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호[리뷰] 돌봄, 학교에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하다 | 이현애

2025-06-09
조회수 134

리뷰


돌봄, 

학교에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하다





김영숙·류은숙 씀,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2022

김영숙·류은숙 씀,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돌봄의 상상력》, 코난북스, 2024



이현애  redyrabbit1968@gmail.com

경기 중등 교사




학교에서 돌봄을 생각하게 될 때


“선생님 죄송한데요……. 1반 담임인데요, 저희 반 ○○학생 1교시 국어 결석으로 시스템에 기록해 놓으신 거 지워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출석 인정으로 처리해야 하거든요. 인정 결석 서류를 늦게 제출해서 그렇게 되었어요. 번거롭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올해 고교학점제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실질적으로 도입되면서, 교무실에서는 저런 대화가 심심찮게 오가고 있다. 제도권 내 학교에서 출석과 결석 처리에 관련된 스트레스는 담임 교사들의 오랜 과제였다.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서 개별 교과의 출결 처리가 교과 담당 교사의 중요한 ‘책임’이 되었지만, 담임 교사의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더더욱 늘어나고 있다. 교과 교사의 책임인데 담임이 신경 쓸 게 뭐 있냐고 묻는다면 저런 학교의 구체적 장면들을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학교라는 곳이 그렇게 딱 부러지게 일을 나눌 수 있는 업무 중심의 공간이 아니라고, 막 큰 목소리로 말해 주고 싶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삶을 살고 있고, 교사의 일 중 많은 부분은 그 삶을 챙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 제발 학교에서 일주일만이라도 제대로 지내 보고 정책이든 비판이든 대안이든 말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건 바로 저런 장면 속에서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현재 교육에 대한 정의, 교육학 교과서가 말하는 그 교육이 지금의 학교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강렬한 의문이 들 때도 대체로 저런 장면들과 마주하게 될 때이다. 교육이라는 언어가 교육 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새로운 언어와 개념을 고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돌봄’이라는 말을 자꾸 입에서 굴리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는 쉽지 않다. “아 뭐, 학교 선생이 돌봄까지 해야 해?” “선생을 너무 무시해…….” “도대체 학교에다 애들 보내 놓기만 하면 다야? 부모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야?” 이런 말들을 들으면 더더욱 그렇다. 너무 과도한 일에 치이고, 그렇다고 그 일의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에서 나오는 말들이라 그 밑에 깔린 힘듦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부끄럽게도 나도 그런 생각들이 여과 없이 떠오르고, 저런 말들이 불쑥불쑥 나올 때가 있다. 게다가 초등학교에 도입되고 있는 ‘방과후돌봄’ 정책이,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지만 제대로 된 인력과 제도가 정비되지는 않은 채 운영되면서, ‘돌봄’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기피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난 나의 노동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학생들의 삶의 조건과 필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런 질문들 속에서 만난 책 《돌봄과 인권》은 돌봄이라는 개념을 인권의 틀에서 설명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면서도 구체적인 돌봄의 실체에 용기를 갖고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나 개인의 생애사, 여성, 특히나 여자 교사라는 위치에 대한 복합적 고민을 돌봄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며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돌봄의 관점에서 교육을 해체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시야도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도 《돌봄과 인권》에서는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부터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립적 인간이라는 근대적 프로젝트로 정의된 인간관에서 돌봄이 설 곳은 없었다. 인간이 누구나 의존적 존재이며 다양한 취약성을 가진 존재라는 새로운 출발점으로부터 인권도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돌봄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돌봄을 보장하고 옹호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된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에 대한 인정 관계, 당신만이 아니라 나 또한 의존하고 있다는 보편적인 상호의존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만나고 서로 돕고 기대며 함께 삶을 산다.

- 《돌봄과 인권》, 47쪽


《돌봄과 인권》은 차곡차곡 인간의 기본 개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돌봄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와 실제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감정적 부분, 관계의 문제까지 섬세하고 살피고 있다. 그리고 결국 돌봄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변화해야 할 문제이며 시민적 권리와 책임의 문제라고 논의를 펼친다. 책은 1부 ‘돌봄의 토대’, 2부 ‘돌봄의 현장’, 3부 ‘돌봄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돌봄을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취약성/의존성, 상호인정, 호혜성으로 설명하고 인권을 재정의한다. 더 나아가 돌봄을 윤리의 문제로 본다. 2부에서는 폐 끼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막연함을 신파로 치장하거나 공포로 윽박지르는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고 ‘아무나 돌보는’ 사회를 제시한다. 3부 ‘돌봄권’에서는 권리의 의미, 인간 존재를 재정의, 재발명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시민 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감정, 현실, 제도 등의 전 방위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나아가 원대한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꿈꾸자며, 그 출발은 돌봄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돌봄으로 재정의되는 인권’은 어떻게 ‘돌봄으로 재정의되는 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교육은 인권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이 간과된 교육과정, 교육 행위, 교육 기관은 현대 사회에서 성립할 수 없고 비난받아야 한다. 현실에서 그 선을 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명제를 포기하거나 그 지향을 단념하는 것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다. 그리고 돌봄이 인권이라면 인권을 기반으로 한 교육도 돌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하고 있지만 못 본 척하고 있는 학교 안 돌봄 노동을 보이도록 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학교에서 돌봄은 학교교육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명명되고, 추가로 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도록 도입되고 있다. 있는 돌봄은 더 보이지 않게 하고, 추가된 시간에 배치된 돌봄은 가치가 낮은 것 혹은 전문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학교를 돌봄의 관점으로 진단하고 재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이 죽어 버린 개념이 되지 않고, 학교가 귀찮은 존재를 보관하고 똑같은 복제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돌봄을 이야기할 자격 혹은 책임


동시에 돌봄은 대상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돌봄자-보호자와 돌봄의존자의 관계, ‘좋은 돌봄’의 불/가능성, 돌봄의 탈/여성화·탈/가족화 또는 공공화·시장화, 돌봄 자원·부담·책임의 평등하고 정의로운 분배 등은 어떤 돌봄 현장에서든 중요한 핵심 의제다.

- 《돌봄과 인권》, 123쪽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이어지는 5월 초 연휴에 아이도, 부모도 돌보지 않으면서 돌봄 관련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자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를 아이러니라 느끼는 것 자체가 문제다. 내 마음속에, 아니 우리 사회의 무의식 속에 돌봄을 이야기하는 데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생애사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들, 현재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교라는 공간의 이야기들은 돌봄이라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의 고민과 발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면 ‘내가 자녀 양육과 부모 봉양 정도는 제대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즉 돌봄을 가족의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왜일까? 돌봄을 말하는 데 꼭 그런 가족적 돌봄이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할까. 사실상 누구도 돌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돌봄의존자, 돌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관계를 가족으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돌봄과 인권》을 읽으며 가장 위로를 받은 것은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다’라는 부분이었다. 돌봄에 자격이 있나? 돌봄을 하는 이 혹은 돌봄을 받는 이로서의 자격은 따로 없다. 우리는 각자의 취약성을 갖고 있고 그 취약성의 인정 속에서 다른 이의 취약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돌봄과 인권》은 그 취약함을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호혜성의 관점에서 살피며 돌봄을 시민적 권리와 책임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가족 행사로 가득한 시기에 돌봄 관련 이야기를 글로 쓰는 나를 아이러니하다고 느끼는 것은 ‘돌봄’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가족’의 문제로 협소화되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돌봄과 인권》에서 힘주어 말하는 것은 돌봄이 가족의 일, 가족 중에서도 어머니, 딸, 아내의 일이 아니라, 시민의 일임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돌봄을 논의하면서 ‘자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여성인 가족의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돌봄의 자리에서 내가 비켜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도 길러 본 적 없으면서, 자기 부모도 직접 봉양하지 않으면서 무슨 돌봄을 이야기한다고!’라는 비난을 받을 것만 같은 걱정을 뚫고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봄은 시민의 자격과 책임이며, 사회적으로 논의되는 자격과 책임이 되어야 한다. 이는 돌봄 사회, 돌보는 사회로의 변화를 향한 시작이다. 물론 거기에 뒤이어 올 질문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돌봄의 가족 책임을 부정한다는 말인가? 어린이집, 학교, 요양원에다 가족들을 다 떠넘겨 버리는 파렴치한들이 득실거리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인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돌봄과 인권》에서는 가족이니까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모두 한 명의 시민으로서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가족의 존재나 가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가족 돌봄의 의미, 가능성, 가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한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가족이 돌봐도 ‘가족이니까’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기 위함이고, 한 명의 시민이 다른 시민을 존중하기에 ‘시민의 윤리의식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시민됨, 시민으로 마주함, 동료로서, 벗으로서 서로 어울리고 연대하는 태도와 입장에서 돌봄을 주고받는다는 생각 자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다.

- 《돌봄과 인권》, 249쪽



현실의 학교에선 더욱 많은 돌봄을, 더욱 보이지 않게


의존이 수치스럽지 않은 사회,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의존이 윤리적 원칙이자 규범이 되는 사회는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도래해야 할 ‘돌보는 사회’다. (……) 돌보는 사회는 돌봄 자원이 풍부하고, 이 자원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되고 순환하는 사회다. 돌봄은 개인 단위에서, 동시에 사회와 국가 단위에서 생산되고 축적되고 유산으로 상속된다. 돌봄 자원은 누구나 돌보고 아무나 돌보는 돌봄 민주주의와 연동되어 있다. 즉 돌봄 역량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일과 시민적 덕성을 증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돌봄 민주주의 사회다. 여기서 평등과 자유가 적대적 대당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당성과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요 힘이다.

- 《돌봄과 인권》, 73쪽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슬픈 것은, ‘자잘한 일’들에 대해서 누구도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자잘한 일’을 돌봄이라고 부른다면 좀 더 많은 논의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많아지는 일. 그러나 일에 쫓겨 서로 돌아볼 틈도 없기에 교무실 옆자리 동료 선생님조차 그 세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는 일. 그래서 그 힘듦을 학생들의 조건과 상황 탓으로 돌리게 되는 일.


‘복불복’으로 표현되는 ‘올해 우리 반에 어떤 학생이 배정되었느냐’가 올해 내 노동량을 절대적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이후 따라오는 마음 씀과 힘듦은 오롯이 내 몫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체념의 상태가 된다. 소위 말하는 ‘운이 없는 그 한 해’를 잘 건너가는 데 있어서 동료 교사의 존재는 동아줄과 같다. 매일 아침 출석을 체크하고,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양육자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기를 붙들고 있고, 이제 학교에 보냈으니 나를 좀 해방시켜 달라는 양육자의 감정의 동요를 읽으며 서로 선을 넘지 않게 정보를 주고받음과 동시에 요구 사항 전달을 잘 해내고, 행정 처리를 위한 서류들을 챙기고 나면 내일도 이걸 또 해야 하나 한숨을 쉬게 된다. 그때 “아이고, 올해 진짜 고생이 많네요”라고 말해 주는 동료 교사가 있으면 힘듦은 조금 누그러진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싶을 땐 좌절이나 분노가 된다.


그 ‘운 없음’이라는 표현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는 학생 하나하나를 살피고 그 삶을 돌보는 교사의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개인의 희생이나 헌신에 의존하지 않고 적절한 자원이 제공되어 정의로운 돌봄이 가능한 제도와 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를 만들려 할 때, 학교 혹은 교육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적 문제가 된다. 학교는 입시 중심으로 설정된 목표를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곳,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인생의 한 시기를 갈아 넣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고 현실에서도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오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비판적 담론들도 한계가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서로서로를 돌아보고 부딪히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언어로는 그것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매끈한 수업과 교육과정만으로 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울퉁불퉁하고 돌발적인 상황과 감정, 몸의 부딪힘과 울렁임으로 학교는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돌봄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돌봄이라는 개념을 학교에 더 용감히 도입해야 하지 않을까? 돌봄이 더 보이도록 만들고 더 제대로 설명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 초등학교에서는 ‘방과후돌봄’이 도입되고 있는데, 제대로 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문제를 가득 안고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아이를 방과 후의 그 늦은 시간까지 부모와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이 맞느냐’라고 질문하며 양육자의 노동 시간을 줄여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는 방과후돌봄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교사의 일로 연결되면서 교사에게 여러 부담이 지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노동 시간 및 노동량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도 존재한다. 이는 교육으로 명명되는 시간을 담당하는 교사와 돌봄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행하는 방과후 교사에 대한 위계적 시선 혹은 차별적 대우까지 이어지면서 너무나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고 있다.


딱 부러지는 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학교의 상황은 정규 수업 시간이든 아니든 더욱 많은 돌봄을 더욱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수행하는 곳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육자의 노동 시간의 문제, 경제적 상황과 다시 맞물려 있다. 즉 우리 사회 전체가 연루된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학교에는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더 많은 상상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출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노동의 이상과 노동의 현장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해 본다. 새로운 것에 대한 상상은 현실에 대해 질문하고 현실을 치고 나갈 가능성을 연다.

- 《돌봄과 인권》, 288쪽


돌봄은 육아, 간병, 활동지원 같은 구체적인 접촉을 포함하되, 세계를 돌보는 일 또한 포함할 것이다. 어떤 노동으로 임금을 벌고 있고 그 노동으로 어떤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이런 돌봄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세계를 거주 가능한 곳으로 가꾸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 그것이 돌봄 사회일 것이다.

- 《돌봄과 인권》, 288~289쪽



교육의 재발명, 돌봄적 학교


《돌봄과 인권》은 돌봄의 차원을 확장하는 상상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생산 노동 및 임금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의 가치와 위계가 변화해야 돌봄 노동으로 옮겨 갈 사람들이 흔쾌하고 자발적으로 돌봄 노동에 몰두하는, ‘노동의 이상’이 실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돌봄을 하면서 사는 삶을 ‘욕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돌봄 사회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돌본 경험, 돌봄받은 경험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돌봄과 인권》에서는 이야기한다. 


뒤이어 나온 책 《돌봄의 상상력》은 현장의 돌봄 연루자들과 저자들이 이를 먼저 실천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돌봄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상상력으로 돌봄과 돌봄 사회를 만들어 갈 힘을 길어 올리고 있다. 서사의 힘, 구체적 현장의 힘이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제도의 영역,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기어이 돌봄을 해내고, 돌봄자와 돌봄의존자로서 살아가며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절절하게 말해 주고 있다. 그 목소리들이 번져 나와 우리 마음에 퍼지는 울림이 크고 아름답다. 장애, 성별, 성 정체성, 비가족이 연루된 돌봄이 구체적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호스피스 완화 치료, 발달장애인 단기 거주 시설, 마을건강센터의 아동 돌봄, 방문 진료, 사회적 협동조합 등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돌봄 체계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읽으며 학교는 여기 어디쯤 서 있을 수 있을까, 혹은 서 있어야 할까 질문해 본다.


《돌봄의 상상력》에 나오는 ‘마을이 함께 하는 아동 돌봄’과 ‘지역 사회 통합 돌봄’은 교육과 돌봄의 얽힘을 고민하는 나의 눈이 가장 오래 머문 이야기였다. ‘집에 머무는 것이 버거운 아이’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코디네이터와 의료사회복지사,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있는 곳(《돌봄의 상상력》, 178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은 돌봄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양육’의 상상력이 출발할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의료, 복지, 돌봄이 함께 모여 시너지를 만들고, 위계, 상대의 전문 분야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갈등을, 경제적 차원에서의 정당한 보상뿐만 아니라, 서로 함께 배워 가며 가치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바꾸지 않고자 노력하고 신뢰를 만들려 애씀으로써 해결해 나가는 조직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상력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까. 학교도 그런 곳이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 상상들을 모아 교육을 재발명하고 학교를 재창조해 나가는 ‘돌봄적 학교’가 되길 바란다. 교육과 학교의 돌봄 이야기를 조직하고 써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 보자’고 속삭이는 책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는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의무인지도 모른다. 또한 돌봄이 시민적 권리와 책무의 문제가 될 때, 돌봄은 학교가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 되기도 한다. 《돌봄과 인권》에서 살펴보고 있는 영 케어러의 독박 간병 살인 사건 이야기는 용기를 내는 것이 의무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봄을 잘하고 잘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배우고 익혀야 가능한 일이다. 시민적 돌봄을 고민해야만 할 시점이라는 것은 바꿔 말해 학교가 돌봄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돌보다’는 ‘돌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학교는 그 돌아서는 애씀과 보아 내는 끈질김을 이제 존중하고, 더 나아가 가르치고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그리고 사실 학교는 서로서로 돌아서 보는, 그 계속 지켜보는 일을 하려고 오랜 시간 노력해 오고 있지 않았던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 왔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그걸 더 밀고 나가고, 더 보이게 하고, 더 상상하는 한 걸음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돌봄 환경에 주목해서 강도영 씨 사건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시도들이 도달한 각성 (……) 아버지가 쓰러졌어도 어느 정도 경제적·사회적 지원이 있었다면, 돌봄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돌봄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돌봄 교육과 훈련이 교육에 통합되어 있었다면, 돌봄을 ‘모든’ 시민의 중요한 활동으로 의식하는 문화와 공통 감각이 있었다면, 특히 자원이 없는 계층의 시민들이 돌봄 위기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일시적, 부분적 정책이 아닌) 포괄적·보편적 복지 정책이 있었다면,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비정한 아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돌봄과 인권》, 83쪽


그리고 포기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 일’은 환자와 보호자-돌봄자 사이에서, 학교와 교사 사이에서, 아이와 양육자 사이에서, 아니 어떤 종류의 ‘사이’에서건 돌봄의 기본을 이룬다. 이런 ‘사이’에서 우리는 의존과 돌봄의 주고받음이 일종의 돌봄 연쇄가 되어 사회를 지탱한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 《돌봄과 인권》, 54쪽.  



❶  ‘돌봄적 학교’는 나의 논문 〈중등학교 ‘지식/돌봄’ 위계의 젠더적 분석: 돌봄 차별의 현실과 ‘돌봄적 학교’의 대안 모색〉(성공회대 실천여성학 전공 석사 학위 논문)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논문에 넣기에 적당한 수준의 논의를 해냈는지 고민이 많았지만 꼭 이 표현을 넣고 싶었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봄과 인권》, 《돌봄의 상상력》에서 돌봄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관련된 논의가 더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