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을 위한 마그나카르타, 가난한 민주주의
- 코로나19 전령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
채효정 measophia@naver.com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노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농민이고 학자이며, 교육자이며 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천사
천사는 하늘에서 온다. 천사, 엔젤angel이라는 말은 ‘전령messenger’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앙겔로스angelos’에서 왔다. 천사는 말을 전하는 전령이다. 미셸 세르는 천사들의 전설을 현대적 신화로 다시 쓰면서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로부터 시작하는 오랜 정치신학 속에 생략된 존재, ‘말을 전하는 자’를 이 문장 속에 다시 기입한다.❶ “태초에 ‘천사들의’ 말이 있었다.” 말을 전하는 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연결하고 관계를 만든다.
❶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2008), 《천사들의 전설 – 현대의 신화》, 그린비.
오늘날 천사는 공항으로 온다. 그중에는 기업, 정부, 대중 매체, 경영, 과학의 세계를 대표하는 전령들도 있지만,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과 고향을 상실한 난민들, 마치 유령처럼 공항과 비행기를 청소하는 청소 노동자도 또 다른 한 세계를 대표하며 그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코로나19도 공항으로 왔다. 그것은 신의 말도 인간의 말도 아닌 동물의 말이었다. 그런데 박쥐의 몸에서 인간으로 왔다는 이 바이러스 천사는 전파력이 아주 강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중에서도 가장 아무것도 아닌 그의 말을 전 세계의 인류가, 그리고 가장 힘센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왕관corona을 쓴 천사는 어떤 말을 전해 주려고 우리에게 왔는가. 그는 지금 누구의 말을 전하고 있는가. 전령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연결한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발신해 온 신호를, 오랫동안 듣지 못한 자들에게,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증폭시켜 전달하고 있다. 재난은 앙겔로스의 전언이다. 우리는 지금 그 말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제대로 의미를 연결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재난의 해석학
‘하멜른의 쥐잡이가 돌아왔다.’ 코로나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렸을 때 읽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이야기는 1284년 6월 26일 요한과 바울의 날에 독일 베저 강변의 하멜른시에서 130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된 실제 사건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이 이야기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각색되고 해석되었다. 하멜른의 쥐떼는 페스트를 거쳐 박쥐로 왔다. 쥐떼가 재난이 되었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시간과 장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처음엔 재난이 복수극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수없이 신호를 보내왔음에도,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며 지구를 파괴해 온 데 대해 반성도 하지 않고 죗값도 치르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 대한 신의 복수 또는 자연의 복수라고. 하멜른의 재난이 지배자에 대해 경고하는 민중적 해석으로, 민중을 가르치려는 지배자들의 해석으로도 전유되었듯이, 현재의 코로나19 담론도 일종의 ‘사건의 해석학’으로서 재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사건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해 각자의 위치와 관점에서 내놓는 응답들은 서로 경합하면서, 그 과정에서 설득력을 얻은 지배적 해석은 이후의 경로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난의 해석학은 사회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의미의 경합’으로서 중요한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 ‘경제 위기’가 재난을 해석하는 중심 열쇠가 되면 다음 담론의 경로는 위기 탈출과 경제 회복으로 집중될 것이다. ‘비정상성’이 해석의 중심에 놓이면, 그 다음 이야기는 당연히 ‘정상성의 복구’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지금 나오는 ‘뉴 노멀’이나 ‘뉴딜’, ‘포스트 코로나’ 같은 담론은 이러한 해석 투쟁의 결과다. 그러나 재난 자체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안 된 채로, 너무 성급히 ‘새로운new 이후post’로 이행하는 것 같다. 이것은 누구의 메시지일까?
초기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사태가 주는 신호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자연의 해석학은 사회의 해석학을 요청했다. 사람들은 하늘이 맑아지고 별이 보이고 물이 깨끗해지고 인간이 사라진 거리에 어디선가 나타난 동물들이 다시 찾아오는 모습에 감탄했고,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자는 성찰의 언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모든 것이 다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무능했고, 기업가는 탐욕을 멈추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 고립되고 지쳐 갔다. ‘자연의 귀환’에 대한 환대의 문법은 ‘정복하고, 이겨 내고, 승리하자’는 적대의 문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멜른의 재난도 적대와 환대의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이방인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도,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교훈으로도 해석된다. 지금 우리를 찾아온 이 바이러스 천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초기의 ‘복수론’이나 ‘징벌론’에는 우리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직관적인 반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론’으로 전환되면서 전 사회적 반성은 전 사회적 총동원으로 바뀌었고, ‘전시 경제’와 ‘비상사태’를 승인하는 전쟁 담론이 재난의 지배적 해석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시각과 하멜른의 사람들이 쥐떼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하다. 박멸의 관점이다. 박쥐의 몸에서 살고 있었다는 그가 인간의 몸으로 도시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쥐떼의 습격을 당한 하멜른시의 사람들처럼 당황했다. 넘어서는 안 될 문명과 야만의 경계,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온 그를 ‘침입자’로 대하고, 제거와 추방의 계획을 세우는 데 급급했다.
우리가 바이러스에게 들을 말이 없고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한, 그의 말은 영원히 해석 불가능의 지대에 놓이며, 어떤 신호도 읽어 낼 수 없게 된다. 사태 속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끝내 우리가 듣지 못한다면, 또는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재난은 우리의 아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와 염기 서열을 모두 밝혀냈어도, 우리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지식에서 나오지만 후자는 관계에서 나온다. 전자에 대응하는 것이 과학적 설명이라면, 후자에 대응하는 것은 인문학적 해석일 것이다. 백신과 방역에만 매달려 있는 현실은 과학과 철학의 불통과 빈곤을 동시에 드러낸다. 지금 이 사태 속에서 결여된 것,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과학 기술적 방법론적 대안을 넘어선 인문적 해석과 정치적 상상력이다. 이 글은 그런 관점에서 재난을 성찰적으로 해석하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 찾아보려고 한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해선 재난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 손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그것을 묻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찾아온 손님, 적인가 친구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낯선 방문자를 적이 아니라 손님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방문자, 이방인, 외부인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 먼 옛날, 사람이 사는 촌락 경계 저 너머 들판 끝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통과해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는 필경 손님 아니면 도둑 둘 중 하나다. 헤르메스Hermes는 손님이자 도둑이고 여행자이며 전령이다. 주인이 그를 어떻게 응대하느냐에 따라 그는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환대는 적도 손님으로 만들고, 적대는 친구로 찾아온 이도 적으로 만든다. 관계는 상호 관계 맺음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는 이방인을 손님으로 대하고 친구로서 관계 맺는 방식을 말한다. 오늘 나를 찾아온 이를 보살펴 줄 때 다음엔 내가 낯선 곳에서 어떤 모르는 이의 도움을 그와 같이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약속이다.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도와주면 언젠가 은혜를 돌려받을 것이나, 반대로 외면하면 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민중 세계를 지탱하는 공존의 규칙인 ‘상호 부조의 원리’를 오랜 세월 가르쳐 왔다. 오늘 우리를 찾아온 손님은 적인가, 친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바이러스는 단독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존재다. 그를 알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에고ego의 해석학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구성하는 존재인가라는 에코eco의 해석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박쥐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맺는 관계의 이행이 ‘우리’라는 함께-존재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와 몸이라는 집oikos을 공유하며, 박쥐와 인간을 연결하고, ‘박쥐-인간’의 몸을 재구성한다. 다르게 보면 이것은 침범이 아니라 ‘관계의 확장’을 의미한다. 천사는 박쥐와도 함께 살고, 인간과도 함께 살겠다고 말한다. 박쥐가 살지 못하는 집은 인간도 살 수 없는 집일 것이다. 이것은 박쥐와 인간의 관계가 함께 살아야 할 존재로서 ‘다시-관계 맺음’이 요청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재구성’은 자연과 인간, 비인간 동물과 인간 사이의 ‘공통 세계의 재구성’이기도 하다. 세계의 재구성은 다시 사회의 재구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는 ‘박쥐와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요청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함께 살자는 메시지를 담은 절박한 공존의 요구다.
인도의 생태주의 페미니스트 반다나 시바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비유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인류가 생명의 그물망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한다면, 이는 스스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순간 생명망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힘센 인간들이 나머지 인류를 향해 선포한 전쟁이 될 것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이미 코로나19보다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체 인류 중 1%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코로나19 퇴치를 명분으로 한 전쟁 상태가 90%의 인류를 생존의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현실을 감춘다. 국가와 기업이 주체가 되어 수행하는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지금까지 지구의 약탈자들이 해 왔던 ‘지구에 대한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도에선 이미 3000만 명 이상이 생계의 터전을 잃었다. 스웨덴의 집단 감염을 통한 집단 면역 실험은 사회를 공리주의적 생체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모범 방역 국가’라는 타이틀 뒤에선 삶터와 일터를 빼앗기고 생계와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모두를 구한다는 전쟁에서 약자들만 계속 쓰러진다면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자연을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은 서구 지배자들의 근본 관점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서구 정치는 기본적으로 이런 지배자들이 수립한 전쟁 국가에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은 자연에 대한 침략과 약탈에서 성립한다. 자연에 대한 자본의 약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약탈, 남구에 대한 북구의 약탈,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약탈,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약탈은 모두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 우리는 종종 자연에 대한 인류의 약탈을 말하며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키지만 이 약탈적 인간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 인류의 특정한 집단을 뜻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 인간의 대표를 자처해 온 인간으로, 귀족이었으며, 사제였고, 전사였던 자이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인, 삼위일체의 신성을 가진 ‘자본가’다.
신자유주의는 이 침략하고 정복하고 승리하는 ‘기업가형 인간’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전형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리스크가 높을수록 수익률도 높다’는 헤지 펀드의 정신을 가지고 위험을 감내하며 ‘블루 오션’으로 뛰어든다. 코로나19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블루 오션으로 해석될 것이다. 군수 산업이 전쟁을 통해 성장하듯이 ‘코로나 수혜주’와 관련 산업도 ‘전쟁 특수’를 안겨 주고 있다. 유통 기업 아마존의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물류 전쟁’을 수행하느라 800명씩 집단 감염이 되어 쓰러질 때, 최고 경영자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30조 원이 넘게 불어났다. ‘K-방역’이라 불리며 세계적인 방역 성공 모델이 된 한국에선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던 보건 의료 노동자들이 코로나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되었지만, ‘비상사태’에 투입되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동권도 주장하지 못해 왔던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영웅도 전사도 아니라고 답했다.
가난한 사람은 죽고 부자는 죽지 않는 병
반대편에는 자연을 친구로 대하며 살아온 또 다른 인류가 있다. 자연의 법칙을 순리로 여기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고자 하는 기술 진보주의자들의 눈에는 낙후와 후진성의 상징이다. 문명과 야만은 자연을 통제하고 굴복시키는 기술적 역량에 따라 나뉜다. 지금 우리를 찾아온 ‘야만인’은 ‘친구’에게 공동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이 약탈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 손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류의 약탈’이 아니라 자연과 그 친구들에 대한 ‘약탈적 인류’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 약탈적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그 삶의 양식이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온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 문명은 자연에 대한 수탈 체계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그것을 ‘제국적 생활 양식’이라고 부른다.❷ 북반구의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의 양식은 남반구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정의로운 전환’도 마찬가지다. 가난과 저임금, 오염과 쓰레기를 지속적으로 외주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세계적 생산의 분업화를 나타내는 ‘가치 사슬value chain’은 착취의 위계화와 맞물려 있는 ‘연쇄적 착취의 사슬’이나 다름없다.
❷ 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 이신철 옮김(2020)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 에코리브르.
어쩌면 이것이 왜 재난이 부자들의 재산을 늘려 주고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난 초기에 나는 이것이 ‘복수’고 ‘징벌’이라면 왜 복수를 엉뚱한 이들에게 하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이 받고 있는지를 계속 물었다. 박쥐의 전령, 동물 세계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온 천사가 이 착취의 위계에서 최후 말단에 있는 사람들부터 찾아온 이유는 그들이 이 약탈에 함께 맞설 동맹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착취의 위계를 전복하는 힘은 결국 위계의 제일 아래에 있는 존재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식물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다른 생명들에도 사람과 같이 이름을 붙여 존칭으로 부르고, ‘그것’이 아니라 ‘누구’로, ‘이것’이 아니라 ‘이분’으로 대한다고 한다.❸ 아마 그런 인디언들이라면 이 낯선 생명도 그렇게 대하고 사유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도 병균도 우리 몸과 같이 사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분들’을 적으로 대한다면 몸속에 그를 가진 이들, ‘감염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똑같이 적대적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추방과 격리의 대상이면, 코로나19의 감염자들도 추방과 격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개체를 중심으로 보면서 문제 부위를 ‘제거’하는 서양 의학의 사유 구조는 사회의 병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만 이제 이것은 전체를 중심으로 보면서 문제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 쿠바의 의학이 부유한 G7 국가인 이탈리아를 원조할 수 있는 의료 역량은 장비나 기술의 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정치와 도덕의 우위에서 나온 것이다.
❸ 로빈 월 키머러, 노승영 옮김(2020),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에이도스.
바이러스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만 분리해서 제거할 수는 없다. 질병이 혐오와 제거의 대상이 되면 당연히 그 병을 앓는 ‘몸’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없애려면 바이러스가 아니라 돼지를 없애야 하듯이 말이다. 바이러스를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만 우리는 그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바이러스를 없애고 인간만 살아남는 그런 방법은 없다. 박쥐를 박멸해도 바이러스는 다시 다른 몸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공존만이 생존의 방법이다. 필요한 것은 제거의 기술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이다. 코로나 천사는 말한다.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쉬어야 하고, 작업장에는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며, 아플 때는 출근하지 않고, 노동 시간과 조건을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것을 비상이 아니라 일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다행히 우리는 ‘아직은’ 돼지가 아니어서 살처분을 당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방역 국가에 더하여 국가의 전 사회적 자원 동원을 허용하는 ‘전시 경제 체제’까지 강화되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경영 위기 때문에 사료값을 감당할 수 없어 대규모 축사에서 굶어 죽게 방치된 가축들과 굶어 죽든 말든 해고되어 내버려진 노동자의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재난의 초기 단계에 허둥지둥하던 국가와 자본은 재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정상 국가에선 할 수 없었던 ‘충격 정책shock doctrine’❹을 밀어붙이고 있다. ‘강한 자본, 강한 국가’와 ‘약한 노동, 약한 민주주의’의 결합, 이것은 파시즘의 강력한 징조다. 뉴욕 북동부의 하트섬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지고 코로나19 사망자들에 대한 집단 매장이 시작되었을 때, 그 장면은 돼지 살처분의 현장과 아우슈비츠를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하트섬은 포로수용소, 정신병동, 노숙인 쉼터 등 기피 시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고,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집단 매장지는 인근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의 무연고 시신들을 매장하던 장소였다. 하트섬의 비밀은 코로나19가 드러낸 진실이다. 그것은 이 손님이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이면 누구의 몸이라도 찾아 들어갈 수 있지만 부자들은 죽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만 죽는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것은 질병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❹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2008), 《쇼크 독트린 –시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 살림Biz.
5월 18일 뉴욕 보건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률이 가장 높은 이 지역에서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은 브루클린 인근의 스타렛 시티로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는 444명이었다. 반대로 사망자 수가 가장 적은 지역은 맨해튼의 부유한 백인 거주지인 그래머시 파크였고,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31명이었다. ‘444 대 31’은 13배가 넘는 비율이다. 13배로 죽을 확률이 높은 사람들은 그 확률을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 목격했다. 코로나19는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일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망자 대부분은 원격 근무가 애초에 불가능한 저임금 노동자였다. 이곳은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의 빈곤층 거주지였다. 높은 집세와 낮은 수입은 열악한 거주 환경으로 귀결된다.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들이 붙어 살아야 하는 곳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의료보험이 없다는 것도, 원래 영양 상태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기저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원인이었다. 뉴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5월 12일 발표된 APM리서치 보고서는 질병이 인종을 차별한다는 사실을 통계학적으로 입증했다. 미국에서 인구 10만 명당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흑인이 43명이었고, 백인 17명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계급과 인종과 성별과 나이를 철저히 차별했다. 가난할수록, 유색 인종일수록, 여성일수록, 노인일수록, 장애인일수록, 소수자이자 약자일수록 더 취약했다. 하지만 재난이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재난은 전부터 있던 불평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한국에서 같은 시기 전염병 사망자는 260명이었다. 하지만 연간 2,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가는 대재난의 현장은 ‘노동 현장’이었다. 자신의 일터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도 이 계급과 인종의 차별 규칙은 그대로 적용될 것이었다.
그래서 천사는 실종자들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몰랐던 존재, 보이지 않던 사람들, 사회의 뒷문으로 조용히 숨겨졌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재난은 사라진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 보이지 않던 노동자들, 숨겨진 노인들, 병원에 매장된 장애인들, 감금된 동물들을 찾아냈다. 해방된 노예들처럼 코로나19는 그들을 세상으로 불러냈다. 실은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비가시화된 존재였다. 손님은 그들을 불러내어 다시 가시적 존재로 우리 눈앞으로 데려왔다. 마치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왔다는 듯이. 공장과 함께 사라졌다던 프롤레타리아가 택배 상자를 옮기다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마이신을 먹고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리던 봉제공들의 자리에 해열제를 먹고 쉴 새 없이 콜을 받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나타났다. 이제 엥겔스가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에서 묘사했던 그런 열악한 노동자는 더 이상 없다고 말했던 사람들 앞에서, 물류센터 신축 현장의 화재는 38명의 건설 노동자들을 단번에 집어삼켜 버리며 ‘그런’ 노동자들이 여기 있다고 보여 주었다.
코로나 시대는 이 포스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에게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재난 덕분에 자신을 새롭게 분류하는 이름을 갖게 이들은 보건 의료 노동자, 돌봄 노동자, 청소 노동자, 택배 노동자, 운수 화물 노동자, 건설 일용직 노동자, 물류센터와 콜센터 노동자 등이었다. 그런데 이 ‘가장 필수적인 노동자들’이 또한 ‘가장 열악한 노동자’였다. 이들이 노동을 멈춘다면 사회는 마비될 것이나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제할 권한도, 중지할 권리도 갖지 못한 ‘노동 외부의 노동자’들이었다. 콜센터 노동자의 집단 감염과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는 지금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자가 누구인지를 드러냈고 동시에 그 필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권리를 드러냈다. “왜 가장 필수적인 노동자에게 가장 적게 지불하는가?” 이 모순적인 임금과 권리의 차별을 자각한 사람들의 물음이 담벼락의 낙서로 떠올랐다.
담벼락의 낙서처럼 떠오른 사람들은 또 있다. 요양 시설, 격리 시설, 종교 시설 등 각종 시설 속으로 감금된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그들은 장애인이거나, 노인이거나, 청년이었고, 공통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코로나19는 초기 대규모 집단 감염으로 코호트 조치가 내려졌던 청도대남병원에서 평생을 그곳에서 살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을 불러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요양병원이라는 이름의 시설에 격리되어 있는지 보게 만들었다. 또한 바이러스는 감염의 전파자였던 ‘신천지 교인’을 통해 이 신흥 종교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보게 만들었다.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두 번째로 집단 폐쇄 조치가 내려졌던 대구 한마음아파트는 월세가 2~5만 원이었고, 감염자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바이러스의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낸 신천지 교인은 광신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멀쩡해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홍콩 시위 당시 폴리텍 대학 건물에 “나는 이 세계에 아무런 지분이 없다”고 써 놓았던 홍콩의 청년들처럼, 신천지로 간 청년들도 이 세계에 아무런 지분도 없고 공동체도 없는 청년들이 아니었을까. 각자도생에 지친 이들은 기댈 수 있는 곁을 찾아 신천지로 갔다. 만약 그 곁을 내어준 곳이 신천지 같은 종교 집단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코뮌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난한 청년들이 모여 신천지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남기’를 할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있었다면. ‘우리가 놓친 사람들’은 어디로 흘러들어 가고 있는 걸까? 사회로부터 낙오되고 추방된 사람들도 박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신흥 종교의 열렬한 신도가 되거나 극우 정치의 신도가 되거나 또는 그 이상의 괴물이 되어 자신을 추방한 사회로 귀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흉악범들도 혐오와 차별을 먹고 자라났다. 추방된 박쥐의 삶터를 우리의 공동 세계commons 안에 다시 만들어야 하듯이,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들도 다시 초대되어야 한다. 그 장벽을 허물고 연결하는 것이 정치의 몫일 것이다.
‘연대의 기술’ -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공동체
코로나 천사는 우리가 얼마나 연결된 존재인지도 드러냈다. 우리가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는 존재인지, 누가 그 협동과 연대의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하는지도. 재난이 오면 엘리트의 리더십은 패닉에 빠지지만 민중은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재난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발휘하는 자치와 자급의 능력은 항상 놀라움을 불러오곤 한다. 고립된 곳에서는 연결의 기술이, 결핍된 곳에선 분배의 기술이, 위험한 곳에선 안전의 기술이 나타났다. 재난 속에서 빛을 발하는 민중의 역량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리베카 솔닛이 말했던 ‘재난 유토피아’는 도처에서 생겨났다. 처음 중국에서 우한시가 봉쇄되었을 때 사람들은 ‘우한 짜요’를 외치며 서로 용기를 주었다. 대구에서 바이러스가 확산되자 전국에서 보건 의료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대구 시민들은 1980년의 광주에서처럼 의료 봉사진을 위해 주먹밥을 싸고 대구 서문시장 상인들은 도시락을 만들어 병원으로 날랐다.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생활협동조합은 슈퍼마켓24와 협력해서 독거노인들에게 식료품을 무료로 배달했다. 봉쇄 조치로 집에 격리된 사람들이 베란다에 나와서 연주를 하고, 노래로 화답하고, 함께 합창을 하는 장면이 세계 각지에서 포착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것을 괴로워했고, 홀로 살 수도 없고, 홀로 살기도 싫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로나 사태는 신자유주의가 심어 놓은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를 일시에 패퇴시켰다. 팬데믹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사회적 백신을 만드는 것이 또한 정치의 몫이다.
인도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도시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 탈출이 시작되었을 때, 다친 아빠를 자전거에 태우고 1,200km를 달려 고향에 무사히 도착한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가 고향으로 가기 위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자전거를 사고 난 후에 남은 것은 물 한 병뿐이었다. 그들이 1,200km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물과 음식과 도움을 제공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고, 이 우애와 협동의 미담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인도의 콜카타에선 팬데믹으로 농산물 유통이 막히자 공산당과 지역 풀뿌리 단체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임시 농산물 시장을 조직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유통과 판로가 막혀 폐기될 위기에 놓인 농산물을 가져와서 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주 노동자들과 도시에 남은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공동 식사를 위한 커뮤니티 주방을 열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농민들은 남는 과일과 채소를 거리에 쌓아 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무상으로 가져가게 하는 무인 보급소를 열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사회주의 농민단체와 지역 풀뿌리 단체들이 부자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수행하는 우파 정부와 경찰을 대신해서 빈곤 지역의 안전망과 필수재 공급망을 조직했다. 농민들은 과일과 채소를 병원과 가난한 지역에 기부하고, 위기 노동자들에게는 쌀을 배달하고, 도시의 카페를 노숙자들을 위한 식당으로 변경했다. 마을 주민들은 마스크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아픈 사람이 있는 집에 음식 꾸러미를 넣어 줬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공동의 생활 규칙을 만들고,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안전을 위해 경찰을 투입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의 담벼락에는 이런 글귀가 떠올랐다. “경찰은 더 적게, 간호사는 더 많이Less Cops, More Nurses.”
혁명이냐 멸종이냐
어떻게 해야 할까? 1세기 전 서구 자본주의가 지금과 유사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고 물었다. 사회주의로의 길과 야만적 자본주의로의 길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서구 사민주의 좌파는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이라는 애매한 길 찾기를 해 왔다. 그것은 야만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착한 자본주의로의 길이었으나, 그 전략은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자본주의는 점점 더 약탈적이고 야수적인 성격으로 변해 갔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 그 종합판인 팬데믹 또한 그 결과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더 곤궁해졌다. 남은 것은 이제 ‘혁명이냐, 멸종이냐’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 체제를 멈춰 세워야 하고 완전히 바꿔야 한다. 혁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혁명을 할 것인가?
지금 두 개의 혁명으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반反자본주의적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혁명이다. 두 힘이 반대 방향에서 각기 급진적 변화를 추동한다. 자본주의적 혁명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통해 낡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 급진화 전략이다. 뉴딜, 리쇼어링, 언택트, 플랫폼 자본주의나 ‘4차 산업 혁명’ 같은 이름으로 대표되는 ‘탈자본주의적 자본주의’를 모색한다. 생산과 소비의 성장을 통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본가들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자본의 탈출구는 금융 자본주의나 디지털 자본주의 같은 ‘가상의 경제 영역’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상의 경제는 실제로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경제를, 숫자의 마술을 통해 지표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오늘날 금융 경제와 부채 경제는 ‘마술 경제’다. 부채가 자산을 능가하며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좀비 기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회생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채권단에 의해 파산이 지연되고 있는 이런 좀비 기업은 부채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파산할 위험이 낮아지는 이상한 숫자의 경제를 대표한다. 이러한 부채 경제는 팔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재무 재표를 위한 허수의 생산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동력이다. 돈을 굴리기 위해 손해를 보는 생산을 계속 하도록 강제하는 금융 경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한 착취의 주범이다. 거대한 부채는 위기를 더 큰 미래의 위기로 이전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1900년대 대공황과 전혀 다른 조건과 상황임에도 ‘뉴딜’ 같은 브랜드를 가져와 돈을 풀고 인위적인 성장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과거의 뉴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탈출구가 있었고, 식민지 수탈로 서구 경제의 성장 영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국주의 체제를 통한 자원의 약탈도 시장의 팽창도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부가 팽창되는 영역은 무로부터 유를 창조해 내는 창조 경제 또는 문화 경제라 불리는 영역, 지식 경제나 증권과 부동산 시장뿐이다. 지구에 기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물질 경제는 실은 엄청난 에너지 소비 산업이고 쓰레기 배출 산업이다.
국가의 개입과 지원 없이는 이런 시장의 창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 국가 개입을 거부하던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시장 개입을 요청하는 ‘국가와 자본의 동맹 체제’로 변화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국가로부터 시장을 방어하던 근대 자유주의는 국가를 시장으로 흡수하는 신자유주의로 나아가더니, 이제 정치적인 것의 완전한 소멸과 완전한 기업 국가로의 구조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를 소멸시키는 것, 민주주의를 기계적 작동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적 혁명의 본질이다.
이런 자본주의 혁명의 반대편에서 반자본주의 혁명은 생태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을 요구해야 한다. 생태주의적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자연을 정치의 주체로 불러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특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간이 아닌 생명 존재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주의적 민주주의는 사유의 혁명이자 실천적 혁명이며, 생명을 약탈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모든 생명들의 탈상품화와 주체적 저항을 조직하는 반자본주의적 혁명이다.
새로운 마그나카르타
혁명 혹은 혁명적 전환은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회 협약을 요구한다. 정치적 합의와 강제 없이 사회가 행위의 총합으로서 자동 진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전환을 위한 두 가지 종류의 대협약이 필요한데 하나는 ‘사회 대협약’이고, 하나는 ‘자연 대협약’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와 자연의 생명들과의 공존의 원리를 두 개의 동시 헌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피터 라인보우는 《마그나카르타 선언Magna Carta Menifesto》에서 영국에서 ‘법에 의한 통치’를 수립할 때, 왕과 시민들 사이의 사회 협약인 마그나카르타 이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숲의 협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❺ 당시 마그나카르타가 귀족-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사회 계약으로서 왕권을 제약한 ‘시민헌장’이라면, ‘삼림헌장’이라고 불리는 숲의 헌장은 공유지인 숲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확인하는 ‘민중헌장’이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숲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삶을 보장받을 권리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시민권과 민중권은 소유권적 원리에서는 각각 사유권과 공유권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시민권이 국가에 대한 시민의 권리로서 시민 ‘개인’의 재산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면, 민중권은 땅에 대한 거주민의 권리로서 숲에 거주하는 생명들의 ‘공통’의 생존권을 보장한다.
❺ 피터 라인보우, 정남영 옮김(2012),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갈무리.
시민권과 민중권의 이중 협약은 지금의 전환 기획에서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시민과 정부 간의 전환을 위한 합의와 협약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인간 간의 합의와 협약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시민권이 민중 생존권과 자연의 권리를 대리하거나 대표했다. 하지만 이 이중 협약은 협약의 주체에서 민중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자본의 시민권을 제약한다. 지금까지 ‘법인’이라는 기이한 형태로 기업이 ‘민간’ 대표로서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해 온 것은 이제 제한되어야 한다. 법인은 생명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 권리가 필요치 않은 죽은 자본이 살 권리가 있는 생명 존재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협약의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식물과 동물들, 땅과 강과 바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는 전환의 주체이자 협약의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없던 권리가 아니라 예전부터 원래 갖고 있던 권리다. 그 권리의 담지자인 공동체가 파괴되고 그들과 함께 살아온 민중이 해체되면서 자연도 함께 권리를 잃었던 것뿐이다. 자연의 권리가 박탈된 곳에 자본은 수많은 법조인과 지식인과 과학자를 수족으로 거느리고 자신의 말을 대변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권리 주체가 되었다. 자본으로부터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생명들에 대해서는 권리를 부여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을 써야만 한다. 자본의 생명에 대한 통치를 생명들의 자본에 대한 통치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반자본주의적 생태 민주주의적 정치 혁명이다.
그러나 지금 전환의 기획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주체 관계의 전환이 아니라 주로 방법론적인 전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유는 역사정치학이 아니라 ‘미래학’으로부터 온다. 미래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문제는 미래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목표를 미래의 어떤 지점에 설정하고, 그로부터 역산하여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행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에도 그런 인식론이 노정되어 있다. 미래의 지구 온도 목표를 설정하고, 온도를 낮추기 위한 기간별 목표를 설정한 후, 다시 이를 위한 방법적 대안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지구 온도 ‘1.5℃’ 상승을 목표로 한 탄소 배출 제로화 전략도 대표적으로 그런 사례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못해 지구 온도가 1.5℃ 이상 상승했을 경우를 예측한 과학적 시뮬레이션과 실험 가설은 그 자체로는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적이고 객관적 근거는 위기의 실체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단이 기술적 대안으로 수렴되고, 정치적 지배 관계의 변화를 동시에 촉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문제를 만든 장본인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모순된 결과를 낳는다. 범죄자에게 자기의 재판을 맡기는 셈이다.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운동을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 해석 및 방향은 정치적인 해석 투쟁의 영역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도 마찬가지다. ‘다음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지금의 정치’다. 코로나19 때문에 해고되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노동자들의 해고 철회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정치적 사안이다. 기업 대표들로부터 코로나19 대책 의견을 듣기 위해 회의를 열어 의논하는 정부가 노동자들의 의견을 내는 집회를 봉쇄하고 불법화하는 것도 정치적인 문제다. 미래의 일자리를 약속하면서 지금의 정리 해고는 막지 않는 것도 정치적 문제다. 국가와 자본의 공동실행위원회가 된 거버넌스 구조에서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대상이 되는지도 정치적인 문제다.
전환의 주체
‘어떻게’ 이전에 물어져야 할 것은 ‘누가’이고 ‘무엇을’이다. 이행의 전략은 자꾸 ‘무엇’을 건너뛰고 ‘어떻게’라는 방법론으로 바로 나아간다. 누가 할 것인가라는 주체의 물음도 상실된다. 우리에게 혁명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 혁명이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지구 구성원 전체의 생존이 걸린 생태주의적 혁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전환의 기획은 전혀 다른 언어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의 혁명이고, 이는 물의 혁명, 불의 혁명, 흙의 혁명, 공기의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4차 산업 혁명’에 맞서는 ‘4원소의 생명 혁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본도 기술을 통해 물과 불과 흙과 공기를 혁신하고 혁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상품화와 새로운 시장의 기획이며 생명에 대한 자본의 혁명이다. 여기에 맞서 우리는 자본에 대한 생명들의 혁명을 기획해야 하고, 이를 생명 주체와 함께 해야 한다.
얼마 전에 그린 뉴딜을 주장하는 환경운동 출신 정치인은 재생 에너지 전환 계획을 말하면서 앞으로 눈을 들어 보이는 산마다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에서 산에 발전기를 ‘꽂는다’라는 표현이 정말 끔찍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발전기가 꽂히게 될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하는 녹색 전환을 위한 새로운 협약Green New Deal에서는 산에 사는 주민들과 동식물들이 주체로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협약은 결국 ‘정부와 시민 간의 협약’ 또는 ‘민관 협치’라고 표현되지만 그 헤게모니의 실 주체는 정부와 기업인 ‘국가와 시장의 거래’다. 시민 참여라는 것도 실제로는 일부 소수 ‘전문가’들이 ‘시민’의 자격으로 참정권을 얻어 대표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산은 비어 있는 ‘공산空山’이 아니라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의 산, ‘공산共山’임에도, 그는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무도 살지 않는 땅으로 산을 보았다. 산과 바다를 ‘국토’로서 바라보며, 삶의 ‘장소’가 아니라 발전기를 꽂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그 관점은 삶터를 지도로 환원하는 ‘국가처럼 보기’의 관점이었다.❻ 포스트 코로나가 미래 담론이 될 때도 그런 위험이 발생한다. 미래학은 우리가 도착할 미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미개척지처럼 여기고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미래라는 빈 시간과 공간 속에 새로운 산업과 도시와 인구와 자원을 배치한다. ‘지금 여기’의 주거 문제, 해고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정의로운 전환의 ‘이후’만을 말하는 것은 몫에 대한 지불 연장이고 ‘지연 사기’다. 미래가 그렇게 도래하려면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몫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의 몫, 거주의 몫을. 그리고 이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몫, 숲과 강과 들판의 몫을 요구해야 한다. 지금 팬데믹은 앞장서서 그 몫을 요구하고 있는 생명들의 반란이다.
❻ 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포스트 코로나가 과거를 성찰하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미래로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되어선 안 되겠다. 이 파괴적 문명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물음은 점점 사라지고,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사회적 의제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런 식으로라면, ‘코로나 이후’가 어쩌면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충격과 반성의 목소리는 방역 체제에 의해 봉쇄되면서 정치적 힘들로 전환되지 못하고, 그 틈새에서 사회 엘리트들은 기득권 체제의 유지를 위한 질서의 회복과 정상화의 고삐를 다시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세력 관계의 어떤 변화도 없이 ‘뉴 노멀’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은 ‘새로운 과거’일 뿐이다. 지난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반자본주의 봉기에서 이 문장이 여러 도시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상이 문제였기 때문에.” 정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과연 그 단호한 의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산티아고와 홍콩에서 빌딩 담벼락에 쓰여 있던 이 구호가 팬데믹이 확산되는 미국의 도시 한복판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다. 나는 이 말이 자본주의적 정상성 속에서 고통받았던 모든 존재들의 말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코로나는 혁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혁명에 우리를 초대했다. 이제 자연과 함께하는 정치를 시작하자고. 탈성장으로 가는 반자본주의 정치를 나는 ‘가난한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전환을 위한 마그나카르타, 가난한 민주주의
- 코로나19 전령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
채효정 measophia@naver.com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노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농민이고 학자이며, 교육자이며 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천사
천사는 하늘에서 온다. 천사, 엔젤angel이라는 말은 ‘전령messenger’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앙겔로스angelos’에서 왔다. 천사는 말을 전하는 전령이다. 미셸 세르는 천사들의 전설을 현대적 신화로 다시 쓰면서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로부터 시작하는 오랜 정치신학 속에 생략된 존재, ‘말을 전하는 자’를 이 문장 속에 다시 기입한다.❶ “태초에 ‘천사들의’ 말이 있었다.” 말을 전하는 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연결하고 관계를 만든다.
❶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2008), 《천사들의 전설 – 현대의 신화》, 그린비.
오늘날 천사는 공항으로 온다. 그중에는 기업, 정부, 대중 매체, 경영, 과학의 세계를 대표하는 전령들도 있지만,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과 고향을 상실한 난민들, 마치 유령처럼 공항과 비행기를 청소하는 청소 노동자도 또 다른 한 세계를 대표하며 그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코로나19도 공항으로 왔다. 그것은 신의 말도 인간의 말도 아닌 동물의 말이었다. 그런데 박쥐의 몸에서 인간으로 왔다는 이 바이러스 천사는 전파력이 아주 강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중에서도 가장 아무것도 아닌 그의 말을 전 세계의 인류가, 그리고 가장 힘센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왕관corona을 쓴 천사는 어떤 말을 전해 주려고 우리에게 왔는가. 그는 지금 누구의 말을 전하고 있는가. 전령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연결한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발신해 온 신호를, 오랫동안 듣지 못한 자들에게,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증폭시켜 전달하고 있다. 재난은 앙겔로스의 전언이다. 우리는 지금 그 말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제대로 의미를 연결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재난의 해석학
‘하멜른의 쥐잡이가 돌아왔다.’ 코로나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렸을 때 읽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이야기는 1284년 6월 26일 요한과 바울의 날에 독일 베저 강변의 하멜른시에서 130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된 실제 사건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이 이야기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각색되고 해석되었다. 하멜른의 쥐떼는 페스트를 거쳐 박쥐로 왔다. 쥐떼가 재난이 되었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시간과 장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처음엔 재난이 복수극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수없이 신호를 보내왔음에도,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며 지구를 파괴해 온 데 대해 반성도 하지 않고 죗값도 치르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 대한 신의 복수 또는 자연의 복수라고. 하멜른의 재난이 지배자에 대해 경고하는 민중적 해석으로, 민중을 가르치려는 지배자들의 해석으로도 전유되었듯이, 현재의 코로나19 담론도 일종의 ‘사건의 해석학’으로서 재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사건의 텍스트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해 각자의 위치와 관점에서 내놓는 응답들은 서로 경합하면서, 그 과정에서 설득력을 얻은 지배적 해석은 이후의 경로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난의 해석학은 사회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의미의 경합’으로서 중요한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 ‘경제 위기’가 재난을 해석하는 중심 열쇠가 되면 다음 담론의 경로는 위기 탈출과 경제 회복으로 집중될 것이다. ‘비정상성’이 해석의 중심에 놓이면, 그 다음 이야기는 당연히 ‘정상성의 복구’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지금 나오는 ‘뉴 노멀’이나 ‘뉴딜’, ‘포스트 코로나’ 같은 담론은 이러한 해석 투쟁의 결과다. 그러나 재난 자체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안 된 채로, 너무 성급히 ‘새로운new 이후post’로 이행하는 것 같다. 이것은 누구의 메시지일까?
초기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사태가 주는 신호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자연의 해석학은 사회의 해석학을 요청했다. 사람들은 하늘이 맑아지고 별이 보이고 물이 깨끗해지고 인간이 사라진 거리에 어디선가 나타난 동물들이 다시 찾아오는 모습에 감탄했고,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자는 성찰의 언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모든 것이 다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무능했고, 기업가는 탐욕을 멈추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 고립되고 지쳐 갔다. ‘자연의 귀환’에 대한 환대의 문법은 ‘정복하고, 이겨 내고, 승리하자’는 적대의 문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멜른의 재난도 적대와 환대의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이방인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도,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교훈으로도 해석된다. 지금 우리를 찾아온 이 바이러스 천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초기의 ‘복수론’이나 ‘징벌론’에는 우리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직관적인 반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론’으로 전환되면서 전 사회적 반성은 전 사회적 총동원으로 바뀌었고, ‘전시 경제’와 ‘비상사태’를 승인하는 전쟁 담론이 재난의 지배적 해석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시각과 하멜른의 사람들이 쥐떼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하다. 박멸의 관점이다. 박쥐의 몸에서 살고 있었다는 그가 인간의 몸으로 도시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쥐떼의 습격을 당한 하멜른시의 사람들처럼 당황했다. 넘어서는 안 될 문명과 야만의 경계,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온 그를 ‘침입자’로 대하고, 제거와 추방의 계획을 세우는 데 급급했다.
우리가 바이러스에게 들을 말이 없고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한, 그의 말은 영원히 해석 불가능의 지대에 놓이며, 어떤 신호도 읽어 낼 수 없게 된다. 사태 속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끝내 우리가 듣지 못한다면, 또는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재난은 우리의 아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와 염기 서열을 모두 밝혀냈어도, 우리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지식에서 나오지만 후자는 관계에서 나온다. 전자에 대응하는 것이 과학적 설명이라면, 후자에 대응하는 것은 인문학적 해석일 것이다. 백신과 방역에만 매달려 있는 현실은 과학과 철학의 불통과 빈곤을 동시에 드러낸다. 지금 이 사태 속에서 결여된 것,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과학 기술적 방법론적 대안을 넘어선 인문적 해석과 정치적 상상력이다. 이 글은 그런 관점에서 재난을 성찰적으로 해석하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 찾아보려고 한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해선 재난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 손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그것을 묻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찾아온 손님, 적인가 친구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낯선 방문자를 적이 아니라 손님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방문자, 이방인, 외부인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 먼 옛날, 사람이 사는 촌락 경계 저 너머 들판 끝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통과해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는 필경 손님 아니면 도둑 둘 중 하나다. 헤르메스Hermes는 손님이자 도둑이고 여행자이며 전령이다. 주인이 그를 어떻게 응대하느냐에 따라 그는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환대는 적도 손님으로 만들고, 적대는 친구로 찾아온 이도 적으로 만든다. 관계는 상호 관계 맺음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는 이방인을 손님으로 대하고 친구로서 관계 맺는 방식을 말한다. 오늘 나를 찾아온 이를 보살펴 줄 때 다음엔 내가 낯선 곳에서 어떤 모르는 이의 도움을 그와 같이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약속이다.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도와주면 언젠가 은혜를 돌려받을 것이나, 반대로 외면하면 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은 민중 세계를 지탱하는 공존의 규칙인 ‘상호 부조의 원리’를 오랜 세월 가르쳐 왔다. 오늘 우리를 찾아온 손님은 적인가, 친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바이러스는 단독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존재다. 그를 알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에고ego의 해석학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구성하는 존재인가라는 에코eco의 해석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박쥐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맺는 관계의 이행이 ‘우리’라는 함께-존재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와 몸이라는 집oikos을 공유하며, 박쥐와 인간을 연결하고, ‘박쥐-인간’의 몸을 재구성한다. 다르게 보면 이것은 침범이 아니라 ‘관계의 확장’을 의미한다. 천사는 박쥐와도 함께 살고, 인간과도 함께 살겠다고 말한다. 박쥐가 살지 못하는 집은 인간도 살 수 없는 집일 것이다. 이것은 박쥐와 인간의 관계가 함께 살아야 할 존재로서 ‘다시-관계 맺음’이 요청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재구성’은 자연과 인간, 비인간 동물과 인간 사이의 ‘공통 세계의 재구성’이기도 하다. 세계의 재구성은 다시 사회의 재구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는 ‘박쥐와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요청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함께 살자는 메시지를 담은 절박한 공존의 요구다.
인도의 생태주의 페미니스트 반다나 시바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비유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인류가 생명의 그물망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한다면, 이는 스스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순간 생명망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힘센 인간들이 나머지 인류를 향해 선포한 전쟁이 될 것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이미 코로나19보다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체 인류 중 1%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코로나19 퇴치를 명분으로 한 전쟁 상태가 90%의 인류를 생존의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현실을 감춘다. 국가와 기업이 주체가 되어 수행하는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지금까지 지구의 약탈자들이 해 왔던 ‘지구에 대한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도에선 이미 3000만 명 이상이 생계의 터전을 잃었다. 스웨덴의 집단 감염을 통한 집단 면역 실험은 사회를 공리주의적 생체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모범 방역 국가’라는 타이틀 뒤에선 삶터와 일터를 빼앗기고 생계와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모두를 구한다는 전쟁에서 약자들만 계속 쓰러진다면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자연을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은 서구 지배자들의 근본 관점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서구 정치는 기본적으로 이런 지배자들이 수립한 전쟁 국가에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은 자연에 대한 침략과 약탈에서 성립한다. 자연에 대한 자본의 약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약탈, 남구에 대한 북구의 약탈,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약탈,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약탈은 모두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 우리는 종종 자연에 대한 인류의 약탈을 말하며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키지만 이 약탈적 인간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 인류의 특정한 집단을 뜻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 인간의 대표를 자처해 온 인간으로, 귀족이었으며, 사제였고, 전사였던 자이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인, 삼위일체의 신성을 가진 ‘자본가’다.
신자유주의는 이 침략하고 정복하고 승리하는 ‘기업가형 인간’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전형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리스크가 높을수록 수익률도 높다’는 헤지 펀드의 정신을 가지고 위험을 감내하며 ‘블루 오션’으로 뛰어든다. 코로나19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블루 오션으로 해석될 것이다. 군수 산업이 전쟁을 통해 성장하듯이 ‘코로나 수혜주’와 관련 산업도 ‘전쟁 특수’를 안겨 주고 있다. 유통 기업 아마존의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물류 전쟁’을 수행하느라 800명씩 집단 감염이 되어 쓰러질 때, 최고 경영자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30조 원이 넘게 불어났다. ‘K-방역’이라 불리며 세계적인 방역 성공 모델이 된 한국에선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던 보건 의료 노동자들이 코로나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되었지만, ‘비상사태’에 투입되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동권도 주장하지 못해 왔던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영웅도 전사도 아니라고 답했다.
가난한 사람은 죽고 부자는 죽지 않는 병
반대편에는 자연을 친구로 대하며 살아온 또 다른 인류가 있다. 자연의 법칙을 순리로 여기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고자 하는 기술 진보주의자들의 눈에는 낙후와 후진성의 상징이다. 문명과 야만은 자연을 통제하고 굴복시키는 기술적 역량에 따라 나뉜다. 지금 우리를 찾아온 ‘야만인’은 ‘친구’에게 공동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이 약탈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 손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류의 약탈’이 아니라 자연과 그 친구들에 대한 ‘약탈적 인류’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 약탈적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그 삶의 양식이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온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 문명은 자연에 대한 수탈 체계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그것을 ‘제국적 생활 양식’이라고 부른다.❷ 북반구의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의 양식은 남반구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정의로운 전환’도 마찬가지다. 가난과 저임금, 오염과 쓰레기를 지속적으로 외주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세계적 생산의 분업화를 나타내는 ‘가치 사슬value chain’은 착취의 위계화와 맞물려 있는 ‘연쇄적 착취의 사슬’이나 다름없다.
❷ 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 이신철 옮김(2020)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 에코리브르.
어쩌면 이것이 왜 재난이 부자들의 재산을 늘려 주고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난 초기에 나는 이것이 ‘복수’고 ‘징벌’이라면 왜 복수를 엉뚱한 이들에게 하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이 받고 있는지를 계속 물었다. 박쥐의 전령, 동물 세계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온 천사가 이 착취의 위계에서 최후 말단에 있는 사람들부터 찾아온 이유는 그들이 이 약탈에 함께 맞설 동맹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착취의 위계를 전복하는 힘은 결국 위계의 제일 아래에 있는 존재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식물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다른 생명들에도 사람과 같이 이름을 붙여 존칭으로 부르고, ‘그것’이 아니라 ‘누구’로, ‘이것’이 아니라 ‘이분’으로 대한다고 한다.❸ 아마 그런 인디언들이라면 이 낯선 생명도 그렇게 대하고 사유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도 병균도 우리 몸과 같이 사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분들’을 적으로 대한다면 몸속에 그를 가진 이들, ‘감염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똑같이 적대적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추방과 격리의 대상이면, 코로나19의 감염자들도 추방과 격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개체를 중심으로 보면서 문제 부위를 ‘제거’하는 서양 의학의 사유 구조는 사회의 병리학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만 이제 이것은 전체를 중심으로 보면서 문제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 쿠바의 의학이 부유한 G7 국가인 이탈리아를 원조할 수 있는 의료 역량은 장비나 기술의 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정치와 도덕의 우위에서 나온 것이다.
❸ 로빈 월 키머러, 노승영 옮김(2020),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에이도스.
바이러스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만 분리해서 제거할 수는 없다. 질병이 혐오와 제거의 대상이 되면 당연히 그 병을 앓는 ‘몸’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없애려면 바이러스가 아니라 돼지를 없애야 하듯이 말이다. 바이러스를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만 우리는 그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바이러스를 없애고 인간만 살아남는 그런 방법은 없다. 박쥐를 박멸해도 바이러스는 다시 다른 몸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공존만이 생존의 방법이다. 필요한 것은 제거의 기술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이다. 코로나 천사는 말한다.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쉬어야 하고, 작업장에는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며, 아플 때는 출근하지 않고, 노동 시간과 조건을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것을 비상이 아니라 일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다행히 우리는 ‘아직은’ 돼지가 아니어서 살처분을 당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방역 국가에 더하여 국가의 전 사회적 자원 동원을 허용하는 ‘전시 경제 체제’까지 강화되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경영 위기 때문에 사료값을 감당할 수 없어 대규모 축사에서 굶어 죽게 방치된 가축들과 굶어 죽든 말든 해고되어 내버려진 노동자의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재난의 초기 단계에 허둥지둥하던 국가와 자본은 재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정상 국가에선 할 수 없었던 ‘충격 정책shock doctrine’❹을 밀어붙이고 있다. ‘강한 자본, 강한 국가’와 ‘약한 노동, 약한 민주주의’의 결합, 이것은 파시즘의 강력한 징조다. 뉴욕 북동부의 하트섬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지고 코로나19 사망자들에 대한 집단 매장이 시작되었을 때, 그 장면은 돼지 살처분의 현장과 아우슈비츠를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하트섬은 포로수용소, 정신병동, 노숙인 쉼터 등 기피 시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고,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집단 매장지는 인근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의 무연고 시신들을 매장하던 장소였다. 하트섬의 비밀은 코로나19가 드러낸 진실이다. 그것은 이 손님이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이면 누구의 몸이라도 찾아 들어갈 수 있지만 부자들은 죽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만 죽는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것은 질병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❹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2008), 《쇼크 독트린 –시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 살림Biz.
5월 18일 뉴욕 보건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률이 가장 높은 이 지역에서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은 브루클린 인근의 스타렛 시티로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는 444명이었다. 반대로 사망자 수가 가장 적은 지역은 맨해튼의 부유한 백인 거주지인 그래머시 파크였고,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31명이었다. ‘444 대 31’은 13배가 넘는 비율이다. 13배로 죽을 확률이 높은 사람들은 그 확률을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 목격했다. 코로나19는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일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망자 대부분은 원격 근무가 애초에 불가능한 저임금 노동자였다. 이곳은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의 빈곤층 거주지였다. 높은 집세와 낮은 수입은 열악한 거주 환경으로 귀결된다.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들이 붙어 살아야 하는 곳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의료보험이 없다는 것도, 원래 영양 상태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기저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원인이었다. 뉴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5월 12일 발표된 APM리서치 보고서는 질병이 인종을 차별한다는 사실을 통계학적으로 입증했다. 미국에서 인구 10만 명당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흑인이 43명이었고, 백인 17명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계급과 인종과 성별과 나이를 철저히 차별했다. 가난할수록, 유색 인종일수록, 여성일수록, 노인일수록, 장애인일수록, 소수자이자 약자일수록 더 취약했다. 하지만 재난이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재난은 전부터 있던 불평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한국에서 같은 시기 전염병 사망자는 260명이었다. 하지만 연간 2,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가는 대재난의 현장은 ‘노동 현장’이었다. 자신의 일터에서 죽는 사람들에게도 이 계급과 인종의 차별 규칙은 그대로 적용될 것이었다.
그래서 천사는 실종자들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가 몰랐던 존재, 보이지 않던 사람들, 사회의 뒷문으로 조용히 숨겨졌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재난은 사라진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 보이지 않던 노동자들, 숨겨진 노인들, 병원에 매장된 장애인들, 감금된 동물들을 찾아냈다. 해방된 노예들처럼 코로나19는 그들을 세상으로 불러냈다. 실은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비가시화된 존재였다. 손님은 그들을 불러내어 다시 가시적 존재로 우리 눈앞으로 데려왔다. 마치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왔다는 듯이. 공장과 함께 사라졌다던 프롤레타리아가 택배 상자를 옮기다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마이신을 먹고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리던 봉제공들의 자리에 해열제를 먹고 쉴 새 없이 콜을 받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나타났다. 이제 엥겔스가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에서 묘사했던 그런 열악한 노동자는 더 이상 없다고 말했던 사람들 앞에서, 물류센터 신축 현장의 화재는 38명의 건설 노동자들을 단번에 집어삼켜 버리며 ‘그런’ 노동자들이 여기 있다고 보여 주었다.
코로나 시대는 이 포스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에게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재난 덕분에 자신을 새롭게 분류하는 이름을 갖게 이들은 보건 의료 노동자, 돌봄 노동자, 청소 노동자, 택배 노동자, 운수 화물 노동자, 건설 일용직 노동자, 물류센터와 콜센터 노동자 등이었다. 그런데 이 ‘가장 필수적인 노동자들’이 또한 ‘가장 열악한 노동자’였다. 이들이 노동을 멈춘다면 사회는 마비될 것이나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제할 권한도, 중지할 권리도 갖지 못한 ‘노동 외부의 노동자’들이었다. 콜센터 노동자의 집단 감염과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는 지금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자가 누구인지를 드러냈고 동시에 그 필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권리를 드러냈다. “왜 가장 필수적인 노동자에게 가장 적게 지불하는가?” 이 모순적인 임금과 권리의 차별을 자각한 사람들의 물음이 담벼락의 낙서로 떠올랐다.
담벼락의 낙서처럼 떠오른 사람들은 또 있다. 요양 시설, 격리 시설, 종교 시설 등 각종 시설 속으로 감금된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그들은 장애인이거나, 노인이거나, 청년이었고, 공통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코로나19는 초기 대규모 집단 감염으로 코호트 조치가 내려졌던 청도대남병원에서 평생을 그곳에서 살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을 불러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요양병원이라는 이름의 시설에 격리되어 있는지 보게 만들었다. 또한 바이러스는 감염의 전파자였던 ‘신천지 교인’을 통해 이 신흥 종교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보게 만들었다.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두 번째로 집단 폐쇄 조치가 내려졌던 대구 한마음아파트는 월세가 2~5만 원이었고, 감염자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바이러스의 손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낸 신천지 교인은 광신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멀쩡해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홍콩 시위 당시 폴리텍 대학 건물에 “나는 이 세계에 아무런 지분이 없다”고 써 놓았던 홍콩의 청년들처럼, 신천지로 간 청년들도 이 세계에 아무런 지분도 없고 공동체도 없는 청년들이 아니었을까. 각자도생에 지친 이들은 기댈 수 있는 곁을 찾아 신천지로 갔다. 만약 그 곁을 내어준 곳이 신천지 같은 종교 집단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코뮌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난한 청년들이 모여 신천지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남기’를 할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있었다면. ‘우리가 놓친 사람들’은 어디로 흘러들어 가고 있는 걸까? 사회로부터 낙오되고 추방된 사람들도 박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신흥 종교의 열렬한 신도가 되거나 극우 정치의 신도가 되거나 또는 그 이상의 괴물이 되어 자신을 추방한 사회로 귀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흉악범들도 혐오와 차별을 먹고 자라났다. 추방된 박쥐의 삶터를 우리의 공동 세계commons 안에 다시 만들어야 하듯이,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들도 다시 초대되어야 한다. 그 장벽을 허물고 연결하는 것이 정치의 몫일 것이다.
‘연대의 기술’ -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공동체
코로나 천사는 우리가 얼마나 연결된 존재인지도 드러냈다. 우리가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는 존재인지, 누가 그 협동과 연대의 기술을 가장 잘 발휘하는지도. 재난이 오면 엘리트의 리더십은 패닉에 빠지지만 민중은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재난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발휘하는 자치와 자급의 능력은 항상 놀라움을 불러오곤 한다. 고립된 곳에서는 연결의 기술이, 결핍된 곳에선 분배의 기술이, 위험한 곳에선 안전의 기술이 나타났다. 재난 속에서 빛을 발하는 민중의 역량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리베카 솔닛이 말했던 ‘재난 유토피아’는 도처에서 생겨났다. 처음 중국에서 우한시가 봉쇄되었을 때 사람들은 ‘우한 짜요’를 외치며 서로 용기를 주었다. 대구에서 바이러스가 확산되자 전국에서 보건 의료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대구 시민들은 1980년의 광주에서처럼 의료 봉사진을 위해 주먹밥을 싸고 대구 서문시장 상인들은 도시락을 만들어 병원으로 날랐다.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생활협동조합은 슈퍼마켓24와 협력해서 독거노인들에게 식료품을 무료로 배달했다. 봉쇄 조치로 집에 격리된 사람들이 베란다에 나와서 연주를 하고, 노래로 화답하고, 함께 합창을 하는 장면이 세계 각지에서 포착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지내는 것을 괴로워했고, 홀로 살 수도 없고, 홀로 살기도 싫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로나 사태는 신자유주의가 심어 놓은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를 일시에 패퇴시켰다. 팬데믹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사회적 백신을 만드는 것이 또한 정치의 몫이다.
인도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도시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 탈출이 시작되었을 때, 다친 아빠를 자전거에 태우고 1,200km를 달려 고향에 무사히 도착한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가 고향으로 가기 위해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자전거를 사고 난 후에 남은 것은 물 한 병뿐이었다. 그들이 1,200km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물과 음식과 도움을 제공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고, 이 우애와 협동의 미담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인도의 콜카타에선 팬데믹으로 농산물 유통이 막히자 공산당과 지역 풀뿌리 단체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임시 농산물 시장을 조직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유통과 판로가 막혀 폐기될 위기에 놓인 농산물을 가져와서 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주 노동자들과 도시에 남은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공동 식사를 위한 커뮤니티 주방을 열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농민들은 남는 과일과 채소를 거리에 쌓아 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무상으로 가져가게 하는 무인 보급소를 열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사회주의 농민단체와 지역 풀뿌리 단체들이 부자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수행하는 우파 정부와 경찰을 대신해서 빈곤 지역의 안전망과 필수재 공급망을 조직했다. 농민들은 과일과 채소를 병원과 가난한 지역에 기부하고, 위기 노동자들에게는 쌀을 배달하고, 도시의 카페를 노숙자들을 위한 식당으로 변경했다. 마을 주민들은 마스크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아픈 사람이 있는 집에 음식 꾸러미를 넣어 줬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공동의 생활 규칙을 만들고,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안전을 위해 경찰을 투입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의 담벼락에는 이런 글귀가 떠올랐다. “경찰은 더 적게, 간호사는 더 많이Less Cops, More Nurses.”
혁명이냐 멸종이냐
어떻게 해야 할까? 1세기 전 서구 자본주의가 지금과 유사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고 물었다. 사회주의로의 길과 야만적 자본주의로의 길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서구 사민주의 좌파는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이라는 애매한 길 찾기를 해 왔다. 그것은 야만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착한 자본주의로의 길이었으나, 그 전략은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자본주의는 점점 더 약탈적이고 야수적인 성격으로 변해 갔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 그 종합판인 팬데믹 또한 그 결과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더 곤궁해졌다. 남은 것은 이제 ‘혁명이냐, 멸종이냐’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 체제를 멈춰 세워야 하고 완전히 바꿔야 한다. 혁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혁명을 할 것인가?
지금 두 개의 혁명으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반反자본주의적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혁명이다. 두 힘이 반대 방향에서 각기 급진적 변화를 추동한다. 자본주의적 혁명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통해 낡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 급진화 전략이다. 뉴딜, 리쇼어링, 언택트, 플랫폼 자본주의나 ‘4차 산업 혁명’ 같은 이름으로 대표되는 ‘탈자본주의적 자본주의’를 모색한다. 생산과 소비의 성장을 통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본가들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자본의 탈출구는 금융 자본주의나 디지털 자본주의 같은 ‘가상의 경제 영역’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상의 경제는 실제로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경제를, 숫자의 마술을 통해 지표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오늘날 금융 경제와 부채 경제는 ‘마술 경제’다. 부채가 자산을 능가하며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좀비 기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회생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채권단에 의해 파산이 지연되고 있는 이런 좀비 기업은 부채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파산할 위험이 낮아지는 이상한 숫자의 경제를 대표한다. 이러한 부채 경제는 팔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재무 재표를 위한 허수의 생산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동력이다. 돈을 굴리기 위해 손해를 보는 생산을 계속 하도록 강제하는 금융 경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한 착취의 주범이다. 거대한 부채는 위기를 더 큰 미래의 위기로 이전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1900년대 대공황과 전혀 다른 조건과 상황임에도 ‘뉴딜’ 같은 브랜드를 가져와 돈을 풀고 인위적인 성장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과거의 뉴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탈출구가 있었고, 식민지 수탈로 서구 경제의 성장 영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국주의 체제를 통한 자원의 약탈도 시장의 팽창도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부가 팽창되는 영역은 무로부터 유를 창조해 내는 창조 경제 또는 문화 경제라 불리는 영역, 지식 경제나 증권과 부동산 시장뿐이다. 지구에 기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물질 경제는 실은 엄청난 에너지 소비 산업이고 쓰레기 배출 산업이다.
국가의 개입과 지원 없이는 이런 시장의 창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 국가 개입을 거부하던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시장 개입을 요청하는 ‘국가와 자본의 동맹 체제’로 변화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국가로부터 시장을 방어하던 근대 자유주의는 국가를 시장으로 흡수하는 신자유주의로 나아가더니, 이제 정치적인 것의 완전한 소멸과 완전한 기업 국가로의 구조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를 소멸시키는 것, 민주주의를 기계적 작동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적 혁명의 본질이다.
이런 자본주의 혁명의 반대편에서 반자본주의 혁명은 생태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을 요구해야 한다. 생태주의적 민주주의는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자연을 정치의 주체로 불러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특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인간이 아닌 생명 존재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주의적 민주주의는 사유의 혁명이자 실천적 혁명이며, 생명을 약탈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모든 생명들의 탈상품화와 주체적 저항을 조직하는 반자본주의적 혁명이다.
새로운 마그나카르타
혁명 혹은 혁명적 전환은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회 협약을 요구한다. 정치적 합의와 강제 없이 사회가 행위의 총합으로서 자동 진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전환을 위한 두 가지 종류의 대협약이 필요한데 하나는 ‘사회 대협약’이고, 하나는 ‘자연 대협약’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와 자연의 생명들과의 공존의 원리를 두 개의 동시 헌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피터 라인보우는 《마그나카르타 선언Magna Carta Menifesto》에서 영국에서 ‘법에 의한 통치’를 수립할 때, 왕과 시민들 사이의 사회 협약인 마그나카르타 이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숲의 협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❺ 당시 마그나카르타가 귀족-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사회 계약으로서 왕권을 제약한 ‘시민헌장’이라면, ‘삼림헌장’이라고 불리는 숲의 헌장은 공유지인 숲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확인하는 ‘민중헌장’이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숲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삶을 보장받을 권리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시민권과 민중권은 소유권적 원리에서는 각각 사유권과 공유권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시민권이 국가에 대한 시민의 권리로서 시민 ‘개인’의 재산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면, 민중권은 땅에 대한 거주민의 권리로서 숲에 거주하는 생명들의 ‘공통’의 생존권을 보장한다.
❺ 피터 라인보우, 정남영 옮김(2012),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갈무리.
시민권과 민중권의 이중 협약은 지금의 전환 기획에서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시민과 정부 간의 전환을 위한 합의와 협약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인간 간의 합의와 협약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시민권이 민중 생존권과 자연의 권리를 대리하거나 대표했다. 하지만 이 이중 협약은 협약의 주체에서 민중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자본의 시민권을 제약한다. 지금까지 ‘법인’이라는 기이한 형태로 기업이 ‘민간’ 대표로서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해 온 것은 이제 제한되어야 한다. 법인은 생명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 권리가 필요치 않은 죽은 자본이 살 권리가 있는 생명 존재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협약의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식물과 동물들, 땅과 강과 바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는 전환의 주체이자 협약의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없던 권리가 아니라 예전부터 원래 갖고 있던 권리다. 그 권리의 담지자인 공동체가 파괴되고 그들과 함께 살아온 민중이 해체되면서 자연도 함께 권리를 잃었던 것뿐이다. 자연의 권리가 박탈된 곳에 자본은 수많은 법조인과 지식인과 과학자를 수족으로 거느리고 자신의 말을 대변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권리 주체가 되었다. 자본으로부터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생명들에 대해서는 권리를 부여하는 새로운 사회 협약을 써야만 한다. 자본의 생명에 대한 통치를 생명들의 자본에 대한 통치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반자본주의적 생태 민주주의적 정치 혁명이다.
그러나 지금 전환의 기획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주체 관계의 전환이 아니라 주로 방법론적인 전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유는 역사정치학이 아니라 ‘미래학’으로부터 온다. 미래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문제는 미래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목표를 미래의 어떤 지점에 설정하고, 그로부터 역산하여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행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에도 그런 인식론이 노정되어 있다. 미래의 지구 온도 목표를 설정하고, 온도를 낮추기 위한 기간별 목표를 설정한 후, 다시 이를 위한 방법적 대안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지구 온도 ‘1.5℃’ 상승을 목표로 한 탄소 배출 제로화 전략도 대표적으로 그런 사례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못해 지구 온도가 1.5℃ 이상 상승했을 경우를 예측한 과학적 시뮬레이션과 실험 가설은 그 자체로는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적이고 객관적 근거는 위기의 실체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단이 기술적 대안으로 수렴되고, 정치적 지배 관계의 변화를 동시에 촉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문제를 만든 장본인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모순된 결과를 낳는다. 범죄자에게 자기의 재판을 맡기는 셈이다.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운동을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 해석 및 방향은 정치적인 해석 투쟁의 영역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도 마찬가지다. ‘다음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지금의 정치’다. 코로나19 때문에 해고되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노동자들의 해고 철회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정치적 사안이다. 기업 대표들로부터 코로나19 대책 의견을 듣기 위해 회의를 열어 의논하는 정부가 노동자들의 의견을 내는 집회를 봉쇄하고 불법화하는 것도 정치적인 문제다. 미래의 일자리를 약속하면서 지금의 정리 해고는 막지 않는 것도 정치적 문제다. 국가와 자본의 공동실행위원회가 된 거버넌스 구조에서 누가 주체가 되고 누가 대상이 되는지도 정치적인 문제다.
전환의 주체
‘어떻게’ 이전에 물어져야 할 것은 ‘누가’이고 ‘무엇을’이다. 이행의 전략은 자꾸 ‘무엇’을 건너뛰고 ‘어떻게’라는 방법론으로 바로 나아간다. 누가 할 것인가라는 주체의 물음도 상실된다. 우리에게 혁명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 혁명이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지구 구성원 전체의 생존이 걸린 생태주의적 혁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전환의 기획은 전혀 다른 언어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의 혁명이고, 이는 물의 혁명, 불의 혁명, 흙의 혁명, 공기의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4차 산업 혁명’에 맞서는 ‘4원소의 생명 혁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본도 기술을 통해 물과 불과 흙과 공기를 혁신하고 혁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상품화와 새로운 시장의 기획이며 생명에 대한 자본의 혁명이다. 여기에 맞서 우리는 자본에 대한 생명들의 혁명을 기획해야 하고, 이를 생명 주체와 함께 해야 한다.
얼마 전에 그린 뉴딜을 주장하는 환경운동 출신 정치인은 재생 에너지 전환 계획을 말하면서 앞으로 눈을 들어 보이는 산마다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에서 산에 발전기를 ‘꽂는다’라는 표현이 정말 끔찍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발전기가 꽂히게 될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하는 녹색 전환을 위한 새로운 협약Green New Deal에서는 산에 사는 주민들과 동식물들이 주체로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협약은 결국 ‘정부와 시민 간의 협약’ 또는 ‘민관 협치’라고 표현되지만 그 헤게모니의 실 주체는 정부와 기업인 ‘국가와 시장의 거래’다. 시민 참여라는 것도 실제로는 일부 소수 ‘전문가’들이 ‘시민’의 자격으로 참정권을 얻어 대표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산은 비어 있는 ‘공산空山’이 아니라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의 산, ‘공산共山’임에도, 그는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무도 살지 않는 땅으로 산을 보았다. 산과 바다를 ‘국토’로서 바라보며, 삶의 ‘장소’가 아니라 발전기를 꽂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그 관점은 삶터를 지도로 환원하는 ‘국가처럼 보기’의 관점이었다.❻ 포스트 코로나가 미래 담론이 될 때도 그런 위험이 발생한다. 미래학은 우리가 도착할 미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미개척지처럼 여기고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미래라는 빈 시간과 공간 속에 새로운 산업과 도시와 인구와 자원을 배치한다. ‘지금 여기’의 주거 문제, 해고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정의로운 전환의 ‘이후’만을 말하는 것은 몫에 대한 지불 연장이고 ‘지연 사기’다. 미래가 그렇게 도래하려면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몫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의 몫, 거주의 몫을. 그리고 이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몫, 숲과 강과 들판의 몫을 요구해야 한다. 지금 팬데믹은 앞장서서 그 몫을 요구하고 있는 생명들의 반란이다.
❻ 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포스트 코로나가 과거를 성찰하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미래로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되어선 안 되겠다. 이 파괴적 문명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물음은 점점 사라지고,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사회적 의제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런 식으로라면, ‘코로나 이후’가 어쩌면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충격과 반성의 목소리는 방역 체제에 의해 봉쇄되면서 정치적 힘들로 전환되지 못하고, 그 틈새에서 사회 엘리트들은 기득권 체제의 유지를 위한 질서의 회복과 정상화의 고삐를 다시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세력 관계의 어떤 변화도 없이 ‘뉴 노멀’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은 ‘새로운 과거’일 뿐이다. 지난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반자본주의 봉기에서 이 문장이 여러 도시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상이 문제였기 때문에.” 정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과연 그 단호한 의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산티아고와 홍콩에서 빌딩 담벼락에 쓰여 있던 이 구호가 팬데믹이 확산되는 미국의 도시 한복판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다. 나는 이 말이 자본주의적 정상성 속에서 고통받았던 모든 존재들의 말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코로나는 혁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혁명에 우리를 초대했다. 이제 자연과 함께하는 정치를 시작하자고. 탈성장으로 가는 반자본주의 정치를 나는 ‘가난한 민주주의’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