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기고] 체험 혹은 모험 | 김지용

2025-04-21
조회수 32


체험 혹은 모험

- 현장체험학습, 불가피한 위험을 감수할 용기 필요


김지용  takitezo68@korea.kr

경기 이우중고등학교 교장



“보호막이 쳐진 거대한 안전 영역에서 걸어 나와 위험하고 불안전한 바깥의 삶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개입하도록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안전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ref]슬라보예 지젝 씀, 김영선 옮김(2016),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글항아리, 53쪽.[/ref]

 

체험과 경험은 어떻게 다른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관광과 여행은 어떤가? 이렇게 구분해 보자. 관광이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잠자리와 먹거리, 볼거리와 이동 등을 미리 계획해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사는 것이다. 나는 돈을 내고 서비스를 소비하되 만족도에 따라 별점을 매기면 되고 정히 마음에 안 들면 보상이나 환불을 요구해도 된다. 반면 여행은 자신이 직접 어디에 갈까, 뭘 볼까, 뭘 먹을까, 어디서 잘까 일일이 선택해야 한다. 게다가 결정이 실패할 경우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하소연할 데가 없다. 제 시간과 돈을 들여 위험을 감수하고 사서 고생을 한다. 


관광은 다수의 사진을 남긴다. 대부분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포즈로 찍는다. 사진은 나 여기 와 봤다는 인증서가 되고 자랑거리가 된다. 관광 사진의 주인공은 물론 나이고 나여야만 한다. 여행에선 불현듯 마주치는 우연한 모험에 몰입되는 순간이 있어도 지나고서야 뒤늦게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더라도 나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외부를 향한다. 


관광이 소비와 만족과 관계있다면 여행은 모험과 변화를 향해 있다. 체험과 경험도 그러하다. 체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고 반복에 익숙해지면 기대치는 급속하게 떨어진다. 경험은 반복하지 않는다. 단 한 번 일어나고 고유하기에 쉽게 다른 것으로 갈음되지 않고 비교되지 않는다.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교육은 관광인가, 여행인가? 체험인가, 경험인가?



사면초가, 현장체험학습


‘현장체험학습’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을 마음속 깊이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나를 좋아하긴 한다. 그런데 이유를 들어 보면 진짜 좋아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학원에 안 가도 되고, 학원 숙제 안 해도 되고(이제 학교는 숙제마저 학원에 빼앗겼다), 부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감시의 눈초리 없이 실컷 게임을 해도 되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에 기뻐해야 할까. 


부모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부모들도 나를 좋아하긴 한다. 강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자녀를 잠시 떼어 놓고 한숨 돌리고 싶은 것이다. 개학을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여기는 부모들에게 2박3일 수련회나 소규모 테마여행은 특별 휴가처럼 느껴진다. 개중엔 자신이 못 한 것을 학교가 대신해 주니 고맙긴 한데 이왕이면 멀고 고급스러운 곳에 가길 바라는 부모들까지 있다. 


교사는 확실히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 계획서니, 답사니, 예약에 정산까지 손품과 발품이 많이 간다. 버스 자리 배치, 방 배정, 숙박시설과 식사 등에 대한 온갖 민원까지 도맡아야 한다. 


“국내·외 테마학습여행을 가려면 강원도의 경우 적어도 17개의 절차를 걸쳐야 한다. 현장체험학습을 가야 할 때 유형별 확인 사항이 19가지다. 현장체험학습 KS표준에 의한 점검 항목은 23가지다. 교통안전 점검 체크리스트만 28가지다. 이 중에는 소화기 비치 여부, 블랙박스 부착 및 정상 가동 여부, 전후방 감지 센서 정상 작동 여부, 음주 감지 실시 여부 등도 체크해야 한다. 식사 관련 체크리스트는 15가지이고, 숙소는 21가지, 화재는 7가지다. 현장체험 자체 점검표는 38가지를 체크해야 한다.”[ref]“(이슈 현장) 현장체험학습 안전… ‘운’이 아닌 ‘과학’이어야”, 〈교육플러스〉, 2024년 5월 15일.[/ref]


무슨 사건이라도 생기면 덤터기를 뒤집어쓴다. 잘해야 본전이다. 풍요의 시대에 가정에서 이미 충분히 누리는데 학교가 되풀이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한다. 교육이 아니라 그냥 일일 뿐이다, 마치 계륵 같은. 이러고도 좋아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 맞다. 


마지못해 좋아하는 아이들과 강박적 자녀 관리에서 벗어나고픈 부모들, 그리고 일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교사들. 현장체험학습은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설레는 마음에 전날 밤잠을 설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침이면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일찍 눈이 번쩍 떠지곤 했다. 부엌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는 김밥을 싸는 어머니의 손길이 만들어 낸 나지막한 소리였다. 김밥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특별한 날에나 먹는 별식이었다. 어설픈 장기자랑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친구들이 있었고 수건돌리기를 하며 까르르 웃던 순간들이 있었다. 참 오래전 얘기다.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들은 풍족해졌지만 예전에 소풍이 줄 수 있었던 설렘은 사라졌다. 현장체험학습이 못내 서운하고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리다 


지난 2월, 춘천지법은 현장체험학습을 위해 방문한 테마파크 주차장에서 초등학생이 버스에 치여 숨진 사고에 대해, 주의 의무 위반 과실을 인정해 담임 교사에게 금고 6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교원단체와 노동조합을 비롯해 교육계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현장체험학습이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1심 판결을 앞두고 강원도교육청이 도내 교사들에게 한 조사에서 85% 이상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경우 현장체험학습을 거부하겠다’고 응답했다. 울산교사노조의 설문 조사에서도 81.5%의 교사가 현장체험학습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새삼스러운 반응은 아니다. 작년 5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벌인 설문 조사에서도 교사들은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을 드러냈다. ‘학교 현장체험학습을 폐지해야 한다’라는 응답이 52%로 절반을 넘었고 현장체험학습 시 사고로 인한 ‘학부모 민원 및 고소·고발이 걱정된다’라는 응답은 93.4%에 달했다. 


춘천지법의 이번 판결은 매우 짧은 생각임이 분명하다. 사법적 판단은 비록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만, 법 조항의 해석과 적용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사회의 방향을 유도하는 힘이 있다. 이번 판결은 현장체험학습을 포함한 모든 학교 교육 활동에서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전제를 다시 한번 강조했으며 이는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교사들의 시각을 변하게 만든다. 안전이 최우선의 가치이자 최고로 중요하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터이고 무한 책임을 지우려 하면 누가 그것을 기꺼이 맡으려 할까. 그러나 교육이 본질적으로 모험에 가까운 활동이라면 과연 사고를 없애는 게 가능하겠는가.


사법부의 판결은 교사들에게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현장체험학습을 아예 거부하거나 폐지할 당당한 명분을 준 셈이다. 이미 현장체험학습은 교육이 아니라 교사들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잡무 중의 잡무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현장체험학습은 학교 교육 활동에서 생략해도 될 무용한 것인가, 아이들의 추억과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임의적이고 부수적인 서비스에 불과한가? 교사의 교육적 접근과 디자인 없이, 테마파크나 놀이동산에 풀어 놓거나 민간 업체에 위탁하는 것을 현장체험학습이라고 생각하는 한 학교는 현장체험학습을 시행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금고형을 내린 사법부와 이에 현장체험학습 폐지를 주장하는 교사들 사이엔 표면상 대립이 있어 보이지만,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교육적 고민의 부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계약과 약속


시대 탓일까, 교육은 서비스 상품이 되고 학교는 그것을 거래하는 시장을 닮아 간다. 마트에서 돈을 내고 자신의 간식을 사는 데서 효능감을 느끼고 정체성을 키운 아이들은 학교에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한다. 어쩌다 학생이 되어 자신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장소에 할애하게 되었으니 그만큼의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서비스가 기대에 못 미치면 민원을 접수하고 따진다. 함께하는 광장이어야 할 학교가 거래하는 시장이 되었다. 함께하는 광장에서 필요한 것이 상호 간의 존중과 약속의 원리라면 거래하는 시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개인적 이해관계와 계약의 원리이다. 함께하는 광장이 서로 연결된 관계망 위에서 작동한다면 거래하는 시장은 적게 들여서 많이 가져가려는 개별자들의 이합집산으로 작동한다. 


교육 서비스를 거래하는 시장이 된 학교에서 교사도 어느덧 소비자 마인드를 내재화한다. 업무는 적게 할수록 좋다. 업무를 잘게 나누고 어떻게 하면 균등하게 배분할까 애쓴다.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다 보니 힘든 일과 쉬운 일이 생기는데 서로 쉬운 일을 맡겠다고 눈치를 보거나 다툰다. 교육청이나 교육부도 성과급으로 교원의 동기 유발을 해 보겠다고 십수 년째 효과도 없는 성과급을 관행처럼 주고 생활부장, 교무부장처럼 기피하는 업무에는 수업 시수를 줄여 주거나 가산점을 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애는 희박해지고, 함께 이루면서 느끼는 신바람도 드물어진다. 인센티브에 길들면 교육은 일로만 남는다. 교사의 동료애와 공동의 성취감은 교육을 교육답게 한다. 이것은 자신들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보고 배울 전범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개개의 점들로만 존재해선 곤란하다. 


 개인의 이해와 편의가 함께 하는 광장의 책임과 윤리를 앞설 때 시장화라고 칭한다. 학교가 함께하는 광장이라면 교사는 약속의 주체여야지, 거래나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장체험학습이 교육적 약속이라면 교사는 그것을 흥정의 대상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현장체험학습에는 약속으로 지켜야 할 교육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가치를 모르거나 잃으면 교육은 가격으로 전락하고 가격이 매겨지면 흥정은 필연이다. 모든 문제와 현상에서 교육적 가치를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에야 교사는 교육자다. 춘천지법의 1심 판결에 대해 교사들이 현장체험학습을 거부나 폐지로 대응하는 것은 마치 사용자에 대한 피고용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쪽이라도 도를 넘기면 파기되는 갑과 을의 계약과는 달리, 약속은 한쪽이 지키지 않는다고 반드시 다른 한쪽도 지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약속은 가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에서도 가해·피해에 초점을 맞추면 행정적·형사적 접근이 선행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피해자 이전에 학생이 보여야 교육적 가치의 영역을 마련할 수 있다. 소비의 시대, 우리는 현장체험학습에서 어떤 교육적 가치를 발견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안전 제일주의의 역설, 무사안일 


강원도 현장체험학습 인솔 교사가 재판을 받게 되자, 경기도 양주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애초 2회로 계획되었던 현장체험학습을 1회로 줄이는 안건을 학교운영위원회에 발의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학부모위원과 교원위원 간의 격론 끝에 부결되었다. 이와 관련, 교사노동조합의 어느 대변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학생의 추억과 행복도 좋지만 안전보다 앞설 수는 없다.”[ref]“○○초 학운위, 체험학습 ‘학교 절충안’ 부결시켜”, 〈오마이뉴스〉, 2024년 6월 11일.[/ref]


생각해 볼 게 두 가지다. 먼저는 현장체험학습은 추억과 행복과 관련된 것인가. 현장체험학습은 미래에 과거의 추억으로 남을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현장체험학습을 단지 현재를 즐겁게 소비함으로써 미래에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현장체험학습의 교육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외면하는 처사다. 추억과 행복을 위해 교과 공부를 한다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현장체험학습 역시 현재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속에서 주체로 사는 현재의 경험으로 미래의 삶의 힘을 기르는 강력한 공부이다. 


또 하나, 추억 및 행복은 안전과 양자택일의 대상인가. 무엇이 추억으로 간직되고 어떨 때 행복감을 느끼는가. 밋밋한 경험은 추억이 될 수 없고 편안한 상태는 지루함으로 이어질지언정 행복이 되지 않는다. 추억과 행복은 다소간 위험과 모험, 결핍과 수고로움이 동반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안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면 우리는 추억과 행복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안전이기 때문이다. 안전은 생존을 보장할지는 몰라도 안전이 저절로 추억과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1979년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입학생을 둔 가정에 자녀가 1학년에 들어가 공부할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하는 안내문을 보냈다고 한다. 질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아이가 4~8블록 정도 떨어진 주변의 가게, 학교 혹은 친구 집에 혼자 갈 수 있습니까?’[ref]조너선 하이트·그리그 루키아노프 씀, 왕수민 옮김(2019), 《나쁜 교육》. 프시케의숲. 319쪽.[/ref] 지금 시점에서는 여덟 살 아이 혼자, 그렇게 먼 거리를 활보하게 하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처지에 놓일 것이 분명하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국가 시스템도 정비된 것 같은데 오히려 안전에 대한 불안은 증폭되기만 한다. 


안전에 대한 극단적 집착이 낳는 최대 역설은 무사안일주의다. 학생과 학부모가 안전의 포로가 되어 안전 제일주의를 학교에 요구하기 시작하면 교육부에서 학교 관리자로 이어지는 관료들은 학생 안전을 명목으로 현장체험학습을 포함한 교육 활동에 하나에서 열까지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무딘 반응보다는 과잉 반응이 더 낫고 규제가 적은 것보다 많은 게 책임을 피하기에 좋다. 신중이라는 명분이 시도할 용기를 꺾는다.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안전에 대한 과잉 집착으로 아이들은 소소한 도전과 위험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놓친다. 그런데 바로 그 도전과 위험이야말로, 그 소소한 역경들이야말로 아이들이 단단하게 성장하는 밑거름이다. 자랄 때 이 밑거름이 충분하지 않은 결과, 사회는 점차 개인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떼쓰면 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 유아적 모습으로 퇴행한다. 안전이 절대 가치가 된 학교에서는 ‘아름다운 위험’으로서의 교육[ref]거트 비에스타 씀, 곽덕주·최진·박은주 옮김(2024), 《교육의 아름다운 위험》, 교육과학사. 297~300쪽.[/ref]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 살아 있어야 할 학교는 무사하고도 안일해진다. 



불신 사회, 죄수의 딜레마


안전 제일주의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불필요하게 희생되지 않아도 될 법한 대형 사고들이 줄지어 일어나다 보니 우리는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하게 되었다. 허술한 안전도 심각하지만 사고에 대응하는 책임자나 그들이 마련한 시스템은 더 큰 불신으로 이어지곤 했다. 


여기에 소비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를 개인화하는 소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예전엔 집에 1대였던 전화기가 이젠 한 사람마다 1대가 되었다. 한 집에 너덧이 모여 살던 풍경도 1인 가구가 일반화되면서 한 집에 한 사람이 산다. 집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개인화된 사회는 고립감과 외로움의 사회적 총량을 늘린다. 그 어느 때보다 정보도 넘쳐나고 네트워크도 전 세계를 손바닥 앞에 가져다 놓을 정도로 촘촘하고 넓어졌다지만 오히려 확증 편향적으로 정보를 축소하고 부족적 단위로 네트워크를 좁혀 동어 반복 속에서 자기도취에 쉽게 빠진다. 불안은 과도한 경계심으로 이어지고 서로 간의 불신을 부채질한다. 


2023년 레가툼 세계 번영 지수[ref]영국의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Lagatum Institute)에서 2007년부터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세계 번영 지수(Global Prosperity Index)는 8개 대륙, 167개국, 99.4%의 인구가 포함되는 대규모 조사이다. 번영 지수는 3개 영역, 12개 항목, 67개 지표로 구성되어 있다.[/ref]를 보면, 한국은 전체 167개국 중 종합 29위로 이른바 ‘잘나가는’ 나라다. 67개의 지표 중 경제의 질은 9위, 보건과 교육은 각각 3위로 매우 상위권에 속하나 유독 사회적 자본은 107위로 다른 지표와 확연한 차이가 난다.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적 관계, 사회적 관계와 규범, 시민의 참여, 사회적 관용의 정도를 나타낸다. 이 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웬만큼 살지만 개인과 사회의 신뢰 수준은 지극히 낮은 사회이다. 올 1월, 글로벌 PR 컨설팅사인 에델만이 발표한 신뢰도 지표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는 불신 사회로 드러났다. 정부와 기업, 언론, NGO에 대한 신뢰도 지수를 합친 전체 신뢰도에서 한국은 41%를 기록해 28개국 중 27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공공 기관이건 민간 기관이건 시민단체건 간에 권위를 인정하고 따를 만한 곳이 없는 사회인 셈이다.


불신 사회는 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비용을 상승시킨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불행하다. ‘죄수의 딜레마’[ref]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수학자 존 내시가 고안한 게임 이론의 예이다. 집단행동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의 대표적 예로, 개인의 (이성적) 최선 행동(personal best choice)의 합이 사회적 최선(social best choice)과 불일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최선을 위한 개인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유도해야 하는가에 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ref]라는 행동경제학의 고전적 실험이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고립된 두 죄수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지만 결국 두 사람의 결정은 상대방을 믿고 내린 결정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불신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놓친 셈이다. 사회적 신뢰가 없을 때 개인에게는 합리적 선택일지라도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는 서로의 믿음을 검증하기 위한 불필요한 비용을 상승시킨다. 사회는 깊이와 두께를 잃고 얄팍해지며 물고기 떼들의 급선회처럼 유행과 폭동에 취약해진다. 


고립과 고독을 끔찍이 두려워하고 미친 듯이 어딘가 소속되고 싶어 하나 일상화된 불안과 불신을 어떻게 다스리고 연대와 협력을 어떻게 이룰지 알 길이 없다. 아이들에겐 친구와 어떻게 사귀고 어떻게 함께 놀며, 누구의 권위와 어떤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가 애써 배워야 할 과제가 되었다. 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가정도 학교도 알려 주지 않는다. 아이는 점점 더 부모에게 의존하고 부모는 자녀를 대신해 자녀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려는 아이들의 의지와 능력은 퇴화하고 도덕적 의존성은 점점 커진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다. 국회는 입법 공장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만큼 매년 법을 쏟아 내지만 그 법들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보단 관료제만 비대하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사법부의 판결에 넘김으로써 국민의 다급함을 묵살한다. 국민조차 문제 해결 전략으로 대화보단 신고와 민원, 소송을 택한다. 과도하게 의사에게 의존하고 운동조차 트레이너에게 맡김으로써 건강에 대한 주권을 잃어간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해서 실현한 스타에게 과몰입한 결과 비정상적인 팬덤 현상이 발흥한다.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를 함부로 외부에 넘기면 민주주의도 허약해진다. 민주주의는 문제 제기의 권리만이 보장된 사회가 아니라 문제 제기자가 곧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나설 윤리적 책임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업무상 책무? 윤리적 책임!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대폭 확대에 반대하며 전개된 의사와 전공의,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은 국민에게 한 가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의 대의가 무엇이건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응급실을 얼마든지 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타적 전문성을 무기로 의료계는 자신의 권위를 계속 인정받기야 하겠지만 그들의 전문성이 과연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익과 맞닿아 있는지는 당분간 의심받을 것이다.


만약 교사들이 지금의 의료계처럼 힘이 막강했다면 어땠을까?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 일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현장체험학습을 통해 공동의 경험을 쌓을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이 학교를 ‘사활을 건 전장’으로 기억한 채 졸업한다면, 이것은 의사의 공백이 불러일으키는 응급실 환자의 두려움보다 사회에 덜 위협적일까?  


봉건적 냄새가 풍기는 ‘스승-제자’의 관계를 꿈꾸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인간의 성장을 책임진다는 사명감이 교사에게 없다면 자신의 직업에서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당당함을 갖기 힘들지 모른다. 교육을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약속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성공을 위한 사적 계약으로 인정하고 말 때, 아이들을 만나되 책임감 대신 단순히 업무상의 책무감만 가지고 만날 때, 직업의 공적 지평에서 교직의 윤리성은 희박해지고 윤리성과 불가분한 전문성마저 훼손된다. 박봉에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교직에서 암암리에 자리 잡은 촌지에 대한 윤리적 결단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전 국민의 지지 속에서 출범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윤리적 결단이 교육의 본질에 대한 전문적 모색으로 이어졌고 참교육의 함성과 운동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춘천지법의 이번 판결이 유감스러운 것은 교사를 윤리적 책임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에 야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법의 판단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랬을 때만이 인간의 선함을 북돋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과 법을 해석하는 판관이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의심하면 사람은 그에 맞춰 악하게 될 것이다. 이번 판결에서 교사를 매뉴얼상의 행정적 책무성뿐만 아니라 학생과의 교육 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책임을 더 무겁게 떠맡는 존재로 여겨져야 마땅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교사의 정치 참여를 제약하는 것이 모욕적인 이유도 교사의 자율적인 판단이 상식과 도를 넘어설 것이라는 불신 때문이 아닌가. 사법적 징계는 오히려 윤리적 책임에 면죄부를 준다. 벌을 받은 것으로 충분하니 성찰과 자정은 생략된다. 우리 사회는 교사가 행정적인 책무성만 다하면 윤리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길 바라는 것인가. 



인생의 주인공과 세상의 중심


몇 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ref]“9회. 피리 부는 사나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2022년 7월 27일 방영.[/ref] 자신의 이름을 ‘방구뽕’이라고 개명한 사내가 학원 버스를 탈취하고 버스에 탄 아이들 열두 명과 하루 종일 야산에서 신나게 놀다가 미성년자 약취 유인죄 현행범으로 잡힌다. 법정에서 자신의 직업을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라고 밝힌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합니다. 나중엔 늦습니다. 대학에 간 후, 취업을 한 후, 결혼을 한 후에는 너무 늦습니다. 비석치기, 술래잡기, 말뚝박기, 고무줄놀이 나중엔 너무 늦습니다. 불안이 가득한 삶 속에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찾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어른들은 말한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 준비를 잘해야 미래가 행복하다고. 거대한 거짓말이다. 모두가 믿고 있어서 감히 반박할 마음조차 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거대하고, 현재를 잘 살아야 그 힘으로 미래 역시 잘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거짓말이다. 지금 사회는 아동기와 청소년기 전부가 시험 준비 기간인 것처럼 굴고 경쟁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같은 나이에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현장체험학습은 특별한 놀이다. 학교 밖 세상을 함께 나가 보는 경험이고 친구와 함께 잠까지 같이 자 보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친구들이 눈에 띄고 가깝던 친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 경험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개인적 경쟁을 부추기고 점수를 매겨 우열을 나누기 때문에 놀이가 중요하고 현장체험학습이 더욱 특별하다. 


현장체험학습이 사라지면 학창 시절의 추억이 통째로 삭제되고 정서적 결핍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는 순진하다. 놀이는 그 사회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학습에서 좀처럼 배우기 어려운 협동과 갈등 해결 기술을 현장체험학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서로 협동해서 문제를 풀고 갈등을 해결하는 기량을 익히지 않으면 일상의 평범한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버겁다. 갈등이 불거지고 문제가 생길라치면 부모가 됐건, 교장이 됐건, 국민신문고가 됐건, 청와대가 됐건, 소송이 됐건 자신보다 힘센 사람에게 의지해 상대방을 강압하려고 한다. 이런 사회는 가짜 영웅에게 쉽게 속는다. 


앞의 드라마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그 기발한 놀이를 해야겠다는 그 생각이, 상술에 찌든 어린이 캠프 체험 또는 체험학습을 만드는 겁니다. 신기하면서도 교육적인 경험을 해 주겠다며 아이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럼 놀이는 사라져요.”


교사는 현장체험학습에 얼마만큼 교육적 고민을 하고 교육적 디자인을 하고 있나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쉽게 또 자주 외부 기관에 위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때 학교는 권위주의적 집단성을 강요한 적이 있다. 3월이면 제식 훈련을 해야 했고 방과 후에 매스 게임을 연습해 관급 체육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민주화가 이뤄졌고 권위주의적 집단성은 희미해졌으나 권위주의적 집단성 대신 건강한 공동체성과 올바른 공공성을 고민하는 것에 게을렀다. 그러자 고민의 빈자리를 소비주의와 개인주의가 자리 잡았다. 손이 많이 가는 합창 대회, 학급(뒤뜰) 야영, 백일장 같은 것들은 사라졌고 놀이공원에 풀어 놓고 업체에 맡기는 게 고민할 일도, 관리할 일도, 책임질 일도 없어 편해졌다. 


학교는 공공재이고 공공재를 다루는 교사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며 교육은 공공(公共)의 감각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와 교사의 공적 책임은 아이들에게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중심은 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익히게끔 하는 것이다. 이르거나 늦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엄연히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절로 알기 어렵다. 요즘처럼 돈만 있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것 같은 세상에선 더욱 어렵다. 학교와 교사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세상에서, 게다가 자신이 중심도 아닌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타인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지, 나는 누구와 함께하고 있으며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 탐험하고 연습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아이들에게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그 경험은 타자와 관계된 일이므로 복잡하고 예측 불가하며 그런 차원에서 모험에 가깝다. 불가피한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내지 못하면 우리는 교육적 가치와 아이 및 사회의 성장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 다시 드라마에 나오는 말이다. 


“제가, 최후 진술을 하는 날 어린이 해방군들을 재판에 불러 주십시오. 마음껏 놀면서 행복한 기억을 심어 주려고 했던 일인데 해방군들 기억 속에 ‘아, 마음껏 논 대가가 결국 징역형이구나’ 이렇게 기억될까 봐 두렵습니다.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으로서 처벌을 받더라도 당당하게 받는 모습 보여 주고 싶습니다. 제가 한 일을 단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