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농] 숨은 ‘생태’ 찾기 (지문희)

2022-09-02
조회수 513

월간 교육농, 9월



숨은 ‘생태’ 찾기



지문희 저현고

 



여전히 학교 텃밭이 없다. 콩을 심어 볼까 했으나 아직은 서먹한 공간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마음도 없는데 틀밭은 어찌 만들고, 무수히 많은 삽질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자연, 생태, 씨앗과 같은 단어들만 좇아다니고 있다. 어디선가 그러한 단어를 만나면 마음이 툭 풀어지고 자연스럽게 텃밭 그림이 그려진다. 몸까지 닿지는 않는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만난 나의 숨은 단어들이다. 아니 숨어 있다 오해한 단어들. 자연, 생태, 씨앗.

 


자연, 《최재천의 공부》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에 빠져 있다. (현재 구독자 38.4만 명 중 3명은 내가 섭외했다.) 수업이어도 꽤 열심히 들었을 것 같은 편안하면서도 다채로운 억양. 게다가 그가 설명하는 동물, 미래, 교육 이야기가 참 재밌다. 무엇보다 동물행동학자의 관점에서 본 사회 현상 분석이 위안이 된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관점, 그렇지만 인간은 달라야 한다는 차분한 논리의 흐름. 


그의 신간 《최재천의 공부》를 수업 시간에 읽었다. 50분 중 겨우 20분만 수업을 한다. 그 후 각자 수능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고3 2학기,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만난 문장들.

 

“진정한 인권 회복은 학생으로 사는 기간도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실현됩니다.”

(나의 독백) 지금 제 앞에 있는 아이들도 알고 있겠죠? 본인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걸.

 

“국영수를 열심히 배우다가 바이러스에 걸려서 죽는 세상에서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나의 독백) 저 국어교사인데... 국영수가 아니라 수능이라고 하셔야 할 듯합니다.

 

“저는 학생들이 현실에까지 다가가기를 원해요.”

(나의 독백) 무엇이 진정한 현실일까요? 입시, 대학을 넘어 옆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떠들며 어른들의 편견을 그대로 짊어진 채 사는 삶의 불안을 알아차리는 수업을 하고 싶습니다.

 

“식물은 씨앗을 자기 그늘에 심지 않는다.”

(나의 독백) 같이 살기 위해 씨앗을 널리 퍼뜨려 경계를 확보해 주는 것처럼, 교육은 과연 이 아이들에게 연대, 배려의 가치를 알려 줄 수 있을까요?

 

“자연에 대해 알아 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연을 도저히 해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나의 독백) 그럴까요?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자연, 생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학교에 필요한 거겠죠? 학교 텃밭을 해야겠죠? 텃밭에서 학생들은 삶의 주도성을 찾고 수다쟁이가 되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거겠죠?


 

생태, 장욱진미술관


《최재천의 공부》에서 ‘장욱진은 생태 화가다’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언젠가 지인이 추천했던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www.yangju.go.kr/changucchin. 학교에서 25분이면 갈 수 있었다. 바로 조퇴를 상신하고 빠르게 업무를 처리했다. 9월 모의평가 4교시 전반부 감독을 마치고 조용히 나갔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아주 조용히...


티켓팅 마감 1분 전. 야외 정원을 지나 미술관까지 이어진 구름다리를 빠르게 올라갔다. 나무 냄새가 옷에 남아 있는 채로 들어간 아주 흰 미술관. 작은 집에 꼭 붙어 있는 가족, 자유로운 동작의 아이들과 항상 그들을 둘러싼 나무, 새, 달, 닭, 호랑이, 집. 단순하고 부드러운 선들의 나무와 새들은 캔버스를 가득 채울 듯 존재감을 뽐냈다. 아이들의 몸은 세상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그 안온하고 투명한 세계가 눈을 가득 채우니 눈물이 조금 났다.


미술가나 과학자는 현재 인식의 꼭짓점을 끌고, 사고의 한계를 돌파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미술가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교사인 내가 돌파해야 하는 사고의 한계는 무엇일까?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상상해야 하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움직이고 시도해야 한다.


  

▲ 장욱진, 〈손자〉, 장욱진미술문화재단 www.ucchinchang.org


▲ 장욱진, 〈나무와 새〉, 장욱진미술문화재단 www.ucchinchang.org 


▲ 장욱진, 〈닭과 아이〉, 장욱진미술문화재단 www.ucchinchang.org 

 

 

씨앗, 아침고요수목원


몇 년 전, 꿈의학교 ‘어린이농부학교’ 강사를 한 적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2주에 한 번 정도 주말마다 초등학생들과 놀았다. 감자를 다 캔 텃밭에 삽질과 조루로 길을 내고, 함정을 만들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때 함께한 강사샘들을 만나면 늘 꽃, 작물, 땅 이야기이다. 누가 보면 대농인 줄 알겠다며 우리끼리 시시콜콜 그렇게 논다. 각자 회사원, 유치원 영어강사, 농협대학교 원예치료과정 학생, 학교 텃밭강사이면서 모두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텃밭과 꽃을 늘 갈구하는 샘들과 아침고요수목원으로 떠났다. 10시 개장과 함께 입장. 여유롭게 잘 가꿔진 수목원을 한가롭게 거닐 줄 알았지만 이내 익어가고 있는 씨앗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채종이 가능한 꽃들이 많았지만, 나름 전문가들의 눈에는 보이는 씨앗들이 있었다. 다시 차로 가서 채종 비닐을 들고 왔다. 토플, 흰 천일홍, 작약, 보리사초, 아이리스 등을 채종하고, 이어 꽃범의꼬리, 큰꿩의비름, 자엽일본매자를 어떻게 심을까 고민했다. 물론 아주 나중에 땅을 산다면 말이다.


걷는 내내 식물들과 연관된 여러 정보, 에피소드, 사람들이 툭툭 튀어나왔고 우리는 계속 깔깔거렸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지식들이 일상의 순간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고 있었다. 지식의 쓸모란 무엇일까? 자연을 내내 가까이 두고 살아온 우리는 세상을 조금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만 집중된 생각이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순간. 그런 순간이 많아질수록 삶이 즐겁고 자유롭다면, 학생들은 세상을 꼭 배워야 한다.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수목원을 친구들과 거닐며 만난 일상 속 단어들. 자연, 생태, 씨앗.

지금의 학교 모습에 갇혀 있지 말고 현재 인식의 꼭짓점을 위로 끌어올리며, 비 오기 전날 학교에 꽃씨라도 듬뿍 뿌려야겠다.

 

“자연계는 총체적인 교육입니다” 

- 게리 스나이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