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분리, 그 사이 존재로서의 고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통합교육을 한다는 것
조윤주 rabbi0901@naver.com
대구고등학교 특수 교사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에 점점 더 걷는 게 어려워졌다. 힘겹게 캠퍼스를 걸어 다니던 나에게 한 선배가 전동 휠체어를 빌려다 주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휠체어를 만났고, 휠체어는 점점 내 몸의 일부가 되어 갔다. 내 몸은 휠체어에 갇혔지만, 휠체어 덕분에 나는 넓고 언덕진 캠퍼스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2008년 특수 교사가 되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특수학교에 발령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휠체어를 탄 나의 모습이 관리자나 동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구의 공립 특수 교사 중 휠체어를 탄 교사는 내가 거의 처음이었다. 스물네 살의 휠체어를 탄 장애 여성이 마주한 특수교육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업무에서 느끼는 배제를 비롯해 쉬이 넘어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전직원 친목회 회식 장소는 대부분 계단이 있는 식당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식당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해 말하지 못하다가 한번은 용기를 냈다. 친목회 담당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1층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장소를 찾아 주실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되돌아온 답은 교장 선생님이 원하는 장소라서 안 된다며 “업어 줄게요”였다. 이 밖에도 말 못 할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휠체어를 탄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배려가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나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누구에게도 차별의 의도는 없으며,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두 발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 좋기만 한 것들이 나에게는 곳곳에 도사린 장벽이 된다는 사실에 공감을 이끌어 내기는 언제나 너무 힘겨웠다.
처음 휠체어 없이 생활하던 내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운동을 하지 않아 휠체어를 타게 되었으니 좀 더 재활에 전념하라는 선 넘은 충고를 들은 적도 있다. 겉으로는 장애가 있는 교사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내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그런 말들에 하나하나 상처를 받았다. 그때의 나는 나의 장애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인정하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장애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젊은 교사가 특수학교에서 다른 장애가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 스스로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이 많았다. 하루하루가 버거웠고 부족한 교사로 학생들을 만났던 것 같다.
통합과 분리 그 사이에 서게 되다
임용 초기, 특수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담임 업무에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배제된 채 시간을 보냈다. ‘장애가 있으니 담임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편견 때문에 “담임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조차 받지 못했다. 담임 업무를 희망하는 장애 교사에게 “힘든데 굳이 그걸 왜 하려고 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듦의 문제를 떠나 ‘장애가 있는 교사는 절대 불가능’이라는 굳어진 인식, 그리고 배제가 만연하고 개인의 의사가 무시되는 업무 분장에서의 구조적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해서 하지 않는 것과 남이 못 하게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나 초임 시절의 나는 그런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다.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소수자로서의 장애가 있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학교라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그저 버텨야 한다고만 생각하며 ‘내가 더 꼼꼼하게 일하면 되지’,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지’라는 강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특수 교사들은 “적절한 지원만 있으면 우리 아이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한 역할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아이들이 자라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며 외면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물론 내가 초임 교사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도, 제도도 개선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긴 했다. 근로지원인제도[ref] 업무에 필요한 핵심 업무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장애로 부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증장애인 근로자가 근로지원인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출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ref]가 있어서 장애가 있는 교사도 적절한 지원을 받아 담임 등의 업무에 조금씩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고, 학교 환경에서도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편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내가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약 20년 전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를 타는 학생의 입학을 거부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베이터뿐 아니라 장애인 화장실, 점자 블록 등의 장애인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특수학급도 3개나 설치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 학교의 문턱이 비장애 학생들에게만큼 완전히 낮아진 것은 아니다.
나는 두 곳의 특수학교를 거쳐 2017년 일반 고등학교에 있는 특수학급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리고 발령과 동시에 특수학급의 담임이 되었다. 특수학급에 배치된 교사는 대부분 담임을 맡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특수학교에서는 담임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 일반 학교 특수학급에서는 너무나 쉽게 담임이 되었다. 벅찬 마음으로 첫 담임을 맡으며 통합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특수학급 담임 업무를 하면서 기존에 내가 가진 생각들이 너무 협소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특수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특수학교라는 사회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공간과 환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학교 내의 모든 학생들에게 장애가 있으니 특수학교 안에서 배제나 차별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반 학교에 발령받으니 우리 반(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이 교육 활동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현실을 온몸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통합과 분리’라는 특수교육의 난제가 나의 숙제가 된 것이다.
봉사의 대상이 되는 학생을 마주하는 것
내가 차별에 대처하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같은 반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나랑 매일 붙어 다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친구를 항상 착한 일을 하는 봉사자처럼 취급하였다. 친구도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1년 동안 서로의 집을 오가는 친한 사이로 지냈는데 선생님은 학년 말에 친구에게 봉사 활동 점수를 주었다. 난 그때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봉사 활동 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개인적인 스토리 때문에 봉사 활동의 대상이 되는 느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에 근무하면서 보니 장애가 있는 학생들은 모두 도우미가 있더라. 도우미를 뽑아서 봉사 점수를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한 통합학급 담임의 조언을 막상 들으니 고민이 들었다. 동료 특수 교사에게 물어보니 장애가 있는 학생을 지원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통합학급에서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에서 장애 학생 도우미에게 봉사 점수를 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결국, 많은 우려를 하면서도 국립특수교육원에서 개발한 통합학급 운영 매뉴얼을 참고하여 ‘굿프렌즈’라는 이름으로 장애 학생 도우미 제도를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2명의 학생이 신청했는데, 한 학기를 운영한 결과 1명은 특별한 교류 없이 봉사 점수만 받아 갔고, 다른 1명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학생의 장애가 봉사 점수의 수단이 되지 않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운영했지만, 생각보다 취지에 맞게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애, 비장애를 떠나 친구로서 우정을 나눈 호진이와 호진이(가명)의 굿프렌즈인 범수(가명)의 사례는 기억에 남는다. 범수가 쓴 활동 보고서의 한 문장이다.
“장애 학생이라는 말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호진이는 그냥 내 친구이다.”
친구는 억지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그저 내 친구 중에 장애가 있는 친구도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명명된다는 것과 특수 교사의 역할 고민
2017년, 신설 고등학교 특수학급에 발령을 받고 교실을 만들어야 했다. 빈 특수학급 명패에는 ‘도움실’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분리되어야 할 것만 같은 ‘도움실’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그 명칭을 어찌해 보기에는 3월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명명된다는 것의 무게와 어떤 명칭에 의해 한계 지어지는 것의 부작용을 잘 알면서도 특수 교사인 나에게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로 다가와서 미뤄 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리 반 여학생 2명이 특수학급으로 들어올 때 온몸을 움츠리면서 몰래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특수학급에 오지도 않았다. 이유를 고민해 보니 특수학급 위치가 급식실 바로 옆에 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특수학급 복도 앞으로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는데 학생들에게 노출되는 특수학급의 모습이 싫어서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을 했다. 그런데 한 아이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교실 앞에 붙어 있는 도움실이라는 글자 때문에 오기 싫어요.”
다른 아이도 동의했다.
“우리가 도움만 받는 아이예요? 애들이 저를 도움실이라고 불러요.”
두 학생은 ‘도움실’이라고 적힌 팻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명칭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2층 통합학급 교실에서 1층 특수학급 창문으로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과 욕설이 적힌 종이를 줄에 매달아 내리는 일이 생겼다. 학생 한 명이 뛰어가서 그 종이를 가져왔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특수학급에 배치된 모든 학생들이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누가 그랬는지 밝혀야 된다고들 했다.
나는 속으로 철렁했다. ‘내가 고민하고 주저하는 사이 이런 불편한 일들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명확하게 요구를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난 어떤 교사가 되어 주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한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다. 선배가 해 준 여러 조언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마디가 있다.
“특수 교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장애 학생으로 명명되는 학생, 학부모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나도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교장,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서 ‘도움실’, ‘도움반 아이’로 명명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렸다. 교장, 교감 선생님 모두 나의 고민에 공감하시며 교실 명칭을 바꾸고 명패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은 전체 교직원 협의회에서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을 부를 때, ‘특수’, ‘도움실’, ‘도움반 아이’가 아닌,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통합학급 교과 선생님께 협조의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
그 후, 나는 장애를 비하하고 욕설이 적힌 종이를 줄에 매달아 내린 통합학급의 담임 교사를 찾아가서 장애인권 및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하겠다고 했다. 해당 반의 학생들 모두를 특수학급으로 내려오게 해서 특수학급 공간을 보여 주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말하며 범인을 특정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다만 특수학급에 있는 친구들도 우리 학교 학생임을 잊지 말고 존중해 달라고 당부하고, 특수학급에 언제든지 놀러 와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그 반 아이들은 우리 교실에 휴지, 물티슈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빌리러 오기 시작했다. 또 혹시 특수학급에 있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에게 말하라는 아이도 있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만 나의 제자일까
내가 담당하는 아이들은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이지만, 통합학급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작은 사회를 경험하고 성인기 사회생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특수학급의 담임이라고 해서 특수학급만 돌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 통합학급에 장애인권교육을 하러 들어간 결과 비장애 학생들의 얼굴을 조금 익히게 되었다. 그중 은지(가명)라는 학생이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친오빠도 뇌병변 장애가 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었어요. 친구들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해요. 저는 오빠가 자랑스럽거든요.”
아마 내가 휠체어를 타고 수업에 들어가서 장애인권교육을 하니 오빠가 생각이 났던가 보았다. 사실 나에게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통합학급 수업이었는데 나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은지가 너무 고마웠다. 그 후 은지는 우리 반 학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 전에는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과만 동아리를 운영했었는데 은지를 보면서 통합 동아리에 대한 아이디어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권에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을 모아 동아리를 만들었다. 간호사, 교사, 바리스타 등의 꿈을 가진 20명 가까운 아이들이 모였다. 장애인의 자립과 관련된 영화도 보고, 지역 사회에 있는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 가서 탈시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인식 개선을 위한 학교 축제 부스 준비도 같이 했다. 동아리 친구들은 은지와 은지 오빠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며, 장애가 있는 친구의 졸업 후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아리 아이들이 졸업한 지 3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은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한 복지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저 은지예요. 동아리 하면서 평생 우리 가족만의 문제일 것 같던 장애에 대한 고민을 공유할 수 있어서 힘이 되고 행복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오빠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면서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복지재단에서 일하다 보니 주변에 장애인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네요. 저도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며 현장을 배워 나갈게요.”
장애가 있는 형제를 둔 비장애 학생 또한 내가 통합교육 현장에서 언제든 만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학생이었다. 장애가 있는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서로 거리낌 없이 졸업 후의 행복을 기원하고,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마찬가지로 특수 교사인 나의 제자가 장애가 있는 학생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학급의 비장애 학생들도 졸업 후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교류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근무 공간을 특수학급으로 한정 짓지 않고 나의 제자를 장애 학생으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 특수 교사로서 통합교육에 한발 더 다가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기분
일반 학교에는 장애가 있지만 특수학급에 오지 않고 통합학급에서만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흔히 완전통합교육을 받는 학생이라고 하는데,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통합교육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일반 학교에 근무하면서 총 3명의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 완전통합교육 대상자로 특수학급에는 오지 않았다. 특수학급에서 별도의 수업은 받지 않더라도 통합학급에서 생활하는 중에 필요한 지원 사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학생을 불러서 상담을 했다. 가장 처음 태인(가명)이라는 학생을 상담했는데 ‘왜 나를 부르지?’ 하는 표정으로 찾아왔다.
태인이는 인공와우 수술[ref] 와우 질환으로 양쪽 귀에 난청이 발생한 환자가 보청기를 착용하여도 청력이 나아지지 않을 때 인공와우를 이식하는 수술(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ref]을 했고, 입 모양을 보고 대화하는 학생이었는데 낯선 단어가 등장하거나 복잡한 내용을 소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 학교에서 지원해야 할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영어 듣기 평가 지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영어 듣기 평가를 할 때 듣기 대본을 보면서 시험을 칠 수 있으니 신청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학교까지 영어 듣기 대본으로 시험을 친 적도 없고 친구들이 놀릴 것 같으니 그냥 찍어도 된다고 했다. 몇 번 더 설명했지만 지원을 거부하여 첫 시험은 포기를 했었다. 그리고 희망하는 과목을 골라 원격으로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내용을 타이핑해 주는 서비스가 있는데 그것을 신청하겠냐라고 물으니, 그것도 친구들이 보는 게 싫고 전 과목 다 해 주는 것도 아니니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 학기의 반을 보내고 중간고사가 끝난 후 다시 불러서 고등학교 공부는 어떤지 물어보았다.
“너무 어려운 말이 많아 놓치는 게 많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기분이에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표현에서 그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적절한 지원의 이점을 설명하며 우선, 영어 듣기만이라도 대본을 제공받아 시험을 쳐 보자고 다시 제안을 했다.
“선생님이랑 둘이 치는 거예요? 친구들이 안 보면 칠게요.”
그래서 따로 특수학급에 불러서 다른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고 대본을 보며 영어 듣기 평가를 치게 했다. 태인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식으로 듣기 내용을 그대로 대본으로 제공해 주는 줄 몰랐어요. 중학교 때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영어 공부를 할 걸 그랬어요.”
그리고 재작년에 졸업한 창민(가명)이도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으로 입 모양을 보며 대화를 해야 해서 선생님이 뒤돌아 설명하거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할 때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창민이와 상담 후 원격교육속기를 신청했다. 원격교육속기는 원격지원으로 교실 수업(음성 또는 영상)을 문자 통역사(속기사)가 자막으로 변환하여 학생 컴퓨터로 실시간 전송하는 서비스이다. 하지만 학생 1인당 최대 3개 교과만 지원되었고, 예체능·실습·제2외국어 등의 교과는 신청이 어려웠다(2023년 대구 기준). 창민이도 원격교육속기가 지원되지 않는 시간에는 여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업 외 동아리나 방과 후 수업, 진로 상담 등의 활동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태인이는 열심히 공부하여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교 4학년이다. 임용 시험을 앞두고 연락이 왔다.
“저 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말하는 걸 제가 못 알아들으면 어쩌죠? 실제로 학교에 근무하는 청각장애 교사도 많이 있나요?”
태인이는 마냥 배우기만 하면 되는 학생에서 가르쳐야 하는 교사로서 교단에 서려고 하니, 청각장애가 있는 자신이 학생들과 잘 소통하고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학창 시절보다 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여전히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한 지원이 부족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기분을 느끼는 태인이의 후배들이 존재한다. 통합학급에 있는 청각장애 학생들을 볼 때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의 특성 때문에 항상 지원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아진다. 특수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영어 듣기 평가 대본 신청이나 청각장애지원센터에 일부 과목의 원격 속기 지원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 외에도 학교 선생님들께 중요한 내용을 전달받을 일도, 상담받을 일도 많은데, 그런 지원은 언제쯤 가능해질지…….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이런 학생들을 위해 전담 수어 통역사나 속기사를 고용해서 초등학교에서부터 수업 및 일상생활을 지원하고, 상급 학교로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수많은 고민을 하면서 오늘도 통합학급에서 만나는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한 제도가 하루빨리 개선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리의 장애를 인정한다는 것
몇 년 전, 처음으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고, 장애 수용, 장애 자존감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장애 수용, 장애 자존감 정도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냉정히 말해 나는 나의 장애를 수용하지만, 장애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장애에 적응해서 살아가지만, 장애가 나의 자존감의 일부가 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4년마다 돌아오는 근무지 만기 때는 남들보다 더 많은 조건을 고려하다 보니 얼마 없는 선택지에 고심하게 되고, 새로운 근무지에서는 나를 잘 모르는 동료들로부터 받는 불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그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새로운 만기에 도래한다.
그래도 주변에서부터 변화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날 때, 그런 점을 많이 느낀다. 내가 어릴 때, 나의 가족들은 내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에너지를 썼지만 이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나의 장애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더 이상 내가 비장애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느끼며 오히려 그런 모습에 내가 힘을 얻고 있다. 더 이상 나를 붙들고 “아까운 가쓰나”라고 말하는 친척 어른들도 없다. 이제는 현재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족들과 친척들에게는 공기와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사자인 자녀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적응해서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님이 많다고 느낀다. 병호(가명)의 어머님은 발달장애가 있는 병호가 주말에 부모님의 눈 밖으로 벗어나서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시내에 놀러 가는 것을 행여 ‘무슨 사고라도 나서 다치지나 않을까’ 하며 반대하셨다. 그리고 병호의 휴대전화를 주기적으로 검사하기도 하셨다.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휴대전화를 보는 것은 병호가 허락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말아 달라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보는 병호의 모습에 대해 말씀드렸다. 병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고, 운동을 좋아하고, 책이나 신문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많았다.
특히 병호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려고 하고,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병호가 조금씩 몸도 마음도 성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대화를 통해 설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병호의 부모님이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병호와의 관계도 좋아졌다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하셨다. 병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그랬던 것 같다. 자녀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장애인 등록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미루다가 진학이나 취업에서의 어려움을 겪으며 마지못해 하거나 끝내 거부하고 졸업하는 사례도 많았다.
자녀가 어쩔 수 없이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거나, 당사자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면, 부모님들이 자녀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수용하지 않으면 당사자인 자녀는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한 주체로 자립하기까지 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담당하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적응해 나가기 위해 특수 교사로서 어떻게 조력해야 하는지 늘 고민하게 된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양육하며 장애인인권교육 강사로 활동하시는 분을 초청하여 부모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의 어머님은 “우리 애가 걸었으면 좋겠어요”, 자폐성장애가 있는 아이의 어머님은 “우리 애가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서로를 부럽다고 이야기하셨다.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고등학교에 오기까지 아이와 부모님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을 다 알 것 같다. 그 어려움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신 또는 자녀와 그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 그 과정이 버겁고 힘들더라도 이겨 낼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분리 교육에 맞닥뜨린 나를 발견할 때
특수 교사로 일하며 우리 반 학생들이 통합학급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비장애 학생들과 잘 어울려 무탈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애를 비하하거나 학급 활동에서 배제하는 일들이 생기면 통합학급 담임 선생님과 협의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통합학급에서 하는 행동들이 비장애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반응을 접할 때면 고민이 깊어진다.
어느 날은 교과 선생님이 연락을 해서 민호(가명)가 수업에 방해되니 특수학급에 내려가 있게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물론, 대학 입학이 중요한 인문계 학교에서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학생이 가끔씩 내는 소리가 불편하고 방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특수학급으로의 분리를 수용할 수는 없어서 교과 선생님에게 잘 설명한 후에 통합학급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민호가 소리를 내는 상황은 보통 원하는 게 있거나 불안한 이유들이 있었다. 시계를 보고 싶거나 종이 쳤는데 수업이 안 끝났거나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민호가 소리를 많이 내는 통합학급 수업 시간에는 내가 교실 입구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오기도 했다. 그렇게 적응하며 고3이 되었다.
인문계고 3학년에서는 자율 학습 시간이 늘어나는데 민호가 속한 통합학급 아이들은 민호가 내는 소리와 또 다른 학생인 경민(가명)이의 낙서하는 소리가 방해된다고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점점 예민해지는 고3 아이들의 호소였다. 결국, 담임 선생님은 자율 학습 시간만이라도 두 학생이 특수학급에 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상황에서 더 이상 통합을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민호와 경민이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친구들이 조용히 하라고 짜증 내서 통합학급에 있기 힘들다고 했다. 친구들이 뿜어내는 불편한 기류를 아이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부모님과 상의 후에 자습 시간에는 특수학급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무리하게 통합을 강행하다가 예민한 시기에 자칫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신중히 내린 결정이었지만, 뒤따르는 무력감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에 또 고3 학생을 담당하여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완전한 통합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더욱더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현실과 타협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특수학급을 분리의 공간, 징벌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매일매일 굳건히 하며 끝없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조용하고 방해가 되지 않는 아이만 통합학급에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방해가 되면 언제든 내쳐지게 될 것이다.
특수 교사가 통합학급 학생들로부터 날아오는 분리 요청에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않기를 바란다. 통합학급 교사의 분리 권고에 전전긍긍하지 않기를 바란다. ‘분리’라는 정해진 결과를 두고 학교 구성원들이 절차적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며 아이들의 교육에 쓰여야 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특수 교사가 통합을 위해 한 걸음 더 내딛으려고 애썼던 흔적들이 부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학교 구성원들에게 시도했던 수많은 설득과 소통,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해 했던 고민,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통합 사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 마지않는 진심들 말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인식 개선에 앞장서고, 제도의 개선을 주장할 때, 변화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통합과 분리, 그 사이 존재로서의 고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통합교육을 한다는 것
조윤주 rabbi0901@naver.com
대구고등학교 특수 교사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에 점점 더 걷는 게 어려워졌다. 힘겹게 캠퍼스를 걸어 다니던 나에게 한 선배가 전동 휠체어를 빌려다 주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휠체어를 만났고, 휠체어는 점점 내 몸의 일부가 되어 갔다. 내 몸은 휠체어에 갇혔지만, 휠체어 덕분에 나는 넓고 언덕진 캠퍼스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2008년 특수 교사가 되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특수학교에 발령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휠체어를 탄 나의 모습이 관리자나 동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구의 공립 특수 교사 중 휠체어를 탄 교사는 내가 거의 처음이었다. 스물네 살의 휠체어를 탄 장애 여성이 마주한 특수교육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업무에서 느끼는 배제를 비롯해 쉬이 넘어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전직원 친목회 회식 장소는 대부분 계단이 있는 식당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식당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해 말하지 못하다가 한번은 용기를 냈다. 친목회 담당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1층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장소를 찾아 주실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되돌아온 답은 교장 선생님이 원하는 장소라서 안 된다며 “업어 줄게요”였다. 이 밖에도 말 못 할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휠체어를 탄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배려가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나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누구에게도 차별의 의도는 없으며, ‘차별’이 아니라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두 발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 좋기만 한 것들이 나에게는 곳곳에 도사린 장벽이 된다는 사실에 공감을 이끌어 내기는 언제나 너무 힘겨웠다.
처음 휠체어 없이 생활하던 내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운동을 하지 않아 휠체어를 타게 되었으니 좀 더 재활에 전념하라는 선 넘은 충고를 들은 적도 있다. 겉으로는 장애가 있는 교사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내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그런 말들에 하나하나 상처를 받았다. 그때의 나는 나의 장애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인정하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장애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젊은 교사가 특수학교에서 다른 장애가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 스스로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이 많았다. 하루하루가 버거웠고 부족한 교사로 학생들을 만났던 것 같다.
통합과 분리 그 사이에 서게 되다
임용 초기, 특수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담임 업무에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배제된 채 시간을 보냈다. ‘장애가 있으니 담임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편견 때문에 “담임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조차 받지 못했다. 담임 업무를 희망하는 장애 교사에게 “힘든데 굳이 그걸 왜 하려고 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듦의 문제를 떠나 ‘장애가 있는 교사는 절대 불가능’이라는 굳어진 인식, 그리고 배제가 만연하고 개인의 의사가 무시되는 업무 분장에서의 구조적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해서 하지 않는 것과 남이 못 하게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나 초임 시절의 나는 그런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다.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소수자로서의 장애가 있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학교라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그저 버텨야 한다고만 생각하며 ‘내가 더 꼼꼼하게 일하면 되지’,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지’라는 강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특수 교사들은 “적절한 지원만 있으면 우리 아이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한 역할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아이들이 자라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며 외면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물론 내가 초임 교사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도, 제도도 개선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긴 했다. 근로지원인제도[ref] 업무에 필요한 핵심 업무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장애로 부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증장애인 근로자가 근로지원인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출처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ref]가 있어서 장애가 있는 교사도 적절한 지원을 받아 담임 등의 업무에 조금씩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고, 학교 환경에서도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편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내가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약 20년 전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를 타는 학생의 입학을 거부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베이터뿐 아니라 장애인 화장실, 점자 블록 등의 장애인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특수학급도 3개나 설치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 학교의 문턱이 비장애 학생들에게만큼 완전히 낮아진 것은 아니다.
나는 두 곳의 특수학교를 거쳐 2017년 일반 고등학교에 있는 특수학급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리고 발령과 동시에 특수학급의 담임이 되었다. 특수학급에 배치된 교사는 대부분 담임을 맡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특수학교에서는 담임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 일반 학교 특수학급에서는 너무나 쉽게 담임이 되었다. 벅찬 마음으로 첫 담임을 맡으며 통합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특수학급 담임 업무를 하면서 기존에 내가 가진 생각들이 너무 협소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특수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특수학교라는 사회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공간과 환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학교 내의 모든 학생들에게 장애가 있으니 특수학교 안에서 배제나 차별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반 학교에 발령받으니 우리 반(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이 교육 활동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현실을 온몸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통합과 분리’라는 특수교육의 난제가 나의 숙제가 된 것이다.
봉사의 대상이 되는 학생을 마주하는 것
내가 차별에 대처하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같은 반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나랑 매일 붙어 다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친구를 항상 착한 일을 하는 봉사자처럼 취급하였다. 친구도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1년 동안 서로의 집을 오가는 친한 사이로 지냈는데 선생님은 학년 말에 친구에게 봉사 활동 점수를 주었다. 난 그때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봉사 활동 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개인적인 스토리 때문에 봉사 활동의 대상이 되는 느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에 근무하면서 보니 장애가 있는 학생들은 모두 도우미가 있더라. 도우미를 뽑아서 봉사 점수를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한 통합학급 담임의 조언을 막상 들으니 고민이 들었다. 동료 특수 교사에게 물어보니 장애가 있는 학생을 지원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통합학급에서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대부분의 학교에서 장애 학생 도우미에게 봉사 점수를 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결국, 많은 우려를 하면서도 국립특수교육원에서 개발한 통합학급 운영 매뉴얼을 참고하여 ‘굿프렌즈’라는 이름으로 장애 학생 도우미 제도를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2명의 학생이 신청했는데, 한 학기를 운영한 결과 1명은 특별한 교류 없이 봉사 점수만 받아 갔고, 다른 1명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학생의 장애가 봉사 점수의 수단이 되지 않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운영했지만, 생각보다 취지에 맞게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애, 비장애를 떠나 친구로서 우정을 나눈 호진이와 호진이(가명)의 굿프렌즈인 범수(가명)의 사례는 기억에 남는다. 범수가 쓴 활동 보고서의 한 문장이다.
“장애 학생이라는 말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호진이는 그냥 내 친구이다.”
친구는 억지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그저 내 친구 중에 장애가 있는 친구도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명명된다는 것과 특수 교사의 역할 고민
2017년, 신설 고등학교 특수학급에 발령을 받고 교실을 만들어야 했다. 빈 특수학급 명패에는 ‘도움실’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분리되어야 할 것만 같은 ‘도움실’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그 명칭을 어찌해 보기에는 3월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명명된다는 것의 무게와 어떤 명칭에 의해 한계 지어지는 것의 부작용을 잘 알면서도 특수 교사인 나에게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로 다가와서 미뤄 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리 반 여학생 2명이 특수학급으로 들어올 때 온몸을 움츠리면서 몰래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특수학급에 오지도 않았다. 이유를 고민해 보니 특수학급 위치가 급식실 바로 옆에 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특수학급 복도 앞으로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는데 학생들에게 노출되는 특수학급의 모습이 싫어서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을 했다. 그런데 한 아이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교실 앞에 붙어 있는 도움실이라는 글자 때문에 오기 싫어요.”
다른 아이도 동의했다.
“우리가 도움만 받는 아이예요? 애들이 저를 도움실이라고 불러요.”
두 학생은 ‘도움실’이라고 적힌 팻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명칭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2층 통합학급 교실에서 1층 특수학급 창문으로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과 욕설이 적힌 종이를 줄에 매달아 내리는 일이 생겼다. 학생 한 명이 뛰어가서 그 종이를 가져왔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특수학급에 배치된 모든 학생들이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누가 그랬는지 밝혀야 된다고들 했다.
나는 속으로 철렁했다. ‘내가 고민하고 주저하는 사이 이런 불편한 일들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명확하게 요구를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난 어떤 교사가 되어 주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한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다. 선배가 해 준 여러 조언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마디가 있다.
“특수 교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장애 학생으로 명명되는 학생, 학부모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나도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교장,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서 ‘도움실’, ‘도움반 아이’로 명명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렸다. 교장, 교감 선생님 모두 나의 고민에 공감하시며 교실 명칭을 바꾸고 명패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은 전체 교직원 협의회에서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을 부를 때, ‘특수’, ‘도움실’, ‘도움반 아이’가 아닌,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통합학급 교과 선생님께 협조의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
그 후, 나는 장애를 비하하고 욕설이 적힌 종이를 줄에 매달아 내린 통합학급의 담임 교사를 찾아가서 장애인권 및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하겠다고 했다. 해당 반의 학생들 모두를 특수학급으로 내려오게 해서 특수학급 공간을 보여 주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말하며 범인을 특정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다만 특수학급에 있는 친구들도 우리 학교 학생임을 잊지 말고 존중해 달라고 당부하고, 특수학급에 언제든지 놀러 와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그 반 아이들은 우리 교실에 휴지, 물티슈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빌리러 오기 시작했다. 또 혹시 특수학급에 있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에게 말하라는 아이도 있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만 나의 제자일까
내가 담당하는 아이들은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이지만, 통합학급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작은 사회를 경험하고 성인기 사회생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특수학급의 담임이라고 해서 특수학급만 돌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 통합학급에 장애인권교육을 하러 들어간 결과 비장애 학생들의 얼굴을 조금 익히게 되었다. 그중 은지(가명)라는 학생이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친오빠도 뇌병변 장애가 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었어요. 친구들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해요. 저는 오빠가 자랑스럽거든요.”
아마 내가 휠체어를 타고 수업에 들어가서 장애인권교육을 하니 오빠가 생각이 났던가 보았다. 사실 나에게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통합학급 수업이었는데 나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은지가 너무 고마웠다. 그 후 은지는 우리 반 학생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 전에는 특수학급에 배치된 학생들과만 동아리를 운영했었는데 은지를 보면서 통합 동아리에 대한 아이디어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권에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을 모아 동아리를 만들었다. 간호사, 교사, 바리스타 등의 꿈을 가진 20명 가까운 아이들이 모였다. 장애인의 자립과 관련된 영화도 보고, 지역 사회에 있는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 가서 탈시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인식 개선을 위한 학교 축제 부스 준비도 같이 했다. 동아리 친구들은 은지와 은지 오빠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며, 장애가 있는 친구의 졸업 후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아리 아이들이 졸업한 지 3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은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한 복지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저 은지예요. 동아리 하면서 평생 우리 가족만의 문제일 것 같던 장애에 대한 고민을 공유할 수 있어서 힘이 되고 행복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오빠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면서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복지재단에서 일하다 보니 주변에 장애인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네요. 저도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며 현장을 배워 나갈게요.”
장애가 있는 형제를 둔 비장애 학생 또한 내가 통합교육 현장에서 언제든 만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학생이었다. 장애가 있는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서로 거리낌 없이 졸업 후의 행복을 기원하고,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마찬가지로 특수 교사인 나의 제자가 장애가 있는 학생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학급의 비장애 학생들도 졸업 후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교류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근무 공간을 특수학급으로 한정 짓지 않고 나의 제자를 장애 학생으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 특수 교사로서 통합교육에 한발 더 다가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기분
일반 학교에는 장애가 있지만 특수학급에 오지 않고 통합학급에서만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흔히 완전통합교육을 받는 학생이라고 하는데,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통합교육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일반 학교에 근무하면서 총 3명의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 완전통합교육 대상자로 특수학급에는 오지 않았다. 특수학급에서 별도의 수업은 받지 않더라도 통합학급에서 생활하는 중에 필요한 지원 사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학생을 불러서 상담을 했다. 가장 처음 태인(가명)이라는 학생을 상담했는데 ‘왜 나를 부르지?’ 하는 표정으로 찾아왔다.
태인이는 인공와우 수술[ref] 와우 질환으로 양쪽 귀에 난청이 발생한 환자가 보청기를 착용하여도 청력이 나아지지 않을 때 인공와우를 이식하는 수술(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ref]을 했고, 입 모양을 보고 대화하는 학생이었는데 낯선 단어가 등장하거나 복잡한 내용을 소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 학교에서 지원해야 할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영어 듣기 평가 지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영어 듣기 평가를 할 때 듣기 대본을 보면서 시험을 칠 수 있으니 신청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학교까지 영어 듣기 대본으로 시험을 친 적도 없고 친구들이 놀릴 것 같으니 그냥 찍어도 된다고 했다. 몇 번 더 설명했지만 지원을 거부하여 첫 시험은 포기를 했었다. 그리고 희망하는 과목을 골라 원격으로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내용을 타이핑해 주는 서비스가 있는데 그것을 신청하겠냐라고 물으니, 그것도 친구들이 보는 게 싫고 전 과목 다 해 주는 것도 아니니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 학기의 반을 보내고 중간고사가 끝난 후 다시 불러서 고등학교 공부는 어떤지 물어보았다.
“너무 어려운 말이 많아 놓치는 게 많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기분이에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표현에서 그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적절한 지원의 이점을 설명하며 우선, 영어 듣기만이라도 대본을 제공받아 시험을 쳐 보자고 다시 제안을 했다.
“선생님이랑 둘이 치는 거예요? 친구들이 안 보면 칠게요.”
그래서 따로 특수학급에 불러서 다른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고 대본을 보며 영어 듣기 평가를 치게 했다. 태인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식으로 듣기 내용을 그대로 대본으로 제공해 주는 줄 몰랐어요. 중학교 때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영어 공부를 할 걸 그랬어요.”
그리고 재작년에 졸업한 창민(가명)이도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으로 입 모양을 보며 대화를 해야 해서 선생님이 뒤돌아 설명하거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할 때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창민이와 상담 후 원격교육속기를 신청했다. 원격교육속기는 원격지원으로 교실 수업(음성 또는 영상)을 문자 통역사(속기사)가 자막으로 변환하여 학생 컴퓨터로 실시간 전송하는 서비스이다. 하지만 학생 1인당 최대 3개 교과만 지원되었고, 예체능·실습·제2외국어 등의 교과는 신청이 어려웠다(2023년 대구 기준). 창민이도 원격교육속기가 지원되지 않는 시간에는 여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업 외 동아리나 방과 후 수업, 진로 상담 등의 활동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태인이는 열심히 공부하여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교 4학년이다. 임용 시험을 앞두고 연락이 왔다.
“저 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말하는 걸 제가 못 알아들으면 어쩌죠? 실제로 학교에 근무하는 청각장애 교사도 많이 있나요?”
태인이는 마냥 배우기만 하면 되는 학생에서 가르쳐야 하는 교사로서 교단에 서려고 하니, 청각장애가 있는 자신이 학생들과 잘 소통하고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학창 시절보다 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여전히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한 지원이 부족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기분을 느끼는 태인이의 후배들이 존재한다. 통합학급에 있는 청각장애 학생들을 볼 때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의 특성 때문에 항상 지원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아진다. 특수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영어 듣기 평가 대본 신청이나 청각장애지원센터에 일부 과목의 원격 속기 지원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 외에도 학교 선생님들께 중요한 내용을 전달받을 일도, 상담받을 일도 많은데, 그런 지원은 언제쯤 가능해질지…….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이런 학생들을 위해 전담 수어 통역사나 속기사를 고용해서 초등학교에서부터 수업 및 일상생활을 지원하고, 상급 학교로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수많은 고민을 하면서 오늘도 통합학급에서 만나는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을 위한 제도가 하루빨리 개선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리의 장애를 인정한다는 것
몇 년 전, 처음으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고, 장애 수용, 장애 자존감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장애 수용, 장애 자존감 정도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냉정히 말해 나는 나의 장애를 수용하지만, 장애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장애에 적응해서 살아가지만, 장애가 나의 자존감의 일부가 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4년마다 돌아오는 근무지 만기 때는 남들보다 더 많은 조건을 고려하다 보니 얼마 없는 선택지에 고심하게 되고, 새로운 근무지에서는 나를 잘 모르는 동료들로부터 받는 불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그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새로운 만기에 도래한다.
그래도 주변에서부터 변화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날 때, 그런 점을 많이 느낀다. 내가 어릴 때, 나의 가족들은 내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에너지를 썼지만 이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나의 장애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더 이상 내가 비장애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느끼며 오히려 그런 모습에 내가 힘을 얻고 있다. 더 이상 나를 붙들고 “아까운 가쓰나”라고 말하는 친척 어른들도 없다. 이제는 현재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족들과 친척들에게는 공기와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사자인 자녀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적응해서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님이 많다고 느낀다. 병호(가명)의 어머님은 발달장애가 있는 병호가 주말에 부모님의 눈 밖으로 벗어나서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시내에 놀러 가는 것을 행여 ‘무슨 사고라도 나서 다치지나 않을까’ 하며 반대하셨다. 그리고 병호의 휴대전화를 주기적으로 검사하기도 하셨다.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휴대전화를 보는 것은 병호가 허락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말아 달라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보는 병호의 모습에 대해 말씀드렸다. 병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고, 운동을 좋아하고, 책이나 신문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많았다.
특히 병호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려고 하고,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 했다. 병호가 조금씩 몸도 마음도 성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대화를 통해 설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병호의 부모님이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병호와의 관계도 좋아졌다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하셨다. 병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그랬던 것 같다. 자녀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장애인 등록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미루다가 진학이나 취업에서의 어려움을 겪으며 마지못해 하거나 끝내 거부하고 졸업하는 사례도 많았다.
자녀가 어쩔 수 없이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거나, 당사자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면, 부모님들이 자녀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수용하지 않으면 당사자인 자녀는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한 주체로 자립하기까지 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담당하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적응해 나가기 위해 특수 교사로서 어떻게 조력해야 하는지 늘 고민하게 된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양육하며 장애인인권교육 강사로 활동하시는 분을 초청하여 부모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의 어머님은 “우리 애가 걸었으면 좋겠어요”, 자폐성장애가 있는 아이의 어머님은 “우리 애가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며 서로를 부럽다고 이야기하셨다.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고등학교에 오기까지 아이와 부모님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을 다 알 것 같다. 그 어려움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신 또는 자녀와 그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 그 과정이 버겁고 힘들더라도 이겨 낼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분리 교육에 맞닥뜨린 나를 발견할 때
특수 교사로 일하며 우리 반 학생들이 통합학급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비장애 학생들과 잘 어울려 무탈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애를 비하하거나 학급 활동에서 배제하는 일들이 생기면 통합학급 담임 선생님과 협의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통합학급에서 하는 행동들이 비장애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반응을 접할 때면 고민이 깊어진다.
어느 날은 교과 선생님이 연락을 해서 민호(가명)가 수업에 방해되니 특수학급에 내려가 있게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물론, 대학 입학이 중요한 인문계 학교에서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학생이 가끔씩 내는 소리가 불편하고 방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특수학급으로의 분리를 수용할 수는 없어서 교과 선생님에게 잘 설명한 후에 통합학급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민호가 소리를 내는 상황은 보통 원하는 게 있거나 불안한 이유들이 있었다. 시계를 보고 싶거나 종이 쳤는데 수업이 안 끝났거나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민호가 소리를 많이 내는 통합학급 수업 시간에는 내가 교실 입구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오기도 했다. 그렇게 적응하며 고3이 되었다.
인문계고 3학년에서는 자율 학습 시간이 늘어나는데 민호가 속한 통합학급 아이들은 민호가 내는 소리와 또 다른 학생인 경민(가명)이의 낙서하는 소리가 방해된다고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점점 예민해지는 고3 아이들의 호소였다. 결국, 담임 선생님은 자율 학습 시간만이라도 두 학생이 특수학급에 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상황에서 더 이상 통합을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민호와 경민이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친구들이 조용히 하라고 짜증 내서 통합학급에 있기 힘들다고 했다. 친구들이 뿜어내는 불편한 기류를 아이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부모님과 상의 후에 자습 시간에는 특수학급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무리하게 통합을 강행하다가 예민한 시기에 자칫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신중히 내린 결정이었지만, 뒤따르는 무력감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에 또 고3 학생을 담당하여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완전한 통합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더욱더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현실과 타협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특수학급을 분리의 공간, 징벌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매일매일 굳건히 하며 끝없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조용하고 방해가 되지 않는 아이만 통합학급에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방해가 되면 언제든 내쳐지게 될 것이다.
특수 교사가 통합학급 학생들로부터 날아오는 분리 요청에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않기를 바란다. 통합학급 교사의 분리 권고에 전전긍긍하지 않기를 바란다. ‘분리’라는 정해진 결과를 두고 학교 구성원들이 절차적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며 아이들의 교육에 쓰여야 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특수 교사가 통합을 위해 한 걸음 더 내딛으려고 애썼던 흔적들이 부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학교 구성원들에게 시도했던 수많은 설득과 소통,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해 했던 고민,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통합 사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 마지않는 진심들 말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인식 개선에 앞장서고, 제도의 개선을 주장할 때, 변화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언젠가 찾아오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