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봄의 물을 올립니다 | 강주희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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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봄의 물을 올립니다



강주희 서울 내발산초





아이들과 만나 서로 알게 될 즈음이면 나무들은 물을 올리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면 저도 봄의 물을 올립니다.
갖가지 씨앗을 꺼내고 어떤 씨앗으로 봄을 끌어올릴까, 저는 늘 밀과 보리입니다.
4년 전 6학년 아이들과 시작한 이후로 밀알은 제게 봄의 색과 향과 맛을 선물합니다. 이런 봄을 아이들도 느끼길 바라, 우유 팩 밀싹을 키워요. (이번 학교는 땅이 없어 더욱 절실하게)

아이들은 선생님이 주신 밀알이 씨앗이라니 씨앗인가 보다 해요. 물을 주고, 첫 주말을 보내고 나면(첫 동아리 시간은 늘 목요일) 싹이 돋아 있습니다. 먼저 돋아난 나의 싹들을 보며 시인이 감탄합니다. 


“교실로 언제 들어왔지?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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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싹은 딱 열흘이면 됩니다. 더 자라면 싱그러움이 덜해요. 풀이 죽는달까요, 물기가 사라진 진한 초록은 주저하는 마음을 갖게 해요.


“이틀 뒤에는 잘라서 먹어야겠네”


이 말에 여러 아이들이 놀랍니다. 소요가 입니다.


“끔찍하다, 이걸 먹는대” 

“왜 먹어요? 불쌍해요”
“응, 먹을 거야”


아침마다 선생님과 함께 아침인사를 나누던 초록이들을, 오후 교실 햇볕 자리를 찾아 옮겨주던 나의 밀싹을 잘라서 먹어야 합니다. 때가 되었어요. 영정 사진을 찍듯 나의 밀싹과 마지막 사진을 찍습니다. 슬프고도 경건한 의식.


끔찍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여러 해 밀싹을 먹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늘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먹는다는 일과 육식과 채식을 바라보는 시선, 그것들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어요.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생명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면 좋을 텐데. 사파리의 치타가 사냥에 성공하는 장면이 숭고한 생명 의식으로 해석되는 방법은 없을까.

“밀싹아, 너를 잘라 주스가 되면 내가 맛있게, 먹을게. 너를 마시고 좋은 생각과 말, 좋은 행동으로 너를 빛나게 할거야. 그러면 너는 내 안에서 나와 같이 빛날거야.” 


슬퍼하지 말고 맛있게,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그 생명이 나를 통해 빛나게 하면 된다. 올해 제가 주입한 봄의 메세지입니다. 아기일 때 잘라 먹지 말고 어른이 다 되고 나서 먹으면 좋겠다, 슬프다던 친구들도 좀 위안을 얻는 듯했어요. 직접 자르고 함께 말합니다.


“고마워, (너의 맛과 먹은 후 나의 변화가) 기대돼” 


표정이 밝아요. 선생님 말 한마디로 변하는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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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담았어요. (40분 안에 갈고 나누고 마신 후 정리를 하려면 종이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 우리반의 밀싹 주스에 대한 반응은 역대 최고였습니다. 주저하는 친구 하나 없이 기대하며 맛을 보고, 한 잔 더! 를 외쳤어요. 

딱 2잔씩. 선생님이 집에  가서 만들어 올게. 이건 올해만 하는 특별 서비스야. 왜냐면 모두들 밀싹을 감사하게 잘 마셔주었기 때문이야. 이런 적은 처음이야. 과장을 하며 행복해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나.
밀싹 주스를 만들 때는 인공 사과향이 들어가지 않은 사과 주스에 갈아야 합니다. 그래야 초록 들판의 봄바람 맛, 살랑이는 봄의 향기가 더 잘 느껴집니다. 첫 잔 후에는 그냥 사과주스도 비교해서 마셔 봅니다. 그 후에 2번째 잔을 마셔요. 그래야 밀이 선물하는 봄을 느낄 수 있어요.

우리반의 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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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싹의 이슬입니다. 물을 끌어올렸다가 아침마다 잎 끝으로 내어놓습니다. 투명하지만 끈적입니다.
올해의 봄도 저와 우리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맺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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