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벗]다름으로 환대하며 존재로 가르치는

별별 교사들 2

채홍·이강희·박병찬 외 씀

18,000원 | 2024

#별별교사들 #소수자 #다양성 #돌봄



각자의 자리에서 한 점을 찍어 학교를 물들이는 사람들,

‘별별 학생들’과 ‘별별 교사들’,

우리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 줄 수 있다면





학교는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상상하며 배우는 기관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모든 삶의 모습들이 동등하게 대우받지는 않는다. 어떤 가치는 폄하되거나, 동정받거나, 아예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떤 학생들은 수치심을 학습하고 고립된다고 느낀다.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지만, 문제는 이 고통이 불평등하고 부당하다는 것이다. 취약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보다도, 고통받도록 방치되었기에 더욱 취약해진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 어떤 이의 고통을 덜어 주는 ‘다른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장애가 없고 이성애자이며 중산층의 정상 가족 출신의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 혹은 만난다고 착각하며 – 생활하는 교직 사회에 침투한다. 이들에게는 혼자 있는 학생들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책은 스스로도 소수자성과 취약성을 가지고 학생들을 만나며 상호 연대와 돌봄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교사들의 이야기다. 가난, 질병, 장애, 성소수자, 비정규직(기간제) 등 다양한 경험과 취약성이 교사라는 위치와 교차하며, 학교의 한계와 더불어 가능성을 드러낸다. 저자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교사’에 대해 쉽게 떠올리는 모습과는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사와 학교에 정말로 바라는, ‘다양한 학생들을 환대하며 자신의 존재로 가르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별별 교사들’이 왜 학교에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별별 교사들 -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 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의 후속편이다. ‘별별 교사들’ 시리즈는 장애인, 성소수자, 신경다양성, 자퇴 등 남들과 다른, 약점으로 비치거나 ‘가르칠 자격 없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점을 하나 이상 가진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포용적인 학교의 상을 그려 보는 기획이다. 《다름으로 환대하며 존재로 가르치는 - 별별 교사들 2》 역시 또 다른 아홉 명의 교사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친구는 억지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그저 내 친구 중에 장애가 있는 친구도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당연해졌으면 좋겠다”(조윤주)라는 말은 학생들의 사교 활동과 또래 문화가 자율성을 가져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적극적이고 섬세한 개입 또한 교육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또래 문화는 전체 사회 문화와 별개가 아니며, 차별·혐오와 같은 사회적 배경과 큰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별별 교사’들은 “누군가의 슬픔을 덜어 주기 위해 (……) 기꺼이 누군가의 웃음을 멈추”고(채홍),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못 본 척 지나가고 싶지가 않”아(현유림) 교과서 진도를 나가는 대신 학생들의 마음을 살피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중등 교사인 채홍과 보란은 가난 속에서 가족을 돌보고 또 떠나보낸 경험이 교사로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학생들을 바라보는 어떤 다른 관점을 열어 주었는지 이야기한다. 채홍은 요주의 인물 취급을 받는 학생들이 “어쩐지 그리 걱정이 되진 않”고, 때론 그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본다. 보란은 가난한 학생들이 주로 재학하는 특성화고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표면적인 이유로 징계하고 분리하기 바쁜 학교 현실을 고발한다. 동시에 규율과 통제보다 상호의존적인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는 학교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강희는 학교 문화 전반에 뿌리내린 성별 이분법을 두고 고민하는 퀴어 초등 교사이다. 수업 중 학생의 혐오 발언, 그리고 고민 상담에서 이어진 선배 교사의 성추행 가해 경험을 계기로 길을 잃은 듯한 시간을 지나온 그는 어느 날 수업을 반추하며 “교실 안의 활동가”로 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출구를 찾는다.

배성규, 조윤주는 각각 지체 또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어린 시절을 통과했고, 박병찬은 교육대학교 재학 중 진행 중인 지체장애를 발견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듯이 자퇴하거나(조윤주), 들리지 않는 강의를 들으며 필기 노트를 빌리러 다니거나(배성규), 교사가 될 수 없을 거라 체념하며 은둔하는(박병찬) 등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결국 교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학생, 나아가 동료 장애 교사들이 무사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징검돌이 되어 길을 열어 간다.

현유림과 구윤숙은 기간제 계약직 초등 교사로서 일하며 겪은 상반된 경험을 풀어낸다. 현유림은 시험공부가 자신이 지향하는 교육의 상과 상반된다고 생각해 임용 시험을 거부하고 ‘보따리 교사’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 여성 기간제 교사에게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고, 험난한 자리에 ‘땜빵’으로 소모하는 교직 문화에 한계를 느끼고 정교사로 돌아와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구윤숙은 정교사로 근무하다 인문학 연구 공동체에 매료되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가 생계를 위해 돌아왔다. ‘비정규직’, ‘이방인’을 자처하는 그는 학교의 일부가 아닌 수업 담당자이자 교육과정보다 인문학에 마음을 둔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학교의 풍경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한다. 학생을 국민으로 길러 내는 시설로서 학교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갖는 한편, 참된 공부의 재미와 효용을 알리기 위해 수업에 마음을 쏟는다.

손지은은 비혼을 선언한 30대 여교사이자 노동조합 ‘강성’ 활동가로서 교직 사회와 운동 사회에서 분투하며 성장한 경험을 정리한다. 소수자라고 정체화하지 않는데 이 기획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잠시 주저했다는 그는, ‘내 삶은 일반적이고 평범하다’는 바로 그 생각부터 특권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고유함이 제거된 보편성 뒤에 숨어 내 삶은 괜찮다고 안주하는 대신 종종 취약하고 자주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결코 완벽하지 않은 내 삶의 단면을 담담하게 끌어안고 갈 것이다”라는 그의 다짐은 이 책 전반을 꿰뚫는 공통 의식을 보여 준다.

 

당연해진 일상에 딴지를 걸고 엉뚱한 시도를 감행하며, 소소하지만 또렷한 한 걸음을 딛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어느새 여태껏 상상해 보지 못했던 교실, 보다 다채롭고 포용적인 사회의 풍경이 우리 앞에 당도할지 모른다.




책 속에서


학교라는 사회에서 우리와 같이 ‘별난’ 교사들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줌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며 한 점을 찍고, 그 점들이 모여 독특한 빛깔로 학교를 물들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 빛깔을 함께 그려 나가는 데 이 책이 참조가 되기를 바란다.

- 채홍, 〈책을 펴내며〉, 13쪽

 

이것은 단지 성적 지향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 나는 대학에 가서야 연어 초밥, 스테이크, 아메리카노, 파스타를 처음 먹어 봤고,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자가용을 타 본 적이 별로 없어 자동차의 창문이나 문을 여는 법도 잘 몰랐다. 뒤늦게 사람들이 ‘평범하게’ 하는 경험들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가족의 직업과 가족의 죽음, 오래된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같이 더 내밀한 부분은 더더욱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 ‘가족들 보살핌을 못 받고 가난하게 자라서 그래’ 같은 말을 하거나, 우울증을 가진 학생에 대해 ‘관심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다’ 같은 말을 하는 동료들은 많았다. 그런 아이들에 대해 비웃는 듯이 말하면서도, 자신의 옆에 있는 동료는 사회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채홍, 〈서로에게 기대어, 무너지지 않기〉, 34~35쪽

 

학교 안에는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살아가는 학생들이 있고,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오픈리 퀴어로 살아가는 학생들이 있으며, 자신의 장애를 밝히고 학교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학생들이 있다. 이런 학생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어른들 ─ 나의 동료들과 같은 사람들이 ‘쉽게 대학 가려고 남의 나라에 왔다’고 하든지, ‘누가 남자 역할일지 궁금하다’고 하든지, ‘튀고 싶어서 자해한다’고 하든지 이 아이들은 상관없다. 그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뿐이다.

교육 현장에는 이러한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원하는 아이들이 학교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건 단순히 우리 교육의 보편적 지향점인 ‘다양성 포용’이나 ‘학생의 개성’ 등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없는, 실존에 관한 문제이다.

- 채홍, 〈서로에게 기대어, 무너지지 않기〉, 37쪽

 

어느 여학생이 자기는 ‘모든 남학생’이 자신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싫다고 하자 이에 질세라 다른 남학생이 자기는 ‘모든 여자’를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성별을 구분해야 할까요? 나의 물음에,

“남자랑 남자랑 뽀뽀하면 이상하잖아요!”

라고 당당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온몸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고 화살을 맞은 듯했다. 그 말은 정확히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복숭아털이 온몸을 뒤덮은 듯한 알 수 없는 감각에 시달렸다. 내가 바로 그, 여자와 뽀뽀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 이강희, 〈젠더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45쪽

 

내가 활동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내가 상상하는 좋은 세상의 구체적 모습은 ‘누구나 삶을 충분히 누리는’ 곳이다. 살면서 괜히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날 그늘에 누워 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마음을 뻐근하게 만들 정도로 좋은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순간들 말이다. 또한 타인과 연결될 때의 기쁨, 좋은 순간들을 누군가와 나눌 때의 기쁨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려면 누구도 혼자이지 않아야 한다. (……) 시민단체에 들어가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이 있듯이 교실이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누군가와 더 밀접하고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방식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이강희, 〈젠더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60~61쪽

 

뒤뚱뒤뚱 걷는 나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비웃거나 놀리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오랫동안 옷장에 꽁꽁 박혀 있던 정장을 꺼내 입어 보니 이제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 되어 있었고, 나의 걸음걸이를 더 이상하게 보이는 효과마저 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 체념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반응을 그저 웃으면서 넘기자’ 생각하며 실습 학교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냥 교실 뒤에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업을 보조하게 되었고, 내가 걱정했던 상황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눈에는 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친 친구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나에게 다가와 “선생님 왜 다쳤어요?”, “언제 나아요?”,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라며 걱정해 주었다.

- 박병찬, 〈내 모습이 나의 가르침〉, 71쪽

 

나의 장애는 계속 진행 중이며 언젠가는 지체장애의 끝판왕에 이를 것이다. 그때까지 교직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장애가 심해질수록 전투력도 커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거대한 장애물인 장애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내 장애가 커져서 ‘펑’ 하고 터지기 전에 학교 현장에서 장애인 교사들을 괴롭히는 장애물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싶다. 앞으로도 다른 장애인 교사들도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분들 또는 기관들에 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전시하고 다닐 것이다. 이번 생에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나의 삶을 보여 주며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다.

- 박병찬, 〈내 모습이 나의 가르침〉, 97쪽

 

나는 교사가 꼭 되고 싶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기에 시험을 치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준비는 시험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사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평등한 관계 맺기를 통해 배움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는데, 모두가 열심히 하더라도 누군가는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로 줄을 세워 합불을 결정하는 임용 시험은 이러한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 현유림, 〈반투명한 보따리를 둘러메고〉, 102~103쪽

 

‘문제 학생’들과의 싸움에 지쳐 버린 교사들이 병가를 길게 내는 경우가 꽤 많은데, 나는 대체로 그런 자리에 땜빵으로 갔다. 나간 사람이 있어야만 생기는 땜빵 자리는 대체로 험난한 환경에 나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곳들에만 갈 수밖에 없는 기간제였고 그래서인지 학생들과의 갈등을 정말 많이 겪었다.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사랑으로 품으라 하고 그냥 조퇴를 쓰고 ‘마음 챙김’ 하라고 하며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없었다. 내가 통제를 못 해서, 무딘 사람이라서, 학생들을 못 잡아서 고통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방관했다. (……) 학생의 문제 행동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 보고 교사에게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교사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면 다른 교사를 데려와서 그 자리를 ‘땜빵’ 할 사람으로 쓰고 버리는 현실을 자주 마주한다. 학생이 가정에서 경험하는 것을 당장 변화시킬 수 없더라도 학교에서의 경험만큼은 다르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데, 그게 학교의 역할인데, 학교는 지금도 교사 수를 줄이고 있기만 하다.

- 현유림, 〈반투명한 보따리를 둘러메고〉, 112~114쪽

 

노조 활동을, 그것도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교사로 사는 것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2017년 무렵 페미니즘이라는 개념과 학문, 실천을 처음 접하고는 SNS를 통해 먼저 페미니즘을 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동시에 반페미니즘적 댓글에 비판 댓글을 다는 소위 ‘키보드 워리어’로 살아가고 있었다. 운동적 실천이나 조직적 대응과 같은 구조적 전략에 무지했고 왜 사람들은 여성을 차별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하루하루 좌절하고 분노하던 시절이었다. (……) 학교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고 내가 속한 노조 지부는 지역에서도 진보 조직을 자처하는 조직이었지만 그 안에서 페미니즘적 조직 운영과 운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지부에 여성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남성위원회도 만들어야겠네”였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여성위원회가 있어야 해요.”

- 손지은, 〈학교에 나 같은 사람이 없을 리가〉, 137~138쪽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20대 시절을 지내는 나를 성인이 ‘되어 가는’ 존재로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호기심 많고 그저 풋풋하고 발랄한, ‘진정한’ 성인은 아닌 젊은 여교사. 학교에서 양육자 상담을 하다가 이런 유의 말을 들은 적이 종종 있었다.

“선생님도 결혼해서 애를 낳아 보시면 더 잘 이해하실 거예요. 아직 애를 안 낳아 봐서 모르시는 것 같아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 본 여교사는 교육에 결격 사유가 있다는 뜻인데 꽤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은 걸로 보아 결혼과 출산과 양육은 이 땅에 태어난 여성의 숙명이자 지상 과제인 것 같다. 그 논리에 따르면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남성 교사는 교사 자격 미달인 셈인데 그런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 손지은, 〈학교에 나 같은 사람이 없을 리가〉, 143~144쪽

 

‘청각장애’라는 진단명은 부모님이 홀로 감당해야 하였고, ‘외로움’이라는 숨겨진 증상은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하였다. 청각장애 학생에게 불합리한 국어 듣기 평가, 영어 듣기 평가, 음악 가창 실기 시험이라는 부조리함을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학창 시절은 늘 삭막했고, 무미건조했다. 체화되지 않은 분노를 어린 마음 심연에 차곡차곡 화석처럼 쌓아 두는 법도 그때 터득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수업 시간 40분을 바보처럼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 10분간 친구의 필기 노트를 베껴 쓰기 바빠 화장실도 쉽사리 가지 못해 마음이 서늘했던 날들이 이어져야만 했다. (……) 들리지 않는 교수님의 강의를 그저 학점 이수를 위해 멍하니 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이 길의 끝에 내가 감히 교단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강의 시간 내내 외로움이라는 물웅덩이에 내던져진 낡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마음속의 갈망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빈곤함을 채웠다.

- 배성규, 〈기억의 공유, 새로운 지경을 위해〉, 152~153쪽

 

서로 다른 장애 영역 간의 만남에서 ‘낯섦’이라는 배경 탓에, 우리의 편견으로 빚어진 섣부른 판단과 뒤늦은 미안함이 늘 뒤따랐다. 논의의 자리에서 의사소통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쏟아 내놓는 말들로 청각장애 조합원들에게 장벽을 쌓았던 일이 있었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때 뇌병변·지체장애 조합원의 흔들리는 숟가락의 불편함과 쉽사리 삼키기 어려운 음식물에 대한 분노를 외면했던 적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낯설음’ 때문이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타 장애 영역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문외한이었다.

- 배성규, 〈기억의 공유, 새로운 지경을 위해〉, 167쪽

 

이반 일리치는 희망과 기대를 구별했다. 예를 들어 승진 점수를 착실히 모아 교장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기대라면, 멋진 교사들과 교육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이루길 바라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은 기대보다 무모하지만 훨씬 매력적이고 추진력이 강하다. 불행히도 학교에서 승진을 기대하는 건 위험해 보였고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어 보였다.

- 구윤숙, 〈학교를 나온 교사, 학교로 돌아간 이방인〉, 194쪽

 

부모님과 친구들은 나의 퇴직을 응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연구실 사람들도 만류했다. 그래도 나는 사직서를 냈다. 사직할 무렵 연구실 홈페이지의 회원 자기소개란에 “예술가처럼 세상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철학자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노동자처럼 당당히 먹고살고 싶다”라고 적었다. 공부와 공동체 활동으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구윤숙, 〈학교를 나온 교사, 학교로 돌아간 이방인〉, 199쪽

 

비정규직으로 학교에 돌아갔을 때 나는 좀 더 예민해졌다. (……) 학생들은 사용할 수 없는 교직원 전용 화장실과 교직원 전용 배식대, 청소 도구 창고는 있으나 청소 용역이 쉴 공간은 없는 건물도 불편해졌다. 외부인과 내부인을 가리지 않고 함께 밥 먹고 공부했던 연구실에서 경험해 본 바로는 그런 구별 없이도 스승에 대한 존중은 충분히 가능했다. 적어도 먹고 배설하고 쉬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좀 더 평등했으면 좋겠다.

이방인의 눈을 가져서인지 교사들의 어떤 푸념들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교사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에는 비교과 교사들을 향한 혐오, 교육공무직에 대한 냉소와 우월감, 스포츠 강사나 예능 강사들을 향한 비아냥을 담은 글들이 익명으로 종종 올라온다. (……)

학교에서 문득문득 보이는 차별과 혐오들이 불편하지만 한편으로는 담담하다. 옛날 같으면 교사들에게 성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학교 밖으로 뛰쳐나오게 했던 인문학은 이해 안 되게 행동하는 집단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 구윤숙, 〈학교를 나온 교사, 학교로 돌아간 이방인〉, 212~213쪽

 

그렇게 3~4개월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 진급을 앞둔 2월이 되었고, 교감 선생님의 말씀대로 교실이 모두 4층으로 배정되었다. 난 그때 마음에 커다란 멍이 들었던 것 같다. 사실상 나를 퇴학시키는 거나 다름없는 학교의 결정 같았다. 생각하고 또 고민한 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자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 결국 나는 그토록 바라던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없었다. 그 학교는 한 아이의 꿈을 담기엔 그릇이 너무 작은 곳이었다.

- 조윤주, 〈우리를 담기엔 그릇이 작은 학교〉, 225~226쪽

 

“비장애인 선생님은 다 속았는데, 선생님은 속일 수 없었어요.”

그렇게 나는 욱진이와 더 가까워졌고, 욱진이도 나에게 더 솔직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 우리의 장애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도 자주 했다. 20년 전에 내가 학창 시절일 때와 물리적인 환경은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은데, 욱진이의 마음은 내가 느낀 것과 참 비슷했다. 하지만, 나처럼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학생이 아니라 부당함과 불편함을 표현하는 학생이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떤 점이 불편한지 나에게 이야기했다. 욱진이의 전동 휠체어는 큰 편이라 학교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학교에는 규격에 맞지 않는, 무늬만 장애인 화장실이라고 표시된 곳이 있었다. 그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어 대변이 보고 싶으면 집에 계신 아버님께 호출해서 조퇴했다. 학생이 학교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어서 조퇴하는 현실 앞에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꼈다.

- 조윤주, 〈우리를 담기엔 그릇이 작은 학교〉, 241쪽

 

호스피스에서 지낸 4개월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엄마의 눈높이와 발걸음을 맞추었던 순간이 충분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돌봄은 관계의 긴장을 함께 견뎌 내는 일이고, 나와 타자의 세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신체가 노화되고 기능을 점차 잃어 가는 순간이 두려울지라도 주변의 존재를 돌보며 배려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돌보는 일이, 곧 나의 존엄성과 연결되는 일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 보란, 〈취약한 나로 되돌아가 보았습니다〉, 266쪽

 

무엇보다 교육은 각자의 존엄과 자유를 속박하지 않는 상호의존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교사의 노동은 훈육, 교화, 돌봄이란 이름으로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교육 노동이 아닌 구조적 폭력에 동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의 노동은 자신과 청소년을 ‘동등한 돌봄 관계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되, 그 누구의 개별적인 헌신과 역량에만 기대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긴 돌봄의 시간을 겪으며, 나는 교육이 ‘각자에게 고유하고, 존엄한, 일상적 돌봄 관계’로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 보란, 〈취약한 나로 되돌아가 보았습니다〉, 274~275쪽



목차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

 

책을 펴내며

- 한 줌의 우리들 | 채홍

 

서로에게 기대어, 무너지지 않기

- 가난, 퀴어, 우울이 교사로서의 나에게 남긴 것들 | 채홍

 

젠더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 교실 안의 퀴어 활동가 | 이강희

 

내 모습이 나의 가르침

-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세상에 던지는 특별한 교육 | 박병찬

 

반투명한 보따리를 둘러메고

- ‘땜빵 교사’의 자리에서 바라본 학교의 풍경 | 현유림

 

학교에 나 같은 사람이 없을 리가

- 페미니스트 ‘강성 노조’ 여교사·활동가의 학교 생존기 | 손지은

 

기억의 공유, 새로운 지경을 위해

- 다양한 장애 유형의 교원과 함께 ‘낯섦’을 넘어 | 배성규

 

학교를 나온 교사, 학교로 돌아간 이방인

-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좋다 | 구윤숙

 

우리를 담기엔 그릇이 작은 학교

- 휠체어를 타고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 | 조윤주

 

취약한 나로 되돌아가 보았습니다

- 아픈 가족을 돌보며 가족 너머의 돌봄을 상상하기 | 보란




저자 소개

 

채홍

중등 국어 교사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세상을 싫어하지만, 이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어 오래 살고 싶다. 아이들에게 이 세상의 슬픔과 아름다움, ‘그럼에도 불구’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다.

 

이강희

초등 교사, 영화감독

1995년 강원도 홍천군 출생, 농촌과 지방 소도시를 거쳐 서울에 거주 중이다. 초등 교사로 일하며 영화, 사진, 글쓰기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지낸다. 다큐멘터리 〈모든 가족은 퀴어하다〉(2024)를 연출했다.

 

박병찬

초등 교사

삶은 때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길로 안내한다. 비장애인에서 중증 장애인이 되는 순간,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 장애를 겪으면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중 ‘내 존재 자체가 교육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 15년째 아이들과 함께하며 행동하는 삶의 가치를 몸소 가르치고 있다. 나는 희망한다. 내 이야기가 세상을 바꾸는 용기가 되기를…….

 

현유림

초등 교사

햇빛이 만들어 내는 밝음과 어두움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과의 평등한 관계를 고민하고,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손지은

초등 교사

강원도 동해의 바다를 보고 자랐다. 물결의 도도한 기상을 마음에 품고 산다. 자연을 닮은 춤 훌라를 추고 가르치며 파도가 되기도, 바람이 되기도, 새가 되기도 한다. 초등 교사로 일하다가 지난 4년 동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전임으로 일하고 있다.

 

배성규

중등 특수교사

소리를 보는 삶을 통해 바람의 흔적을 기억하려는 특수교사이다.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는 것들을 한미한 이 몸뚱이로 저항하고, 얕은 헤아림으로 다친 마음을 스스로 다독여 왔다. 모두가 함께 가면 커다란 길이 되듯, 나 홀로 겪은 저항의 흔적이 모두의 목소리로 공유되어 우리의 길을 만들어 가기를 희망한다.

 

구윤숙

비정규직 초등 교사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좋다. 좋은 스승과 도반을 만나 오랫동안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있으세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리스 신화, 중국 고전, 서양 미술사, 철학, 과학 등등. 배울 게 많아서 좋다.

 

조윤주

중등 특수교사

학창 시절에도, 특수교사가 된 이후에도 학교라는 조직이 녹록지 않음을 수시로 마주한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 때때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이 되고, 제자들의 존재가 때때로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의 존재가 ‘때때로’ 서로에게 의지함을 느낄 때 나는 특수교사로 조금 더 살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보란

중등 교사

돌봄 노동을 하며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특성화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 함께 과학을 한다. 우울증을 겪으며 여동생, 길고양이 모모, 코코와 같이 살고 있다. 아파도 자기다운 삶을 모두가 살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