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현장체험학습을 체험하는 중
임선영 yallary@2woo.net
경기 이우고등학교 교사
급하다, 급해!
개학을 며칠 앞두고, 제주도로 급히 답사를 가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여유 있게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싸~해졌다. 지갑을 뒤져서 신분증을 찾아봤다. 아뿔사! 없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급히 지하철에서 내려서 집에 들렀다가 신분증을 갖고 다시 공항을 향했다. 검색해 보니, 김포공항역에 비행기 출발 30분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망했다. 비행기를 놓치겠다 싶었지만, 검색해 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온라인 선배님들의 조언과 나이를 초월한 긴박한 전력 질주로, 출발 5분 전에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출발 전부터 고생이다.
왜 갈까?
주제 기행은 실제 현장 경험을 통해서 교실의 배움을 확장하고 새롭게 통합하는 교육과정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삶’과 ‘실제 현장에서 이야기하는 삶’은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이런 질문을 안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 혹은 관심사에 따라서 주제를 선정하고, 탐색해서 새롭게 배우는 경험을 한다. 그동안 학생들은 1학기 말 혹은 드물게 다음 해 1월에 주제별 기행을 다녀왔다. 학생들이 다양한 주제에 따른 제안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이를 중심으로 희망하는 주제를 선택해서 팀을 구성했었다. 생태, 문화·예술, 교육, 역사, 스포츠, 에너지, 과학 등 그해 학생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에 따라서 내용과 장소를 다르게 선정했다. 그러나 학기 후반이 되면 애초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간다. 학교 자치의 중심축인 2학년 학생들은 1학기를 마치고 나면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교사들은 주제 기행의 취지와 방향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면서 학생들과 아슬아슬한 신경전을 펼쳤다.
교육 활동의 가장 큰 힘은 선배에게 구전되는 이야기다. 선배로부터 어떤 활동이 좋았다고 전해 들으면, 학생들은 이미 학습 동기의 절반을 채우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활동이 힘들더라도 의미와 재미가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가면 구전의 이야기는 어느새 전설로 둔갑한다. 전설에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재미가 함께 할수록 이야기되기 쉽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서 전설은 중단되고, 다시 시작된 체험 활동은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밀도로 운영되지 못했다. 혹은 팀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배움의 차이가 크게 발생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주제 기행’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설정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변화와 맞물려서, 교사회에서는 대안형 특성화 학교로서 학교 철학과 방향이 잘 드러나는 교육과정을 고민했다. 학생들은 대안학교로서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의견을 대자보에 담아 학교 벽에 붙였다. 동시에 학생·학부모·교사 사이에 특성화 대안학교 정체성에 관한 논란도 붙었다. 몇 번의 논의를 거쳐서 작년에 교사회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입학생부터 교육과정 변화를 단계적으로 마련하고, 우선 2025년 고2 통합 기행, 고1 농촌 봉사 활동 목표를 재설정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진로 탐색 시기와 학교 교육 목표(공공성, 생태성, 민주 시민성)에 맞춰서 6가지 주제(생태, 지질, 여성과 장애, 역사와 평화, 교육, 문화와 예술)와 주제별로 참고할 만한 단체를 제안했다. 그리고 학교가 제안하는 교육적 경험과, 학생들이 기획할 수 있는 주제별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서 기존 2박 3일에서 3박 4일 일정으로 하루를 보탰다.

주제 기행의 시기도 4월 말로 변경했다. 학기 말과 학년 말은 추위와 더위로 인해서 외부 활동을 하기 힘들다. 학생들도 심리적·신체적으로 지치고 힘든 상태인 점을 고려해 쾌적한 4월 말이 적합했다. 무엇보다 진로를 탐색하기에 앞서, 기행을 통해서 만나게 될 ‘사람’과 그들이 지키려는 ‘가치’와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랬다. 막연한 진로에 대한 불안함으로 ‘어떤 직업이 좋은가’를 고민하기 전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기대했다.
왜 제주도인가?
다양한 주제에 따라서 현장체험학습을 운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복잡한 행정 처리다. 특히 안전 문제와 관련해서 확인하고 지켜야 할 규정이 많아지고, 변화되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예산안을 작성하고 회계 처리를 하려면 교사들의 부담은 가중된다.
6가지 주제에 따라 장소가 다를 때에는 숙박과 교통 등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주제 수만큼 많아진다. 주제별로 담당 교사가 사전 답사와 회계 처리까지 맡아서 진행하게 되면, 정작 학생들이 경험하게 될 교육적 내용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행정적으로 조금 수월하기 위해서는 한 장소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후보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제주도였다.
여러 현장학습을 기획한 대안학교 교사 친구에게 연락해서 제주도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줄 현지 활동가도 소개받았다. 관광지로 만나는 제주도가, 아니라 4.3 항쟁, 강정 마을, 알뜨르, 송악산 등 시민 불복종과 저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주도는 아프고 참혹한 수탈의 역사를 겪었지만, 쉽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곳이다. 강정마을에 대해 이미 해군기지가 들어서 버려 끝난 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을 전제로 안보를 이야기하는 군사주의에 맞서 ‘평화’를 노래하고 춤추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공부는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에서는 생기가 돋고, 아름다운 것은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4월 말에 진행할 주제 기행을 위해서 겨울 방학에 빠듯한 일정으로 기행을 기획하고, 개학하기 직전에 학년 팀장 선생님과 1박 2일로 제주도로 답사를 다녀왔다. 숙소와 학생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하는 장소 몇 군데를 뽑아서 움직이고, 현지 활동가분을 만나서 강정마을을 둘러보고 대략의 동선을 확인했다. 우리가 선택할 만한 숙소가 많지 않았다. 예약이 가능한 숙소는 조금 허름하고, 오래된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넉넉하고, 주변에 상권이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같은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라서 더 흡족했다.
학생과 함께 만드는 주제 기행
‘OECD 학습 나침반 2030’에서는 학습자에게 중요한 역량으로 세 가지 ‘변혁적 역량(transformative competencies)’을 강조했다. 이때 변혁적 역량은 지금 여기 사회에 기여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미래 만들어 가기 위한 학습자의 역량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소수자 입장의 고려, 차별과 억압 구조가 작동하게 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실천과 행동으로 더불어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제와 추천 장소를 제시하고, 학생들은 제시된 주제와 장소를 탐색하며 그 주제를 선택한 동기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음은 팀 내에서 활동 규칙과 팀 활동을 통해서 기대하는 목표에 대한 핵심 질문을 만들고, 활동 내용을 기획한다. 기획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주제 기행 계획서 작성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공유한다. 주로 통합 기행의 취지에 적합한 것인지, 현실성이 있는지, 팀 내에서 협의를 통해서 논의된 것인지 등을 묻는 내용이다.
팀에서는 탐방 장소뿐만 아니라 이동 방법과 점심 식사 메뉴, 활동 기록, 회계 담당, 사전 질문, 인터뷰 등을 포함한 일정 협의 등을 학생들이 협의하고 각자 역할을 나눠서 맡는다. 학년 전체가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매주 2시간 정도 확보했지만, 사전 안전교육과 다른 학교 행사 등으로 인해서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팀별로 주로 점심시간과 방과 후를 활용해서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팀장들은 ‘주제 기행 준비위원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전체 일정을 협의하고, 팀별 상황을 공유했다. 또한 주제 기행에서 학년 전체가 모이는 시간에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특히 문화·예술팀은 강정마을에서 인간띠 잇기 평화 문화제 행사를 위해서 전 학년 퍼포먼스까지 준비해야 했다. 노래를 선정해서 80명에게 숙지시키고, 이동 동선을 짜서 움직이는 연습을 몇 번에 걸쳐서 진행했다.


주제 기행은 끝났지만, 배움은 지금부터 시작
준비위원회는 사전 준비부터 시작해서 기행을 다녀온 후 공유회 운영 방식까지 정하고, 기행을 잘 마쳤다. 그런데 준비위원회 활동은 기행이 끝난 후부터 더욱 바빠졌다. 준비위원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행이 끝난 후 3회에 걸쳐 학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장이 열렸고, 이야기장 준비를 위해서 숨 고를 새 없이 회의가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과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행 4일 일정 중 3일은 아주 순조로웠다. 마지막 날은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둘러보고, 해군기지 앞에서 진행하는 문화제에 참여하고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80명의 학생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해군기지와 강정천을 둘러봤다. 햇볕이 쨍하고 바람이 부는 곳이라서 조금 덥기는 했지만,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아이들이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중간에 물을 사서 목을 축이면서 강정마을 활동가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정(江汀)마을은 이름처럼 제주도에서도 물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국방부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기 위해 몇몇 마을을 후보지로 살펴봤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인해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7년 4월에 일부 주민들이 모여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하고, 그해 6월에 다시 전체 주민이 모여 해군기지 찬반 투표를 하려고 했지만, 해군과 해군기지 사업추진위 측이 사전 모의해서 투표를 무산시켰다. 주민 동의뿐만 아니라 환경영향평가 등 해군기지 건설 과정은 절차적으로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2012년 강정마을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고, 2016년에 해군기지가 완공되었다. 해군기지 정문 안쪽에 훼손된 구럼비 바위가 있었다. 평화활동가들은 2013년부터 매일 아침 7시 생명 평화 100배(拜)와 11시 가톨릭 미사, 12시 평화문화제(인간 띠 잇기)를 해 왔다. 오랜 비폭력 저항운동이자 일상 투쟁의 하나다. 경찰, 해경, 해군, 국정원 등 국가 기관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폭행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벌어졌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해 어떻게 불법적으로 움직였는지,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를 어떻게 분열시켰고 마을분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행 마지막 날 밤이라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논 탓인지 학생들은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해군기지 정문 앞으로 갔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전체 학생들이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걸려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몸이 피곤했던 학생들은 버스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이내 해군기지에 도착했다. 평화문화제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열렸다. 우리는 동그랗게 서서 〈바위처럼〉을 불렀다. 무대 위에서 노래에 맞춰 추는 몸짓을 따라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피곤해서 쉬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문화제 장소는 생각보다 협소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준비한 노래를 불렀지만, 연습한 동선대로 이동하지 못하고 서서 불렀다. 문화제는 강정에서 평화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 학교 졸업생이 후배들에게 환영 인사를 전하면서 마무리되었다.
5월 초, 연휴를 보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난 지 며칠 후 대자보가 붙었다. 한 학생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앞에서 참여한 문화제를 시위로 규정하고, 사전에 문화제에 대한 충분한 안내가 없었고, 당일 버스에 내리자마자 이동해 문화제에 참여한 것을 두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참여를 강요받았다’는 요지의 글을 작성한 것이다. 또 ‘해군과 강정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모두 듣지 않고, 한쪽 이야기만 듣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위배가 되기 때문에 교사회에게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후 다른 학생들에게 들어 보니, 몇몇 학생들이 총을 들고 있는 군인 앞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무척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은 놀란 마음에 문화제에 참여하지 않고 한쪽에 모여서 문화제를 지켜보며 화가 났다고 했다. 그렇게 화가 난 친구들은 문화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불편한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오해에 대해 교사회에서 입장을 정리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먼저 문화제에서 놀란 학생들에게 사전 안내와 소통을 충분히 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전 교육에서 강정에 관한 소개와 평화문화제에 대한 안내가 있었고, 해군기지와 강정천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활동가분들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들었지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었겠다 싶었다. 그러나 문화제는 시위가 아니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은 분명 부당한 일이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의’라고 했다. 2019년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주민 폭행과 같은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발표한 조사 결과도 공유했다. 집회 신고도 하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매일 진행한 문화제를 시위라고 볼 수 없다고도 설명했다. 이번 문제 제기를 통해서 기행의 의미를 되짚고,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랬다.
이어서 강정을 공부한 팀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반박 대자보를 붙이면서, 두 가지를 요청했다.
1. 22기 전체가 강정마을 평화문화제의 활동가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
2. 22기 구성원 모두가 주제 기행에서의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앞으로 배움의 태도를 다시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 나눌 것.
이렇게 2번의 이야기장과 1번의 공유회 과정을 거치게 됐다. 기행에 참여한 80명의 학생들은 어느 편에서 쉽게 판단하지 않고 ‘틈’에 존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또 이야기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라운드 룰을 정했다.
그라운드 룰
1. 이야기장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
2.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자.
3. 다른 의견도 존중하자.
4. 의견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5. 이야기장은 토론이 아니라 함께 마음을 모아 가는 토의의 과정이다.
6. 발언을 독점하지 말자.
학생들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싸움이 아닌 배움의 장을 만들기 위해 공유회 내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노력했고, 그 속에서 ‘침묵의 언어’가 느껴졌다. 이야기장이 끝날 때마다 교사에게 찾아와서 사과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논리보다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되어 버리면 이야기는 들리지 않게 된다. 이야기장이 끝날 때마다 몇몇 친구들의 발언과 태도에 속상해하는 아이들도 생겼다. 주제 기행을 기획한 교사로서 자책감이 들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학생들의 경험과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나? 준비 과정이 조급했던가? 그러나 힘이 약한 애가 덩치 큰 애에게 맞고 와서 울고 있을 때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누가 일방적으로 때렸는지 분명하다면 덩치 큰 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공정함도, 균형감도 아니다. 또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적 현안과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 논의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내년에는 올해 주제 기행의 운영 방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했으니, 이 경험을 참조해서 한 번 더 설명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교과 수업과 연계해서 학기 초 혹은 이전 학년에서 관련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교육적 경험을 제공해야 겠다. 교실에서의 배움을 확장해 현장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 공유회에서 주제별 활동을 발표하고, 전체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인상 깊었던 배움을 나눴다. 몇 번의 이야기 과정을 통해서 교육의 정치적 편향성에 관해서는 의견을 굽히지 않는 소수의 친구들이 있지만, 누구도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그렇게 시작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계속 배우는 중이니까.
통합기행을 통해서 얻은 배움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 말하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 왔지만, 우리는 듣지 않고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행동할 용기, 용기 낼 용기를 배우게 되었다. 연대의 힘을 배우며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활동은 굉장히 값지다.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
• 가장 인상 깊었던 배움은 ‘책임감’이다. 주제 기행을 통해서 사람의 선택이 자연이나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더 나은 결정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 수많은 종들이 각자 다른 다양한 생존 전략을 쓰고 있다. 생태계는 그 다양함으로 튼튼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다양성이 매우 중요하다.
• 예술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졌고, 예술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위로와 상처를 표현하기도 한다는 걸 느꼈다. 또한 예술과 문화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문화를 받아들여서 예술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수업
현장체험학습을 체험하는 중
임선영 yallary@2woo.net
경기 이우고등학교 교사
급하다, 급해!
개학을 며칠 앞두고, 제주도로 급히 답사를 가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여유 있게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싸~해졌다. 지갑을 뒤져서 신분증을 찾아봤다. 아뿔사! 없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급히 지하철에서 내려서 집에 들렀다가 신분증을 갖고 다시 공항을 향했다. 검색해 보니, 김포공항역에 비행기 출발 30분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망했다. 비행기를 놓치겠다 싶었지만, 검색해 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온라인 선배님들의 조언과 나이를 초월한 긴박한 전력 질주로, 출발 5분 전에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출발 전부터 고생이다.
왜 갈까?
주제 기행은 실제 현장 경험을 통해서 교실의 배움을 확장하고 새롭게 통합하는 교육과정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삶’과 ‘실제 현장에서 이야기하는 삶’은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이런 질문을 안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 혹은 관심사에 따라서 주제를 선정하고, 탐색해서 새롭게 배우는 경험을 한다. 그동안 학생들은 1학기 말 혹은 드물게 다음 해 1월에 주제별 기행을 다녀왔다. 학생들이 다양한 주제에 따른 제안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이를 중심으로 희망하는 주제를 선택해서 팀을 구성했었다. 생태, 문화·예술, 교육, 역사, 스포츠, 에너지, 과학 등 그해 학생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에 따라서 내용과 장소를 다르게 선정했다. 그러나 학기 후반이 되면 애초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간다. 학교 자치의 중심축인 2학년 학생들은 1학기를 마치고 나면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교사들은 주제 기행의 취지와 방향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면서 학생들과 아슬아슬한 신경전을 펼쳤다.
교육 활동의 가장 큰 힘은 선배에게 구전되는 이야기다. 선배로부터 어떤 활동이 좋았다고 전해 들으면, 학생들은 이미 학습 동기의 절반을 채우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활동이 힘들더라도 의미와 재미가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가면 구전의 이야기는 어느새 전설로 둔갑한다. 전설에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재미가 함께 할수록 이야기되기 쉽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서 전설은 중단되고, 다시 시작된 체험 활동은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밀도로 운영되지 못했다. 혹은 팀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배움의 차이가 크게 발생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주제 기행’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설정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변화와 맞물려서, 교사회에서는 대안형 특성화 학교로서 학교 철학과 방향이 잘 드러나는 교육과정을 고민했다. 학생들은 대안학교로서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의견을 대자보에 담아 학교 벽에 붙였다. 동시에 학생·학부모·교사 사이에 특성화 대안학교 정체성에 관한 논란도 붙었다. 몇 번의 논의를 거쳐서 작년에 교사회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입학생부터 교육과정 변화를 단계적으로 마련하고, 우선 2025년 고2 통합 기행, 고1 농촌 봉사 활동 목표를 재설정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진로 탐색 시기와 학교 교육 목표(공공성, 생태성, 민주 시민성)에 맞춰서 6가지 주제(생태, 지질, 여성과 장애, 역사와 평화, 교육, 문화와 예술)와 주제별로 참고할 만한 단체를 제안했다. 그리고 학교가 제안하는 교육적 경험과, 학생들이 기획할 수 있는 주제별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서 기존 2박 3일에서 3박 4일 일정으로 하루를 보탰다.
주제 기행의 시기도 4월 말로 변경했다. 학기 말과 학년 말은 추위와 더위로 인해서 외부 활동을 하기 힘들다. 학생들도 심리적·신체적으로 지치고 힘든 상태인 점을 고려해 쾌적한 4월 말이 적합했다. 무엇보다 진로를 탐색하기에 앞서, 기행을 통해서 만나게 될 ‘사람’과 그들이 지키려는 ‘가치’와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랬다. 막연한 진로에 대한 불안함으로 ‘어떤 직업이 좋은가’를 고민하기 전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기대했다.
왜 제주도인가?
다양한 주제에 따라서 현장체험학습을 운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복잡한 행정 처리다. 특히 안전 문제와 관련해서 확인하고 지켜야 할 규정이 많아지고, 변화되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예산안을 작성하고 회계 처리를 하려면 교사들의 부담은 가중된다.
6가지 주제에 따라 장소가 다를 때에는 숙박과 교통 등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주제 수만큼 많아진다. 주제별로 담당 교사가 사전 답사와 회계 처리까지 맡아서 진행하게 되면, 정작 학생들이 경험하게 될 교육적 내용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행정적으로 조금 수월하기 위해서는 한 장소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후보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제주도였다.
여러 현장학습을 기획한 대안학교 교사 친구에게 연락해서 제주도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줄 현지 활동가도 소개받았다. 관광지로 만나는 제주도가, 아니라 4.3 항쟁, 강정 마을, 알뜨르, 송악산 등 시민 불복종과 저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주도는 아프고 참혹한 수탈의 역사를 겪었지만, 쉽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곳이다. 강정마을에 대해 이미 해군기지가 들어서 버려 끝난 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을 전제로 안보를 이야기하는 군사주의에 맞서 ‘평화’를 노래하고 춤추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공부는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에서는 생기가 돋고, 아름다운 것은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4월 말에 진행할 주제 기행을 위해서 겨울 방학에 빠듯한 일정으로 기행을 기획하고, 개학하기 직전에 학년 팀장 선생님과 1박 2일로 제주도로 답사를 다녀왔다. 숙소와 학생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하는 장소 몇 군데를 뽑아서 움직이고, 현지 활동가분을 만나서 강정마을을 둘러보고 대략의 동선을 확인했다. 우리가 선택할 만한 숙소가 많지 않았다. 예약이 가능한 숙소는 조금 허름하고, 오래된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넉넉하고, 주변에 상권이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같은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라서 더 흡족했다.
학생과 함께 만드는 주제 기행
‘OECD 학습 나침반 2030’에서는 학습자에게 중요한 역량으로 세 가지 ‘변혁적 역량(transformative competencies)’을 강조했다. 이때 변혁적 역량은 지금 여기 사회에 기여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미래 만들어 가기 위한 학습자의 역량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소수자 입장의 고려, 차별과 억압 구조가 작동하게 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실천과 행동으로 더불어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제와 추천 장소를 제시하고, 학생들은 제시된 주제와 장소를 탐색하며 그 주제를 선택한 동기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음은 팀 내에서 활동 규칙과 팀 활동을 통해서 기대하는 목표에 대한 핵심 질문을 만들고, 활동 내용을 기획한다. 기획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주제 기행 계획서 작성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공유한다. 주로 통합 기행의 취지에 적합한 것인지, 현실성이 있는지, 팀 내에서 협의를 통해서 논의된 것인지 등을 묻는 내용이다.
팀에서는 탐방 장소뿐만 아니라 이동 방법과 점심 식사 메뉴, 활동 기록, 회계 담당, 사전 질문, 인터뷰 등을 포함한 일정 협의 등을 학생들이 협의하고 각자 역할을 나눠서 맡는다. 학년 전체가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매주 2시간 정도 확보했지만, 사전 안전교육과 다른 학교 행사 등으로 인해서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팀별로 주로 점심시간과 방과 후를 활용해서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팀장들은 ‘주제 기행 준비위원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전체 일정을 협의하고, 팀별 상황을 공유했다. 또한 주제 기행에서 학년 전체가 모이는 시간에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특히 문화·예술팀은 강정마을에서 인간띠 잇기 평화 문화제 행사를 위해서 전 학년 퍼포먼스까지 준비해야 했다. 노래를 선정해서 80명에게 숙지시키고, 이동 동선을 짜서 움직이는 연습을 몇 번에 걸쳐서 진행했다.
주제 기행은 끝났지만, 배움은 지금부터 시작
준비위원회는 사전 준비부터 시작해서 기행을 다녀온 후 공유회 운영 방식까지 정하고, 기행을 잘 마쳤다. 그런데 준비위원회 활동은 기행이 끝난 후부터 더욱 바빠졌다. 준비위원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행이 끝난 후 3회에 걸쳐 학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장이 열렸고, 이야기장 준비를 위해서 숨 고를 새 없이 회의가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과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행 4일 일정 중 3일은 아주 순조로웠다. 마지막 날은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둘러보고, 해군기지 앞에서 진행하는 문화제에 참여하고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80명의 학생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해군기지와 강정천을 둘러봤다. 햇볕이 쨍하고 바람이 부는 곳이라서 조금 덥기는 했지만,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아이들이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중간에 물을 사서 목을 축이면서 강정마을 활동가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정(江汀)마을은 이름처럼 제주도에서도 물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국방부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기 위해 몇몇 마을을 후보지로 살펴봤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인해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7년 4월에 일부 주민들이 모여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하고, 그해 6월에 다시 전체 주민이 모여 해군기지 찬반 투표를 하려고 했지만, 해군과 해군기지 사업추진위 측이 사전 모의해서 투표를 무산시켰다. 주민 동의뿐만 아니라 환경영향평가 등 해군기지 건설 과정은 절차적으로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2012년 강정마을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고, 2016년에 해군기지가 완공되었다. 해군기지 정문 안쪽에 훼손된 구럼비 바위가 있었다. 평화활동가들은 2013년부터 매일 아침 7시 생명 평화 100배(拜)와 11시 가톨릭 미사, 12시 평화문화제(인간 띠 잇기)를 해 왔다. 오랜 비폭력 저항운동이자 일상 투쟁의 하나다. 경찰, 해경, 해군, 국정원 등 국가 기관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폭행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벌어졌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해 어떻게 불법적으로 움직였는지,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를 어떻게 분열시켰고 마을분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행 마지막 날 밤이라서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논 탓인지 학생들은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해군기지 정문 앞으로 갔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전체 학생들이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걸려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몸이 피곤했던 학생들은 버스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이내 해군기지에 도착했다. 평화문화제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열렸다. 우리는 동그랗게 서서 〈바위처럼〉을 불렀다. 무대 위에서 노래에 맞춰 추는 몸짓을 따라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피곤해서 쉬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문화제 장소는 생각보다 협소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준비한 노래를 불렀지만, 연습한 동선대로 이동하지 못하고 서서 불렀다. 문화제는 강정에서 평화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 학교 졸업생이 후배들에게 환영 인사를 전하면서 마무리되었다.
5월 초, 연휴를 보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난 지 며칠 후 대자보가 붙었다. 한 학생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앞에서 참여한 문화제를 시위로 규정하고, 사전에 문화제에 대한 충분한 안내가 없었고, 당일 버스에 내리자마자 이동해 문화제에 참여한 것을 두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참여를 강요받았다’는 요지의 글을 작성한 것이다. 또 ‘해군과 강정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모두 듣지 않고, 한쪽 이야기만 듣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위배가 되기 때문에 교사회에게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후 다른 학생들에게 들어 보니, 몇몇 학생들이 총을 들고 있는 군인 앞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무척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은 놀란 마음에 문화제에 참여하지 않고 한쪽에 모여서 문화제를 지켜보며 화가 났다고 했다. 그렇게 화가 난 친구들은 문화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불편한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오해에 대해 교사회에서 입장을 정리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먼저 문화제에서 놀란 학생들에게 사전 안내와 소통을 충분히 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전 교육에서 강정에 관한 소개와 평화문화제에 대한 안내가 있었고, 해군기지와 강정천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활동가분들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들었지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었겠다 싶었다. 그러나 문화제는 시위가 아니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은 분명 부당한 일이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의’라고 했다. 2019년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주민 폭행과 같은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발표한 조사 결과도 공유했다. 집회 신고도 하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매일 진행한 문화제를 시위라고 볼 수 없다고도 설명했다. 이번 문제 제기를 통해서 기행의 의미를 되짚고,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랬다.
이어서 강정을 공부한 팀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반박 대자보를 붙이면서, 두 가지를 요청했다.
1. 22기 전체가 강정마을 평화문화제의 활동가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
2. 22기 구성원 모두가 주제 기행에서의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앞으로 배움의 태도를 다시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 나눌 것.
이렇게 2번의 이야기장과 1번의 공유회 과정을 거치게 됐다. 기행에 참여한 80명의 학생들은 어느 편에서 쉽게 판단하지 않고 ‘틈’에 존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또 이야기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라운드 룰을 정했다.
학생들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싸움이 아닌 배움의 장을 만들기 위해 공유회 내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노력했고, 그 속에서 ‘침묵의 언어’가 느껴졌다. 이야기장이 끝날 때마다 교사에게 찾아와서 사과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논리보다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되어 버리면 이야기는 들리지 않게 된다. 이야기장이 끝날 때마다 몇몇 친구들의 발언과 태도에 속상해하는 아이들도 생겼다. 주제 기행을 기획한 교사로서 자책감이 들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학생들의 경험과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나? 준비 과정이 조급했던가? 그러나 힘이 약한 애가 덩치 큰 애에게 맞고 와서 울고 있을 때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누가 일방적으로 때렸는지 분명하다면 덩치 큰 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공정함도, 균형감도 아니다. 또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적 현안과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 논의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내년에는 올해 주제 기행의 운영 방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했으니, 이 경험을 참조해서 한 번 더 설명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교과 수업과 연계해서 학기 초 혹은 이전 학년에서 관련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교육적 경험을 제공해야 겠다. 교실에서의 배움을 확장해 현장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 공유회에서 주제별 활동을 발표하고, 전체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인상 깊었던 배움을 나눴다. 몇 번의 이야기 과정을 통해서 교육의 정치적 편향성에 관해서는 의견을 굽히지 않는 소수의 친구들이 있지만, 누구도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그렇게 시작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계속 배우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