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교 텃밭, 6월
‘나’를 그리는 텃밭
지문희 경기 저현고
휴일의 마지막 날, 집을 보러 온다는 부동산 연락에 책을 들고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흔들의자에 앉아 《식물의 책》 목차를 훑어보다 ‘쑥’ 부분을 펼쳤다. “쑥이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유는 잎 뒷면에 털이 촘촘히 나 있기 때문이다” “쑥은 국화과에서 드물게 충매화가 아니라 바람에 꽃가루를 날려 수분하는 풍매화”라는 설명을 지나, ‘개똥쑥’ 부분.
처음 텃밭을 일굴 때 캐모마일인 줄 알고, 개똥쑥을 화분에 곱게 담아 엄마에게 선물했다. 몇 달 후 엄마의 말. “엄청 크게 자라는데 냄새가 꼬리꼬리해서 버렸다.” 몇 달의 경험으로 캐모마일과 개똥쑥을 구별할 수 있게 된 난, 실수는 감춘 채 눙쳤다. “잘했네.” 그런 개똥쑥이 기존의 항암제보다 항암 효과가 1200배 있다는 설명에, 바로 어제도 댕강 잘라 멀칭으로 쓴 개똥쑥을 떠올리며 ‘개똥쑥 먹는 법’을 검색했다. 한 줌 지식으로 개똥쑥의 존재 의미를 바꾸는 인간의 민첩함이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리 식물을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 ‘식물에 몰입하게 된 걸까?’ 텃밭에 몰입하게 된 경험, 계기 말고 몰입이란 행동의 원인이 되는 사고 작용이 궁금했다. 즐거울 테니 할 텐데, ‘왜 즐거울까?’ 하는 철학적 질문! (철학을 여기다 써도 되나 싶기는 하다.)
▲ 위는 캐모마일과 차이브. 아래는 개똥쑥
‘도시농업기초과정’이 인연이 되어, 많이 의지하게 된 동네 언니 햇님. 일상적인 얘기는 금세 지루해하시고 ‘자신’에 대해 지치지 않고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햇님 언니를 만나면 나도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많은데, 그 경험이 참 고맙고 소중하다. 햇님 언니가 올해 5평 되는 작은 텃밭을 시작하셨다. 다른 동기들이 자신만의 텃밭을 가꾸고, ‘도시농업전문가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준비할 동안 자신은 텃밭에 확신이 없다고 하셨다. 또 교육 중 동기들이 함께 키운 토마토가 너무 맛이 없다며 들어가는 품에 비해 참 보람 없다고 하셨던가? 그런 햇님 언니가 올해 드디어 텃밭을 시작하셨다. 3년 동안 매일 퇴근 후 텃밭에 가는 ‘나’의 영향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때가 되어 땅 가까이 오셨을 가능성이 크다.
▲ 햇님 언니의 작품들
며칠 전 텃밭 3개월째인 햇님 언니와 카페에서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텃밭 시작은 갑자기 찾아온 불행을 흘려보내고 직접 입을 옷을 만들면서 단단해진 햇님 언니 친구 때문이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소비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능동성을 확인하고 실감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친구 분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유난히 마른 몸, 선명한 이목구비와 조화로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갔다.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든 옷이었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직접 입을 옷을 짓는 일과 같은 걸까? 텃밭은 늘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런 텃밭은 묘하게 나를 닮아 있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계절과 함께 그리는 자화상 같다. 쌈채소는 입맛 없는 여름 저녁, 비빔밥으로 해 먹을 정도만 심고, 허브는 식초, 오일, 페스토를 만들어야 하니 다양하게 많이 심는다. 밭에 갈 때마다 수확할 수 있는 부추는 필수로 심는다. 박남준 시인의 〈흰 부추꽃으로〉란 시를 좋아하니, 단단한 대에 올라오는 흰 부추꽃도 꼭 봐야 한다. 그리고 땅을 갈지 않아도 되는 머위, 참나물, 취나물, 당귀, 미나리 등 다년생 작물을 위한 이랑. 이랑 사이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텅 빈 공간도 있다. 비록 아스파라거스 옆에 있어 벌들과 함께해야 하지만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도 보인다. 당뇨가 있는 아버지를 위한 당조고추, 과일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한 참외와 딸기. 작년 장마에 당근이 다 물러서 텃밭에서 달아나 차에서 울던 조카를 위한 색깔 당근들. 벨기에 사는 친구 집에 갔을 때, 감기 걸린 나에게 친구가 발라준 오일과 향이 비슷한 타임. 지인들에게 나눠주면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노랑주키니호박까지. ‘그렇구나. 나는 혼자 있는 시간만큼 사람도 참 많이 좋아하는구나.’ 다른 밭에서 보고 따라 심은 ‘무스카리, 은쑥, 커먼 세이지, 천인국, 샤스타 데이지, 수레국화 등 ‘나는 욕심도 참 많다.’
나에게 필요한 적당한 물건을 만들듯 먹거리를 직접 생산한다. 그렇게 ‘나’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알아가며 필요 없는 욕망이 사그라들고, 주체적인 삶이 되어간다. 땀을 흘리며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피며 자연과 연결된 삶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한다. 결국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나’라는 인간을 긍정하게 된다. ‘꽤 쓸 만한데’ 하면서 말이다. 이 마음이 함께하는 학생들에게도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육농’을 계속하려 한다.
다음은 햇님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한 동네 산책에서 본 수많은 자화상들이다, 능동적인 삶들.
▲가로수를 연결해 키우는 콩
▲ 이 담대한 주민은 포도도 키우신다.
▲남천과 금계국
▲욕조 밭
▲저 의자에 앉아 화단을 바라보실 듯
▲박스를 상추 사이에 까셨다. 이 분은 고수다.
나의 학교 텃밭, 6월
‘나’를 그리는 텃밭
지문희 경기 저현고
휴일의 마지막 날, 집을 보러 온다는 부동산 연락에 책을 들고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흔들의자에 앉아 《식물의 책》 목차를 훑어보다 ‘쑥’ 부분을 펼쳤다. “쑥이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유는 잎 뒷면에 털이 촘촘히 나 있기 때문이다” “쑥은 국화과에서 드물게 충매화가 아니라 바람에 꽃가루를 날려 수분하는 풍매화”라는 설명을 지나, ‘개똥쑥’ 부분.
처음 텃밭을 일굴 때 캐모마일인 줄 알고, 개똥쑥을 화분에 곱게 담아 엄마에게 선물했다. 몇 달 후 엄마의 말. “엄청 크게 자라는데 냄새가 꼬리꼬리해서 버렸다.” 몇 달의 경험으로 캐모마일과 개똥쑥을 구별할 수 있게 된 난, 실수는 감춘 채 눙쳤다. “잘했네.” 그런 개똥쑥이 기존의 항암제보다 항암 효과가 1200배 있다는 설명에, 바로 어제도 댕강 잘라 멀칭으로 쓴 개똥쑥을 떠올리며 ‘개똥쑥 먹는 법’을 검색했다. 한 줌 지식으로 개똥쑥의 존재 의미를 바꾸는 인간의 민첩함이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리 식물을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 ‘식물에 몰입하게 된 걸까?’ 텃밭에 몰입하게 된 경험, 계기 말고 몰입이란 행동의 원인이 되는 사고 작용이 궁금했다. 즐거울 테니 할 텐데, ‘왜 즐거울까?’ 하는 철학적 질문! (철학을 여기다 써도 되나 싶기는 하다.)
▲ 위는 캐모마일과 차이브. 아래는 개똥쑥
‘도시농업기초과정’이 인연이 되어, 많이 의지하게 된 동네 언니 햇님. 일상적인 얘기는 금세 지루해하시고 ‘자신’에 대해 지치지 않고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햇님 언니를 만나면 나도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많은데, 그 경험이 참 고맙고 소중하다. 햇님 언니가 올해 5평 되는 작은 텃밭을 시작하셨다. 다른 동기들이 자신만의 텃밭을 가꾸고, ‘도시농업전문가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준비할 동안 자신은 텃밭에 확신이 없다고 하셨다. 또 교육 중 동기들이 함께 키운 토마토가 너무 맛이 없다며 들어가는 품에 비해 참 보람 없다고 하셨던가? 그런 햇님 언니가 올해 드디어 텃밭을 시작하셨다. 3년 동안 매일 퇴근 후 텃밭에 가는 ‘나’의 영향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때가 되어 땅 가까이 오셨을 가능성이 크다.
▲ 햇님 언니의 작품들
며칠 전 텃밭 3개월째인 햇님 언니와 카페에서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텃밭 시작은 갑자기 찾아온 불행을 흘려보내고 직접 입을 옷을 만들면서 단단해진 햇님 언니 친구 때문이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소비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능동성을 확인하고 실감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친구 분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유난히 마른 몸, 선명한 이목구비와 조화로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갔다.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든 옷이었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직접 입을 옷을 짓는 일과 같은 걸까? 텃밭은 늘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런 텃밭은 묘하게 나를 닮아 있다.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계절과 함께 그리는 자화상 같다. 쌈채소는 입맛 없는 여름 저녁, 비빔밥으로 해 먹을 정도만 심고, 허브는 식초, 오일, 페스토를 만들어야 하니 다양하게 많이 심는다. 밭에 갈 때마다 수확할 수 있는 부추는 필수로 심는다. 박남준 시인의 〈흰 부추꽃으로〉란 시를 좋아하니, 단단한 대에 올라오는 흰 부추꽃도 꼭 봐야 한다. 그리고 땅을 갈지 않아도 되는 머위, 참나물, 취나물, 당귀, 미나리 등 다년생 작물을 위한 이랑. 이랑 사이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텅 빈 공간도 있다. 비록 아스파라거스 옆에 있어 벌들과 함께해야 하지만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도 보인다. 당뇨가 있는 아버지를 위한 당조고추, 과일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한 참외와 딸기. 작년 장마에 당근이 다 물러서 텃밭에서 달아나 차에서 울던 조카를 위한 색깔 당근들. 벨기에 사는 친구 집에 갔을 때, 감기 걸린 나에게 친구가 발라준 오일과 향이 비슷한 타임. 지인들에게 나눠주면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노랑주키니호박까지. ‘그렇구나. 나는 혼자 있는 시간만큼 사람도 참 많이 좋아하는구나.’ 다른 밭에서 보고 따라 심은 ‘무스카리, 은쑥, 커먼 세이지, 천인국, 샤스타 데이지, 수레국화 등 ‘나는 욕심도 참 많다.’
나에게 필요한 적당한 물건을 만들듯 먹거리를 직접 생산한다. 그렇게 ‘나’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알아가며 필요 없는 욕망이 사그라들고, 주체적인 삶이 되어간다. 땀을 흘리며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피며 자연과 연결된 삶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한다. 결국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나’라는 인간을 긍정하게 된다. ‘꽤 쓸 만한데’ 하면서 말이다. 이 마음이 함께하는 학생들에게도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육농’을 계속하려 한다.
다음은 햇님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한 동네 산책에서 본 수많은 자화상들이다, 능동적인 삶들.
▲가로수를 연결해 키우는 콩
▲ 이 담대한 주민은 포도도 키우신다.
▲남천과 금계국
▲욕조 밭
▲저 의자에 앉아 화단을 바라보실 듯
▲박스를 상추 사이에 까셨다. 이 분은 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