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90호] 교육, 그 존재의 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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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90호 특집은 오늘날 학교와 교육의 현실을 포착하며, 사유와 신뢰가 없고, 분리와 배제를 정당화하며, 지속불가능한 학교를 이야기한다. 기획에서는 계명대 유학생 뚜안 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이주민·유학생 정책의 문제를 짚어 보았고, 영화 〈3학년 2학기〉 감독을 인터뷰했다. 



특집

교육, 그 존재의 밀도


매년 새로운 이름의 정책과 담론, 이른바 ‘○○ 트렌드’ 속에서 교육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변화가 반복될수록 학교와 교육은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규정과 매뉴얼, 절차와 책임 분담은 촘촘해졌지만, 교육의 주체들은 자신의 역할과 책임, 존재의 무게를 체감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학교는 사유의 공간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번 특집은 오늘의 학교가 어떻게 사유를 잃어 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토론과 숙의가 사라진 결정 구조, 갈등을 외부 절차로 넘기는 외주화와 사법화, 신뢰 대신 증거와 감시에 의존하는 문화,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배제, 지역 소멸의 흐름 속에서 비워지는 학교의 자리까지. 이러한 장면들은 개별 현상이 아니라, 교육의 구조와 언어가 변화해 온 결과다. 학교가 더 이상 스스로 책임지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공간으로 기능하지 못할 때, 교육 전반에서 ‘존재의 밀도’는 옅어지고 있다.
양서영은 규정개정위원회에서 벌어진 하복 위 겉옷 금지 논의를 통해, 학교 민주주의가 어떻게 형식만 남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토론과 숙의 없이 설문으로 결론이 내려진 결정은 규제 강화로 이어졌고, 이는 이미 정해진 답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정답이 먼저 주어지는 교육과 촘촘한 규정 속에서 학생과 교사는 함께 사유하는 경험을 잃어 간다. 이 글은 사유가 사치가 된 학교에서, 왜 다시 질문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양여경은 특수교사 20년 차의 시선으로, 통합교육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실패하도록 설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시간제 통합교육’은 통합의 이름으로 분리와 배제를 정당화하고, 그 책임은 장애 학생과 부모에게 전가된다. 필자는 통합교육의 이상을 말하기보다, 학교가 실패를 은폐해 온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저항임을 강조한다.
난다는 교실 내 CCTV 설치 논란을 계기로, 학교가 ‘신뢰’ 대신 ‘증거’와 ‘감시’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름을 비판한다. 불평등한 증거 수집 조건은 감시 요구를 키웠고, 감시는 학교를 통제의 공간으로 고착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난다는 카메라가 아니라 기록과 문제 제기 권리, 다중의 참여를 통해 서로 ‘감시자’가 아닌 ‘목격자’로 존재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윤경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와 교권보호위원회의 교육지원청 이관을 통해 교육의 사법화와 외주화가 학교 안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짚는다. 갈등은 교육의 언어가 아닌 법과 절차의 언어로 처리되고, 처벌과 매뉴얼은 남았지만 사과와 화해, 관계 회복의 시간은 사라졌다. 문제를 학교 밖으로 넘길수록 학교는 더 안전해지기보다 더 취약해졌다.
이민희는 전남 영광 묘량중앙초 사례를 통해 농촌 교육과 지역 소멸 문제를 조명한다. 작은 학교를 지키려는 선택은 공동체를 변화시켰지만, 농촌 전반의 구조적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학교를 교육·문화·돌봄의 지역 거점으로 다시 사유하며, 지역과 함께 지속 가능한 교육의 가능성을 묻는다.
이번 특집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학교는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질 수 있는 공간인가. 사유 없는 결정, 외부로 이전된 책임, 감시와 절차로 대체된 관계, 반복되는 배제와 비워지는 학교의 자리는 우연히 나란히 놓인 장면들일까. ‘교육, 그 존재의 밀도’는 무엇을 더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빠져 왔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을 다시 학교와 교육의 한가운데에 놓으며, 교육이 어떤 무게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독자에게 되돌려 묻고자 한다.

- 편집부



차례


 

읽은 이야기 | 최은숙

 

오늘의 교육을 열며

다시 ‘교육 불가능’의 의미 | 공현

 

특집│교육, 그 존재의 밀도

사유하지 않는 학교 | 양서영

학교가 통합교육에 실패하는 방식 | 양여경

감시를 바라게 되는 학교 | 난다

- 불신과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외주화된 책임, 무력해진 학교 | 이윤경

두려움과 가능성의 경계에서 | 이민희

- 농촌 교육의 현실과 과제

 

기획│한 유학생의 죽음을 부른 가혹한 구조

이주민, 유학생 강제 추방이라는 지옥도 | 박중엽

한 유학생의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질문들 | 송은정

- 체류 제도와 대학 사이에서 배제되는 삶

 

후속│3학년 2학기, 공백과 비틀거림의 시간

교육과 노동 사이, 살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 이란희, 신운섭

- 영화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 인터뷰

 

뒤집기 / 봄눈 | 김영언

텃밭 / 전학생 | 하상만

 

연재│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②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사유하기 | 박복선, 윤상혁, 조진희

 

기고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와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의 실제 | 이혁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서 벌인 미술교육 | 김인규


에세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 | 최석우

- 구례 ‘자라는공동체’의 이야기

 

리뷰

인종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은유 | 치리

- 〈주토피아2〉

오늘의 학교를 떠올린다 | 서희

-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 읽기 | 공현

세 줄 새 책

어제와 오늘의 어린이책 | 조현민



책 속에서



어디에도 깊은 고민은 없었다. 우리가 왜 이런 규정을 만들고 없애야 하는지, 이성 교제와 화장은 교육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학생들의 삶에 대한 논의보다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논의만 있었다. 모든 논의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생각은 ‘규정을 어기려는 학생들은 나쁜 학생들이고 그 학생들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본문 26~27쪽, 양서영, 〈사유하지 않는 학교〉


이제 나는 더 이상 학교의 성공을 응원하지 않겠다. 학교의 실패를 슬퍼하지도 않겠다. 지금 필요한 일은 통합교육의 이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통합교육을 실패로 이끈 조건들을 드러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학교가 통합교육에 실패하는 방식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학교의 은폐된 전략을 하나씩 가시화하는 일, 그 ‘꼼수’를 언어로 드러내는 일만이 학교의 의도된 실패에 맞설 수 있는 유력한 대응 전략이 될 것이라 믿는다.

- 본문 33쪽, 양여경, 〈학교가 통합교육에 실패하는 방식〉


학교에 왜 이토록 오랫동안 불신이 뿌리내렸는지, 불평등과 불균형을 함께 인식하고 바꿔 나가기 위해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객관적인 재판 증거가 아닌 신뢰와 평등, 참여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CCTV의 시선을 빌려 서로가 서로에게 감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가 되어 주는 학교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 ­ 본문 51쪽, 난다, 〈감시를 바라게 되는 학교〉


학폭위와 교보위가 사법화의 통로라면, 이 과정에서 진행되는 ‘교육의 외주화’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커다란 위기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법적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관련 학생과 보호자 뒤에 변호사가 있을 게 분명하니 학교로서는 자체 해결보다 외부로 넘기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 본문 57쪽, 이윤경, 〈외주화된 책임, 무력해진 학교〉


세계 최악의 저출생 국가에서 ‘인구 위기’는 곧 ‘교육’과 ‘돌봄’의 위기이다. 마을과 교육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마을이 살아야 교육이 살고, 교육이 살아야 마을은 희망을 키울 수 있다. 물론 사회 문제 해결의 해법을 학교 교육을 외과 수술 방식으로 찾겠다는 발상은 일방적이고 편협하다. 사회가 엉망인데 학교만 달라질 수 있나? 이기적인 욕망들을 그대로 두고서 교육만 핀셋으로 집어내듯 바꾸는 게 실현 가능한 일인가? 교육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구조를 반영한다. 사회와 교육의 선순환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와 교육의 미래 모두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사회’라야 ‘좋은 교육’도 가능하다. ‘좋은 교육’이 있어야 ‘좋은 사회’도 지속가능할 것이다.

­- 본문 67쪽, 이민희, 〈두려움과 가능성의 경계에서〉


유학생에게 가혹한 이 구조는 낯설지 않다. 한국의 교육 역시 실패와 유예를 허용하지 않는 체계 속에서 작동해 왔다. 다만 유학생에게 그 실패의 대가는 ‘성적’이 아니라 ‘체류 자격 상실’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치명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제도 개선보다 대학에 책임을 떠넘겨 왔다. 교육부는 ‘불법 체류자 비율’을 기준으로 대학 지원을 차등한다. 그 결과 대학은 학생의 권리보다 체류 관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2023년 한신대학교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강제 출국 사건 같은 게 발생하는 것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인권 침해적인 통제가 정당화되고 있다.

-­ 본문 85쪽, 송은정, 〈한 유학생의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질문들〉


“선생님들은 되게 다양한 계급의 아이들을 만나는데, 늘 ‘노력(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차피 퍼센티지가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성공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이. 그럼 성공하지 못할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 정작 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 하지 않더라고요.”

이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진단에 가깝다. 대학 입시처럼 성공이 상대적 순위로 정의되는 이상,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교육은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그렇다면 성공하지 못하는 다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교육의 테이블 위에 오르지 않는다.

-­ 본문 93~94쪽, 이란희·신운섭, 〈교육과 노동 사이, 살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교육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터전이 사물들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사유 역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여러 가지 환경들과 엮여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과학계에서 얘기하는 건 탄소 중립이에요. (……) 그러한 물질적인 변화가 수반되려면 거기에 맞춰서 사회, 경제, 교육, 문화도 전환의 단계가 있어야 하잖아요. 예를 들어 그걸 교육에 적용한다면 장기적으로 2050년에 바뀔 교육의 상을 하나 그려 봐야 해요. 지금과 다른 인간 너머 교육 또는 생태적 전환의 페다고지라는 것이 2050년도에 완전히 구현된다고 보고, 그때의 학교는 어떤 모습이고 그때의 교육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를 상정하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좀 짧게는 2030년까지 우리가 절반이라도 바꿔 보자, 그럼 교육에서 절반을 바꾼다는 게 무엇인지 시급하게 바꿔야 할 목표들을 몇 가지 정해서 절반의 전환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죠.

-­ 본문 149쪽, 박복선·윤상혁·조진희,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생각하기〉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을 살펴본 뒤 다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여러 고민이 떠오른다. 나는 국가교육위원회 산하 ‘중장기 국가교육발전 전문위원회’에서 2023년 1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중장기 교육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원래 위원의 임기는 2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기 전문위원 전원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활동을 종료했다. 전문위원회 내부의 의견 대립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초정권적이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였지만,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위원회보다 갈등이 잦았고, 합의를 만들어 내는 구조로 작동하지 못했다. 전문위원 선정이 이른바 ‘보수.진보 균형 배분’ 방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여 숙의보다는 충돌이 반복되는 장이 되어 버렸다.

-­ 본문 169쪽, 이혁규,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와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의 실제〉


더 나아가 최고샘은 교사가 학교 밖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

최고샘은 수업 시간에 젠더와 혐오 표현 등 현실 세계와 연관된 주제들을 논한다. 이미 학생과 관계가 형성돼 있기에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된다. 또한 성별 구분처럼 학생에게 해로운 게 있다면 기꺼이 나서서 걸러 낸다. 이 대목에서 내가 학교에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나에게 호응한 학생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위로가 됐다.

­- 본문 207쪽, 서희, 〈오늘의 학교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