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호[특집] 기술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술 (최빛나)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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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공 지능 시대 앞에 선 교육

 

기술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술



최빛나
unmakelab@gmail.com
제작기술문화를 접속 면으로 연구, 교육, 만들기 활동을 하는

‘다르게 만들기 연구실’ 언메이크 랩Unmake Lab의 일원이다.

산업 사회에서 정보기술 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변화와 현상들을

개인 자작 문화의 차원에서 꿰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구 기술과 신 기술을 연결하는 개념이나 사물을 좋아한다.



‘걱정을 멈추고 인공 지능을 사랑하게’

 

작년까지 회자되던 ‘인공 저능’이란 표현은 이제 착오적인 농담이 되었다. 나 역시 영화 〈닥터 스트렌지 러브〉의 대사를 카피하며 ‘걱정을 멈추고 인공 지능을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여유가 있지 않았던가. 당장은 약한 인공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 알고리즘 기반의 플랫폼 일거리, 즉 온디맨드on-demand 경제가 불러올 파급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익히 알려졌듯 ‘우버’나 ‘에어비엔비’, ‘파이버’ 같은 플랫폼들이 연결해 내는 ‘토막 일거리’에 해체되어 가는 일자리와 노동의 문제, 정립되지 않은 네트워크와 부의 분배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포디즘’의 100년 역사가 대표하는 산업 사회가 저물어 간다는 것, 그것과 연동된 모든 사회의 기반 ― 교육, 문화, 예술, 경제, 정치, 노동의 양식들이 급속하게 해체되고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 이행의 과정에서 또 얼마만큼의 탈락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더 컸다.


➊ 이 영화의 부제는 〈걱정을 멈추고 (원자) 폭탄을 사랑하게〉이다.

➋ Fiverr.com. 주로 디자인, 음악 등 문화예술 분야의 생산물들이 거래되는 플랫폼이다. 사이트의 제목이 의미하듯 기본 5달러부터 작업을 진행해 주는 수많은 생산자들이 있다.



그러한 인식을 담아 플랫폼 경제와 노동을 다루는 ‘21세기 살롱 : 노동의 희비극 시나리오’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열었다. 그러나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조금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던 초알고리즘 사회는 소박한 알고리즘 사회와 동시에 오고 있었고, 오히려 우리가 위협을 느낀 그 플랫폼들은 이행의 과정에서 잠시 드러난 과도기적 형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➌ 언메이크 랩에서 한주연과 2015년에 연 라운드 테이블의 제목. 기술의 도약이 만들어 내는 일자리의 대체, 특히 정보 네트워크가 떠받치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 대중 외주) 플랫폼에 의해 만들어지는 노동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자세한 내용은 언메이크 랩 홈페이지(www.unmakelab.org)에서 확인 가능하다.



5월의 알파고 충격은 생생했고, 늘 늦게 도착했던 아방가르드들의 행진을 이곳에서 지켜본 것은 다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피상적이고 통치술적인 언어로서의 혁신이 아닌 진짜배기 인간의 도약을 옆에서 지켜본 파장이란 강렬한 것이었고 나를 이런저런 B급도 안될 SF적 사고 실험에 젖게 만들었다.

 

‘데이터를 통한 연산이 아니라 강화 학습을 통해 질문 자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고? 마치 인간이 철학과 예술과 문학을 통해 자기 인식에 이르는 것 같잖아? 그럼 인공 지능은 강화 학습이 일종의 자기 인식 능력인가?'


‘앞으로 인공 지능의 타락은 차이성 있는 데이터의 소멸. 즉 인간의 파토스에 의해 만들어진 차이 데이터라는 원자재가 사라지는 순간이 아닐까? 근데 정말 감정도 연산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되지? 인공 감정으로 데이터를 만들어 내려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정말로 인공 지능이라는 초알고리즘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인공 지능에 대한 걱정 ― 많은 노동들이 대체될 것이라는, 즉 ‘일자리’에 대한 불안 ― 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부터였다.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의 정동, 광기와 신화, 불가해함을 담은 것들. 그것에 인공 지능이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자각한, ‘두려운 매혹’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인간이 스스로 마련하는 자기 인식과 위안, 울증, 소박한 지능, 오묘한 듯 충만한 지복의 감정이 알고리즘 위에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강렬했다. 그 강렬함은 호감 담긴 거부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➍ 기술은 노동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노동 담론에서 기술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크다. 그러면서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일자리의 소멸에 대한 공포감만 확산되는 모양새이다. 또한 더 이상 고용이나 직업이 삶의 소명이나 존재의 이유가 아닌 시대에 노동이 고용의 문제, 일자리의 문제인 것으로만 문제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결국 존재의 삶으로서의 노동의 의미는 더욱 가려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무엇이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가’라는, 그 즈음 누구나 한 번씩은 했을 생각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뚜렷하게 구별 짓기에는 이전의 기계 시대와 달리 알고리즘은 너무 유연하고 유기적이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데이터가 다시 미세 혈관으로 만들어져 연결되는 기분이었고, 코드가 살이 되어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다들 이런 기분이었지 않은가?

 

 

삶 형태적인 기술


➎ 기술로 번역되는 테크놀로지는 여러 가지 정의와 함의가 있다. 여기에서는 기술사가인 토머스 휴즈가 그의 저서 《테크놀로지 창조와 욕망의 역사》(원제 ‘Human-built World’, 김정미 옮김, 플래닛미디어)에서 언급한 테크놀로지의 정의를 제안한다. ‘테크놀로지, 인간의 독창성 및 발명 능력과 관련된 창조적 과정’



경계의 확정 자체가 무의미한 기술들이 이미 우리 삶의 형태를 조형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자각하든 말든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활동을 하며 보게 되는 기술/IT 감수성은 사실 우려되는 것들이 많다.(이것은 스스로에게도 가지는 우려심이다.) 기술 자체에 대한 무감함도 있지만, 기술이 주어지는 속도가 전유와 상상의 속도를 앞질러 자리 잡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무감함은 생각보다 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텔레비젼을 틀어 놓고 사는 이전 세대를 보듯, 또 다른 기술 환경 속에서 ‘통속화’된 우리들을 보는 것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기술사가인 멜빈 크란츠버그Melvin Kranzberg의 기술에 대한 여섯 가지 법칙  중 첫 번째 “기술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Technology neither good, nor bad, nor is it neutral)”라는 표현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기술적 대상을 대하며 사용자들이 낮은 감각적 유흥의 위치에 쉽게 자리 잡아 버리는 현상은, 기술의 속성에 대한 추상적 해석 문제 이전의 현상적 사실이다.


➏ Appropriation. 이 글에서는 기술과 관계 맺는 방식을 외부가 정의한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➐ 멜빈 크란츠버그의 기술에 대한 6가지 원칙  1. 기술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2.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 3. 기술은 크던 작던 패키지로 온다. 4. 기술이 많은 공공 이슈에서 주요한 요소일지 모르지만, 기술 정책의 결정에서는 비기술적인 요인들이 우선시된다. 5. 모든 역사는 현재와 상관성이 있다. 하지만 기술의 역사는 보다 상관성이 크다. 6. 기술은 지극히 인간적인 활동이다. 그러므로 기술의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마냥 회의를 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얼마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지 강조하는, ‘유기적이 되어 가는 기계 vs. 유기성을 잃어 가는 인간’이라는 대비적 공포에 대한 비관은, 기술이 얼마나 인간을 더 창의적이고 똑똑하고 통찰력 있게 만들어 주고 있는지를 주장하는 견해 못지않게 해롭다. 그러한 견해는 아무리 예민하다 하더라도 후퇴하고 싶은 충동 혹은 기술에 대한 미비한 이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보 기술적 사고의 방식과 지각을 새롭게 성찰해 봐야 하는 것을 기피하려는 감정, 혹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혹은 배울 수 있는 세대가 없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당혹감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다시 익숙한 질문 

 

파리가 날아다니는 스마트폰 게임 화면 위로 혀를 날름거리며 파리를 잡으려고 하는 개구리 영상을 본적 있는가. 그 즉물적인 반응. 포레스트Forest나 프리덤Freedom➑ 같은 앱들을 만들며 ‘관조적 컴퓨팅’을 논하는 것도 그들만의 표현이다. 사실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상황에 태어난 우리가 새로운 세기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아무래도 그려지는 그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발을 만들어 팔아 공장을 세우고 산업 역군으로 치켜세우는 수출 탑 앞에서 과노동의 행군을 했던 이전 세대.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말이다. 더욱 가속된 ‘쫓음’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사회, 다시 ‘패스트 팔로우’ 역군들의 노고. 그럼에도 지금의 기술 경제적 성과들을 그 노력으로는 얻어 내기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 이미 다들 인지하고 있듯이 말이다.


➑ 포레스트는 모바일 기기를 쓰지 않을수록 나무가 자라는 앱이고, 프리덤은 자기가 지정하는 시간만큼 모든 네트워크를 차단해 버리는 프로그램으로, 젠(zen) 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보와 네트워크의 흐름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한 이러한 절제적 방식들을 ‘관조적 컴퓨팅’이라 부르는 논자들도 있다.



이런 시대의 학교와 교육은 무엇일까? 현재의 산업화 시대를 위한 교육과 학교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진단은 이미 광범위하게 공감을 얻고 있음에도 ‘그렇다면?’에 대한 답을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전부터 해결되지 못한 교육적 문제들이었는데 기술 사회에 대한 질문이라고 해답이 나오겠는가?’ 그런 생각도 들지만, 이미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실 그 시도들에 녹아 있는 교육적 질문들은 진지하다.

 

하지만 기술 사회에서 교육이 가장 주요하게 물어야 하는 질문 ― 기술권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 중 무엇이 확장되고 축소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하기 전에, 코드와 연산적 사고에 대한 피상적 강조, 사회 문제에 대한 기술 해결적 접근의 사고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STEM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 교육과 함께 짝짓기처럼 등장하고 있는 ‘메이커 교육’은 창조 경제와 맞물리며 급한 ‘에듀테크’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상품들과 프로그램들에서 기술과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오랜 기술의 역사가 녹아 있는 해외의 교육 키트들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은, 단지 외연으로 쉽게 카피되고, 워크숍 프로그램은 단발적 노하우에 가깝게 짜인다. 앞서의 대답을 교육이 하고 있기엔 시간이 없는 것이다. 기술의 도약은 넘볼 수 없을 거라 여겨졌던 경계를 넘으며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묻고 있지만, 자신이 기술과 어떻게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로 인한 스스로의 확장과 축소가 어떻게 생겨나고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교육이란 것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그것에 더해 앞으로의 기술 정책안에서 변화된 삶을 판단할 수 있는 시민교육, 상황에 대한 전유적 상상을 가능케 하는 문화예술 교육을 동시적으로 요구 받는 것은 더욱 버거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➒ Technosphere. 대기권에 대응하는 의미로 쓰였다. 자연적 환경 못지않게 중요해지고 있는 기술적 환경에 대한 표현이다.

➓ 기술은 결국 사회 구조 안에서는 정책적 결정과 함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정보 기술 사회의 불확실한 탐험가

 

길 없는 지도에 대한 교육적 은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도의 은유를 이용해 보자. 구글은 2014년에 리와Liwa 사막을, 트래킹 카메라를 낙타에 매달아 건넘으로써 일종의 오지 ‘스트리트 뷰’를 만들었다. 낙타의 이름이 ‘라피아’였다는 스토리를 더해서 말이다. 이렇게 세계는 투명해지고 있고 해상도 높은 정보는 경험과 지각의 ‘스포일러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투명해지고 해상도는 높아만 가고 지각적 정보는 넘쳐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정보적 경험의 풍성함 속에 지식을 중심으로 한 이제까지의 교육은 큰 전환을 요구한다. ‘탐구’와 ‘제작적 실행’이라는 배움의 형태로 말이다. 즉 우리는 이제 교육의 오랜 요구에 더욱 강하게 직면하게 된다.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법을 배우라’라는 요구 말이다. 이것은 결론 없는 탐색 자체를 위한 배움의 시공간인 ‘불확실한 학교’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⓫ 2015년 2월에 예술가 최태윤은 통의동 갤러리 팩토리에서 연 <당신의 친구>전의 일환으로 ‘불확실한 학교’를 열었다. 언메이크 랩은 이 자리에 초대되어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메이크 랩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 기술 사회에서의 배움을 제작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매핑 랩 : 이중도시를 위한 공작’이라는 워크숍을 한 예로 들어보자. 이 워크숍에서 참여자는 매핑 도구 를 만드는 것을 ‘방향성’으로 둔다. 그리고 그 도구를 제작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도시 공간에 대해 가지는 장소성의 감각, 기술적 실현의 문제 등을 스스로 탐색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현재 도시의 화두인 도시 재생 등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된다. 규정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인 아닌, 개인이 도시 담론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현재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의 이행은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지까지 동시대의 현상을 함께 다루게 된다. 즉 ‘수행하는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 기술적 탐색뿐 아니라, 개인적 지각, 현 시대의 도시에 대한 질문을 동시에 탐색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자는 방향성을 던져 주는 공동의 작업자 역할을 하게 된다.


⓬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도시 유휴 공간 건축전 <Re;play>전과 연계된 시민 워크숍으로 기획하였다. 총 6회가 진행되었으며 내용은 언메이크 랩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⓭ 매핑(mapping)은 ‘지도화’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 지리 정보를 담은 평면 지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지 지도, 즉 감각 지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지도화된 결과물은 시각, 청각, 촉각, 사물, 공간, 관계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서 매핑 도구란 그러한 지도화를 위한 수행적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요청하는 제작을 통한 자율적 문화예술의 방식, 그리고 시민성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늘 쉽지 않은 일이고, 이러한 방식을 어렵게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는? 물론 그다지 그럴듯하지 않다. ‘망치기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 사실 그것이 최대치이다. 하지만 연구와 문제 제기를 기반으로, 개인들이 현재의 정보 기술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를 묻는 것, 자기 탐구의 시간과 그것을 제작적 실행으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이러한 프로그램이 목적하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또 다른 지도적 은유를 디안 라브로Diane Rabreau의 ‘위성 탐험가 되기’라는 작업에서 찾아보자. 디안 라브로는 사람들이 구글 맵스 위성 사진에서 기이하고 흥미로운 사진을 보내 주면 직접 그곳을 다녀오는, ‘디안이 당신을 위해 갑니다Diane Goes for You’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3년 전부터 전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투명해져 가는 세계에서 디안 라브로의 탐험은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이러한 ‘삽질’은 그 무용함으로 인해 예술계를 벗어나면 ‘쓰잘데기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보적 해상도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시적 체험이자 지금의 기술권에 대한 강렬한 전유를 전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전유와 은유라는 것은 이렇게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질문이고 무기이다. 그리고 그 전유는 기술권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상태이기도 하다. 

 

피상적 기술 교육이 우려되는 점은 그 방식이 기술권에서의 존재 양식에 대한 질문은 고사하고 상업적 패러다임조차 만들지 못하는 교육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기저에는 기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결과론적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스스로를 비인격적인 도구로 취급(체념하는 감정 ― 내가 어떻게 의견을 가지던 결국 일어날 것이다)하고 찬반이 분분해야 할 의견조차 전유는커녕 적응하기에 바쁜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어떻게든 삐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하는 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주류적 교육의 문제였으나 지금은 더욱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행성에 기반을 둔, 목적이 불확실한 학교이다. ‘책을 뒤로 물리고 거울을 보여 주는 스승’이라는 교육의 알레고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은유라는 ‘자율적 자기 이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동일성 깨트리기, 그리고 시적 경험 ― 그 경험이 기술권을 관통해 나가게 해야 한다.

 

 

시민성에 기반한 기술에 대한 호의적 회의

 

작년에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열린 ‘비평적 제작 축제Critical Making Festival’라는 곳에 다녀왔다. 그들이 정의하는 ‘비평적 제작’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여전히 그들은 갖추지 못한, 그러나 어떤 폐해를 가지고 올지 뻔히 짐작이 되는 산업 시스템을 넘어, 다른 발전의 패러다임을 찾는 것을 ‘비평적 제작’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사회의 발전 방향을 제작의 위치에서 찾는 것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비평적 제작을 위해 다양한 수준의 기술과 서로 다른 배경의 인물들(혁신 바보부터 하드코어 해커, 전통 그림자극 교육자까지)을 불러들여 컨퍼런스를 여는 것을 무척 흥미롭게 관찰하고 왔다. 한 사회의 발전 패러다임을 놓고 미디어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행사의 뼈대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지역 풀뿌리 NGO부터, 전통 공예, 글로벌 기업의 혁신센터에서 일하는 기업가와 디자이너까지 초대한 컨퍼런스였다. 즉 ‘좋아 보이는 가치’ 지향의 패러다임이 아닌 ‘실천’의 의미로서의 실용주의적 철학이 강하게 녹아 있는 하나의 운동적 컨퍼런스를 연 것이다.

 

한 사회의 결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에 대해 지지하거나 성급한 호감을 표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배움의 시간은 분명 인상 깊었다. 기술 사회의 가속적 요구에 대해 현명하게 이해하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협업적 문화와 오픈 소스 문화, 서로 다른 층위의 요구를 섞어 내려 노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큰 환기가 되는 시간이었다.⓯ 그와 함께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그들의 전통 기술을 보며 ‘우리의 문명은 기술 수준이 높던 낮던 대량 생산을 위한 메타 장치를 만드는 패러다임의 연속’이라는 인식에 대한 성찰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⓮ 물론 오픈소스 역시 양가적 면을 가지고 있다. 풀뿌리 기술의 가능성과 집단 지성의 역량을 강화해 주기도 하지만, ‘자율적 포섭’의 또 다른 기제가 될 수도 있다.

⓯ 족자카르타 역시 급속한 도시 개발과 관광지화로 반농반도의 밀도와 생활 양식이 급속히 변화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⓰ 특히 인상적으로 본 것은 바틱(BATIK)이라는 전통 프린팅 기법이었다. 바틱은 촛농으로 실크에 패턴을 그리고 나서 천을 염색한 후 뜨거운 물이 삶아 버림으로써 촛농 부분을 제거해 문양을 만드는 프린팅 기법이다. 즉 기술적 수준이 낮건 높건 ‘보다 많은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인쇄 기술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품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작을 통해 새로운 시민성과 공공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회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도시의 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공공성이 얕게 도구화되거나 자원봉사주의 즉 ‘DIY 시민을 만드는 방식’으로 재편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시민 사회의 역량을 제대로 키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⓱ 개인적으로 지금의 관 주도적 사회적 자본의 배분과 그것을 아웃소싱하는 방식의 거버넌스의 구조가 시민성과 시민 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좋은 선택일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창조 경제’ 정책은 큰 맥락에서는 크게 변화되고 있는 경제적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흐름에서 ‘제작자 운동maker movement’이라는 ‘시민 기술 리터러시’의 맹아를 가진 새로운 에너지가 신 경제의 측면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민 사회의 ‘기술 독해력’은 기술로 야기되는 갈등들을 중재해 나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시민 사회가 형성해야 할 숙성된 리터러시가 ‘모험 자본화’ 되거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이라는 기술 환원적 행사로 조직되어 가시화되는 것에는 큰 우려가 든다. 혁신이라는 구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정말 무엇을 제대로 변화시킬 것인지 작더라도 실제적으로 실행하는 제작의 시간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슈 중심의 사회운동뿐 아니라, 문화예술적 조절 능력과 함께 가야 한다. 또한 그것을 배태할 수 있는 중재적 공동체를 발명하는 방식으로 교육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 토대에서 학교의 해체나 새로운 배움의 형식이 필요하다면 시도해야 한다. 즉 기술에 대한 비평적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제작의 문제이며 그것이 우리가 제작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민 사회를 위한 기술 리터러시’는 결국 이러한 질문과 떨어져 있지 않다. 기술 해결적 관제 해커톤, 즉물적 교육, 실리콘 밸리의 패스트 팔로우 식의 접근은 기술 문화 자체를 더욱 협소하게 한다. 따라서 기술 사회에서의 새로운 교육에 대한 질문은 시민 사회적 설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 즉 읽고 쓰고 이해하고 사용하기 이상의, 그 안에 결여된 가치가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는 깊은 사회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기술이 만들어 내는 삶의 질, 우리의 책임, 기술이 야기하는 또 다른 불평등을 이해하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⓲ 이 부분에서는 단순한 새로운 전자공작의 흐름으로의 제작자 운동이 아니라,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둔 기술 이해를 ‘시민 기술 리터러시‘의 주요한 축으로 둔다. 기술이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지식에 뿌리와 바탕을 두고 기술적 수단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근원을 파악 할 수 있는 기제들이 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4대강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먹은 물이 강에서 온다는 감각이 사라진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여러 정책적 결정에 대해 ‘무감각한 승낙과 참여’가 이루어지는 이유로는 은연한 반기술 태도나 기술에 대한 몰이해를 깔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테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 시대에 인문을 이해하는 방식에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둔 ‘기술에 대한 독해력’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⓳ 해커톤은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기획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이 한 팀을 이루어서 특정한 주제로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물을 내는 소프트웨어 이벤트이다.



아무도 가르칠 수 없는 시대이다. 하지만 교육이 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부터 제작적 실행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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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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