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와 불평등저자 인터뷰 ③ 정용주 “공정한 경쟁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고?”

정용주

초등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교육학의 가장자리》 저자. 《가장 민주적인, 가장 교육적인》 공저자.


‘한 세대의 능력이 다음 세대에는 불평등으로 대물림되는 현상’을 지적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와 불평등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평등이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믿음은 우리를 배반했다.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교육제도를 통해 과거에는 배제했던 이들에게까지 교육의 범위를 넓히고,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했지만 그럼에도 사회의 불평등 수준 또한 높아졌다. 이러한 민주적 불평등의 중심에 능력주의가 있다고 본다. 부지런한 자가 가을에 더 많은 수확을 거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되는 것처럼, 능력주의 체제하에서 불평등한 보상은 개인 능력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정당한 대가가 된다. 그래서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이 더 정의로운 것으로 인식되고, 한 세대에서 능력에 따라 이룬 성취는 다음 세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증여 및 상속되면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을 나는 확률적 세습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설명하려고 했다.


각별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는가?

우리는 가난하지만 능력있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상상을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이 이런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고안한 개념이 ‘누적적 인과관계’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능력은 경제, 지식, 교육, 생활, 도덕 등의 요소와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장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경제적 지위의 보장, 자녀의 교육 투자라는 순환 구조 속에 있다. 누적적 인과관계는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경제적 계층의 고착화와 단절화, 더 나아가 경제적 계층간 대립에 대해 중요한 설명력을 제공한다. 독자들이 뮈르달의 이 개념을 상기하면서 지능과 능력을 사회, 경제적 환경으로부터 분리하여 개인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다수의 인원을 평가할 대안적인 지표가 부족하므로 입시경쟁은 필요악이며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공정한 입시의 문제는 능력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입시가 없는 나라에서도 능력주의는 작동하고 있다. 능력주의와 불평등의 관점으로 입시경쟁의 문제를 보면, 대안적 지표의 문제보다 공정한 입시제도라는 사고 자체가 문제가 된다. 공정하게 시험을 봐서 각자가 얻은 점수 자체에 수많은 비능력적 요인들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곤층에 공정한 교육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능력주의를 완화시키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다른 공저자들의 글 중에서 각별히 깊은 인상을 남긴 내용이 있다면 어느 부분이었나?

채효정의 〈학벌은 끝났는가〉는 학벌과 능력주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초기의 학벌 경쟁의 추동력이 한 계단 더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이었다면, 지금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제2의 김용균이 되지 않으려는 하강의 공포가 경쟁의 동력이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채효정의 글을 읽으며 수도권 대학 집중 현상과 지방대 소멸 등의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됐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당신에게 능력주의란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능력주의는 공정함으로 포장된 지독한 편견이다. 

사람들은 자기조정적 시장처럼 능력이란 개인이 가진 순수한 재능이므로 그것을 재는 방법에 부정이 없으면 완전히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순수한 개인의 능력이란 없으며 능력주의가 공정했던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책이 나왔는데,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은 뭐라고 보시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능력주의에 대한 의심이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능력주의를 고발하는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이 다른 도서와 비교해 가지는 차별점은 10명의 저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해온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능력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진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능력주의가 정의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탈능력주의에 대한 비전이 추상적 수준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