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속시대 ― 망설임과 기다림의 취약성 | 정용주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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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속시대 ― 망설임과 기다림의 취약성



정용주



정용주 님이 sns에 올린 글입니다. 마침 밑줄독서회에서 박경은 님이 용주 샘이 말한 것과 같은 TV 영상물을 추천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 MBC는 인심이 팍팍하기로 유명한데 왠일로 이번에는 풀버전을 인터넷으로 공개했습니다.

지난주에 방영했던 손석희 질문들(김애란편)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Ewri3_Hgs0 

못보신 분들은 길지만 꼭 다 보시길 추천드려요.  최근에, 경험의 멸종,이란 책을 다 읽었는데 마지막에 주는 메시지가 강력했어요. 전 문학을 더 더 더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 언급으로 용주 샘의 글 첫줄이 눈에 띄었고, 따라가며 읽다 보니,  같이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싶어 이곳에 베껴 오게 되었다는 썰을 붙입니다. - 풀씨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카페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데, 김애란 작가가 손석희 앵커와 나눈 대화에서 나온 ‘망설임’, ‘기다림’, ‘주저함’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소위 인공지능 시대,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잠시 말을 삼키는 시간, 판단을 유예하는 것, 상대의 삶을 내 언어로 함부로 정리하지 않으려는 주저함... 이 말은 문학에 관한 말이면서 동시에 교육에 관한 말이다. AI 시대의 교육. 우리는 학생에게 더 빠른 답을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답하기 전에 멈추고, 듣고, 헤아리고, 기다리는 인간의 능력을 가르칠 것인가.


2년동안 집필하고 작년에 출판한, 멈추지 못하는 학교, 그리고 텃밭교육학 강의를 가면서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나는 입시가속체제를 단순히 대학에 가기 위한 선발제도가 아니라 학생의 시간, 교사의 시간, 학교의 시간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학생은 더 빨리 준비해야 하고, 교사는 더 빨리 성과를 확인해야 하며, 학교는 더 빨리 비교 가능한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아직 자라나는 존재는 이미 평가 가능한 결과로 앞당겨지고, 교육과정은 탐색의 시간이 아니라 선별을 위한 통로가 된다. 입시가속체제의 가장 깊은 폭력은 아이에게서 자기 성장의 시간을 빼앗는 데 있다.


특히 나는 입시가속체제의 문제를 시간주권의 문제로 개념화하고자 했다. 시간주권이란 단순히 자유 시간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삶과 배움의 속도를 스스로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학생이 자기 이해의 속도를 갖는 것, 교사가 학생을 충분히 관찰할 시간을 갖는 것, 학교가 공동체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 교육이 기다림과 버팀과 머무름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 이것이 시간주권이다. 시간주권이 무너지면 교육은 성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관계를 견디지 못하며, 타자를 자기 속도에 맞추도록 압박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간주권을 리듬, 정동, 여유, 의미, 행위으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리듬이다. 교육에는 집중과 이완, 질문과 침묵, 몰입과 산만함, 실패와 재시도의 고유한 박자가 있다. 모든 학생이 같은 속도로 이해하지 않고, 모든 교사가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모든 공동체가 같은 시간 안에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다. 리듬은 교육을 기계적 처리 과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장 과정으로 만드는 시간의 질서이다.


둘째는 정동이다. 교육은 정보 전달 이전에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온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아이가 망설이며 입을 여는 순간, 교사가 눈빛으로 기다려주는 순간, 학급 전체가 어떤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통과하는 순간은 모두 정동적 시간이다. 정동은 교육에서 쉽게 측정되지 않지만, 배움의 방향을 바꾸는 깊은 힘이다. 학생은 설명만으로 배우지 않는다. 자신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는 감각, 누군가가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감각 속에서 배운다.


셋째는 의미이다. 의미는 정보의 양에서 생기지 않는다. 의미는 경험이 시간 속에서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고, 다른 경험과 연결될 때 생긴다. 학생이 어떤 작품의 주제를 곧바로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작품이 그의 삶의 의미가 된 것은 아니다. 교사가 학생의 행동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 아이의 성장 의미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의미는 늦게 온다. 의미는 지나간 경험이 다시 해석될 때 생기며, 그 과정에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넷째는 여유이다. 여유는 남는 시간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생각을 기다리는 교육적 공간이다. 말이 늦은 아이, 질문을 정리하지 못한 학생, 수업을 다시 설계하려는 교사, 합의에 이르지 못한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시가 아니라 충분한 여백이다. 여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교육이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남겨두는 숨이다.


다섯째는 행위이다. 행위는 외부의 속도 명령에 끌려가지 않고, 무엇을 서둘러야 하며 무엇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지 판단하는 힘이다. AI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AI의 답변 앞에서 멈추고, 수정하고, 거절하고, 다시 묻는 능력이다. 행위는 기술을 쓰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이 제안하는 속도와 결론을 인간의 책임 아래 다시 배치하는 능력이다.


문제는 우리 교육이 취약한 이 다섯가지 시간주권의 구성요소가 AI가속시대에 더욱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AI는 기다리지 않는다. 김애란 작가의 말대로 망설임이 없다. AI는 즉시 요약하고, 즉시 번역하고, 즉시 답변하고, 즉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능력은 분명 유용하다. 행정업무를 줄이고, 자료 접근성을 높이며, 학생 맞춤형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도 있다. 그러나 AI가 교육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기술의 효율이 아니라, 기술이 은밀하게 재구성하는 시간의 질이다.


AI가속시대는 교육의 리듬을 하나의 즉시성으로 압축하려 한다. 긴 글은 요약으로, 토론은 결론으로, 수업의 흔들림은 산출물로, 숙고의 과정은 보고서 문장으로 바뀐다. 학생은 긴 텍스트를 견디기보다 요약을 요구하고, 교사는 복잡한 판단을 문장 생성으로 대체하려 하며, 학교는 숙고의 회의를 압축된 회의록과 실행계획으로 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때 교육은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박자를 잃는다. 형식적으로 콘텐츠의 측면에서 질이 높아졌지만, 콘텐츠를 넘어서는 과정으로서 컨텍스트는 취약해 졌다.


정동도 취약해진다. 위로는 문장으로 생성되고, 공감은 표현 양식으로 정리되며, 갈등은 처리 가능한 사안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문장 형식만으로 응답될 수 없다. 어떤 아이의 울음, 어떤 교사의 침묵, 어떤 학부모의 불안은 즉시 설명될 수 없는 잔여를 갖는다. AI가 그럴듯한 말들을 빠르게 제공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타자의 고통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정동이 무르익기 전에 언어가 앞서고,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처방이 도착하는 것이다.


의미 역시 위태로워진다. AI가 제공하는 빠른 요약과 매끄러운 설명은 의미 형성을 돕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미가 형성되기 전에 의미가 이미 주어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교육에서 이해는 정리된 결과가 아니라 흔들리는 과정이다. 학생은 모호함을 지나며 생각하고, 교사는 불확실성을 견디며 판단한다. 그런데 AI가 모든 것을 빠르게 정리해 줄수록, 우리는 의미가 생기기도 전에 의미를 소비하게 된다.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완성된 것처럼 처리된다.


여유는 가장 먼저 사라진다. AI가속시대의 학교는 여유를 비효율로 생각하기 쉽다. “왜 아직 정리되지 않았는가”, “왜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왜 더 빨리 피드백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교육의 언어를 지배한다. 그러나 교육에서 여유가 사라지면 기다림이 사라지고, 기다림이 사라지면 발달이 사라진다. 아이는 완성된 결과로만 보이고, 교사는 즉각적 처리자로만 이해되며, 학교는 성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빠르게 반응하는 조직으로 축소된다.


행위 주권도 외주화된다. AI가 편리할수록 인간은 점차 자신의 판단을 기술에 맡기기 쉽다. 무엇을 읽을지, 어떻게 요약할지, 어떤 문장을 쓸지, 어떤 결론을 낼지 AI가 먼저 제안한다. 이때 위험은 AI가 틀린 답을 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위험은 인간이 자기 판단의 근육을 사용하지 않게 되는 데 있다. 기술은 도구로 들어왔지만, 어느 순간 교육의 시간표와 사고의 순서를 정하는 보이지 않는 관리자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문제는 최근 교육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콘텐츠의 질” 논의와도 연결된다. AI 시대 교육에서 더 좋은 콘텐츠, 더 정교한 콘텐츠, 더 개인화된 콘텐츠, 더 몰입도 높은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말은 얼핏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콘텐츠의 질을 주로 전달력, 흥미도, 접근성, 즉각적 피드백, 학습 효율로만 판단한다면, 그것은 다시 속도의 언어로 귀결된다. 좋은 콘텐츠란 학생을 빠르게 이해시키는 콘텐츠만이 아니다. 좋은 콘텐츠란 학생을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이다.


교육에서 콘텐츠의 질은 속도와 분리되어야 한다. 더 빠른 콘텐츠가 아니라 더 깊은 콘텐츠를 물어야 한다. 더 많은 콘텐츠가 아니라 더 오래 남는 콘텐츠를 물어야 한다. 더 자극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더 책임 있는 콘텐츠를 물어야 한다. 어떤 콘텐츠는 학생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만 아무런 변화를 남기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문장 하나, 어떤 시 한 편, 어떤 소설의 한 장면, 어떤 친구의 발표 한 문장은 학생의 내면에서 오래 진동하며 삶의 방향을 바꾼다. 교육의 질은 소비량이 아니라 공명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문학교육은 그래서 AI 시대에 더 중요해진다. 문학은 정보 전달의 장식물이 아니다. 문학은 인간이 인간의 속도를 배우는 장치이다. 문학은 타인의 삶을 세 줄 요약으로 단축하지 못하게 한다. 문학은 말하는 사람의 속도와 분량을 존중하게 한다. 문학은 쉽게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독자를 붙잡아 세운다. 김애란의 말처럼 인간의 망설임 안에는 배려와 품위가 있다. 교육은 바로 그 배려와 품위를 배움의 형식으로 조직해야 한다.


나는 AI시대를 AI가속시대라고 부른다. AI가속시대에 교육은 기술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인간성을 지킬 수 없다. 오히려 기술을 사용할수록 더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 무엇은 빨라져도 되는가. 무엇은 빨라지면 안 되는가. 행정의 반복 작업은 빨라져도 된다. 자료 접근은 쉬워져도 된다. 학생 지원을 위한 초기 신호 포착은 정교해져도 된다. 그러나 아이의 발달, 교사의 판단, 공동체의 합의, 타인의 고통, 문학의 문장, 생태적 감수성은 함부로 빨라져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가 발생한다. 타자는 언제나 느리다. 타자는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고, 내 언어로 즉시 번역되지 않으며, 내 기준에 맞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학생이라는 타자, 교사라는 타자, 학부모라는 타자, 장애와 빈곤과 이주와 상처를 지닌 타자는 모두 교육을 느리게 만든다. 더 나아가 비인간 주체도 그렇다. 숲, 강, 동물, 기후, 지역 생태계는 인간의 개발 속도와 행정의 시간표에 맞춰 존재하지 않는다. AI가속시대의 교육이 속도와 효율만을 추구할 때, 그것은 인간 타자뿐 아니라 비인간 세계에 대한 폭력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므로 생태전환교육, 시민성 교육, AI 리터러시, 문학교육은 서로 분리된 교육 의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자기 속도를 절대화하지 않고, 타자와 세계의 속도를 함께 배워가는 교육이다. 생태전환교육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도덕 교훈만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빠른 처리 방식 자체를 성찰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시민성 교육은 의견을 빨리 말하는 훈련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속도를 공적 공간 안에서 조율하는 훈련이어야 한다. AI 리터러시는 프롬프트를 잘 쓰는 기술만이 아니라 AI가 앞당긴 판단을 다시 인간의 책임 아래 늦추는 능력이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빨리 답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천천히 듣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정확히 요약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요약하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능력이다. 효율적으로 쓰는 것도 능력이지만, 쓰기 전에 잠시 부끄러워하고 망설이는 것도 능력이다. 실패를 빨리 수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교육은 학생이 더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콘텐츠 앞에서 멈추어 자기 삶을 다시 읽게 하는 일이다.


김애란의 망설임은 문학의 한 문장이 아니라 교육학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학생이 더 빨리 답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이 응답하게 할 것인가. 우리는 교사가 더 빨리 판단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더 오래 바라보게 할 것인가. 우리는 학교가 더 빨리 성과를 제출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더 단단한 리듬을 만들게 할 것인가. 우리는 AI를 교육의 조력자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의 시간 자체를 AI의 즉시성에 넘겨줄 것인가.


망설임과 기다림은 오늘날 가장 취약한 교육적 자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취약성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취약한 것은 쉽게 부서지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이 머무는 자리이기도 하다. 아이의 느린 문장, 교사의 조심스러운 판단, 학부모의 불안한 질문, 공동체의 더딘 합의, 숲과 계절의 침묵은 모두 교육이 함부로 단축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교육은 인간이 인간의 속도를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는 AI가속시대에도 여전히, 망설임과 기다림을 공적으로 보호하는 장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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