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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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현이
욱현이는 조금 느린 아이다
평소에도 약간 그렇지만
시험 기간에는
느린 동작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흡사 조각가 같다
OMR 카드에 서른 문항의 정답을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옮겨 적는데
무려 오 분이 걸린다
서른 개의 빈방마다
한참씩이나 고요한 눈길을 주다가
아뿔싸, 실수를 했는지
카드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또 오 분을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시간이 없다고 다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의 고요한 눈길이
다시금, 한 장의 카드가 아닌
서른 개의 빈방에 가닿고 있었다
욱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속도를 반성한다
겨우 핀 꽃
누가 나를 끌었을까
길 가다 말고 허리 굽혀
한참을 바라보니
꽃의 형상이 보였다
저 작은 것들은
어쩌자고 피었을까
꽃이 피었다기보다는
생명이 피었다고 해야 옳겠다
해묵은 낙엽 더미에서
겨우 핀 꽃들에게
차마 사진기를 들이대지 못하고
눈으로만 찍고 또 찍다가
넌 왜 피었니?
그쪽은 왜 피었는데요?
한마디씩 주고받다 보니
기막힌 마음이 더했다
난 왜 피었을까
묻고 또 묻다가
쪼그린 자세를 풀고 일어설 때는
묵은 피가 도는지 가슴께가 아팠다
오랜만에
겨우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시작 노트
“욱현이를 볼 때마다 / 나는 나의 속도를 반성한다”를 넣을까 뺄까 하다가 넣었다. 처음에 시를 탈고할 때는 이 구절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 ‘사족’ 같다는 의견을 내자 나도 수긍하며 빼기로 한 것인데 다시 넣어 보았다. 《오늘의 교육》 독자들에게는 시의 미학보다도 메시지 전달이 더 중요할 수 있겠다 싶어서다.
‘욱현이’는 ‘겨우 핀 꽃’과 겹쳐지는 아이다. 가끔 학교로 강연을 갈 때는 이 2편의 시를 후배 선생님들께 보여 드리곤 한다. “아이들을 느리게 만나는 것은 교사의 전문성에 해당한다”는 말과 함께.
안준철(jjbird7@hanmail.net) 1954년 전주 출생으로 전남 순천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했다. 1992년 제자들에게 써 준 생일시를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 《생리대 사회학》, 《나무에 기대다》, 《꽃도 서성일 시간이 필요하다》, 산문집으로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등이 있다. 교육문예창작회와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전북 전주에서 산책가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