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 사건’ 이후 교육을 둘러싼 무수한 성토와 질문이 오갔다. 《오늘의 교육》 77호는 ‘진상 학부모’를 손쉽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악마화하는 담론을 정면으로 다룬다. 특집 기획 의도에서는 이를 ‘여성의 과도한 교육열이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손가락질의 연장선’이라고 지적하며, 진상 학부모의 문제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관점을 보이는데, 나의 마음을 시작부터 달랬다. 문제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알면서도, 학부모를 향한 무차별한 편견 역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77호는 특집과 기획을 병행하여 읽을 때 더욱 흥미로웠다. 두 주제가 함께 조응해 현 교육 체제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우리 교육의 심연을 지배하고 있는 가족주의와 젠더 규범의 강력한 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엇보다 흔히 교육 체제의 문제와 젠더 문제는 서로 무관하다고 여겨지지만, 학교와 교육 현장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적으로 고민하는 일이 교육 문제 해결에 근원적 실마리를 줄 것임을 재확인했다.
특집의 글들은 학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모두 직간접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로 구성되는 교육 3주체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각 주체가 민주적인 교육공동체 내의 교육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배경과 맥락, 제도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몽글은 한국 공교육이 서비스화된 맥락을 설명하며 서비스의 간접적 수혜자일 수밖에 없는 학부모라는 위치는 민주적 자치 기구가 유명무실할 때 교육 주체로서의 위치를 얻을 수 없음을 성토한다. 학부모의 ‘악성 민원인화’가 개인의 악행과 비도덕성을 넘어 구조적으로 틀 지워진 맥락이 있음을 드러낸다. 남궁수진과 곽경애의 글 역시 과연 우리 교육 체제가 학부모를 주체로서 호명하고 있는지, 학부모 스스로 역시 그 권한과 책임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그와 같은 역량을 함양할 기회와 조건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 위치의 모순과 곤란함을 직면하고 풀어 보고자 하는 글들을 읽을수록 교육 현안의 핵심에 가닿는 기분을 느꼈다. 학부모는 대체 왜 이토록 애매하고 모호한 교육 주체인가? 그 이유는 1차적으로는 학부모가 젠더화된 현실에 있다. 실제 학부모의 다수가 여자인 ‘모’들이라는 통계적 현실을 넘어,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의 내용이 여성적인 일들로 여겨지고 있고 이 모든 것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기에 그렇다(실상 교사, 특히 초등 교사의 업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현재의 ‘진상 학부모’ 담론에 ‘학부모 혐오’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여성 혐오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나임윤경은 지난 20여 년간 교사성이나 모성, 학부모성이 변모해 온 사회적 조건을 빠르게 훑으며,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축적된 역량을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한 ‘의도적 실책’”(본문 56쪽)을 문제 삼는다.
교육 주체라고는 하지만 학부모는 언제나 학생인 아이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호출된다. 우리는 부모라면 당연히 ‘내’ 아이의 교육 문제에 누구보다 직접성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잠깐, 그 직접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나? 77호를 읽으며 교육 주체들의 사이를 매개하고 관계 맺게 하는 규범과 전제들은 무엇인지도 되묻게 된다. 바로 학부모가 애매한 주체가 되는 두 번째 이유, 다른 교육 주체와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가족주의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는 여성-엄마 개별자를 호출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가족을 소환한다. 아무 곳에서 ‘제가 애를 키우는 엄마인데요’라고 말하는 것과 학교에 가서 ‘제가 누구누구의 엄마(학부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다른 질감의 정체성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학교는 아이가 어떠한 가정에 속해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를 대리하고 보호할 사람으로 가족 중 한 사람을 호출하고, 가정 내에서 이는 여전히 모의 역할로 한정된다.
학부모로 호출되는 엄마란 ‘정상 가족 내의 엄마’ 위치로 더욱 한정된다는 점이 강력히 환기되어야 한다. 여전히 강력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이 교육 체제 전반의 뿌리로 기능한다. 학부모로서 ‘제가 아빠 없이 혼자 키워요’ 혹은 ‘저는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장애를 가진 채 아이를 키웁니다’, ‘전 엄마는 아니고 이모인데요’, ‘제가 레즈비언 엄마입니다’ 등의 말이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여성의 공적 활동이 당연시된 사회에서조차 ‘제가 일을 하는 엄마입니다’라는 말을 겸양과 사죄의 감정을 깔고 말해야 한다. 학부모가 될 때는 최대한, 더욱더 정상 가족인 것처럼!
교육 문제가 가족주의와 얼마나 깊이 착종되어 있는지를 더 파헤쳐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가족으로 매개되지 않으면 교육 이슈에 개입할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는 것 같다. 가족의 이름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당연시되는 만큼 무논리적이다. 누군가를 낳은 자만이, 키우는 자만이 교육 문제에 접속하게끔 하는 것은 매우 자명하고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그건 가족주의에 기인한 자연화된 습관에 불과할 수 있다. 내가 첫째가 졸업한 중학교와 교육 문제에 대해, 지역 시민으로서 그리고 그 학교를 경험했던 선배 학부모로서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지 상상해 보고 싶다. 혈연과 부계 중심의 가족 구조가 아닌 방식으로 학생과 시민이 교육적 관계망을 맺을 다른 방법은 무엇일지 상상해 낼 순 없는 걸까? 교육은 양육하는 사람들만의 고민인가? 교원들만의 고민인가? 교육은 고작 그런 것이어도 되는가? 현실적으로 학생을 양육하는 부모가 대부분이 될지라도 그 부모들이 시민, 지역 주민 등으로 호명되는 것과 부모로 호명되는 것의 차이가 정말 없을까?
섣부르고 날것인 생각들로 쓰고 있어 낭만적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은 교육 체제 안에서의 연결이 오직 젠더화된 가족주의 규범 속에서만 가능한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의도 때문이다. 어느 계급화된 가족의 귀한 물건을 임시 보호하듯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전제보다는, 한 명의 사회 구성원이자 동료가 될 시민(학생)의 성장을 돕는다는 전제가 실제 교사의 소명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서도 더 나은 토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학부모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교육 주체의 자리를 상상하고 구성해 내는, 단지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시민-학생으로서의 자리를 마련하는, 교사로의 소명과 역할의 재가치화와 교사 역시 노동자-시민이라는 것을 재인식하는 고민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모든 교육 당사자들이 “고압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배타적 경쟁 체제”(본문 81쪽)인 현 교육 체제에서 당사자들은 아주 빠르게 손쉬운 방법으로 기울게 된다. 교사들이 방어적 업무 태도 경향으로 치우치게 된 것도 경쟁적 교육 체제와 정책의 사업화 때문이다. 몽글의 글에서 ‘학부모 자원봉사’의 종류나 수가 제한된 맥락도 흥미로웠다. 최근 노골적인 모성 동원이 줄었다고 하여 젠더 규범이 개선됐다고 섣불리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평가에 부담을 느낀 서비스 제공자들의 방어적 태도에서 온 변화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는 그 유연성 덕분에 산적한 문제들과 그 원인들을 매우 잘 비가시화하며, 마치 문제가 이미 해결된 듯 착시를 일으키는 데 능하다. 변진경의 글에서 보여 주는 사례들 역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게 한다. 정부와 학교가 그동안 제시했던 ‘원스톱’, ‘토탈’, ‘맞춤’, ‘낳기만 하면 다 책임져 줍니다’ 같은 식의 서비스 용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교육공동체로서의 돌봄이나 케어(care), 상호 연대와 보살핌이 아니라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용어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경쟁 체제의 얼굴 중 하나였다. 돌봄의 용어는 있었으나 학교에서의 공적 돌봄은 착취적인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할당되어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이행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 실행 역시 신자유주의적 정상성의 재생산에 복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기획 중 ‘‘젠더문제아’들이 바꾸는 학교의 풍경’을 병행하여 읽을 때, 경쟁 체제적인 학교교육이 가르치는 게 결국 어떤 ‘손쉬움’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루인의 글은 차별과 폭력, 혐오와 배제라는 손쉬운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의 문제를 조준하고 있다. 경쟁적이고 한계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학습하는 가장 문제적인 것은 누군가는 혐오받고 배제받아도 된다는 감각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경쟁에서의 우위, 성공 열망, 정상성의 이름으로 허락되고 감추어진다. 남미자의 글 제목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낡은 정상성의 학교’라고 부를 만하다. 서이초 사건을 통해 수면으로 부상한 여러 문제점과 개선 요구는 모두 교육 체제의 급진적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반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할 때도,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스쿨 미투 운동 때도, 교육 제도 및 실천의 심연에 자리한 가족주의, 젠더 이분법 등의 전형적이고 낡은 규범들이 핵심이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유지되는 집단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응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다시 써 가는 과정”(본문 87쪽)이라는 이수광의 글이나 “학교가 변하기를 바라고만 있을 순 없다”며 자발적 학교 참여를 요청하는 곽경애의 글이나, 성별 이분법적 학교에 변화를 주고자 했던 유랑·꼬꼬의 좌충우돌의 경험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교육공동체가 흠결이나 갈등이 없는 것도, 낭만적이기만 한 것도 아님을 웅변한다. 숙의 과정이란 불편과 이견, 차이의 직면 속에서 당혹과 곤란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손쉬운 해법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김서화(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젠더교육연구소 IGE 연구원)
‘서이초 사건’ 이후 교육을 둘러싼 무수한 성토와 질문이 오갔다. 《오늘의 교육》 77호는 ‘진상 학부모’를 손쉽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악마화하는 담론을 정면으로 다룬다. 특집 기획 의도에서는 이를 ‘여성의 과도한 교육열이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손가락질의 연장선’이라고 지적하며, 진상 학부모의 문제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관점을 보이는데, 나의 마음을 시작부터 달랬다. 문제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알면서도, 학부모를 향한 무차별한 편견 역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77호는 특집과 기획을 병행하여 읽을 때 더욱 흥미로웠다. 두 주제가 함께 조응해 현 교육 체제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우리 교육의 심연을 지배하고 있는 가족주의와 젠더 규범의 강력한 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엇보다 흔히 교육 체제의 문제와 젠더 문제는 서로 무관하다고 여겨지지만, 학교와 교육 현장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적으로 고민하는 일이 교육 문제 해결에 근원적 실마리를 줄 것임을 재확인했다.
특집의 글들은 학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모두 직간접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로 구성되는 교육 3주체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각 주체가 민주적인 교육공동체 내의 교육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배경과 맥락, 제도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몽글은 한국 공교육이 서비스화된 맥락을 설명하며 서비스의 간접적 수혜자일 수밖에 없는 학부모라는 위치는 민주적 자치 기구가 유명무실할 때 교육 주체로서의 위치를 얻을 수 없음을 성토한다. 학부모의 ‘악성 민원인화’가 개인의 악행과 비도덕성을 넘어 구조적으로 틀 지워진 맥락이 있음을 드러낸다. 남궁수진과 곽경애의 글 역시 과연 우리 교육 체제가 학부모를 주체로서 호명하고 있는지, 학부모 스스로 역시 그 권한과 책임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그와 같은 역량을 함양할 기회와 조건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 위치의 모순과 곤란함을 직면하고 풀어 보고자 하는 글들을 읽을수록 교육 현안의 핵심에 가닿는 기분을 느꼈다. 학부모는 대체 왜 이토록 애매하고 모호한 교육 주체인가? 그 이유는 1차적으로는 학부모가 젠더화된 현실에 있다. 실제 학부모의 다수가 여자인 ‘모’들이라는 통계적 현실을 넘어,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의 내용이 여성적인 일들로 여겨지고 있고 이 모든 것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기에 그렇다(실상 교사, 특히 초등 교사의 업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현재의 ‘진상 학부모’ 담론에 ‘학부모 혐오’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여성 혐오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나임윤경은 지난 20여 년간 교사성이나 모성, 학부모성이 변모해 온 사회적 조건을 빠르게 훑으며,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축적된 역량을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한 ‘의도적 실책’”(본문 56쪽)을 문제 삼는다.
교육 주체라고는 하지만 학부모는 언제나 학생인 아이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호출된다. 우리는 부모라면 당연히 ‘내’ 아이의 교육 문제에 누구보다 직접성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잠깐, 그 직접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나? 77호를 읽으며 교육 주체들의 사이를 매개하고 관계 맺게 하는 규범과 전제들은 무엇인지도 되묻게 된다. 바로 학부모가 애매한 주체가 되는 두 번째 이유, 다른 교육 주체와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가족주의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는 여성-엄마 개별자를 호출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가족을 소환한다. 아무 곳에서 ‘제가 애를 키우는 엄마인데요’라고 말하는 것과 학교에 가서 ‘제가 누구누구의 엄마(학부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다른 질감의 정체성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학교는 아이가 어떠한 가정에 속해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를 대리하고 보호할 사람으로 가족 중 한 사람을 호출하고, 가정 내에서 이는 여전히 모의 역할로 한정된다.
학부모로 호출되는 엄마란 ‘정상 가족 내의 엄마’ 위치로 더욱 한정된다는 점이 강력히 환기되어야 한다. 여전히 강력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이 교육 체제 전반의 뿌리로 기능한다. 학부모로서 ‘제가 아빠 없이 혼자 키워요’ 혹은 ‘저는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장애를 가진 채 아이를 키웁니다’, ‘전 엄마는 아니고 이모인데요’, ‘제가 레즈비언 엄마입니다’ 등의 말이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여성의 공적 활동이 당연시된 사회에서조차 ‘제가 일을 하는 엄마입니다’라는 말을 겸양과 사죄의 감정을 깔고 말해야 한다. 학부모가 될 때는 최대한, 더욱더 정상 가족인 것처럼!
교육 문제가 가족주의와 얼마나 깊이 착종되어 있는지를 더 파헤쳐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가족으로 매개되지 않으면 교육 이슈에 개입할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는 것 같다. 가족의 이름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당연시되는 만큼 무논리적이다. 누군가를 낳은 자만이, 키우는 자만이 교육 문제에 접속하게끔 하는 것은 매우 자명하고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그건 가족주의에 기인한 자연화된 습관에 불과할 수 있다. 내가 첫째가 졸업한 중학교와 교육 문제에 대해, 지역 시민으로서 그리고 그 학교를 경험했던 선배 학부모로서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지 상상해 보고 싶다. 혈연과 부계 중심의 가족 구조가 아닌 방식으로 학생과 시민이 교육적 관계망을 맺을 다른 방법은 무엇일지 상상해 낼 순 없는 걸까? 교육은 양육하는 사람들만의 고민인가? 교원들만의 고민인가? 교육은 고작 그런 것이어도 되는가? 현실적으로 학생을 양육하는 부모가 대부분이 될지라도 그 부모들이 시민, 지역 주민 등으로 호명되는 것과 부모로 호명되는 것의 차이가 정말 없을까?
섣부르고 날것인 생각들로 쓰고 있어 낭만적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은 교육 체제 안에서의 연결이 오직 젠더화된 가족주의 규범 속에서만 가능한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의도 때문이다. 어느 계급화된 가족의 귀한 물건을 임시 보호하듯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전제보다는, 한 명의 사회 구성원이자 동료가 될 시민(학생)의 성장을 돕는다는 전제가 실제 교사의 소명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서도 더 나은 토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학부모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교육 주체의 자리를 상상하고 구성해 내는, 단지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시민-학생으로서의 자리를 마련하는, 교사로의 소명과 역할의 재가치화와 교사 역시 노동자-시민이라는 것을 재인식하는 고민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모든 교육 당사자들이 “고압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배타적 경쟁 체제”(본문 81쪽)인 현 교육 체제에서 당사자들은 아주 빠르게 손쉬운 방법으로 기울게 된다. 교사들이 방어적 업무 태도 경향으로 치우치게 된 것도 경쟁적 교육 체제와 정책의 사업화 때문이다. 몽글의 글에서 ‘학부모 자원봉사’의 종류나 수가 제한된 맥락도 흥미로웠다. 최근 노골적인 모성 동원이 줄었다고 하여 젠더 규범이 개선됐다고 섣불리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평가에 부담을 느낀 서비스 제공자들의 방어적 태도에서 온 변화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는 그 유연성 덕분에 산적한 문제들과 그 원인들을 매우 잘 비가시화하며, 마치 문제가 이미 해결된 듯 착시를 일으키는 데 능하다. 변진경의 글에서 보여 주는 사례들 역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게 한다. 정부와 학교가 그동안 제시했던 ‘원스톱’, ‘토탈’, ‘맞춤’, ‘낳기만 하면 다 책임져 줍니다’ 같은 식의 서비스 용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교육공동체로서의 돌봄이나 케어(care), 상호 연대와 보살핌이 아니라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용어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경쟁 체제의 얼굴 중 하나였다. 돌봄의 용어는 있었으나 학교에서의 공적 돌봄은 착취적인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할당되어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이행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 실행 역시 신자유주의적 정상성의 재생산에 복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기획 중 ‘‘젠더문제아’들이 바꾸는 학교의 풍경’을 병행하여 읽을 때, 경쟁 체제적인 학교교육이 가르치는 게 결국 어떤 ‘손쉬움’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루인의 글은 차별과 폭력, 혐오와 배제라는 손쉬운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의 문제를 조준하고 있다. 경쟁적이고 한계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학습하는 가장 문제적인 것은 누군가는 혐오받고 배제받아도 된다는 감각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경쟁에서의 우위, 성공 열망, 정상성의 이름으로 허락되고 감추어진다. 남미자의 글 제목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낡은 정상성의 학교’라고 부를 만하다. 서이초 사건을 통해 수면으로 부상한 여러 문제점과 개선 요구는 모두 교육 체제의 급진적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반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할 때도,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스쿨 미투 운동 때도, 교육 제도 및 실천의 심연에 자리한 가족주의, 젠더 이분법 등의 전형적이고 낡은 규범들이 핵심이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동일한 정체성으로 유지되는 집단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응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다시 써 가는 과정”(본문 87쪽)이라는 이수광의 글이나 “학교가 변하기를 바라고만 있을 순 없다”며 자발적 학교 참여를 요청하는 곽경애의 글이나, 성별 이분법적 학교에 변화를 주고자 했던 유랑·꼬꼬의 좌충우돌의 경험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교육공동체가 흠결이나 갈등이 없는 것도, 낭만적이기만 한 것도 아님을 웅변한다. 숙의 과정이란 불편과 이견, 차이의 직면 속에서 당혹과 곤란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손쉬운 해법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김서화(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젠더교육연구소 IGE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