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1호] 부당한 지배 -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다시 묻는다


보이게, 듣게 만드는 것

(……)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를 ‘치안’이라는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 속에 묶어 둔다. 치안으로서 정치는 통치 과정이다. 치안으로서 정치는 동의를 분할의 논쟁적 형상들로 대체하기보다 인간들을 공동체(국가)로 결집시켜 동의를 조직하고, 그들 각자에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킨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성의 장에서 정치는 치안으로 변화하며, 국가–교사–학생의 위계적 관계가 재생산되기 때문에 평등 과정이며 해방 행위로서 정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치안의 질서를 가로질러 그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배의 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치안이 아니라 정치의 공간에서는 교육과정, 교수–학습, 교과서, 평가가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주체들의 정치적 공간으로 바뀐다. 정치의 출현과 함께 치안 질서는 순간적으로 와해되고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때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며, 정치적 중립성은 보다 적극적인 교원과 학생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전제가 된다.

특히 정치적 중립은 국가의 교육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제한하고 학생들이 단순히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정치 주체가 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존재로 바뀐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써 듣게 만드는 행위이다.

민주주의란 하나의 구조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하는, 온갖 구조를 가진 거대한 시장이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 모든 사회적 지위 분배, 남녀 사이에 완전한 대등성을 보장하는 전제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참여와 토론, 논쟁적이고 자유로운 탐구가 보장되어야 한다. 즉 통치자는 피통치자와 같고 청년들은 장년층과 대등하며, 학생들은 교사들처럼, 동물들은 그들의 주인들처럼 대우를 받아야 한다.

‘민주공화국’은 1919년 이후 대한 ‘제국’으로 돌아가기보다 공화국을 이룩하고자 하는 뜻을 실천으로 옮긴 인민들로부터 이후 각종 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헌 헌법에 이르기까지 ‘민주공화국’이란 말을 담기 위해 치열하게 민주주의를 일구어 간 시간을 통해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은 다양하고, 그 시대 깨어 있는 민중들의 조직화 정도, 그 참여 방식과 수위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공화국 대한의 모습은 외부에서 어느 한순간에 이식될 수 있거나 단일한 모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세력과의 지난한 정치 투쟁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가 선거 시기를 포함해 일상에서 교육 전문성과 자주성을 구현하는 정치의 주체로 나서지 않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교육적 상상력도 거기서 멈출 것이다.

- 편집위원장 정용주


차례


4 바라보다 / 최승훈 기자 PDF


특집 부당한 지배 -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다시 묻는다
▐ 6 보이게, 듣게 만드는 것 정용주 PDF 바로보기


증언과 고백

12 사소한,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하는 결단  정은균 PDF 바로보기

20 평교사로서 하지 않았던 일 세 가지 배희철 PDF

29 정치적이나 정치적이지 않다 최병우 PDF 바로보기

37 편향적인, 그러나 그것도 괜찮을 김진 PDF 바로보기

42 정치적 중립, 모호하고도 굴욕적인 미나리 PDF 바로보기

49 “학생들을 선동하여 질서를 문란하게 한 학생” 류제민 PDF

58 교사는 지식인이다– 부당 전보에 맞선 김현수, 정찬일 교사를 만나다 김수현 PDF


‘정치하는’ 청소년들 3인과의 좌담회
79 “비행 중에 가장 큰 비행이 정치” 녹갱이, 나수빈, 김풀, 공현 PDF 


해외 사례
100 스웨덴의 오늘을 만들어 낸 노동운동– 스웨덴의 정치교육 김민주 PDF
106 누구도 폭력에 희생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다 – 독일의 정치교육 김민주 PDF
118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절대 평등 –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택광 PDF 


후속 학교 민주주의 설계도 ④
128 ‘생명에 대한 모독’을 끝낼 수 있는 단초 안영신 PDF 


기획 3.11과 4.16
143 풍화되어 가는 3.11에 맞서기 위한 책 읽기 김종구 PDF
157 나로부터 시작해 나에게로 향하는 나의 운동 홍은전 PDF
170 세월호 참사와 회복적 정의 김훈태 PDF 


인터뷰
182 “성장 시대의 종언이라는 시대정신이 중요하다” – 이계삼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정용주 PDF 바로보기


기고
204 나는 왜 해고된 것인가 채효정 PDF 바로보기

228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벗 석영 PDF 


청년 이슈
249 대학원, 노예 세계를 말하다– 이우창 서울대대학원총학생회 고등교육전문위원 김환희 PDF 


연재
모두를 위한 학교 행정 ③
263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돈’ 이야기 진냥 PDF 


수업 비평 10년, 변화된 학교 현장을 찾아서
275 수업 비평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이혁규 PDF
277 문학 수업과 연희적 상상력 조용훈, 김종욱 PDF
304 과학 수업에 사회적 쟁점 가져오기 이선경, 임선영 PDF 


지상 중계
328 교육의 생태적 전환, 그 사유와 실천 박복선, 정용주, 이계삼, 공현 PDF 


리뷰
359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 백서》“알려줘야지, 우리가 아직 싸우고 있다는 걸” 이보아 PDF
372 《공부 중독》공부하고 있지만 공부하지 않는 아이, 공부 안 하고 있지만 공부하는 아이 임선영 PDF
382 주제가 있는 책_4.16 김환희 PDF 


책 속에서


정치 혐오주의는 오래된 ‘풍습’과도 같다. 정치를 사갈시하는 이들이 많다. 학교 안에서 정치는 금기어 취급을 당한다. 헌법 제31조 4항 3)이 ‘보장’하는 ‘권리’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들의 복무규정에서 요령부득의 ‘의무’로 둔갑해 있다. ‘정치적’ 선택과 결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육 활동이 없건만 모든 교육 활동이 ‘중립’이라는 무균질의 세계에 갇혀 있기를 요구받는다. 불가능과 기만의 시스템이다.
- 18쪽, 〈사소한,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하는 결단〉, 정은균


저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무너지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를 희망합니다. ‘학교자치조례’에 제동을 거는 것과 비슷한 대법원의 판결이 자주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형식 논리로 헌법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모순이 계속 누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의 자주성에 해당되는 학생회, 학부모회, 교직원회 등의 풀뿌리 자치 기구를 부정하는 대법원의 판결은 정치적 탄압으로 간주되어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기만의 산을 무너뜨릴 때까지 정치적 탄압을 두려워 말고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에 합당한 실천을 계속해야 합니다.

- 26쪽, 〈평교사로서 하지 않았던 일 세 가지〉, 배희철


교장은 수행평가 비율을 줄일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수행평가 70퍼센트는 도덕 수업의 완성형이었다. 그러자 교장은 성적관리위원회를 열어 매우 집요하고 거친 공격을 하였다. 또 학교 아닌 직업훈련원에서 기술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수행평가(광주를 직접 두 번 찾아가 평가) 점수를 만점 준 데 대해 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손해를 본다며 점수 고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만일 이게 문제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라고 하였으나 학교장은 집요하고 거칠게 교사들과 함께 밀어붙였다. 학교장이 회의 석상에서 하는 말이 하도 거칠어 항의를 하니 “너 기분 나쁘라 그런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 34쪽, 〈정치적이나 정치적이지 않다〉, 최병우

 
이들에게 교사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실에 살아 있지 않은 죽은 화석과 같이 아무런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하지 않으며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학생의 머릿속에 잘 심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사람이 맞을까? 최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미 ‘교과서’라고 하는 것에도 정치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지 않았던가?
 - 41쪽, 〈편향적인, 그러나 그것도 괜찮을〉, 김진


반면 정치적 중립 의무는…… 힘들지 않다.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말 비참하고 정말 굴욕적이다. 목구멍에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그 비참함. 나는 선거에 내가 지지하는 후보, 내가 지지하는 정책이 뭔지 옆 사람한테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정당과 관련된 글이면 SNS에서 리트윗이나 좋아요 하나 무서워서 클릭하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 굴욕감. 대체 나한테 투표권은 왜 있는 거지? 정치적이면 안 되고 정치적인 존재여서는 안 되는데 왜 투표는 하는 걸까?

 - 48쪽, 〈정치적 중립, 모호하고도 굴욕적인〉, 미나리


아직도 많은 학교의 교칙에는 “학생들을 선동하여 질서를 문란하게 한 학생”을 징계 대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집회나 결사를 금지하는 학교들도 있다. 아예 규칙에 씌어 있지도 않은데 학생들이 뭔가 자기 의견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려면 ‘사전 허가’를 받으라고 요구하는 학교들도 있다. 이런 제도로 아예 대놓고 콩도르세가 말하는 교육의 목적을 부정하고 있고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전체주의, 독재 사회의 제1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함께 행동한다면 독재 체제는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는 ‘선동’을 한다며 나를 징계하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발 규제에 대한 불만의 불씨에 부채질(선동 煽動)을 해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을 모아 행동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출발점이다.  

- 57쪽, 〈학생들을 선동하여 질서를 문란하게 한 학생〉, 류제민


교장 전보 요구 릴레이 1인 시위, 감사, 담당 장학관 및 변호사와의 면담, 관리자와 교사 간 갈등 중재 프로그램 참석, 수업하고 검찰청 조사 가고, 교원소청 하고, 탄원서 쓰고, 사실 확인서 쓰고……. 한 말 또 하고 쓰고 또 쓰고. 고생 끝에 결국 교장은 전보 조치되었지만 교직 생활 중 존경할 만한 몇 안 되는 선배 교사도 강제 전보 조치되었다. 학교엔 평화가 왔지만 우리 대신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이 자리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현수, 정찬일 선생님이 공립학교의 민주성을 과대평가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비교적 낫다뿐이지 내가 겪은 교장들을 보면 사실이 아니다. 교장의 권력이 막강한 한, 언제든지 오늘은 맞고 내일은 틀린 게 되고 만다.

- 77쪽, <교사는 지식인이다>, 김수현


청소년인권은 너무 인정을 못 받는 것 같다. 가정 폭력을 당해 경찰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법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보장을 해 주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이 정치적 활동을 해야 한다.
- 99쪽, 〈“비행 중에 가장 큰 비행이 정치”〉, 나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