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호[시] 논두렁에서 외 | 임덕연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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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서



발목쯤 물에 잠그고 사는 벼들은

물속에서 결코 얼굴을 내밀지 않는 

물풀들이 사랑해서 발목이 잡혔을 거다.


발목쯤 물에 잠겨 있는 행복보다 

발등이 드러날까 걱정인 벼들은

속으로 단단한 나이테를 살찌우며 살고 있는 

나무들이 늘 부러운 듯하다.


연병장에 도열한 신병훈련소 훈련병들처럼 벼들은 

부동의 차렷 자세로 매번 나를 맞이하지만 

나는 왠지 늘 불안하다.


일동 쉬어!


나는 벼들에게 무슨 운명처럼 발목 잡혀 있는 듯하다.






소만 무렵



청딱따구리가 죽은 자두나무를 툭툭 쳐본다. 

어느 먼 암자에서 들리는 목탁소리 같다. 

애써 잠을 깬 덩굴강낭콩 잎들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멈칫멈칫 손잡을 곳을 찾는다.


여기를 한번 올라가 볼까 하고 

자두나무를 올려다보던 호박순이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환삼덩굴을 

살짝 밀어본다.


땅강아지 다시 흙 속으로 파고 들어갈 때 

호미에 묻은 흙이 슬며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사내는 또 졸립다.




시작 노트

24절기 중 소만은 5월 20일쯤 된다. 소만 무렵이 되면 온수로 하던 샤워를 냉수로 할 만하다. 밤이나 비 올 때 기온이 많이 내려가 잘 자라지 않던 풀들이 이때쯤은 제법 기운차게 길이를 키운다. 소만은 좀 풍부해지는 때를 말한다. 풀이나 나뭇잎이 어느 정도 자라 벌레들이 태어나고 새들도 자식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른다. 특히 중부 지방은 이때 논물을 가득 가두고 논두렁을 보수하고 논두렁 풀을 깎고 모내기를 한다. 가끔 논두렁에 나가 멍하니 서 있다 보면 나도 논두렁이 되곤 한다.


임덕연(sigolanduk@korea.kr)      1963년 충북 충주 남한강가에서 태어나 경기 안양천변에서 자랐다. 지금은 경기 여주 이포나루 근처에서 아홉 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많다. 텃밭에 곡식보다 풀을 더 많이 키운다. 시집 《남한강 편지》, 환경 동화 《똥 먹은 사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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