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리박스쿨과 극우 성교육이 훼손한 가치들
리박스쿨 사태, ‘교육의 중립성 위반’이 문제가 아니다
- 교육의 민주성과 돌봄·온라인의 취약성을 돌아보자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경남 초등 교사
리박스쿨. 그 이름을 듣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과의 연관성을 떠올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실제로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름을 따왔다는데, 그들은 이제 떠올리기에 너무 먼 사람들인지라 그 자체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청문회(2025년 7월 10일)에 소환된 리박스쿨 대표 손효숙 씨가 질문을 받다 “지금부터 심신미약자”라고 답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도 비웃음을 샀다.
리박스쿨은 2025년 5월 〈뉴스타파〉의 심층 보도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댓글로 나라를 구하는 자유손가락 군대’(자손군)라는 ‘댓글 부대’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정치적 여론 조작을 벌이는 한편,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늘봄학교의 강사로 적극 나서 극우 역사관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주입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조선을 위한 기독교 선교사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관” 등의 주제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는 여론 조작 조직과 교육 조직이 동일한 인물들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적인 이데올로기 전파 시도였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노인들을 상대로 “총선 필승을 위한 스마트폰 교육”을 실시하며, 휴대전화 사용에 서툰 노인들에게 댓글 공작 방법을 전수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집회에 나오거나 댓글 조작에 가담한 사람들을 늘봄학교 강사로 취업시켜 수입을 보장하겠다며 강사 양성 과정도 운영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리박스쿨 청문회 영상 중에서(〈JTV〉 2025년 7월 10일 유튜브 영상)
교육의 중립성은 허구다
리박스쿨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교육의 중립성 위반’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극우 성향 교육단체의 여론 조작 및 교육 현장 침투 사건이며,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그 의무를 위반하고 극우적 내용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려 했다는 것이 경악스럽고 매우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교육의 본질과 인권의 가치를 심각하게 왜곡하며, 오히려 이념적 프레임의 양극화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좀…… ‘후진 발상’이다.
왜냐면, 우선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교육 내용의 선택과 구성 자체가 이미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판단 없는 교육 내용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교육과정의 내용 선택, 교수-학습 방법의 결정, 평가 기준의 설정 등 교육의 모든 요소에는 필연적으로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 모든 교육은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고, 교육 자체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탈사회적, 탈정치적인 교육은 불가능하거니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그것은 교육 참여자를 탈사회적, 탈정치적인 교육 공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사건을 배제할 것인가, 어떤 문학 작품을 교과서에 실을 것인가, 어떤 과학 이론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모든 결정은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역사교육에서 민주화운동을 중요하게 다루느냐, 산업화의 성과를 중심으로 서술하느냐는 교육의 중립성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역사관을 중심에 두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모든 교육은 편향되어 있다. 그럼에도 교육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모두의 정치적 편향을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지적했듯이, ‘교육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기존 지배 구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며, 교육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리박스쿨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역사교육을 실시하면서 이를 ‘객관적 역사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교육의 중립성 개념의 허구성에 기초한 주장이다.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 민주적이지 않은 교육
리박스쿨 사태에서 진짜 문제는 ‘정치적 편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체적 쟁점들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교육의 목적과 방법의 문제이다. 앞서 교육 내용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교육 방법 측면에서도 소위 ‘중립적’ 교육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을 선호하느냐,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을 선호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반영한다. 주입식 교육은 교사가 가진 지식과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권위주의적 교육 방식으로, 학생들을 수동적 지식 수용자로 규정한다. 반면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은 민주적 교육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 방법이 교육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권력을 학습자에게 일정 부분 이양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의미는 결국 누구에게 결정 권한이 있느냐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으니 말이다. 헨리 지루, 피터 맥라렌 등 비판교육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위이다. 진정한 교육은 학습자들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교육을 통해 학습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행위다. 교육의 이러한 해방적, 변혁적 기능을 부정하고 단순한 지식 전달로 교육을 축소시키는 것은 교육의 사회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국회 청문회에서 공개된 리박스쿨의 수업 장면은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교육의 내용보다 교육의 방법이 더 문제적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역사 수업이라며 ‘이승만이 왜 친일 청산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객관식 문제로 내고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답을 정답으로 제시해 반복해 읽게 한다. 「아동 권리 협약」 제29조는 교육의 목적이 “아동의 인격, 재능, 정신적·신체적 능력의 최대한 계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다양성에 대한 관용” 등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리박스쿨의 행위는 이러한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특히 협약 제17조는 아동이 다양한 정보와 자료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리박스쿨의 편향된 교육은 아동이 다양한 관점과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침해한다. 또한 협약 제13조는 아동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한다. 즉 리박스쿨이 실시한 교육은 학생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하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자율적 판단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교육 방법이 반민주적인 이유다.
리박스쿨을 끊어 내기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을 근절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리박스쿨에만 반대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명제는,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또는 그에 포섭되지 않는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 죄인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은 문제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교장, 교감을 대상으로 민주적 회의 문화 연수를 폭넓게 실시한 적이 있었다. 연수를 받고 온 교장, 교감들이 회의 때마다 포스트잇만 꺼내 들어서 포스트잇 지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태도나 의사결정, 권력 구조에 대한 성찰과 변화는 없이, 그러니까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이 군말 없이 따라 주길 바라는 마음은 바꾸지 않고 포스트잇만 동원한다고 민주적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가치를 실제로 구현해 내는 수단이지 장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서 리박스쿨을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학습자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 학습자에게 자기결정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교육, 일방향으로 지식과 가치를 전달하기만 하는 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와 같다. 극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은 주입하는 것이 정당한가? 절대 그럴 리 없다. 학습자와 소통하지 않고 정해진 정답을 제시하는 형태를 교육에서 없애 나갈 때 리박스쿨 같은 사례는 재발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의 민주화와 학습자 권리 신장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교육은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비판적 사고력보다는 암기와 순응을 강조하는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박정희 시대의 반공교육, 국민윤리교육 등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교육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권위주의적 문화와 획일화된 교육 방식이 남아있으며, ‘진보 교육감’이 혁신교육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은 권위적인 교육을 벗어나 민주시민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리박스쿨이 얼마나 문제적이고 극우 세력이 얼마나 보기 흉하고 우스꽝스러운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민주적인 교육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우리는 보다 집중해야 한다. 학습자에게 순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선거 참여, 시민단체 활동, 지역 사회 봉사 등 다양한 시민 참여 방식을 교육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학생들이 수동적인 제도 순응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참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교육으로 교육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리박스쿨과 같은 사례를 다시 초래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보편 가치 훼손에 대한 엄중한 경계
이렇게 이야기하면 리박스쿨은 방법만 문제이지 내용은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리박스쿨은 전형적으로 보편적 가치와 특수 이익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인권, 민주주의,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특정 정파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는 국제 인권 규범과 헌법적 가치로 확립된 것으로,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역사, 한반도 역사와 함께 고찰되고 온 사회 구성원이 함께 수십, 수백, 수천 년간 구축해 온 것이다. 「세계 인권 선언」을 비롯해 유엔의 여러 인권 선언, 「아동 권리 협약」 등의 국제 인권 협약, 「헌법」 등에 명시된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편향’이 아니라 교육의 당연한 책무이며 동시에 학습자의 권리 보장이다.
또한 리박스쿨의 교육 내용은 현상 유지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인권 증진을 위한 노력을 특정 집단이나 특정 정파의 ‘편향’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교육에서 다루는 것을 ‘정치적 편향’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결국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계속되는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더 민주적인 사회, 더 해방된 사회,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진전해 온 인류 역사가 가진 보편 가치를 부정한 리박스쿨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그야말로 반사회적이다.
돌봄과 온라인 정치 공간의 취약성
더불어 짚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취약성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리박스쿨은 댓글 부대를 운영하며 정치적 여론 조작에 관여한 조직이 동시에 늘봄학교에 들어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교육과 정치 선전을 연계시킨 새로운 사례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공동체에서 돌봄과 온라인 정치 공간이 얼마나 이용하기 쉬운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김건희의 목걸이가 진품인지 가품인지로 세상이 떠들썩하지만 그건, 가품일 경우에는 상표 관련 법 위반으로, 진품일 경우 재산 신고 누락 및 청렴 비위 관련 법규로 처벌될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정치 공간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늘봄학교에서 반민주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적용할 수 있는 제도나 법규가 존재하는가? 총선 기간에 이루어진 댓글들은 「공직선거법」 적용이 가능하겠지만, 선거가 아닌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된 댓글 부대에 대해선 개별 민사 소송 외에 대응 방안이 뚜렷하게 없다. 늘봄학교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계약 해지 외에는 방법이 전무하다. 계약 해지는 재발 방지일 뿐, 그 이전에 이루어진 활동들에 대한 조치가 되지 않고, 업체명을 바꾸어서 다른 학교에 들어가면 그 역시 막을 수 없다. 이 취약성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서두에서 언급했듯, 리박스쿨이 구성원들을 늘봄과 방과후학교 강사로 취업하게 한 것은 댓글 정치 선전에 대한 대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를 돌보는 노동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거칠게 말해 지금의 어린이 돌봄은 정해진 시간 동안 누구든 어린이를 데리고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지향이다. 사회적 돌봄이 요구되지만 여전히 돌봄은 노동하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즉 개인의 사사로운 사정에 따라 제공되는 일종의 노동자 보조 정책에 불과하고 그에 겸해 저소득층 어린이 지원 역할이 함께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을 중요한 영역으로 재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정말 공공화하고 사회화해야 한다. 지금 사회에 자리 잡은 공공 영역들도 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교육도 의료도 처음엔 사적 영역이었다. 공공 교육을 제도화하고 공공 의료를 시간과 재정과 노력을 들여 발전시켜 왔다. 특정한 영역을 공공화하는 것은 사회가 여유 있을 때 하는 일이 아니다. 영국은 의료 보험 제도와 무상 의료 체제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만들어 냈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여유 있을 때란 없으니, 필요할 때 사회가 함께 노력해 그야말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첨언하고 싶은 것은 어린이 돌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노동자)들에게 특정 학력과 특정 자격증을 요구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들의 삶을 대졸 학력 소지자로만 채우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다. 어린이들의 삶을 비장애인으로만 채우는 것도 민주적이지 않다. 돌봄은 분리가 아닐뿐더러 보호만도 아니다. 돌봄이 지역 사회에서 더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돌봄의 수혜자가 지역 사회의 시민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돌봄의 역할 중 하나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동시대인인 어린이들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교류하고 관계 맺는 매일매일을 보낼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더 많이 교류하고 관계 맺는 매일매일을 보낼 수 있도록, 돌봄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처럼 ‘민주시민돌봄’, ‘돌봄을 통한 시민권 보장’, ‘돌봄으로 변화하는 ○○구 정치’를 상상해 본다. 돌봄에서 아동이 대상자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주입식 교육, 이데올로기 주입식 돌봄 프로그램이 있을 수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온라인 댓글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온라인 댓글 공간이 문제가 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1992년에 이미 한 여중생이 PC 통신에서 성적인 폭언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❶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온라인에서 혐오나 차별적 발언에 대한 전 사회적 대응은 공익 광고와 ‘선플 달기’ 운동 정도다.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않고 있다. 2024년 불법 합성 성착취물 사태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로 터졌는데도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광활한 온라인 공간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격적 고민이 필요하다. 전두환 정부부터 정부 산업 발전 목표를 ‘정보화’에 두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책 사업으로 광통신망을 깔아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는 국가라는 유일무이한 성격을 지닌 우리 사회에서 온라인 공간을 민주화하는 것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박스쿨 사태의 해결은 교육의 중립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민주성과 해방성을 되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현장에서 다양한 관점과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자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동시대 시민이라는 것에 기반한 교육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특정한 정치적 세력이나 이익집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향이다.
❶ 윤보라(2025), 〈한국사회 온라인 공간의 성별성 변화와 정치주체로서의 여성〉,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기획 | 리박스쿨과 극우 성교육이 훼손한 가치들
리박스쿨 사태, ‘교육의 중립성 위반’이 문제가 아니다
- 교육의 민주성과 돌봄·온라인의 취약성을 돌아보자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자문위원, 경남 초등 교사
리박스쿨. 그 이름을 듣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과의 연관성을 떠올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실제로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름을 따왔다는데, 그들은 이제 떠올리기에 너무 먼 사람들인지라 그 자체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청문회(2025년 7월 10일)에 소환된 리박스쿨 대표 손효숙 씨가 질문을 받다 “지금부터 심신미약자”라고 답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도 비웃음을 샀다.
리박스쿨은 2025년 5월 〈뉴스타파〉의 심층 보도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댓글로 나라를 구하는 자유손가락 군대’(자손군)라는 ‘댓글 부대’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정치적 여론 조작을 벌이는 한편,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늘봄학교의 강사로 적극 나서 극우 역사관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주입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조선을 위한 기독교 선교사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관” 등의 주제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는 여론 조작 조직과 교육 조직이 동일한 인물들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적인 이데올로기 전파 시도였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노인들을 상대로 “총선 필승을 위한 스마트폰 교육”을 실시하며, 휴대전화 사용에 서툰 노인들에게 댓글 공작 방법을 전수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집회에 나오거나 댓글 조작에 가담한 사람들을 늘봄학교 강사로 취업시켜 수입을 보장하겠다며 강사 양성 과정도 운영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리박스쿨 청문회 영상 중에서(〈JTV〉 2025년 7월 10일 유튜브 영상)
교육의 중립성은 허구다
리박스쿨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교육의 중립성 위반’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극우 성향 교육단체의 여론 조작 및 교육 현장 침투 사건이며,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그 의무를 위반하고 극우적 내용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려 했다는 것이 경악스럽고 매우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교육의 본질과 인권의 가치를 심각하게 왜곡하며, 오히려 이념적 프레임의 양극화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좀…… ‘후진 발상’이다.
왜냐면, 우선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교육 내용의 선택과 구성 자체가 이미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판단 없는 교육 내용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교육과정의 내용 선택, 교수-학습 방법의 결정, 평가 기준의 설정 등 교육의 모든 요소에는 필연적으로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 모든 교육은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고, 교육 자체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탈사회적, 탈정치적인 교육은 불가능하거니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그것은 교육 참여자를 탈사회적, 탈정치적인 교육 공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사건을 배제할 것인가, 어떤 문학 작품을 교과서에 실을 것인가, 어떤 과학 이론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모든 결정은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역사교육에서 민주화운동을 중요하게 다루느냐, 산업화의 성과를 중심으로 서술하느냐는 교육의 중립성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역사관을 중심에 두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모든 교육은 편향되어 있다. 그럼에도 교육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모두의 정치적 편향을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지적했듯이, ‘교육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기존 지배 구조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며, 교육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리박스쿨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역사교육을 실시하면서 이를 ‘객관적 역사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교육의 중립성 개념의 허구성에 기초한 주장이다.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 민주적이지 않은 교육
리박스쿨 사태에서 진짜 문제는 ‘정치적 편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체적 쟁점들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교육의 목적과 방법의 문제이다. 앞서 교육 내용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교육 방법 측면에서도 소위 ‘중립적’ 교육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을 선호하느냐,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을 선호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반영한다. 주입식 교육은 교사가 가진 지식과 가치관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권위주의적 교육 방식으로, 학생들을 수동적 지식 수용자로 규정한다. 반면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은 민주적 교육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토론과 참여 중심의 교육 방법이 교육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권력을 학습자에게 일정 부분 이양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의미는 결국 누구에게 결정 권한이 있느냐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으니 말이다. 헨리 지루, 피터 맥라렌 등 비판교육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위이다. 진정한 교육은 학습자들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교육을 통해 학습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행위다. 교육의 이러한 해방적, 변혁적 기능을 부정하고 단순한 지식 전달로 교육을 축소시키는 것은 교육의 사회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국회 청문회에서 공개된 리박스쿨의 수업 장면은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교육의 내용보다 교육의 방법이 더 문제적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역사 수업이라며 ‘이승만이 왜 친일 청산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객관식 문제로 내고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답을 정답으로 제시해 반복해 읽게 한다. 「아동 권리 협약」 제29조는 교육의 목적이 “아동의 인격, 재능, 정신적·신체적 능력의 최대한 계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다양성에 대한 관용” 등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리박스쿨의 행위는 이러한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특히 협약 제17조는 아동이 다양한 정보와 자료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리박스쿨의 편향된 교육은 아동이 다양한 관점과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침해한다. 또한 협약 제13조는 아동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한다. 즉 리박스쿨이 실시한 교육은 학생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하거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고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자율적 판단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교육 방법이 반민주적인 이유다.
리박스쿨을 끊어 내기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을 근절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리박스쿨에만 반대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명제는,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또는 그에 포섭되지 않는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 죄인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은 문제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교장, 교감을 대상으로 민주적 회의 문화 연수를 폭넓게 실시한 적이 있었다. 연수를 받고 온 교장, 교감들이 회의 때마다 포스트잇만 꺼내 들어서 포스트잇 지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태도나 의사결정, 권력 구조에 대한 성찰과 변화는 없이, 그러니까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이 군말 없이 따라 주길 바라는 마음은 바꾸지 않고 포스트잇만 동원한다고 민주적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가치를 실제로 구현해 내는 수단이지 장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서 리박스쿨을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학습자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 학습자에게 자기결정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교육, 일방향으로 지식과 가치를 전달하기만 하는 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와 같다. 극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은 주입하는 것이 정당한가? 절대 그럴 리 없다. 학습자와 소통하지 않고 정해진 정답을 제시하는 형태를 교육에서 없애 나갈 때 리박스쿨 같은 사례는 재발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의 민주화와 학습자 권리 신장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교육은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비판적 사고력보다는 암기와 순응을 강조하는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박정희 시대의 반공교육, 국민윤리교육 등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교육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권위주의적 문화와 획일화된 교육 방식이 남아있으며, ‘진보 교육감’이 혁신교육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은 권위적인 교육을 벗어나 민주시민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리박스쿨이 얼마나 문제적이고 극우 세력이 얼마나 보기 흉하고 우스꽝스러운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민주적인 교육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우리는 보다 집중해야 한다. 학습자에게 순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선거 참여, 시민단체 활동, 지역 사회 봉사 등 다양한 시민 참여 방식을 교육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학생들이 수동적인 제도 순응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참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교육으로 교육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리박스쿨과 같은 사례를 다시 초래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보편 가치 훼손에 대한 엄중한 경계
이렇게 이야기하면 리박스쿨은 방법만 문제이지 내용은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리박스쿨은 전형적으로 보편적 가치와 특수 이익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인권, 민주주의,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특정 정파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는 국제 인권 규범과 헌법적 가치로 확립된 것으로,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 역사, 한반도 역사와 함께 고찰되고 온 사회 구성원이 함께 수십, 수백, 수천 년간 구축해 온 것이다. 「세계 인권 선언」을 비롯해 유엔의 여러 인권 선언, 「아동 권리 협약」 등의 국제 인권 협약, 「헌법」 등에 명시된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편향’이 아니라 교육의 당연한 책무이며 동시에 학습자의 권리 보장이다.
또한 리박스쿨의 교육 내용은 현상 유지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인권 증진을 위한 노력을 특정 집단이나 특정 정파의 ‘편향’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교육에서 다루는 것을 ‘정치적 편향’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결국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계속되는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더 민주적인 사회, 더 해방된 사회,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진전해 온 인류 역사가 가진 보편 가치를 부정한 리박스쿨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그야말로 반사회적이다.
돌봄과 온라인 정치 공간의 취약성
더불어 짚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취약성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리박스쿨은 댓글 부대를 운영하며 정치적 여론 조작에 관여한 조직이 동시에 늘봄학교에 들어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교육과 정치 선전을 연계시킨 새로운 사례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공동체에서 돌봄과 온라인 정치 공간이 얼마나 이용하기 쉬운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김건희의 목걸이가 진품인지 가품인지로 세상이 떠들썩하지만 그건, 가품일 경우에는 상표 관련 법 위반으로, 진품일 경우 재산 신고 누락 및 청렴 비위 관련 법규로 처벌될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정치 공간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늘봄학교에서 반민주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적용할 수 있는 제도나 법규가 존재하는가? 총선 기간에 이루어진 댓글들은 「공직선거법」 적용이 가능하겠지만, 선거가 아닌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된 댓글 부대에 대해선 개별 민사 소송 외에 대응 방안이 뚜렷하게 없다. 늘봄학교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계약 해지 외에는 방법이 전무하다. 계약 해지는 재발 방지일 뿐, 그 이전에 이루어진 활동들에 대한 조치가 되지 않고, 업체명을 바꾸어서 다른 학교에 들어가면 그 역시 막을 수 없다. 이 취약성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서두에서 언급했듯, 리박스쿨이 구성원들을 늘봄과 방과후학교 강사로 취업하게 한 것은 댓글 정치 선전에 대한 대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를 돌보는 노동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거칠게 말해 지금의 어린이 돌봄은 정해진 시간 동안 누구든 어린이를 데리고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지향이다. 사회적 돌봄이 요구되지만 여전히 돌봄은 노동하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즉 개인의 사사로운 사정에 따라 제공되는 일종의 노동자 보조 정책에 불과하고 그에 겸해 저소득층 어린이 지원 역할이 함께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을 중요한 영역으로 재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정말 공공화하고 사회화해야 한다. 지금 사회에 자리 잡은 공공 영역들도 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교육도 의료도 처음엔 사적 영역이었다. 공공 교육을 제도화하고 공공 의료를 시간과 재정과 노력을 들여 발전시켜 왔다. 특정한 영역을 공공화하는 것은 사회가 여유 있을 때 하는 일이 아니다. 영국은 의료 보험 제도와 무상 의료 체제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만들어 냈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여유 있을 때란 없으니, 필요할 때 사회가 함께 노력해 그야말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첨언하고 싶은 것은 어린이 돌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노동자)들에게 특정 학력과 특정 자격증을 요구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들의 삶을 대졸 학력 소지자로만 채우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다. 어린이들의 삶을 비장애인으로만 채우는 것도 민주적이지 않다. 돌봄은 분리가 아닐뿐더러 보호만도 아니다. 돌봄이 지역 사회에서 더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돌봄의 수혜자가 지역 사회의 시민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돌봄의 역할 중 하나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동시대인인 어린이들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교류하고 관계 맺는 매일매일을 보낼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더 많이 교류하고 관계 맺는 매일매일을 보낼 수 있도록, 돌봄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처럼 ‘민주시민돌봄’, ‘돌봄을 통한 시민권 보장’, ‘돌봄으로 변화하는 ○○구 정치’를 상상해 본다. 돌봄에서 아동이 대상자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주입식 교육, 이데올로기 주입식 돌봄 프로그램이 있을 수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온라인 댓글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온라인 댓글 공간이 문제가 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1992년에 이미 한 여중생이 PC 통신에서 성적인 폭언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❶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온라인에서 혐오나 차별적 발언에 대한 전 사회적 대응은 공익 광고와 ‘선플 달기’ 운동 정도다.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않고 있다. 2024년 불법 합성 성착취물 사태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로 터졌는데도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광활한 온라인 공간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격적 고민이 필요하다. 전두환 정부부터 정부 산업 발전 목표를 ‘정보화’에 두었고, 김대중 정부에서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책 사업으로 광통신망을 깔아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는 국가라는 유일무이한 성격을 지닌 우리 사회에서 온라인 공간을 민주화하는 것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박스쿨 사태의 해결은 교육의 중립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민주성과 해방성을 되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현장에서 다양한 관점과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자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동시대 시민이라는 것에 기반한 교육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특정한 정치적 세력이나 이익집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향이다.
❶ 윤보라(2025), 〈한국사회 온라인 공간의 성별성 변화와 정치주체로서의 여성〉,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