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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술

크리킨디센터 전환교육연구소 기획, 2017~2020


삶의 기술, 첫 번째

자전거로 충분하다  열람

종종 적정기술이나 도시농업이, 반GMO와 탈핵과 탈탄소문명을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다거나 비과학적이라거나 의롭지도 합법적이지도 않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2008년 자연(바위, 산 , 바다 등 )에도 인간이 가진 권리와 동등한 권리를 주자는 헌법이 에콰도르에서 통과한 것을 알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던 때로부터 2017년 3월 뉴질랜드에서 원주민들에게 가족과 같았던 황거누이강에 사람과 동등한 법적 권리가 부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은, 사회는 훨씬 더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은 과학과 정의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해 왔던 공부의 과정을 들여다보며 아직 유능한 기술자나 농부가 되지 못하였는데도 몸의 일부에 그런 과정들이 들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이 도시의 골목길들과 예술과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의 의욕’을 발견한다.


삶의 기술, 두 번째

태양은 축제  열람

태양은 우리에게 ‘빛’이라는 선물을 차고 넘치도록 준다. 우리는 태양이 주는 것만 가지고도 풍성하고 흥겨운 축제를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현혹되어 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 썼다. 축제는 더 화려해졌지만, 그것은 즐겁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벼랑 끝에 서서야 우리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태양의 선물을 생각해 냈다. 태양의 선물을 선용하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이 난 숲에서 모두 허둥대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 크리킨디처럼 먼저 나섰다.

태양은 축제다. 태양이 마련한 풍요롭고 품위 있는 잔치에 초대한다.



삶의 기술, 세 번째

플라스틱 프리  열람

플라스틱 쓰레기는 ‘버리는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버리는 문화’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근대의 성장주의 경제 체제가 편리함을 추구하는 생물학적 요구를 자극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면, 잠자는 아이들에게 “버리는 것이 고치는 것보다 낫다(ending is better than mending)”, “수선하면 할수록 가난해진다(the more stitches, the less riches)”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일종의 세뇌 교육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현실이 되었다. 학교교육과 광고를 통해 세련되게 한다는 점이 좀 다르지만. 버리는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플라스틱 문제는 근본적으로 버리는 문화를 바꾸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습다. 세뇌가 아닌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오어가 ‘인류의 재교육’이라고 말한 그것을 해야 한다. 지금이 그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할 때다.


삶의 기술, 네 번째

흙을 세우다  열람

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건축 재료다. 다져 주기만 해도 강해지지만, 석회를 첨가해서 더 강하게 할 수도 있다. 벽돌로 만들면 활용도가 높아진다. 비에 약한 단점은 ‘모자를 씌우고 장화를 신기는’ 집짓기와 방수 기술로 보완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흙집을 짓는 정신’일 것이다. 흙집은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연다. 흙집은 자연의 한계 안에서 사는 법을 익히고, 이웃과 서로 돕고 사는 법을 익히는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함께 집을 짓고, 그렇게 지은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흙집이 누구에게나 좋은 집은 아닐 것이다. 흙집을 짓고 사는 것은 많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이 도시 안에서 흙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흙집을 짓는 것은 ‘좋은 삶’을 향한 희망의 표현이다. 자연 그리고 이웃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몸짓이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다.


삶의 기술, 다섯 번째

모두의 정원  열람

"우리의 정원(텃밭)을 가꾸자" 세상을 유랑하면서 기아, 지진, 광신, 질병, 약탈 등 온갖 불행을 경험한 캉디드가 내린 결론이다. 《캉디드》는 당대 유행하던 ‘낙관주의’(‘신이 창조한 세상은 최선이다’라고 믿는 것)를 풍자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이 좋다(all is well)’는 믿음은 세상의 고통에 눈감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결국 볼테르는 ‘우리 삶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지금 여기서 좋은 삶을 가꾸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볼테르는 실제로 밭을 가꾸었고, 수확한 것으로 손님들을 위한 식탁을 차렸다고 한다.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참여’였다. 정원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 시대에 정원은 ‘전환의 장소’가 될 것이다. 


삶의 기술, 여섯 번째

장인의 교육  열람

일은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창조의 기쁨과 타자를 돌보는 보람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둘 중의 하나만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대개는 극단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인데, 그곳이 어느 쪽에 가까이 있는지는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그 실천을 이끄는 것은 ‘일’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일 것이다.

최근 ‘장인’이 다시 조명을 받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장인은 자기 일에 몰입하고, 자기 일에서 큰 성취를 이루고 보람을 느낀다. 그러한 특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러한 특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


삶의 기술, 일곱 번째

만드는 사람들  열람

메이커 운동은 많은 가능성에 열려 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의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회 혁신 프로그램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적 방식과는 다른 경제를 그려 보고 있다. 구성주의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를 젓고 있고.

메이커 운동이 어디로 향할지는 결국 ‘사회적 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것이 자본에 포획되지 않으려면, ‘좋은 삶’이라는 기획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주 많은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 “메이커는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나?” 이 질문이 고민과 공부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삶의 기술, 여덟 번째

코로나 이후의 전환  열람

지금은 학습의 시간이다. ‘좋은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좋은 삶을 가꾸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나오는 이야기 중에는 좋은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잘 이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야 한다. 청소년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든 학교 문을 열고 수능 시험 준비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재난을 성찰하고, 재난을 좋은 삶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