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호[기획] 강남역 10번 출구 (난할)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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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페미니즘과 교육


강남역 10번 출구


난할
경기도 지역 고등학생
kkukkumon@naver.com
고등학생. 청소년인권활동가. 페미니스트.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화장실 앞에서 범행 대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들어온 남성은 보내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이 사건에 대한 추모 공간이 마련되었다. 희생당한 여성을 추모하기 위한 발길이 이어졌고 추모의 메시지를 담은 메모와 흰 국화가 수도 없이 놓였다.


5월 20일, 나는 강남역 추모 공간에 찾아가기로 했다. 부모님을 포함하여 주변 많은 사람들이 걱정의 말을 건넸다. 납득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SNS에서 미리 본 추모 장소에는 추모하러 온 시민들이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마스크가 비치되어 있었고, 일베와 같은 사이트에서 훼방을 놓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가량을 가는 내내 마음 한구석은 불안했다. 그 곳에서 도촬을 당할까 봐, 어떠한 물리적인 위협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단지 희생자를 추모하는 당연한 일을 하러 왔을 뿐이니 얼굴은 가리지 않겠다는 결심은 막상 강남역에 도착하니 무너졌다. 역 안의 액세서리 가게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샀다. 얼굴을 꼭꼭 가린 채 10번 출구로 향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공간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추모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흰 국화와 강남역 살인 사건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상징하는 흰색 리본이 바닥과 벽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메모를 읽는 사람들 틈에 껴서 벽을 눈으로 훑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선 아프지 마세요”, “좋은 곳에서 행복하세요”……. 수많은 메모 가운데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SEXIST MURDER CASE(성차별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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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공간을 메웠던 포스트잇들.   ⓒ 배경내



여성들은 왜 얼굴을 가려야 했나


“나 대신 죽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공간에 붙어있던 메모 중 하나이다. 많은 여성들이 이 메모에 공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성들은 실질적인 언어적, 물리적 위협을 ‘일상’에서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는 19일부터 추모 공간 철거 전까지 매일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추모 문화제의 자유 발언대는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고 자유롭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에 아카이빙된 발언 내용을 읽으면서, 또 직접 강남역 10번 출구로 가서 함께하면서 절감했던 것은 대부분의 여성이 일상 속에서 폭력과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여성은 마이크를 잡고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이 추모 장소에 나오는 것 자체가 무섭다”라고. 실제로 자유 발언대 바로 옆에선 “남성혐오를 조장하지 말라” 하고 외치며 위협하는 남성도 있었고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추모객을 도촬한 사진이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모두 씁쓸한 공감을 표했다.


미취학 아동 때부터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수도 없이 성추행을 당한 여성, 가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탈가정하여 도망자로 살고 있는 여성, ‘김치녀’와 같은 여성혐오 표현을 일상적으로 들어오며 자기 행동을 검열해 왔던 여성 등 많은 여성들이 추모 문화제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사실 여성들이 모여서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있는 자리는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같이 공기 같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내가 예민한 거겠지’,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겠지’ 하며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유 발언대에 선 여성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여성들은 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조심해 왔는가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여성들의 몸가짐, 옷차림 하나하나가 평가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실제 폭력을 당했을 때조차 ‘덜’ 조심한 부분을 트집 잡혀 ‘예민충’, ‘꽃뱀’ 따위의 말로 매도당하기 십상인 매일을 살아내면서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서로를 위해 뜨거운 연대와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공통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많은 여성들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기보다는 살아남고 있었다. 밖에 나가고 누군가를 추모하는 일상적인 일조차 공포 속에서 해야만 하는.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불러야 하는 이유

“여성혐오가 죽였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자유 발언대에 등장한 플랑의 문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으로 보고 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여성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여성혐오란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혐오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타자화, 객체화를 말한다. 즉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주체성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문화적 태도를 여성혐오라고 할 수 있으며 여성혐오는 남녀 간의 임금 격차, 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지나친 성적 대상화, 여성들이 주 소비층인 문화 콘텐츠에 대한 비하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경찰은 ‘여성 혐오에 의한 범행이라기보다는 조현병으로 인한 범행’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왜 범인은 먼저 들어온 6명의 남성은 그냥 보내고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을까. 단순한 ‘묻지마 살인’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지점이 있다.


검색창에 ‘묻지마 살인’을 검색해 보았다. 중복 사건을 제외하고 상위에 노출되는 대부분의 언론 기사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여성이다. 실제로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은 90.2%(경찰청 통계, 2013)의 비율을 차지한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이 통계로 나타나는 셈이다.


인터넷상에서 유통되는 대표적인 여성혐오 표현 중 ‘삼일한’이라는 단어가 있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삼일한’이 단순히 인터넷 속 농담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많은 여성이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 ― 심지어 가정 안에서조차 ― 물리적·언어적 폭력에 노출된다. 여성이 말 그대로 ‘삼일에 한 번씩’ 남성 파트너(또는 전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언론은 여전히 ‘여성 대상 범죄’ 또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특정인을 대상으로 계획한 범죄가 아니라는 점에서 ‘묻지마 범죄’라는 표현 또한 타당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성별이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무시한 채 ‘○○녀’와 같은 2차 가해적 호칭만을 생산해 내는 모습은 분명 문제가 있다.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명명한다면 이런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여성들이 들어야 했던 ‘몸가짐을 단정히 했어야 했다’라는 등의 말들은 상당 부분 무력화된다.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주문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남성들의 역할도 변화한다. 이와 같은 사건이 사회적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면,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성혐오라는 시스템 안에서 혜택을 받아 온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그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호명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몇 남성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공포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지금도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성차별과 여성혐오, 가정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익혔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 소파에 늘어져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침 방영하던 것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육아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큰 관심이 없던 터라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저것 좀 봐라, 너무 귀엽다’라며 나를 불렀다. 어머니가 귀여워한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인 출연자가 아이에게 샌드백을 때리게 시킨다. 아이가 샌드백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출연자는 아이에게 샌드백을 누나라고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여러 누나 중 평소 잘 대해 준 누나의 이름을 말하자 아이는 샌드백을 꼭 안아준다. 하지만 평소 장난을 많이 걸었던 누나의 이름을 말하자 아이는 주먹을 꼭 쥐고 샌드백을 강하게 때린다.


아이가 샌드백을 누나라고 생각하고 때린 것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정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실제로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때리는 용도’인 샌드백을 ‘누나’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장면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은 심지어 아이가 샌드백을 때리는 장면 전에 누나가 장난을 치는 모습을 편집해 넣는다. 이것은 폭력(직접 가한 것이 아니더라도)에 대한 정당화이다. 나는 여기서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 ‘여성이 당할 만해서 당했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대관절 어느 부분에서 귀여움을 느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여성들이 처음으로 성별을 이유로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는 것은 주로 가정에서이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음식을 흘리면 ‘여자애가 그게 뭐니, 공주같이 먹어야지’ 하며 지적을 받는다. 남자 형제들에게는 허락되는 외박이나 늦은 시간의 외출이 허락되지 않기도 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여성들은 ‘앞으로는 더 일찍 일찍 다니라’는 주문을 받는다. 때때로 ‘쟤 봐, 늦게 싸돌아다니니까 표적이 됐잖아’ 등,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까지 곁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들은 자신을 검열하고 자신을 탓하는 방법을 체득한다.


학교는 또 어떤가. 많은 학교가 학생의, 특히 여학생의 복장 및 행동을 엄격하게 규율한다. 여학생은 무조건 치마를 입어야 하고, 옷 위로 속옷이 드러나지 않도록 속옷의 색깔을 흰색으로 맞춰야 하고, 양말은 복숭아뼈를 가리는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심지어는 교복 안에 티셔츠와 속바지를 받쳐 입었는지 체크하기도 하고 다리에 자를 대고 치마 길이를 재기도 한다. 또 다리를 조금이라도 벌리고 앉거나 속옷 끈이 드러나면 바로 지적을 받는다. 나 역시 다리를 꼬고 앉았다는 이유로 교사로부터 ‘네가 그런 자세로 앉으면 모든 여성의 수치가 된다’라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이처럼 여성의 몸은 숨겨야 할 것, 드러나면 수치가 되는 것으로 취급 받는다.


학교 안의 여성혐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로 및 학과계열에 대해서 배울 때, 여성의 진로와 직업이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남성을 위한 것인 것처럼 말하는 교사가 많다. 가령 이공계를 선택하고자 하는 여학생이 있다면 진로 교사는 ‘공대에서 여자는 평타만 치면 여신이 되지만 못생기면 그냥 남자가 된다’ 같은 발언을 서슴없이 하곤 한다. 여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여대를 가면 미팅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거나, 교사나 보육직을 꿈꾸는 학생에게는 ‘일등 신붓감이다’, ‘남자들이 좋아하겠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시집을 잘 가기 위해, 남성에게 많은 인기를 끌기 위해 진로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여성의 직업은 남성을 보조하기 위한 것, 혹은 남성의 눈요깃거리인 것처럼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여자가 너무 배우면 나중에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 ‘시집가기 어렵다’는 식의 소위 말하는 ‘후려치기(?)’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선택하기보다는 남성의 시선에 맞춘 일을 선택하도록 배운다.


또 남학생에게는 주어지는 기회가 여학생에게는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주로 이과 계열에서 관련 심화 학습이나 체험 학습에 참여할 학생을 모집할 때 남학생만을 뽑거나, 남학생 두 명을 뽑으면 여학생 한 명을 뽑는 식으로 모집 인원에 차별을 둔다. 선생님의 실험 보조나 수업 도우미를 뽑을 때도 남학생을 우선한다. 성별이 전혀 관련 없는 부분임에도 굳이 성별 제한을 두어 이과 계열은 남성의 일이라는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반 교과 수업에서도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나타난다. 나 역시 학교 수업 시간에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많이 들어왔다. 주로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수업이나 주로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이 있는 바느질, 요리 실습 시간이면 그 문제가 두드러졌다.


우선 임신과 출산에 대한 가정이나 과학 수업을 듣는 내내, 나는 내가 ‘자궁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 흡연이 위험한 이유, 여성이 어떤 질병을 조심하여야 하는 이유, 여성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이유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여성 자신이 아닌 ‘미래의 아이’였다. 마치 여성은 아이를 갖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듯이 수업을 듣고 있는 여학생을 ‘미래의 어머니’로 상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나의 월경마저도 ‘미래의 아이를 만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나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내 가치이자 의무인 것처럼 배우는 수업이 늘 불편했다.


바느질과 같은 실습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느질 실습 시간이면 내가 만난 가정 교사들은 꼭 ‘이런 건 남자들은 못하고 여자들이 잘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은 겉보기에는 여학생을 칭찬하는 말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여학생에게 자기 몫의 바느질을 팽개치는 남학생을 정당화하는 말이었다. 여학생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바느질을 할 줄 알았을 리가 만무한데, 마치 여학생에게는 출중한 바느질 솜씨가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바느질 방법을 물어보는 남학생에게는 ‘여자들한테 도와달라고 해라’ 하고 답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나는 나도 난생 처음 해본 바느질을 주변 남학생들의 몫까지 해 주는 신세가 되었다. 칭찬이랍시고 ‘고맙다, 너 나중에 남편이 좋아하겠다’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엔 이걸 해주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학생이 상대적으로 많이 해본 일이니 도와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반대로 남학생이 많이 해본 일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을 도울 수 있지 않겠냐’라고.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만난 여학생들은 대부분 남학생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피하는 눈치였다. 앞서 말한 ‘김치녀’와 같은 여성혐오 표현이 강제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기술 과목 실습 시간이었다. 톱질을 하고 못을 박아서 가구를 만드는, 즉 세간에서 주로 ‘남성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수업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학생은 남학생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내 옆자리 여학생이 같은 조 남학생에게 ‘이것 좀 도와달라’라고 말하며 부품을 건넸다. 그러자 남학생은 ‘너 김치(녀)야?’ 라고 대답했다. 진지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여학생은 같은 조원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부탁하면서도 ‘김치녀’ 소리를 듣는 반면,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기는 것은 너무 흔했다. 교실이나 학교 친구들과 친구를 맺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은 자신이 ‘김치 짓’을 한 게 아닌지 반성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당장 ‘김치녀’ 라는 단어를 쓸 때의 분위기는 장난스러울지 몰라도 그 효과는 전혀 장난이 아니다. 농담처럼 오고가는 여성혐오 표현 속에서 여성은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검열을 내면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변화는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베 회원은 자신에게 발언권을 달라고 소리쳤지만 글쎄요, 남성은 이 추모 장소만 벗어나면 얼마든지 발언권을 갖지만 여성은 이 장소를 벗어나면 어떠한 발언권도 갖지 못합니다. 그 약소한 발언권조차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공포 속에서 행사합니다. 이것이 남성권력이고 여성혐오입니다.

내가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문화제에 참석했다 돌아오는 길에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 일부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슬픔과 분노를 느낀 동시에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 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고 박수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당한 성희롱, 성추행을 털어 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에이, 그게 무슨 성폭력이야. 네가 예민한 거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나는 ‘연대’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의 박수를 보내고, 큰 목소리로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고 구호를 외치는 경험은 내게 특별하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특정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여성들이 겪어 온 일은 더 이상 그들 개인의 일에 머무르지 않고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이슈가 되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시적인 것으로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또 ‘시끄럽게’ 해야 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여성 대상 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성찰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 또한 개선되어야 한다.


6월 6일, 홍대 인근에서 ‘여성혐오 세상을 뒤엎자’라는 제목의 집회가 있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는 집회였다. 늘 그렇듯 여성혐오가 어디 있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행진에 함께하였다. 대오를 만들어 홍대 거리를 걸으며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서로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행진 대열을 지켜보고 관련 홍보물을 받아가는 시민도 많았다. 변화에 대한 요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금은 구상 단계이지만 ‘청소년 페미니즘 집담회(가칭)’라는 모임도 있다. 청소년들이 모여 자신이 겪었던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모임이다(비청소년도 참가 가능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자유 발언대가 그랬듯,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또 하나로 모아 세상에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모임이 되도록 노력해 나갈 예정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집단적 슬픔과 분노가 강력한 집단적 요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변화해야만 하고,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 사건과 더불어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금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들이 더 이상 ‘살아남았다’는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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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