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분리 교육은 없다
윤상원 씀
15,000원 | 2023
특수교육은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인가.
분리 교육을 정당화하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특수교육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다.
발행일 2023년 4월 20일
쪽수 166쪽
책 크기 145*210mm
+ 책 소개
흔히 특수교육은 장애 학생의 복지와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장애 차별에 저항하는 학문인 장애학은
특수교육이 장애 학생을 주류 사회와 학교 문화로부터
분리 및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분리와 배제가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특수 교사로서 필자의 삶과 교육 경험을 통해 밝히며,
진정한 통합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제안한다.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특수교육을 성찰하다
저자는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이다. 차별 없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특수 교사가 되었지만, 교육 현장은 차별과 그 차별을 양산하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저자는 ‘평등한 분리 교육’ 논리가 진보적 교육 의제가 되고 학교 내 분리 교육이 강화되는 현상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특수교육이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한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저자의 경험과 성찰을 기록하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라는 저자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대학 때 장애운동을 만나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된 저자는 특수학교 교사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만나며 장애학의 관점으로 특수학교와 특수교육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자기 성찰적 비판의 결실인 이 책은 장애 차별 없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작은 나침반이 되어 준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8장에 걸친 작은 질문들로 세분화하여 구성하였다.
1장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 명명은, 특정 손상 내지는 차이를 지닌 한 학생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학교 사회 구조를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학생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그 학생에게 부여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왜 특수학교 내 폭력 사건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2장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향한 특수학교 내 폭력 사건은 특수학교 구성원에 대한 감시와 특수학교 운영 구조의 개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에, 특수학교를 개선하기보다 폐쇄를 검토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3장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에서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학교 제도하에서 ‘특수’ 교사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 학생을 능력에 따라 차별하고 분리하는, 학교 사회의 규범을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 역할은 아닌지 성찰한다.
4장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는 장애라 명명된 개별 학생의 차이에 맞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종합적 지원 계획으로서 개별화교육계획이 자리 잡지 못하고 학생 개별화 수업 계획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학교 사회의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장애 체험 활동 위주로 진행되는 ‘장애이해교육’은 정말 장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5장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에서 그 실태를 들여다볼 수 있다.
6장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에서는 특수교육법 제정의 의의 및 한계, 분리 교육 중심의 현행 특수교육법의 문제점을 정리하고 실질적인 통합 교육 지원을 위해 특수교육법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들을 제안한다. 흔히 직업 교육은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할까.
7장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고등학생을 위한 진로와 직업 교육의 열악한 현실과, 그 열악한 현실의 배후에 있는 학교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본다.
8장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는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에게 약물을 권하는 학교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본문에 더해, 〈프롤로그〉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한 특수 교사로서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 책이 어떤 입장 내지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더불어 〈에필로그〉에서는 ‘특수는 특수하게’라는 논리가 어떻게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지, 그리소 특수 교사로서 저자는 어떻게 이런 악을 덜 행할 수 있을지 성찰한다.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로
저자는 특수학교 설립 취지나 특수교육의 목적과는 별개로 ‘특수’라는 꼬리표가 일상에서 어떻게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하는지를 특수 교사로서 경험과 학자로서 연구를 통해 깊이 있게 분석해 낸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 ‘평등한 분리 교육은 없다’는 데 다다른다. 분리를 정당화하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특수학교는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척박한 한국 사회의 환경에서 다소 비현실적이고 도발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당부처럼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의 입장에서 실천할 때 통합 교육은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차별 없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특수 교사가 되었지만, 교육 현장은 차별과 그 차별을 양산하는 모순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순과 부딪히며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모두를 위한 통합 교육과 보편적 복지 정책 선진국인 노르웨이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노르웨이에서 6년의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교로 복직했지만, 학교 현장에서의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 대한 차별과 분리는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특수학교(급)를 늘려 분리하되 일반 학생들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한 일이라는 ‘평등한 분리 교육’에 대한 논리가 진보적 교육 의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학교 내 분리 교육이 강화되는 현상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특수교육이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에 대해 한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저의 경험을 성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성찰의 결실인 이 책이 장애 차별 없는 학교 사회를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길 바라 봅니다.
— 〈책을 펴내며〉
나는 태어날 때부터 턱이 비대칭적으로 휘어서 자라는 선천성 안면 기형에 오른쪽 눈 실명으로 인해 좌우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시(斜視)로 태어났다. 흔히들 말하는 ‘장애 정도가 경한 장애인’으로 기존 학교 환경 속에서 학습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안면 기형과 사시는 학교에서 또래 혹은 교사와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걸림돌이 되었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거나, 교사에게 꾸중을 들을 때 나의 장애는 나의 잘못에 덧씌워졌다. 때론 연좌제와 같이 나의 삶을 따라다녔다. (중략) 하지만 장애라 명명된 한 사람으로서 주체성을 인식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은 전국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 가장 많이 재학하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속한 특수교육과에는 장애라 명명된 동기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무언지 모를 동질감에 이끌려 우리의 모임은 잦아졌다. 기숙사는 거의 매일 새벽까지 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마치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우리의 ‘할 수 없음’ 내지는 ‘장애’의 이유가 나 개인의 신체적 손상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을 할 수 없게 하는 사회 때문이었음에 말이다. 그렇게 시선을 나 개인에서 사회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장애라 명명된 한 사람으로서 나란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 〈프롤로그 :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20~22쪽
분리와 배제 및 학대를 야기하는 ‘장애’는 학생 개인의 손상 내지는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학교 사회가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장애 학생’ 대신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란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라는 표현은 장애와 학생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다. 그래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도 ‘나’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느끼고 소통하며 인정받고자 하는 ‘너’임을 학교 사회가 잊지 않는 데 기여할 것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인정과 참여의 욕구를 이해함으로써 그 학생들을 향한 차별을 방지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또한 학생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할 수 없음’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의 ‘장애’를 자기 자신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장애 자체가 나 자신이 아님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즉, 장애라 명명된 학생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 〈1장 :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 - 질문을 바꿔야 한다〉, 40~41쪽
직접적 폭력을 행사한 개인을 놓아두고 왜 애먼 특수학교 탓을 하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악마적 개인은 따로 있는데 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위해 좋은 취지로 만든 특수학교 자체가 무슨 잘못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끊이지 않는 특수학교 폭력 사건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개인 중심 능력관과 그 능력을 기준으로 일반학교와 특수학교로 나누고 분리하는 구조적 폭력성이 낳은 참사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특수학교가 차이에 따른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표면적으로는 다양성을 배려하기 위해 설립된 ‘특별한’ 학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수학교는 실상 개인 중심 능력관과 그 능력관에 따라 설계된 학습 구조에 맞지 않는 아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선별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그렇게 선별된 아이들을 일반학교에서 분리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특수학교는 존재한다. 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 〈2장 :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 - 구조적 폭력으로서 특수학교(급)〉, 49~50쪽
특수 교사에게 부여된 역할 또는 규범은 학교 사회의 ‘정상성(normality)’을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로, 학교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실현된다. 특수 교사는 ‘정상’ 학생들에 맞추어 설계된 일반학급의 ‘정상’ 수업 및 생활 규범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정도에 따라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특수’학급으로 분리하는 시간의 양을 결정한다. 나아가 학교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 및 보호하는 데 위협이 될 것 같은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에게 비록 불법이라 할지라도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강요하거나 권유하기도 한다. 일반학급의 ‘정상’ 수업이나 생활 지도를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분리 교육 결정은 어느덧 장애라 명명된 학생 본인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비록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은 ‘정상’ 내지는 ‘자립’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정상’이 되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고 일반학급 또는 학교 사회 바깥에 놓인 투명한 존재처럼 ‘특수’학급에 머물러야 함에도 말이다.
— 〈3장 :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 - 문지기로서 ‘특수’ 교사〉, 64쪽
나는 전문성이 부족한 ‘특수’ 교사였다. 도저히 혼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없었다. 학교의 체육 수업은 휠체어로 이동하는 지체장애라 명명된 학생이 참여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판서 중심의 수업은 시야의 폭과 사물을 바라보는 거리에 있어 차이가 나는 시각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겐 불리함 그 자체였다. 문자나 음성 언어 중심으로 의사소통하는 문화는 문자/음성 언어가 아닌 그림이나 상징 등으로 의사소통하는 언어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소통에서의 단절의 연속이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름을 이유로 각종 괴롭힘을 당하며 성장한 정신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일반학교는 다양한 오해와 갈등을 촉발했다. 그렇게 학교 환경은 A부터 Z까지 장애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내 한 몸 또는 한 개인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아이들의 욕구를 맞출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특수 교사 개인으로서 느꼈던 나의 부족함은 협력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우선 지체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체육 수업을 비롯해 외부 활동에서 이동 지원을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시각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판서 내용 필기를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정신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오해할 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에 관해 설명해 주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특수교육 보조 인력’ 신청에 관한 공문이 오면 적극적으로 신청했다. 나아가 보조 인력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라면 적극적으로 연락하고 보조 인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 〈4장 :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 - 고립을 넘어서기 위한 조건들〉, 74~75쪽
타인의 어려움을 경험해 보며 그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기르는 일이 어찌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장애 체험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선한 마음을 확인하고 나누는 감상회 수준에 머무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기존 장애 체험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경험을 감상하며 도덕적 만족감을 얻는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길 우려가 높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했던 타인의 고통이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 내지는 특권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온종일 학교 이곳저곳을 다니는 지체장애 체험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임을 절감한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지체장애라 명명된 친구 개인에 대한 불쌍함과 측은함은 배가 된다. 다른 한편,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몸을 갖고 태어난 자신에 대해 감사한 마음에 빠지기도 한다. 지체장애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의 비극이며, 오히려 타인의 비극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안도감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적 관음증의 향락 속에서, 지체장애라 명명된 친구의 불편함 내지는 고통이 자신과 같은 두 다리로 이동하는 사람들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 및 발전해 온 학교 건물 구조 때문일 수 있음에 대한 고민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5장 :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 - 동정은 필요 없다〉, 95~96쪽
노르웨이가 특수교육 관련 법을 폐기하고 〈일반교육법〉에 특수교육 관련 내용을 편입시킴으로써 하나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구축한 점은 한국의 특수교육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별법으로서 특수교육법은 학생들을 장애 유형에 따라 분류하고 분리하여 특별한 교육 방법을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장애와 무관하게 동등하고 통합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 교육받아야 할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반법인 「초·중등교육법」에서 분리된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국한되는 특수교육법은 특별하고 특수한 법이니 일반 학생을 위한 일반학교 교육에서 우선 고려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태도는 특별법 우선의 원칙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나아가 통합 교육은 특수 교사 혹은 특수학급 단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전체 교육 환경과 지원에 있어 변경이 요구되는 일이다. 즉, 개인의 결함을 진단하고 교정하기 위해 분리하는 의료적 모델을 넘어 개인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학교 환경 및 지원을 평가하고 변화시키는 인권적 모델에 기반한 교육을 실현하려면 통합 교육을 위한 특수교육적 지원에 대한 내용이 일반교육법에 편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6장 :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 - 분리 교육을 조장하는 특수교육법의 문제와 대안〉, 109~110쪽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은 진로와 직업 교육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진로와 직업 교육을 했음에도 취업 관련 자격증 하나 취득하지 못한 채 학생들을 졸업시키고 있었다는 말인가?
실제 기능보다는 취업을 위한 단순 스펙으로서의 자격증이 갖는 폐해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더라도, 특수 교사로서 나는 장애라 명명된 고등학생의 졸업 후 성인기 삶을 준비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노력을 했던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랬다. 고등학교 직업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일회성 체험 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진로와 직업 교육은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이라던 선배 특수 교사의 자부심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고등학교 직업 교육은 단순 체험 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장애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에 갇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 수 있고 없음은 사회 문화적 도구 내지는 환경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문제를 학생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며 특수 교사로서 나는 부지런히 체험 활동을 쫓아다녔음을 위안 삼으며 말이다.
— 〈7장 :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 - 스티커 붙이기식 교육은 필요 없다〉, 127~128쪽
병이기 때문에 고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고치고 싶어서 병인 것이다. 고치고 싶다는 욕망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온다. 즉, 고통이 먼저 있고 그 고통을 제거하거나 치료하고 싶다는 요구가 나오고 나서야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과 그에 대한 처방이 내려지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고통스러우며, 누가 고치고 싶어 하는가다. 신체적 질병은 대체로 본인이 고통스럽기에 스스로 고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신병은 주로 주위 사람들이 고통스러우므로 본인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고치고 싶어 한다. (중략) 약물은 민재를 잠재움으로써 망상 증세를 일시적으로 소거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민재가 망상 증세를 가지고 어떻게 타인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삶의 지혜 내지는 앎을 얻을 기회는 박탈하였다. 또한, 조현병이라는 병명은 민재와 만나는 주요한 한 타인으로서 내가 민재의 망상적 행동의 원인을 개인 내의 생물학적 기질 탓으로 돌리기 딱 좋았다. 그렇게 민재의 행위는 더 이상 교육적 영역이 아닌 의료적 영역의 문제가 되었다. 정신병 진단은 학생의 삶의 경험 속에서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애써야 하는 교사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면죄부가 되어 주었다.
— 〈8장 :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 - 약물 권하는 학교 사회 비판 〉, 146~148쪽
이 사례는 ‘특수’라는 말 한마디 내지는 명사가 일상에서 어떻게 한 사람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하는지 잘 보여 준다. ‘특수는 특수하게’라는 상식에 동의하는 순간, 아이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최전선에 동맹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라고 아이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나도 특수 교사인 이상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나의 존재 자체가 이 분리와 배제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적어도 ‘특수’라는 이름으로 분리하고 배제하는 악을 덜 행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모두가 통합 교육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통합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분리하고 배제해야 할 수천수만 가지 이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다.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의 입장에서 실천할 때 통합 교육은 한 걸음 더 다가올 것이다.
— 〈에필로그 :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로〉, 161~162쪽
+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1장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
- 질문을 바꿔야 한다
2장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
- 구조적 폭력으로서 특수학교(급)
3장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
- 문지기로서 ‘특수’ 교사
4장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
- 고립을 넘어서기 위한 조건들
5장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
- 동정은 필요 없다
6장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
- 분리 교육을 조장하는 특수교육법의 문제와 대안
7장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
- 스티커 붙이기식 교육은 필요 없다
8장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
- 약물 권하는 학교 사회 비판
에필로그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적극적 통합주의자’로
+ 저자 소개
윤상원 yadayada@hanmail.net
대한민국의,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특별요구교육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든 인간은 약점으로서 손상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 혹은 개인 발달의 역사는 이 손상에 대한 부단한 사회적 보완의 결과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손상을 발달의 계기가 아닌 장애로 만드는 문화 역사적 현실에 맞서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저항하고자 한다.
평등한 분리 교육은 없다
윤상원 씀
15,000원 | 2023
특수교육은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인가.
분리 교육을 정당화하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특수교육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다.
발행일 2023년 4월 20일
쪽수 166쪽
책 크기 145*210mm
+ 책 소개
흔히 특수교육은 장애 학생의 복지와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장애 차별에 저항하는 학문인 장애학은
특수교육이 장애 학생을 주류 사회와 학교 문화로부터
분리 및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분리와 배제가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특수 교사로서 필자의 삶과 교육 경험을 통해 밝히며,
진정한 통합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제안한다.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특수교육을 성찰하다
저자는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이다. 차별 없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특수 교사가 되었지만, 교육 현장은 차별과 그 차별을 양산하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저자는 ‘평등한 분리 교육’ 논리가 진보적 교육 의제가 되고 학교 내 분리 교육이 강화되는 현상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특수교육이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한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저자의 경험과 성찰을 기록하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라는 저자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대학 때 장애운동을 만나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된 저자는 특수학교 교사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만나며 장애학의 관점으로 특수학교와 특수교육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자기 성찰적 비판의 결실인 이 책은 장애 차별 없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작은 나침반이 되어 준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8장에 걸친 작은 질문들로 세분화하여 구성하였다.
1장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 명명은, 특정 손상 내지는 차이를 지닌 한 학생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학교 사회 구조를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학생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그 학생에게 부여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왜 특수학교 내 폭력 사건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2장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향한 특수학교 내 폭력 사건은 특수학교 구성원에 대한 감시와 특수학교 운영 구조의 개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에, 특수학교를 개선하기보다 폐쇄를 검토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3장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에서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학교 제도하에서 ‘특수’ 교사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 학생을 능력에 따라 차별하고 분리하는, 학교 사회의 규범을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 역할은 아닌지 성찰한다.
4장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는 장애라 명명된 개별 학생의 차이에 맞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종합적 지원 계획으로서 개별화교육계획이 자리 잡지 못하고 학생 개별화 수업 계획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학교 사회의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장애 체험 활동 위주로 진행되는 ‘장애이해교육’은 정말 장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5장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에서 그 실태를 들여다볼 수 있다.
6장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에서는 특수교육법 제정의 의의 및 한계, 분리 교육 중심의 현행 특수교육법의 문제점을 정리하고 실질적인 통합 교육 지원을 위해 특수교육법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들을 제안한다. 흔히 직업 교육은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할까.
7장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고등학생을 위한 진로와 직업 교육의 열악한 현실과, 그 열악한 현실의 배후에 있는 학교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본다.
8장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는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에게 약물을 권하는 학교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본문에 더해, 〈프롤로그〉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한 특수 교사로서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 책이 어떤 입장 내지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더불어 〈에필로그〉에서는 ‘특수는 특수하게’라는 논리가 어떻게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지, 그리소 특수 교사로서 저자는 어떻게 이런 악을 덜 행할 수 있을지 성찰한다.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로
저자는 특수학교 설립 취지나 특수교육의 목적과는 별개로 ‘특수’라는 꼬리표가 일상에서 어떻게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하는지를 특수 교사로서 경험과 학자로서 연구를 통해 깊이 있게 분석해 낸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 ‘평등한 분리 교육은 없다’는 데 다다른다. 분리를 정당화하고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특수학교는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척박한 한국 사회의 환경에서 다소 비현실적이고 도발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당부처럼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의 입장에서 실천할 때 통합 교육은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차별 없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특수 교사가 되었지만, 교육 현장은 차별과 그 차별을 양산하는 모순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순과 부딪히며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모두를 위한 통합 교육과 보편적 복지 정책 선진국인 노르웨이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노르웨이에서 6년의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교로 복직했지만, 학교 현장에서의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 대한 차별과 분리는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특수학교(급)를 늘려 분리하되 일반 학생들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한 일이라는 ‘평등한 분리 교육’에 대한 논리가 진보적 교육 의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학교 내 분리 교육이 강화되는 현상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특수교육이 정말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에 대해 한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로서 저의 경험을 성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성찰의 결실인 이 책이 장애 차별 없는 학교 사회를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길 바라 봅니다.
— 〈책을 펴내며〉
나는 태어날 때부터 턱이 비대칭적으로 휘어서 자라는 선천성 안면 기형에 오른쪽 눈 실명으로 인해 좌우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시(斜視)로 태어났다. 흔히들 말하는 ‘장애 정도가 경한 장애인’으로 기존 학교 환경 속에서 학습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안면 기형과 사시는 학교에서 또래 혹은 교사와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걸림돌이 되었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거나, 교사에게 꾸중을 들을 때 나의 장애는 나의 잘못에 덧씌워졌다. 때론 연좌제와 같이 나의 삶을 따라다녔다. (중략) 하지만 장애라 명명된 한 사람으로서 주체성을 인식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은 전국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 가장 많이 재학하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속한 특수교육과에는 장애라 명명된 동기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무언지 모를 동질감에 이끌려 우리의 모임은 잦아졌다. 기숙사는 거의 매일 새벽까지 장애라 명명된 이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마치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우리의 ‘할 수 없음’ 내지는 ‘장애’의 이유가 나 개인의 신체적 손상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을 할 수 없게 하는 사회 때문이었음에 말이다. 그렇게 시선을 나 개인에서 사회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장애라 명명된 한 사람으로서 나란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 〈프롤로그 :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20~22쪽
분리와 배제 및 학대를 야기하는 ‘장애’는 학생 개인의 손상 내지는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학교 사회가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장애 학생’ 대신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란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장애라 명명된 학생이라는 표현은 장애와 학생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다. 그래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도 ‘나’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느끼고 소통하며 인정받고자 하는 ‘너’임을 학교 사회가 잊지 않는 데 기여할 것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인정과 참여의 욕구를 이해함으로써 그 학생들을 향한 차별을 방지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또한 학생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할 수 없음’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의 ‘장애’를 자기 자신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장애 자체가 나 자신이 아님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즉, 장애라 명명된 학생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 〈1장 :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 - 질문을 바꿔야 한다〉, 40~41쪽
직접적 폭력을 행사한 개인을 놓아두고 왜 애먼 특수학교 탓을 하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악마적 개인은 따로 있는데 장애라 명명된 아이들을 위해 좋은 취지로 만든 특수학교 자체가 무슨 잘못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끊이지 않는 특수학교 폭력 사건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개인 중심 능력관과 그 능력을 기준으로 일반학교와 특수학교로 나누고 분리하는 구조적 폭력성이 낳은 참사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특수학교가 차이에 따른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표면적으로는 다양성을 배려하기 위해 설립된 ‘특별한’ 학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수학교는 실상 개인 중심 능력관과 그 능력관에 따라 설계된 학습 구조에 맞지 않는 아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선별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그렇게 선별된 아이들을 일반학교에서 분리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특수학교는 존재한다. 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 〈2장 :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 - 구조적 폭력으로서 특수학교(급)〉, 49~50쪽
특수 교사에게 부여된 역할 또는 규범은 학교 사회의 ‘정상성(normality)’을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로, 학교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실현된다. 특수 교사는 ‘정상’ 학생들에 맞추어 설계된 일반학급의 ‘정상’ 수업 및 생활 규범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정도에 따라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특수’학급으로 분리하는 시간의 양을 결정한다. 나아가 학교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 및 보호하는 데 위협이 될 것 같은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에게 비록 불법이라 할지라도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강요하거나 권유하기도 한다. 일반학급의 ‘정상’ 수업이나 생활 지도를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분리 교육 결정은 어느덧 장애라 명명된 학생 본인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비록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은 ‘정상’ 내지는 ‘자립’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정상’이 되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고 일반학급 또는 학교 사회 바깥에 놓인 투명한 존재처럼 ‘특수’학급에 머물러야 함에도 말이다.
— 〈3장 :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 - 문지기로서 ‘특수’ 교사〉, 64쪽
나는 전문성이 부족한 ‘특수’ 교사였다. 도저히 혼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없었다. 학교의 체육 수업은 휠체어로 이동하는 지체장애라 명명된 학생이 참여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판서 중심의 수업은 시야의 폭과 사물을 바라보는 거리에 있어 차이가 나는 시각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겐 불리함 그 자체였다. 문자나 음성 언어 중심으로 의사소통하는 문화는 문자/음성 언어가 아닌 그림이나 상징 등으로 의사소통하는 언어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소통에서의 단절의 연속이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름을 이유로 각종 괴롭힘을 당하며 성장한 정신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일반학교는 다양한 오해와 갈등을 촉발했다. 그렇게 학교 환경은 A부터 Z까지 장애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내 한 몸 또는 한 개인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아이들의 욕구를 맞출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특수 교사 개인으로서 느꼈던 나의 부족함은 협력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우선 지체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체육 수업을 비롯해 외부 활동에서 이동 지원을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시각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판서 내용 필기를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정신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는 오해할 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에 관해 설명해 주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할 선생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특수교육 보조 인력’ 신청에 관한 공문이 오면 적극적으로 신청했다. 나아가 보조 인력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라면 적극적으로 연락하고 보조 인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 〈4장 :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 - 고립을 넘어서기 위한 조건들〉, 74~75쪽
타인의 어려움을 경험해 보며 그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기르는 일이 어찌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장애 체험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나의 선한 마음을 확인하고 나누는 감상회 수준에 머무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기존 장애 체험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경험을 감상하며 도덕적 만족감을 얻는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길 우려가 높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했던 타인의 고통이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 내지는 특권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온종일 학교 이곳저곳을 다니는 지체장애 체험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임을 절감한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지체장애라 명명된 친구 개인에 대한 불쌍함과 측은함은 배가 된다. 다른 한편,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몸을 갖고 태어난 자신에 대해 감사한 마음에 빠지기도 한다. 지체장애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의 비극이며, 오히려 타인의 비극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안도감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적 관음증의 향락 속에서, 지체장애라 명명된 친구의 불편함 내지는 고통이 자신과 같은 두 다리로 이동하는 사람들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 및 발전해 온 학교 건물 구조 때문일 수 있음에 대한 고민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5장 :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 - 동정은 필요 없다〉, 95~96쪽
노르웨이가 특수교육 관련 법을 폐기하고 〈일반교육법〉에 특수교육 관련 내용을 편입시킴으로써 하나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구축한 점은 한국의 특수교육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별법으로서 특수교육법은 학생들을 장애 유형에 따라 분류하고 분리하여 특별한 교육 방법을 적용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장애와 무관하게 동등하고 통합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 교육받아야 할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반법인 「초·중등교육법」에서 분리된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게 국한되는 특수교육법은 특별하고 특수한 법이니 일반 학생을 위한 일반학교 교육에서 우선 고려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태도는 특별법 우선의 원칙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나아가 통합 교육은 특수 교사 혹은 특수학급 단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전체 교육 환경과 지원에 있어 변경이 요구되는 일이다. 즉, 개인의 결함을 진단하고 교정하기 위해 분리하는 의료적 모델을 넘어 개인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학교 환경 및 지원을 평가하고 변화시키는 인권적 모델에 기반한 교육을 실현하려면 통합 교육을 위한 특수교육적 지원에 대한 내용이 일반교육법에 편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6장 :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 - 분리 교육을 조장하는 특수교육법의 문제와 대안〉, 109~110쪽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은 진로와 직업 교육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진로와 직업 교육을 했음에도 취업 관련 자격증 하나 취득하지 못한 채 학생들을 졸업시키고 있었다는 말인가?
실제 기능보다는 취업을 위한 단순 스펙으로서의 자격증이 갖는 폐해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더라도, 특수 교사로서 나는 장애라 명명된 고등학생의 졸업 후 성인기 삶을 준비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되는 노력을 했던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랬다. 고등학교 직업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일회성 체험 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진로와 직업 교육은 고등학교 특수교육의 꽃이라던 선배 특수 교사의 자부심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고등학교 직업 교육은 단순 체험 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장애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에 갇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 수 있고 없음은 사회 문화적 도구 내지는 환경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문제를 학생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며 특수 교사로서 나는 부지런히 체험 활동을 쫓아다녔음을 위안 삼으며 말이다.
— 〈7장 :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 - 스티커 붙이기식 교육은 필요 없다〉, 127~128쪽
병이기 때문에 고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고치고 싶어서 병인 것이다. 고치고 싶다는 욕망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온다. 즉, 고통이 먼저 있고 그 고통을 제거하거나 치료하고 싶다는 요구가 나오고 나서야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과 그에 대한 처방이 내려지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고통스러우며, 누가 고치고 싶어 하는가다. 신체적 질병은 대체로 본인이 고통스럽기에 스스로 고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신병은 주로 주위 사람들이 고통스러우므로 본인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고치고 싶어 한다. (중략) 약물은 민재를 잠재움으로써 망상 증세를 일시적으로 소거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민재가 망상 증세를 가지고 어떻게 타인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삶의 지혜 내지는 앎을 얻을 기회는 박탈하였다. 또한, 조현병이라는 병명은 민재와 만나는 주요한 한 타인으로서 내가 민재의 망상적 행동의 원인을 개인 내의 생물학적 기질 탓으로 돌리기 딱 좋았다. 그렇게 민재의 행위는 더 이상 교육적 영역이 아닌 의료적 영역의 문제가 되었다. 정신병 진단은 학생의 삶의 경험 속에서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애써야 하는 교사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면죄부가 되어 주었다.
— 〈8장 :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 - 약물 권하는 학교 사회 비판 〉, 146~148쪽
이 사례는 ‘특수’라는 말 한마디 내지는 명사가 일상에서 어떻게 한 사람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하는지 잘 보여 준다. ‘특수는 특수하게’라는 상식에 동의하는 순간, 아이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최전선에 동맹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라고 아이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나도 특수 교사인 이상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나의 존재 자체가 이 분리와 배제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적어도 ‘특수’라는 이름으로 분리하고 배제하는 악을 덜 행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모두가 통합 교육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통합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분리하고 배제해야 할 수천수만 가지 이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다.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의 입장에서 실천할 때 통합 교육은 한 걸음 더 다가올 것이다.
— 〈에필로그 :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 ‘적극적 통합주의자’로〉, 161~162쪽
+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1장
누구를 위해 ‘장애’ 명명은 존재하는가
- 질문을 바꿔야 한다
2장
누구를 위해 ‘특수학교’는 존재하는가
- 구조적 폭력으로서 특수학교(급)
3장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
- 문지기로서 ‘특수’ 교사
4장
누구를 위해 ‘개별화교육계획’은 존재하는가
- 고립을 넘어서기 위한 조건들
5장
누구를 위해 ‘장애이해교육’은 존재하는가
- 동정은 필요 없다
6장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법’은 존재하는가
- 분리 교육을 조장하는 특수교육법의 문제와 대안
7장
누구를 위해 ‘직업 교육’은 존재하는가
- 스티커 붙이기식 교육은 필요 없다
8장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
- 약물 권하는 학교 사회 비판
에필로그
‘선량한 분리주의자’를 넘어‘적극적 통합주의자’로
+ 저자 소개
윤상원 yadayada@hanmail.net
대한민국의,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특별요구교육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든 인간은 약점으로서 손상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 혹은 개인 발달의 역사는 이 손상에 대한 부단한 사회적 보완의 결과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손상을 발달의 계기가 아닌 장애로 만드는 문화 역사적 현실에 맞서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저항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