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6호]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오늘의 교육》 86호는 최근 불거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교육을 소환하는 방식에 물음표를 던진다. 특집에서 제기된 진단과 제안은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지,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기획에서는 12.3 내란과 광장에서의 투쟁 이후 제안된 사회 개혁 과제와 더불어 대통령 선거를 지나 차기 정부가 교육정책에서 유념해야 할 점을 다루었다. 수업 지면에는 대안적이고 적극적인 현장체험학습의 사례를 소개했고, 초등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중계를 시청한 생생한 경험담도 에세이로 담았다. 


특집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정치·사회적 전환기 속, 새 정부 출범과 맞물려 교육과 사회에서 풀어야 할 과제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의 확산과 발호, 여성 혐오와 소수자 차별 등이 여실히 드러났다. 진보 교육계에서는 ‘극우 대응 교육’, ‘미디어 리터러시’, ‘민주시민교육’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특정 능력 배양이나 ‘계몽’ 위주의 교육 담론이 올바르고 효과적인 해결책인지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청소년을 주체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경쟁, 불평등은 외면한 채 현상만을 ‘문제’로 규정하는 위험한 시각일 수 있다. 이런 접근은 교육의 본질을 흐리고 근본적 해결을 방해한다. 《오늘의 교육》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최근 이야기되는 교육 담론의 한계와 사회적 맥락을 짚어 본다.
박권일은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를 능력주의와 성찰의 결핍에서 찾는다. 학교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는 시험과 경쟁, 서열 중심의 능력주의로 작동한다. 문제는 이 두 가치가 단순히 충돌하는 것을 넘어, 능력주의가 교육을 압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화 세력’과 고학력 중산층 진보 인사들이 평등을 말하면서도 자녀를 ‘엘리트화’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며, 이런 모순된 태도가 교육의 신뢰를 허무는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를 ‘이중 규범’과 ‘이중 구속’의 구조로 설명하며,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배우면서도 불평등한 현실을 체화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민주시민교육이 공허한 담론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론이나 정책이 아니라, 가르치는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결국 문제는 그 가치를 살아 내려는 용기의 결여와 성찰의 부재다.
공현은 문제를 단순히 교육이 부족한 결과로만 진단하는 시선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자신의 청소년기를 돌아보며, 삶의 의미나 책임 없이 ‘유예된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의 공허함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기존 방식을 비판한다. 그는 단지 어떤 능력을 추가로 장착시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태도를 ‘부품 장착식 교육’이라 명명하며 비현실성을 지적한다. 또한 청소년을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봐야 하고, 그들이 처한 조건과 현실을 함께 바꾸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도 학교는 침묵을 지켰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조용히 굳게 닫힌 문 뒤에 숨었다. 교사인 톨은 이 침묵이 단지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학교가 본래부터 지배 질서 재생산의 도구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해방 이후 학교는 군사 독재 정권의 국민 양성소였으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맞는 인간형을 길러 냈다. 교사는 체제 유지의 파수꾼으로 자리 잡았고, 교육은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과정이 아닌, 통제와 길들이기, 그리고 이윤 추구의 도구가 되었다. 위기 때마다 ‘교육이 문제’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실제로는 ‘학생이 문제’라는 진단 아래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한은 청소년·청년 남성들 사이에 뿌리내린 여성과 소수자를 경쟁 상대로 보는 ‘제로섬적 세계관’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이 고착된 사회 구조의 결과임을 지적한다. 끊임없는 자기 증명 압박과 실패 경험이 그들의 불안과 혐오를 키우고 이는 교육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임을 보여 준다. 그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 ‘교육’이 아니라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청소년과 함께 고민하고 질문하며 신뢰를 쌓는 ‘동행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육과 사회가 청소년의 삶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그들의 경험을 존중할 때만 변화가 가능하다. 이 위기에 대해 우리 사회는 성찰과 연대의 자세로 응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 교육에 갇혀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는 특정 지식의 전달이나 능력 배양으로 해결할 수 없다. 청소년을 ‘문제’로 규정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시각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청소년을 인간으로,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삶과 사회 구조를 함께 바꾸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교육은 ‘무엇을 가르칠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어야 한다. 미래의 인재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서 청소년과 사회가 연대하여 삶과 구조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성찰과 실천이 절실하다. 능력주의와 지식 전달 위주의 틀을 넘어 청소년의 현실을 깊이 살피고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새로 들어설 정부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교육 과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는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편집부

       

 


차례


읽은 이야기 | 윤예슬


오늘의 교육을 열며

아이들은 어떻게, 무엇을 통해 배우는가 | 전세란

 

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하는 이유 | 박권일

 -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모순과 성찰의 결핍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어떻게 살고 있나’가 문제 | 공현

‘그들’은 학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 톨

 - 교육을 한 적 없는 학교에 저항하기 위하여

우리의 ‘소년의 시간’, ‘구원’하고 ‘계몽’할 수 있나요? | 이한

 

기획 | 내란, 광장, 대선, 그리고 개혁의 과제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위한 ‘사회대개혁’ | 서채완

누가 교육정책을 대변하는가 | 이윤경

 - ‘교육·사회 대개혁을 위한 비상시국 교육원탁회의’와 광장의 요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차별’ | 문호진

 

욱현이 / 겨우 핀 꽃 | 안준철

논두렁에서 / 소만 무렵 | 임덕연

 

연재 |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성교육이되 마지막 회

안전한 임신중지를 성교육에 담아내기 | 나영

 

수업

현장체험학습을 체험하는 중 | 임선영

 

기고

급식은 교육이고, 급식노동자도 교육노동자다 | 정명옥

통제와 낙인의 도구, 상벌점제 | 이은선

 

에세이

수업을 멈추고, 민주주의를 켜다 | 김기수

 - 키가 작은 시민들과 함께한 파면의 순간

 

리뷰

교육운동이 기억해야 할 저항과 연대의 역사 | 강동선

- 《고등학생운동사》

돌봄, 학교에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하다 | 이현애

- 《돌봄과 인권》, 《돌봄의 상상력》

 

오늘 읽기 | 공현

세 줄 새 책

어제와 오늘의 어린이책 | 조현민



책 속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불평등을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에게 능력주의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민주주의는 선거 때나 잠깐 경험하는, 화석화되고 추상적인 이념으로 인식되곤 한다. 앞서 교육 규범으로서 민주주의가 현실 규범으로서 능력주의와 병존한다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시민교육’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능력주의의 비대칭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능력주의는 너무나 강력하게 현실을 규율하기에 따로 교육할 필요조차 없다.

-­ 본문 33~34쪽, 박권일,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실패하는 이유〉

 

청소년들을 일방적으로 교육‘받는’ 대상으로 간주하며 무슨 교육을 하면 무슨 능력이 길러질 것이라는 전제부터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경시하는 것이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그런 느낌으로 명명해 보자면 이런 사고방식은 ‘부품 장착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기계에 부품을 추가하고 갈아 끼우듯이 이 기능 저 기능을 갖다 붙이려 드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 본문 42쪽, 공현, 〈‘무엇을 가르칠까’보다 ‘어떻게 살고 있나’가 문제〉

 

확신은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는 게으름의 변명이다. ‘교육을 한다’라는 확신 속에서 교육 아래 사라진 아동 인권을 못 본 척하면 안 된다. ‘평등을 교육한다’라는 확신 속에 성평등을 불편해하거나 ‘착한 페미니즘’, ‘건강한 페미니즘’ 운운하며 건전하고, 온건하고, 무해하고, 고분고분하고, 전복적이지 않은 평등을 요구하면 안 된다. ‘평화가 중요하다’라는 확신 속에서 갈등이 없는 교실을 만든다며 젠더 권력과 나이 권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생태전환교육을 한다’라는 확신 속에 ‘탄소 제로’,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환경교육인 양 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라는 확신 속에 학생을 학교운영위원회의 들러리로 세우면 안 된다. ‘교육을 걱정한다’라는 확신 속에 입시 경쟁은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학생을 위해서’라는 확신 속에 학생들 뒤에 숨으면 안 된다.

-­ 본문 60~61쪽, 톨, 〈‘그들’은 학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활동가들 중 누구도 어떤 책을 읽고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다. 그보다 존경하는 어른, 괴로워하는 친구, 사랑하는 애인과 가족 등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누적된 변화의 시간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어쩌면 이런 변화가 너무 느리고 고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자를 꿈꾸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청소년과 눈 마주치고 그들의 삶을 고민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이런 변화는 그저 일부가 아닌 누군가의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 우리 모두 분명 변한다. 단번의 구원, 계몽이 아니라, 주변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관심과 돌봄 덕분에 변한다.

-­ 본문 76쪽, 이한, 〈우리의 ‘소년의 시간’, ‘구원’하고 ‘계몽’할 수 있나요?〉

 

12.3 내란이 종식된 사회는 내란을 자행할 수 있었던 사회와는 확연히 달라진 사회여야 한다. 만연했던 차별과 혐오, 권력 기관에게 보장된 무분별한 권력, 시민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정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정책들, 입시 중심의 교육 등은 언제든지 내란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구조적 원인일 수 있다. 민주 사회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12.3 내란을 법 기술로 정당화하던 엘리트 관료들, 시민들의 절박한 호소를 뭉개고 당파적 이득만 챙기는 정치인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앞세워 계엄을 ‘계몽령’이라 하던 극우 혐오 세력 등을 만든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이러한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관점에서 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

­ - 본문 85~86쪽, 서채완,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위한 ‘사회대개혁’〉

 

집단 이기주의를 버리고 서로 화합하는 성숙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교육계에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서로의 발목을 잡아 양쪽 모두 옴짝달싹 못 하고 멈춰 있는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학생인권법, 유보통합, 고교학점제, 돌봄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운동 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요구해도 정부가 들어줄까 말까 한데, “서로 합의가 되지 않았으니 어느 쪽 의견도 못 들어주겠다”는 교육 당국의 핑계에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선거 캠프에서도 마찬가지 논리로 교육은 뒷전이다. 각 단체들의 교육정책을 취합해 제안했던 교육운동 연대체들도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은 아예 제외시키고 무난한 정책들만 제안해 왔다. 교육정책이 수십 년 동안 새로울 것 없는 재탕, 삼탕 무한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부터 달라져야 한다.

­- 본문 96쪽, 이윤경, 〈누가 교육정책을 대변하는가〉

 

결국 유명 특목고, 자사고나 국제학교의 ‘선진적 모델’은 보통 그들의 요란한 홍보와 달리 애당초 존재하지 않거나, 공교육 바깥의 자원을 사교육이나 ‘부모 찬스’ 등의 사적 구제를 통해 끌어와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킹 노하우’는 면접 합격자 답안 복원 등의 ‘데이터 사유화’, 사교육 컨설턴트가 쓴 생기부 초안을 학생이 제출하면 그대로 받아적는 식의 (학부모나 사교육 업체와의) ‘암묵적 담합’처럼, 뿌리 깊은 악습에 해당합니다. 이는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어렵고, 연수 등의 명시적인 형태로 전수될 리도 없습니다.

­- 본문 113쪽, 문호진,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차별’〉

 

최근 한 청소년 내담자는 유산유도제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셰어에 대한 정보를 찾아 직접 셰어의 카카오톡 채널로 연락을 했다. 가정폭력과 현재 파트너와의 관계, 경제 상황 등 자신의 상황과 앞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 이미 많은 부분을 고민하고 판단한 상태였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건 ‘미성숙’을 전제로 한 일방적 개입이 아니라 필요한 역량과 자원을 일상에서 함께 키워 나가는 여건,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지 기반, 그리고 편견이나 낙인,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언제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이다. 학교가, 교사가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 본문 139쪽, 나영, 〈안전한 임신중지를 성교육에 담아내기〉

 

학생들의 오해에 대해 교사회에서 입장을 정리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먼저 문화제에서 놀란 학생들에게 사전 안내와 소통을 충분히 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온라인으로 진행한 사전 교육에서 강정에 관한 소개와 평화문화제에 대한 안내가 있었고, 해군기지와 강정천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활동가분들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들었지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었겠다 싶었다. 그러나 문화제는 시위가 아니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은 분명 부당한 일이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의’라고 했다.

-­ 본문 153~154쪽, 임선영, 〈현장체험학습을 체험하는 중〉

 

학교는 조리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며 인사하고 노고에 감사하는 학생과 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인문적으로 척박한 환경은 노동 주체로서의 노동자성을 형성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이것 역시 악순환이다. 노동자로서, 어른으로서 당당하고 자부심 있는 태도가 결여된 현재의 학교, 급식 노동 현장은 바람직한 것일까? 결과적으로 학교에서 급식 시간, 급식 장소는 교육 시간도 교육 현장도 아닌 제3의 장소가 되고 만다.

-­ 본문 164쪽, 정명옥, 〈급식은 교육이고, 급식노동자도 교육노동자다〉

 

상벌점제가 비교육적인 것은 단순히 점수를 매기기 때문이 아니다. 제도의 목적과 효과가 감시와 통제의 강화에 있기 때문이다. 상벌점제는 어떤 행동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지 않고,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처벌을 정당화한다. 학생이 ‘문제 행동’을 했을 때 그 이유와 맥락을 살피고 함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상벌점을 부과한다. 그러면서 학생은 ‘남에게 도움이 되고 보람차서’가 아니라, ‘상점을 받기 위해’, ‘벌점을 깎기 위해’ 선행을 하게 된다. 규칙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벌점을 피하기 위해’ 지키게 된다. 규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해서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처벌을 피하거나 보상을 얻기 위한 외적 동기로 움직이게 만든다면 그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본문 175쪽, 이은선, 〈통제와 낙인의 도구, 상벌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