이런 문제의식들을 가지고서도 다시 그 학교에 입학하겠느냐 하면 나는 그렇게 할 것 같다. 그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 그 경로 역시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경험들이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졸업한 지 한참 된 학교에 대해서도 ‘나는 다 끝났으니 땡’ 하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예전보단 선택지들이 늘어났다지만, 여전히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양한 경험을 체득하는 곳은 학교다. 그런 막중한 역할에 비해 내가 경험한 학교는 늘 청소년들에게 특정한 교육 목표 아래 부당한 대우를 참고 기다릴 것을 요구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학생을 일방적으로 교육하고, 교정해야 하는 대상으로서만 한정 짓는 학교교육은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무언가 배우는 일 자체를 실패하게 만든다. 학내 구성원들이 동등한 주체로서 만나 우리가 이 공간에서 지향해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지, 또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하고 싶은지 논의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배울 수 있게 만들 것이다. 



❶  “기숙형 고교 자율학습 강제·휴대폰 규제… 인권위 “인권 침해””, 〈뉴시스〉, 202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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