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기고] ‘어린’ 존재의 죽음과 애도에 서툰 학교 | 현유림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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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존재의 죽음과 

애도에 서툰 학교


현유림  hisummerimoon@gmail.com

경북 초등 교사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에 대한 사회적 애도는 충분했을까. 사건이 발생한 직후 많은 사람들이 피해 어린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일상 속에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회의 역할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애도는 단지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후 대처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교사가 어린이인 학생을 살해한 이번 사건은 일상에서 어린이들이 경험해 온 무수히 많은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충분히 애도하기 위해서는 어린이가 ‘어린 존재’라는 이유로 겪는 대상화와 폭력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죽음조차 대상화되는 어린 존재들


우리 사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현재의 존재로 보기보다 미래를 위한 존재로 여긴다. 과거 학생 시절의 경험과 현재 교사로서 생활하고 있는 학교를 떠올려 보면, 학생들을 바라보는 학교의 기조는 대체로 ‘미래의 인재로 기르자’는 취지였다.


어린 사람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여겨지기보다는 ‘어린 죽음’으로 여겨진다. 그들이 ‘잃어버린 미래’가 강조되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에서 고등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우리 아이들’이라 부르며 ‘채 피지도 못하고 졌다’면서 더욱 슬퍼했다. 이처럼 어린 사람의 죽음을 ‘미래’로 이입하여 슬퍼하는 것은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2020년에 발생한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 일명 ‘정인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아동학대로 살해된 아이의 이름이 ‘정인’이었고, 관련 법안 논의 중 한 국회의원이 “정인아, 미안해”라고 외쳐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와 사회의 책임을 흐리게 하고, 개인적인 사과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문제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런 태도는 아동학대와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정작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존재들은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든지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최근 경북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 A가 수업 시간에 이번 사건을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공격하면 나도 너희를 해치거나 공격할 수 있다. 나도 자살할 수 있다”라고 말한 혐의를 받아 수사 중이다.[ref]“‘하늘이 사건’ 언급한 초등 교사, 학생들에 “나도 공격 가능””, 〈 한국경제〉, 2025년 3월 14일.[/ref]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과 부대끼며 받는 스트레스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점은 학생보다 교사가 더 쉽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어린이를 향한 비청소년의 폭력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가해자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공격했다는 것이고, 교사나 부모 등 보호자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원인은 단순히 어린이가 신체적으로 비청소년보다 ‘약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남성이 가해자인 여성 혐오 범죄를 키우는 원인이 단지 남성의 신체적 힘이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이듯, 어린이를 향한 학대와 살인 범죄를 키우는 것 또한 개인의 정신 질환이 아니라 어린이를 대상화하고 차별하는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동료 시민으로서 이번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을 충분히 애도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지금껏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어린이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알아채고 반성할 때 비로소 애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어린이의 안전이 얼마나 쉽게 무참히 빼앗길 수 있는 것인지 알게 된다. 2022년 보건복지부에서 ‘일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하였으나 아직도 이를 지키지 않는 기사들도 종종 보인다. ‘가족 살해’, ‘아동 살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동반 자살’이라는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기보다 부모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청소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대상화되고, 이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 중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종종 어린 존재가 우는 모습을 귀여워하는 릴스 등을 발견할 때마다 수치심이 든다. 누군가의 슬픔이 단지 ‘어린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귀여운 것’으로 치부된다는 것이 굉장히 기이하면서도 슬프게 느껴진다. 어린 존재의 감정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귀여운 존재의 귀여운 행동이라고 왜곡하여 납작하게 해석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행위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학교는 애도가 가능한 공간인가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을 떠올리면 피해 학생과 그의 유가족의 삶과 함께,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과연 학교는 애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일까.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애도에 대해 생각하다, 학생의 죽음이 발생했을 때 이후 학교의 대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대다수 기사는 학교의 대처로 자살 예방 교육과 같은 생명 존중 교육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는데, 2021년부터 제주도의회에서 제정을 논의하고 있는 ‘죽음이해교육’에 관한 조례였다.


죽음이해교육은 공교육 현장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를 터부시하지 말고, 학생들에게 상실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대처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발의되었으나,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학교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산됐다.[ref]“‘죽음이해교육’ 지원 조례 이번엔 제정될까”, 〈제민일보〉, 2025년 3월 11일.[/ref] 이와 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학교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나 또한 고등학생 시절, 동급생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동급생이 자살을 했고, 같은 반이 아니라서 그와 직접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반에는 그와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당일 울다 지쳐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호되게 혼이 나야 했다. 교사는 그들에게 ‘왜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동급생의 죽음으로 슬픔이 가득한 교실에서 숨 쉬고 있는 존재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조차 않은 것 같았다. 친구가 죽었어도 우리들은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생의 본분’을 다해야만 했다. 슬프고 잔인한 풍경을 보고만 있는 것이 괴로워 교무실에 찾아가 담임 선생님께 어떻게 좀 도와달라고 했지만, 선생님도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였다. 우왕좌왕 며칠이 지난 뒤 외부 기관에서 상담 전문가들이 몇 명 투입되었고, 자살한 학생과 친하게 지냈던 우리 반 친구들도 상담을 받았던 것 같다. 그때 학교에 오셨던 상담 선생님께 힘들어하는 반 친구들에게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물었다. 그분은 “그냥 평소에 그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면 도움이 될 거야”라고 했다. 나는 딸기우유와 초코우유를 사서 그 친구들 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렇게 나는 애도의 방식을 새롭게 배우고 그 대상도 조금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학교에서는 죽음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복도에서는 “너는 친구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우리 학교 운동장에도 드라마처럼 운구차 오려나?”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당시에는 동급생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듯한 친구들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우리는 모두 죽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학교에서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거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일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실제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애도하거나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닥쳐온 시험 공부를 해야 했고, 수업 시간에 바르게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들은 슬퍼할 기회도 애도의 기회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빼앗겼던 것이다.


현재의 학교는 어떨까? 초등 교사인 나는 4.3 사건이나 이태원 참사 등을 추모하는 계기 교육을 해야 할 때면 으레 수업을 준비한다. 그러나 기존 자료를 찾아보면, 대부분 죽음의 원인과 이후의 대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같이 슬퍼하는 날’이라는 내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학교에서 오히려 ‘죽음’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의아했다. 


생각해 보면 교사들도 어떻게 해야 죽음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지,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애도가 무엇인지 배우지 않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죽음에는 원인이 있고 그것이 ‘슬픈’ 죽음이라면, 이를 애도하기 위해서는 단지 슬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원인과 결과, 이후의 대처에 대해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슬픔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 수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들조차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학교 정서에 동화되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꼭 죽음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도 학교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애도할 일이 종종 일어난다. 좋아하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친구와 다툼이 있었을 때, 시험을 마음만큼 잘 보지 못했을 때. 그리고 학교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애도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이 애도할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학생이 애도할 시간이 필요해 잠시 엎드려 있거나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단순 ‘문제 행동’으로 치부한다. 여전히 학생이 왜 엎드려 있는지, 왜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는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이처럼 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애도하기 위해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억압하고 박탈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친구 등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애도하는 경험을 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을 애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사건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겪는 폭력과 차별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이들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을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나 가정,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어린이가 겪는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고, 그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는 문화가 필요하다. 또한, 애도의 과정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어린이들이 슬픔을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해야 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정책이나 법안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무시되지 않도록 하는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애도의 과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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