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농] ‘학교’ 텃밭은 에너지를 착취하는 곳이 아니다 (강주희)

202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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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교 텃밭, 10월



 ‘학교’ 텃밭은 에너지를 착취하는 곳이 아니다



강주희 서울 우장초




놀자.

시월은 노느라 바쁘다. 텃밭의 두둑 사이를 오가면서 달팽이들과 사마귀, 여치, 풀무치, 이름 모를 수많은 곤충들을 관찰하고 구경하느라 즐겁다. 배춧잎 사이에서 숨어 있던 달팽이들을 교실로, 집으로 데려가느라 바쁘다. 지렁이 똥무더기가 좋다는 걸 안 뒤로 찾아 세는 재미로 심심할 겨를이 없다. 텃밭에 물이나 액비를 주는 일 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으니 또 다른 것들을 도모해 보는 일도 가능하다. 


9.24기후정의행진을 앞두고 우리 반은 닷새 동안 교정, 복도마다 다니며 캠페인을 했다.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1학년은 통합교과 여름에서 에너지 문제를 다루고 피켓을 만들게 되어 있어서 지난 7월 만들어 둔 피켓을 쓰고 그 즈음 배웠던 노래와 춤을 추면 되었으니까. 코로나19 전 교내 캠페인을 했던 경험과 견줘 보니 학교는 여전히 경직되고 통제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쉬는 시간에도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학생들의 이동이 없었다. 그 긴 점심시간도 다들 교실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의 캠페인을 볼 관객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 1학년 8반의 열정이 있었기에 교사인 나는 학생 관객들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내 메신저를 넣었다. 단 5분 남짓한 우리의 춤과 노래를 보기 위해 멈춘 학급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3일째부터는 동학년 선생님들에게도 부탁하여 관객을 구했다. 


이 와중에 5학년들의 관심과 호응은 압도적이었다. 2년 전 코로나19 첫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31차시의 지속가능발전교육(ESD)과 생태전환교육 활동을 전 학년이 공동으로 벌인 수혜(?)받은 친구들이다. 함께 연구 활동을 하는 동료 교사 학급이 연합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전 학년이 동일한 내용의 교육활동과 수업을 적용한 것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던 학년이다. 우리 반이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발디딜 틈 없이 나와 주어 박수와 환호, “나도 꼭 갈게!” “우리도 함께 할께요!” 외침들로 복도를 가득 채워 준 5학년들의 모습은 내게 가슴 벅찬 선물이었다. 교육의 목적과 의도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맨날 연구 보고를 통해 강조하고 증명하려던 데이터들과 말잔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첫날(월요일)과 마지막 날(금요일)의 캠페인. 관객 앞에 서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모습이 나흘 만에야 편안해졌다.

▲ 관객을 구하느라 복도마다 찾아다녔다. 점심시간 복도 역시 화장실을 찾는 친구 외에는 이동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관객들의 관람과 호응에 나나 우리반 아이들 모두 고무되었던 날.



“엄청 부끄럽고 그랬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은 데서 또 하고 싶어요”라던 하늘이처럼 모두 즐겁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 우리 반만 하느냐”던 은찬이도 있고, “너무 부끄러워서 노래만 하겠다”는 대한이도 있었다. “그냥 피켓만 붙이고 글로 알리면 되지 않느냐”는 태현이도 있고, “아이, 아이, 진짜 싫은데”만 연발하던 서현이도 있었다. 닷새를 보내고 난 다음 주 화요일, 문득 태현이가 물었다. “오늘은 안 해요?”

 

 

벌레랑 친해지기


가을 텃밭은 무, 배추 등 김장 거리를 주로 심기에 작물들 키가 작고 잡초도 적다. 모기는 좀 날아다니지만 성가시지 않고, 우거지던 풀들이 없으니 벌레들을 무서워하던 친구들도 마음 편하게 드나든다. 


한번은 메리골드 꽃 사이에 앉아 있던 통통한 사마귀 한 마리가 우리 눈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호준이가 정중하게 옆구리를 잡아서 모두가 같이 관찰하고 바닥에 내려놓고 움직임을 들여다보며 놀다가 역시 정중하게 풀숲(정확히는 낙엽 지는 더덕 줄기와 호박잎이 가득 엉클어진 밭 구석)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은 내가 발견한 사마귀였지만 나는 사마귀를 만지지는 못한다. 손으로 잡기는커녕, 사마귀가 내 옷자락 위에 붙을까 티나지 않는 거리 두기를 한다. 그런 나 대신 사마귀를 붙들고 친구들을 관찰시켜 주되, 사마귀도 힘들지 않도록 대하는 호준이가 그리 멋질 수 없다. 


이런 내 반응을 눈치챈 몇몇의 남자 친구들은 호기롭게 ‘나도 사마귀를 잘 만질 수 있어’라며 손을 내밀고, 서로 연약한 사마귀가 물지는 않는지, 물어도 따끔 아프기는 하지만 모기 물린 것보다 안 가렵다든지, 사마귀가 엄청 빠르게 달려갈 수도 있다든지 하는 사랑의 대화가 넘쳐 흘렀다. 분위기가 이쯤 되니, 여름의 기운이 한창 높아 가던 감자 캐는 날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벌레들로 자지러지게 울던 주아랑 나윤이, 두 손가락을 덜덜 떨며 감자를 캐던 가현이도 다소 편안한 자세(?)로 사마귀를 함께 관찰했다.


우리반 최근 핫 아이템은 텃밭 달팽이다. 9월 초 어느 날, 호준이가 2교시를 마치고 다녀온 텃밭에서 완전히 말라붙어버린 듯한 달팽이 집 하나를 텃밭에서 주워 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고 싶다길래 작은 통에 물을 뿌려 담아 두었다. 집에 갈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죽었나 보다 했던 것이 다음 날 아침 그릇 바깥으로 이동하여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 후부터 우리반은 달팽이 열풍이 불고 있다. 


가을 시간에 초식곤충과 육식곤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이후, 달팽이는 채식이라 우리가 먹을 배추와 상추들을 다 먹어 버리기 때문에 잡은 달팽이는 밭과는 멀리 떨어진 길 위에 던져 놓고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데려가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호준이에게 별 생각없이 허락했던 것이 그리 되었다. 


처음엔 호준이랑 태현이만 다녀오던 텃밭을, 많을 때는 여덟~아홉 명이 다녀온다. 쉬는 시간마다 텃밭으로 달려 나가서 달팽이를 찾는 통에 이따금씩 무와 배추가 하나씩 뽑히기도 한다. 점심시간에는 해가 뜨거워 달팽이들이 숨는다, 아침이나 비가 온 다음에 더 잘 보인다는 설명을 무심코 친절하게 했더니, 아침마다 나가고 낮에는 텃밭에 물을 뿌려 달란다. 그렇게 9월을 보내면서 달팽이 소문이 나니 점심시간엔 달팽이를 얻으려는 이웃반 아이들도 몇 명씩 나타난다. 무와 배추는 더 많이 뽑히고 있다. 


학년 간담회 때 교장님은 며칠 전, 달팽이를 찾는 우리반 아이 둘만 텃밭에 나가 있던 것을 목격했단다. ‘수업시간에’ 텃밭에 나온 아이들을 보니 1학년 8반이겠구나 싶어 물었더니,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더란다. ‘선생님은 아시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우리반 쉬는 시간’이고 ‘선생님이 허락했다’고 하더란다. 아이들이 사고가 날까 싶어 한참을 지켜보았단다. ‘뭘 찾느냐’ ‘달팽이요’ 하며 묻는 말에 대답들을 씩씩하게 하더니, ‘달팽이를 교실에 가져가도 되냐’ ‘선생님이 안 좋아할 것’이라는 친절한 조언에는 대답 없이 달팽이를 손에 들고 교실로 돌아섰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웃반 선생님은 교실에 그런 거 가져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 여기 있다며 웃었다.


작년에는 배추 사이에서 잡은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집으로 데려가도 되느냐고 통사정을 하던 시은이가 있었다. 집에 쓸데없는 걸 가져가게 놔 두는 교사가 반갑지 않을 학부모들도 계시니 그런 순간들은 늘 고민이 된다. 생명을 가져 간 아이의 마음과 달리 바로 텃밭으로 돌려놓으라고 되가져오기도 하고, 간밤에 아빠가 처리(?)해 버리는 일도 있다. 그러면 나는 교사와 부모의 사이에서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 하지만 시은이는 그 애벌레를 끝내 나비로 변신시켰다. 다만 나비가 되어 날아간 그 시점이 11월 말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뿐.



▲우리 반이 올 가을 처음 만난 사마귀. 호준이의 따뜻하고 친절한 배려로 사마귀는 아이들과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고 텃밭으로 돌려보냈다.

▲사마귀가 얼마나 빠른지 관찰하며 감탄하는 중. 아이들 앞쪽에 멀리 빠르게 달려가는 사마귀가 있다. 

▲작년 아이들하고는 배추벌레를 잡았는데, 통통한 애벌레 두어 마리를 시은이가 데려갔다.

▲시은이의 성공 메시지와 나비 사진. 좁은 공간에서 계속 키울 수 없어 날려보냈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시은이 덕분에 나비가 된 애벌레는 행복했을 거다, 그것만 생각하자고 했다. 

 ▲하루 종일 기척이 없어 죽은 줄 알았다가 다음날 아침 살아서 움직이는 달팽이를 보고 다들 기뻐했다.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댓 마리씩 달팽이들을 모셔 오는데, 1학기 때 벌레들의 출몰에 기겁을 하며 울던 나윤이도 달팽이는 직접 잡는다.

▲매일매일 등하교를 함께하는 하영이의 달팽이들.

 


꽃놀이


가을은 꽃을 따며 논다. 지난여름부터 누누이 말했던 본격적으로 꽃을 따는 계절이 바로 시월이다. 작년에 아이들과 따며 마셨던 구절초 생꽃차의 향기를 고대하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10월 첫 주가 되니 희거나 연보라빛의 구절초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과연 쓰지 않고 향긋한 구절초(긴 시간 보관을 위해서 말리는 꽃들은 특유의 건초향이나 쓴 맛이 난다)는 정말 반갑다! 


구절초를 따며 지난가을 6학년 덩치 큰 어린이들을 추억한다. 구절초라는 꽃을 먹기 위해 따는 일을 처음으로 함께했던 6학년 우리반 어린이들은 향기가 참 좋다고 했다. 귀에 꽂고 우아하게 장난도 치고, 긴 줄기를 뽑아내서 서로 핀잔을 주면서 떠들썩했다. 액비를 주거나 웃거름을 주는 날에도 나는 구절초를 따는 것이 좋겠다며 도망치던 지우를 구박하던 여자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들도 그대로 꽃잎마다 새겨져 있다.


메리골드는 딸 때 똑똑, 경쾌한 소리를 내는 우리 반 아이들도 즐거워한다. 뜨거운 물에 우려낸 메리골드 꽃차의 색을 보고 ‘너무 예쁘다’며 감탄하더니 엄마 아빠를 드리고 싶다기에 작은 병 21개를 채울 만큼 꽃을 따기로 했다. 부모님을 위해 가을을 선물하자는 목표로 일주일에 두어 번, 쉬는 시간이나 하굣길마다 메리골드를 딴다.

 


▲작년 겨울 만들어 보관하던 태양광 건조기를 이용하여 꽃을 말리고 있다.

▲올해 메리골드를 따던 날(위, 1학년), 지난해 구절초를 따던 날(아래, 6학년) 모두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꽃잎들과 함께 흔들리며 가을을 채워 준다.

작년에는 메리골드 염색을 했다. 끓이고 식히고 소금물에 담궜다 헹궈 내는 일련의 과정이 익숙하다면 담임 교사 혼자서도 가능한 활동이다. 하지만 염색 직후 쨍하리만치 선명했던 노란색은 마르면서 금세 채도가 낮아진다.

 

 

고구마 캐는 건 재미 없었어


내게는 감자와 고구마가 오랜 시간 동안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관리도 특별히 필요하지 않아서 꼭 심어야 하는 작물이 아니다. 지난해 우리학교 4학년이 고구마 심기를 요청해서 고구마가 좀 심겨 있었다. 4월 말 밭갈이를 위한 총동원령(과한 밑거름 투입과 경운을 하지 않기 위해 시도했지만 실패)이 내려지고 텃밭 짓기를 원하는 학년 부장들과 교사들이 텃밭에 나와 1시간 남짓 낙엽 섞인 밭을 뒤집고 두둑을 만드는 데도 4학년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마 줄기를 너무 일찍 주문(5월 초)해 둔 터에 우리 교실 물이 담긴 양동이에서 보름 가까이 시들어가던 차에 텃밭 동지 보안관 선생님이 심었던 고구마다. 일찍 심은 고구마 줄기가 냉해를 입지 않을까, 마음을 쓰며 돌보고 들여다 보며 기운을 차리던 고구마 잎줄기의 모습에 고마워하던 고구마 동료는 보안관 선생님과 나였다. 잎이 무성해지고 줄기가 한창 뻗어 나와 모기에 물려 가며 고구마 잎을 올려 주고 솎아 주던 일꾼도 역시 보안관 선생님과 나, 그리고 방학 때 호출되었던 우리반 친구들이다. 


9월 중순의 어느 날, 고구마 한 두둑이 멧돼지들이 다녀간 듯 죄다 파헤쳐졌다. 무너지고 망가진 두둑을 다시 정리하고, 여기저기 쓰레기마냥 내팽개쳐 흩어진 고구마 줄기들을 아까워하며 고르고 갈무리하여 고구마 줄기의 의미 있는 생의 마감을 보살핀 이들도 보안관 선생님과 나 둘뿐이었다. 당황했지만, 텃밭을 전담하다시피 접수한 나의 욕망 탓에 늘어난 일이니 생색낼 일도 아니었고, 애초부터 혼자 애쓰는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텃밭 짓기가 즐거우신 보안관 선생님 역시 섭섭한 일은 아니었다. 온라인 등교가 재개된 시월 초의 오후, 텃밭에 커피 한 잔 들고 마실 나와 좋지 않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일하던 내게 ‘볕이 안 좋아 그런가 고구마가 밑이 안 들었더라’는 말을 던진 4학년 부장에게 나는 한 오라기의 섭섭함이 절대로 없었다. 정말이다. 그건 남부지방 기준이고, 중부는 10월 중순 이후에 캐셔야 돼요, 나는 친절하게 안내까지 드렸더랬다. 


그래서인가 10월 마지막 주까지도 4학년이 캐다가 남은 한 두둑이 계속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서리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던 주에 우리 학년의 등교 동아리 활동으로 남은 고구마 두둑을 캐서 정리하자는 비극의 단추를 내가 누르게 된 것이다. 텃밭의 주인이자 관리인은 아니지만 날이 춥기 전에 두둑에 남은 작물을 정리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레 안고 있었고, 학년의 생태 활동과 기타 외부의 교육농 활동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이라 4학년 부장에게 미리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다(메세지를 하려던 생각은 있었으나 일련의 과정을 통해 4학년을 고구마의 주인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6학년 5반이 고구마를 캐던 6교시, 텃밭에 마실을 나왔던 4학년 부장은 수업 중이던 교사에게 ‘지금 남의 밭에서 허락없이 뭐하는 짓이냐’며 아이들 앞에서 경멸의 억양과 목소리(4학년 텃밭이라고 꽂아 놓은 곳은 4학년의 공간이기 때문에 경우 없이 남의 공간을 침입하고 파헤치는 꼴을 가만히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로 나무랐고, 그에 당혹스러워하는 담임 선생님을 아이들이 위로해 주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압적인 자세와 신경질적인 말투로 우리 학년 부장을 찾아대는 전화를 동학년 선생님에게, 호출 아닌 호출을 받은 학년부장은 나 대신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 4학년 부장을 만나려 했다가 교실 문 앞에서 문전박대(그런 사과 한마디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지금은 내가 말하고 싶지 않으니 가라)를 당했다.


하! 이 모든 과정 이후 나의 역할은 아름다운 시월의 학교 텃밭을 노래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이쯤에서 생략한다. 하지만, 학교 텃밭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 땀과 진한 냄새가 가득한 노동을 경시하는 인간상을 모두 안고 있는 이에게 대처하는 일은 참 고단했다는 점을 기록하고 싶다. ‘학교’의 텃밭은 토양에 작물을 꽂고 흙과 햇볕, 비, 바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에너지를 착취하는 공간이 아니다. 무농약 유기농 작물을 무노동, 무임금, 공짜로 취할 수 있는 소비의 공간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톱에 흙 때가 가득 끼고, 손가락 끝이 작물의 물기로 시커멓게 변하며, 단지 취하기 위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살피고 존중하며 보듬는 공간이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 주고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의 모습에 경탄하는 아이들의 공간이며, 생명이 피어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마주하며 우리 역시 ‘자연을 닮은 삶’을 걷는 자로서 겸허해지는 공간이다. 그것이 ‘생태’이고 그 안에서 한 줄기 겸손함을 깨닫는 순간이 ‘전환’이 아닌가.


고작 학교 텃밭 하나로 이토록 격앙된 모습이 다소 부끄럽지만, 매년 시월이면 나는 2021년의 우장초 고구마가 떠오를 것이다. 고구마를 수확하려면 9월보다는 10월, 그것도 중순에서 말일 사이에 캐면 된다. 그리고 캘 때는 두둑을 되도록 보전하면서, 여유가 된다면 고구마 줄기들은 먹을 수 있게 갈무리하면서 캐고, 처리하기 곤란한 줄기들은 두둑 위에 보기 좋게 얹어 둔다. 나의 경우처럼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애초부터 두둑에 이름표를 꽂아 두기만 하는 자가 소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구마를 위한 노동을 확실히 수행한 자가 소유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고구마는 심고 나서 손이 덜 가는 쉬운 작물 같지만 한여름 땅으로 기어 나가는 줄기들을 뒤집어 올려 주고, 적당히 순치기를 해 줘야 한다. 여름 방학 내내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성심껏 고구마를 보살펴왔었다. (2021.08.)

▲남의 고구마를 함부로 캐다 들켜 일부만 남은 사건 현장. 다음 주 10도 이상 기온이 떨어진다는 한파 예고에 이번 주 등교일에 고구마를 캐고 밭 정리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강박이 판단을 흐렸던 것 같다. (2021.10.15.) 이후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되었고 방치되듯이 남은 고구마들은 우리 반이 토요일에 텃밭에 나가 캐어 내고 정리했다. (2021.10.30.)

▲시월 중순 이후에 캔 고구마들은 저장성이 떨어진다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고구마들이 제법 나왔다. 결국 시월 중순 이후 찬 날씨 때문에 빨리 수확해야 한다는 나의 판단은 쓸데없는 참견이었던 것으로 고백한다.


 

가을 수확


학교에 수세미나 호박을 한가득 심었다면 시월 말에는 거두는 것이 좋다. 볕이 종일 쨍하게 드는 곳이어도 초록빛 수세미들은 11월을 넘기면서 기온이 영하 가까이 가는 순간 얼어 버린다. 수세미는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수분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정도(적절히 말라가고 있는 수세미는 무게가 제법 가볍고, 주물럭거리며 만져 보면 내부의 수세미 섬유질로부터 분리된 겉껍질의 두께가 느껴진다) 마르지 않으면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채종이라도 할라치면 엄청난 물이 쓰이고 미끈거리지 않게 삶아 내는 과정도 세 차례 이상 반복해야 한다. 시월에 이미 고운 갈색으로 바싹 마른 수세미는 기분 좋게 껍질을 부수듯 까고, 씨앗을 털어서 채종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다만 마른 수세미의 진액이 가루가 되어 날리기 때문에 볕이 따스한 한낮, 밖에서 작업하는 것이 좋다. 노각이나 호박도 아침저녁 찬 기운이 들기 시작하면서 열매들이 맺히고 굵어지지만 11월을 넘기면 잎이 수명을 다해 ‘늙고 볼품 없는’ 잎줄기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들의 손에 쓰레기 봉투로 버려지기 십상이다. 여유가 있다면 시월 마지막 주나 늦어도 11월 첫 주까지는 잎과 줄기들을 모두 정리하고 텃밭으로 되돌리자.



시월에는 갖가지 박과의 작물들이 풍성하게 수확된다. 수확한 단호박을 직접 쪼개고 씨앗을 빼는 작업을 하면서 난생 처음 부엌칼처럼 큰 칼을 써 본다고 상기되었던 시은이와 수빈이는 이후 호박 자르기를 도맡아 했다.

▲낙엽처럼 잘 마른 수세미의 색깔은 누렇지만 채종과 껍질 벗기기가 용이하다. 반면 초록 수세미는 미끌거리는 수세미 진액이 있어서 수확 후 말리는 과정에서 죄다 곰팡이가 생기고, 곧바로 껍질을 제거하는 과정도 많은 에너지가 든다.

올해 수확한 조롱박 세 알은 보안관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 쪼갰다. 박을 가르는 동안 운동장 수업을 마친 6학년 형님들도 신기하다고 한참 구경하다 갔다.


  

자연스럽다


교장이 바뀌더니 학교를 둘러 감싸고 있던 나무들을 죄다 쳐냈다. 업자를 불러 부탁했다는데,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쳐냈네, 아쉬움은 1도 없다. 여름 방학 끄트머리에 주무관님의 기분을 살살 살펴 가며 ‘가을 잎들이 떨어지면 버리지 말고 나를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내 모습이 처량하다. 화단 돌덩이 같은 토양에서 비실거리던 대추나무도 완전히 쳐냈다. 주무관은 자신과 코드가 맞는 교장이 와서 속이 후련한 것 같다(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면, 나는 우리 학교 주무관님의 성실하고 부지런함, 그 덕에 학교 곳곳이 깔끔하게 정돈되며 늘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공간을 만들어 주심에 감탄과 경의를 드리고 싶다). 


어느 날은 한가득 꽃이 만발하던 화단이 듬성듬성 사라졌다. 덕분에 서로를 지지해 주던 꽃줄기들이 빈 자리만큼 남아 있는 꽃들이 빈 공간을 향해 스러졌다. 며칠 가을 폭우가 쏟아진 직후에는 죄다 엉클어지고 비틀어져서 더욱 흉측해졌다. 학년 간담회가 있던 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화단에서 제거된 꽃, 풀 줄기들을 화단 땅 위에 그대로 덮어두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어리고 반짝반짝 새것 같은 것들만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는 일상을 마주하는 아이들에게 텃밭은 오래되고 낡고 늙은 것들의 성숙과 아름다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역사와 지혜, 그 연결을 전략적으로 가르치는 공간으로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나. 그뿐 아니라 토양을 맨땅으로 드러내지 않고 지키고 살려야 하는 목적까지 알게 되는 곳으로서 더더욱. 


어지러이 피어있던 꽃들의 첫인상이 ‘자연스럽다’였다는 교장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니, 같은 장소에 대한 접근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당신은 무엇이든 ‘본디의 목적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학교 화단의 ‘본디의 목적’은 무엇인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기후 위기’와 ‘생태 전환’의 시류 속에 있는 교육 현장의 요구와 필요가 개인의 시각과 취향으로 치부되는 영역인 걸까. 학교 이곳저곳에 느닷없이 세워둔 플라스틱 화분들에 한아름 어여삐 피어 팔려 온 국화는 본디의 목적, 씨앗을 품고 초록이 사그라들면 곧 버려질 것이다.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지기 전에 내가 텃밭으로 옮겨야겠다.



학교 뒤 텃밭 마당은 우리 학교 쓰레기가 모이는 분리수거장이기도 하다. 푸른 나무들이 한창 우거질 때는 그곳의 쓰레기나 폐기물들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 나무를 몽창 베어 앙상해지니 쓰레기장이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다.

하늘로 푸른 가지를 뻗던 교정의 나무(이름을 모른다)들이 모두 잘렸다. 생장점까지 잘려 키가 높이 자라지는 못할 것 같다. 교문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 나무들도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잘렸다. 이 모습이 깔끔한가?

나무와 풀들이 초토화된 직후, 학교 주요 현관들에 놓여진 국화 화분. 한창 화려할 때 우리 학교에 팔려 왔다. 나는 저 국화들의 마지막을 매년 보아 왔기에 눈이 부시도록 짙은 색만큼이나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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