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미안함에 대하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책이 나온 뒤 보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뒷심이 부족한 글로 숟가락을 얹은 꼴이 된 점이 아쉽다. 시간이 좀 더 넉넉히 주어졌더라면 보충을 했을 텐데, 나이가 드니 힘이 금세 떨어진다.(웃음)
짧지만 함축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인 것 같다.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는 독자 리뷰도 있었는데,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 다른 공저자들의 글 중 인상 깊게 읽은 부분도 궁금하다.
내 글 외에 다른 글들이 다 좋았다. 박권일도, 채효정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다. 정말이다. 시의적절한, 또는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더 좋았을 기획의 책이다.
능력주의 문제는 자본주의에서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에서도 프랑스 상황을 잠시 언급했는데, 한국보다 조금 더 사민주의적인 사회에서 능력주의 내지 지적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떠한지 간단히 소개한다면?
가령 프랑스인들에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평등하고”에서부터 이미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계급 재생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과의 평등을 이뤄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해 “그래”라고 바로 답하지도 않을 듯하다. 1981년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랑제콜(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 기관)을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가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랑제콜 출신의 엘리트들이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지고 있다는 국민 여론이 작용했다. 이 점이 한국과 프랑스의 능력주의 엘리트 사이에 놓여 있는, 이상적인 측면에서는 작지만 현실 측면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아닐까 싶다.
책에 함께 실린 채효정의 글은 단체 ‘학벌없는사회’와 반학벌 운동을 정리, 평가했다. 어떻게 읽었나?
한때 ‘학벌없는사회’의 공동 대표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반성과 함께 회한을 다시금 느꼈다. 몇 가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 무렵 강연을 할 때면 ‘벌’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재벌, 족벌(조중동)언론과 학벌이었다. ‘벌’에 천착했다는 것은 채효정도 지적했듯 능력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개인적 경험을 하나 소개하자면, 2010년에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 꽤 오래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학생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두 키도 훤칠하게 컸고 얼굴도 미끈했다. 학벌이 ‘부-명예-권력’의 기회가 되는 것에서 점차 부가 ‘학벌-명예-권력’의 조건이 되는 쪽으로 이동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결국 주체적 역량이 점차 소진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노동력 가치 추락, 취업 경쟁 격화는 대학 내 동아리를 소멸시켰고 대학생이나 청년 운동 주체의 충원이 이뤄지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 또한 채효정의 바람대로 운동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학벌 사회에서 몫 없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그게 과연 ‘생각하는 교육’을 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가능할까?
글에서 현재 교육은 계급 간 문화 자본 격차와 그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시는지?
그러한 교육은 사회 안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이젠 정말이지 “하면 된다”라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교육자라면 적어도 지배 세력의 상징 폭력을 일생에 걸쳐 당하도록 놔둬선 안 되지 않겠는가.
각별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는가?
독자들이 무엇보다 ‘기회의 평등’이란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기회의 평등에 비판적이라고? 그럼 결과의 평등을 바라는 거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까지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임을 놓치면 안 된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미안함에 대하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책이 나온 뒤 보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뒷심이 부족한 글로 숟가락을 얹은 꼴이 된 점이 아쉽다. 시간이 좀 더 넉넉히 주어졌더라면 보충을 했을 텐데, 나이가 드니 힘이 금세 떨어진다.(웃음)
짧지만 함축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인 것 같다.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는 독자 리뷰도 있었는데,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 다른 공저자들의 글 중 인상 깊게 읽은 부분도 궁금하다.
내 글 외에 다른 글들이 다 좋았다. 박권일도, 채효정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다. 정말이다. 시의적절한, 또는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더 좋았을 기획의 책이다.
능력주의 문제는 자본주의에서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에서도 프랑스 상황을 잠시 언급했는데, 한국보다 조금 더 사민주의적인 사회에서 능력주의 내지 지적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떠한지 간단히 소개한다면?
가령 프랑스인들에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평등하고”에서부터 이미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계급 재생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기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과의 평등을 이뤄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해 “그래”라고 바로 답하지도 않을 듯하다. 1981년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랑제콜(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 기관)을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가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랑제콜 출신의 엘리트들이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지고 있다는 국민 여론이 작용했다. 이 점이 한국과 프랑스의 능력주의 엘리트 사이에 놓여 있는, 이상적인 측면에서는 작지만 현실 측면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아닐까 싶다.
책에 함께 실린 채효정의 글은 단체 ‘학벌없는사회’와 반학벌 운동을 정리, 평가했다. 어떻게 읽었나?
한때 ‘학벌없는사회’의 공동 대표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반성과 함께 회한을 다시금 느꼈다. 몇 가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 무렵 강연을 할 때면 ‘벌’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재벌, 족벌(조중동)언론과 학벌이었다. ‘벌’에 천착했다는 것은 채효정도 지적했듯 능력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개인적 경험을 하나 소개하자면, 2010년에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 꽤 오래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학생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두 키도 훤칠하게 컸고 얼굴도 미끈했다. 학벌이 ‘부-명예-권력’의 기회가 되는 것에서 점차 부가 ‘학벌-명예-권력’의 조건이 되는 쪽으로 이동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결국 주체적 역량이 점차 소진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노동력 가치 추락, 취업 경쟁 격화는 대학 내 동아리를 소멸시켰고 대학생이나 청년 운동 주체의 충원이 이뤄지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 또한 채효정의 바람대로 운동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학벌 사회에서 몫 없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그게 과연 ‘생각하는 교육’을 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가능할까?
글에서 현재 교육은 계급 간 문화 자본 격차와 그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시는지?
그러한 교육은 사회 안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이젠 정말이지 “하면 된다”라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교육자라면 적어도 지배 세력의 상징 폭력을 일생에 걸쳐 당하도록 놔둬선 안 되지 않겠는가.
각별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는가?
독자들이 무엇보다 ‘기회의 평등’이란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기회의 평등에 비판적이라고? 그럼 결과의 평등을 바라는 거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까지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임을 놓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