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글][코로나리포트_후속 인터뷰]교육은 백신으로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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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현장 리포트_후속 인터뷰


교육은 백신으로 해결할 수 없다



지난달, ‘코로나19 현장 리포트’ 요청에 많은 벗 조합원들이 다양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중 동료 교사들을 인터뷰해서 당시 온라인 수업 상황과 교사들의 문제의식을 전달해 준 글에 공감과 관심이 높았습니다. 해당 글을 보내 준 박노해(경북 구미 eclipz13@naver.com) 조합원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리포트 내용을 보고 궁금했던 점과 현재 상황에 대해 들어 보았습니다. _ 사무국 설원민


 박노해 벗의 코로나19 현장 리포트’ 주소 링크.


설원민

박노해 벗 안녕하세요? 정성스레 보내 주신 리포트에 많은 조합원들이 공감과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박노해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6년 차 초등 교사 박노해입니다. 제 글이 혼란한 시절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벗과 가까이에서 함께하지 못해 빚을 진 마음이었는데 리포트 참여로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앞서 리포트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우리 학교는 전체 25학급이고 안정된 중산층 가정의 자녀가 많습니다. 저를 포함해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선생님들은 모두 30대고요. 좀 더 다양한 연령대의 선생님들을 이야기를 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친한 선생님들 위주로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만……. 대신 2·3·4·5·6학년 교사들의 만나 치우침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실 교사로서 정체성이 갈수록 약해져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 정도로 스스로를 여기고 있습니다. 요즘엔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는 일이 재미있어 혼자 뭔가를 만들면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고요. 집에 종일 있어도 잘 지내는 스스로를 보며 ‘코로나형 인간’이란 생각도 문득 해 봅니다.


설원민

동료 교사들이 온라인 수업에 대해, 피드백의 어려움 등 소통의 문제를 주로 호소했습니다. 격주로 온/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가요?

   

박노해

현재 격주제 등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 반의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주씩 번갈아 가며 등교를 하고, 등교하지 않는 주에는 온라인 수업을 듣는 것입니다.

격주제 등교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주변 반응은 “어떻게 온/오프라인 수업을 동시에 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격주제 시스템에 적응하는 교사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현 상황을 오히려 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 온라인 수업을 처음 진행할 때의 피로감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음’에서 왔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해 보지 않았고 다 같이 헤맸으니까요. 지금은 온라인 수업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고 거의 관성적인 힘으로 돌아가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온라인 수업은 관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오프라인 수업에선 학생 수가 반으로 줄어드니 오히려 편하다는 분위기가 많습니다. 서른 명의 학생을 지도하던 ‘정상 등교’ 때와 비교하면 열다섯 명을 데리고 수업하는 지금이 더 낫다는 입장이지요. 물론 온/오프라인 수업을 따로 준비해야 하는 부담으로 현 상황을 버거워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격주로 등교를 하고 온라인 수업을 병행하다 보니 소통의 문제, 피드백의 어려움 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또한 두 그룹의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 완전히 같을 수 없기에 진도 문제, 평가 문제 등이 꽤나 골치 아픈 숙제가 되었고요. 방역 수칙을 일일이 지켜 가며 수업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설원민

온라인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싶은 마음에 등교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막상 등교를 해 보니, 친구들과 대화할 수도 함께 뛰어놀 수도 없는 상황일 텐데 학생들은 이 상황은 잘 이해하고 이겨 내고 있나요?


박노해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인상적인 변화를 발견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상황이나 제약도 문제지만 저는 지금 말씀드릴 학생들의 상태와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코로나19 이후로 학생들이 눈에 띄게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모든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말씀하시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수업 시간에 조용한 것은 기본이고,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잘 보이지 않으며, 의욕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인데 마치 오후 시간대의 고등학교 교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생기가 없어요.

말씀드린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 누구도 시원스레 답할 수 없겠으나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다 보니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같은 반 구성원들끼리 서로 친해지고 마음을 열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올해는 그럴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으며, 대화는 최소화되고 신체 접촉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친구, 선생님과 유대감을 쌓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학생들 입장에서 여기가 내 공간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내 사람이라는 마음이 없으니 항상 위축되어 있고 무기력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교 밖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해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고요.


설원민

초등의 경우 문해력과 자기주도학습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온라인 수업보다 대면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대면 관계를 기본으로 한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도 ‘성장’과 ‘대화’, ‘만남'이 핵심 키워드였고요. 그런데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의 성장과 온/오프라인 수업의 형식은 무관하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박노해

우선 저를 포함하여 지난 인터뷰에 응해 주신 동료 선생님들은 30대입니다. 그리고 저희 학교의 특성 중 하나는 에듀테크Edutech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선생님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생님들의 개인적 성향에 의해 온라인 수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 역시 존재합니다. 저희 학교에 국한된 상황이 수 있으니 보편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온/오프라인 수업에 관한 주변 선생님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어지간하면 오프라인 수업이 나은데 온라인 수업도 적절히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는 입장. 다른 하나는 온라인 수업이 지닌 의미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이를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입장입니다. 전자는 온라인 수업을 그다지 신뢰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고, 후자는 온라인 수업을 적극 수용하는 사람들이지요.

다만 ‘성장과 온/오프라인 수업의 형식은 무관하다’는 일관된 반응이 있었던 이유는 온라인에선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긴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저 역시도 온라인 수업을 통한 교육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분법적인 답변을 요구받는다면 가능하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온라인에서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교감하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온라인 수업을 비롯한 ‘에듀테크’가 지닌 맹점에 주목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었단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수업은 교육이 아니라 말할 수 없고, 온라인이 지닌 장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전부 감안하더라도 학교의 온라인화를 비롯해 IT 기술이 학교 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는 현 상황에 반대합니다. 여기서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겠지만 우리는 기술을 너무도 쉽게, 무비판적으로, 순진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요.


설원민

“교육부와 학부모들이 교육에 관해 너무 무지하다”며 “모두 입시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EBS 확충을 대책으로 제시한 것을 두고 “그것으로 교육이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너무 안일하다”는 지적도 있었고요. 이로 인해 학교의 존재 의미를 다시 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박노해

팬데믹Pandemic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요즘 ‘학교와 수업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 나름의 정의는 꽤나 명료하고 즉각적으로 도출되었습니다. 우선 학교의 본래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는 ‘성장’혹은 ‘동반 성장’이고 후자는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입시’와 ‘보육’이겠지요. 학교는 원래 한 인간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친구와 모여서 함께 한다는 것은 ‘동반 성장’을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학교에는 입시와 보육을 제외한 의미를 찾기 어렵고, 이는 코로나19가 적나라하게 증명했습니다.

다만 의미에 관한 이런 점검을 지금 시점에서 재차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무력감이 따라붙을 뿐입니다. 실제로 학교의 의미에 관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질문해 본다고 했을 때, 제 의견과 다른 내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가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지,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현 상황을 낙관하는지 비관하는지, 바꾸려고 하는지 바뀌든 말든 상관이 없어 하는지와 같은 입장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결국 학교의 의미를 정의하는 방식은 꽤나 관성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학교를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 보려는 입장에서는 학교라는 공간과 수업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도 중하지만, 어떻게 ‘현실적 의미를 본래적 의미로 복원시킬 것인가’ 혹은 ‘왜 학교가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는가’ 하는 질문을 좀 더 깊이 있게 던져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해 친구와 같은 타인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고 이런 점을 빌려 학교가 성장을 위한 공간으로써 가치 증명을 해 내기도 합니다. 학원이나 온라인 수업은 하지 못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학교가 어느 정도 해내는 것도 맞고요. 실제로 학교가 작동을 멈춘 지난 몇 달간 학생들은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을 크게 느꼈고, 학교라는 사회가 부재함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겨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근거로 학교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법과 사회성을 가르친다는 명분이 학교를 지키는 최종 보루가 되어도 괜찮을까요?

저는 애초에 학생들의 ‘친구 집단’을 모조리 수용하고 있는 학교라는 곳을 빼고서 성장을 논하는 것이 가능키나 한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인간, 특히 유년기의 인간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친구가 있는 곳은 학교가 사실상 유일한데 이 점을 근거로 학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여덟 살만 되면 학교로 몰려가 책상에 앉아 있는 현 상황을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학교의 의미도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라는 존재를 이미 필수로 규정해 놓고 의미를 끼워 맞추는 느낌이랄까요. 친구가 필요하면 친구를 만나면 될 일이고, 선생님이 필요하면 선생님을 만나면 될 일인데 그곳이 꼭 학교여야 하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나왔던, “학교는 성장을 위한 곳이다”라는 말은 너무나 자명함과 동시에 하나 마나 한 소리 같아요. 대체 오늘날 아이들, 청소년들이 학교가 아닌 어디에서 사회성을 기를 수 있습니까. 학생 입장에서 유일한 사회가 학교인데 학교에서 사회성이 길러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학교 밖을 상상해 보지도 않고 학교의 의미를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는 것은 다소 작위적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과 골방에 갇히는 것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포함한 다양한 교육 공간을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긴 생각을 짧은 글에 담으려 하니 다소 건너뛰거나 의미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줄여 말하자면 저는 학교의 의미에 관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현 상황에 대해 회의합니다. 왜 다들 인정하는 학교의 역할이 현실에선 발현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학생의 성장을 말하면서 수업 일수 채우기에 급급한 것인가요. 학사 일정이 파괴된 상황에서 내신 성적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 관심이 집중될까요. 그것이 성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학교의 의미를 묻고 그것이 ‘성장’이라 답했다면, 다시 그 ‘성장’을 왜 학교가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그 이후에 방법을 생각해야지, 학교라는 공간을 방법으로 확정 짓고서 이후에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봐요.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학교와 수업의 의미에 관한 여러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사용하는 낱말은 다르지만 큰 맥락에선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저 역시 대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느냐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사고하는 순서에서 원인을 찾고 싶습니다. 목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목적에 맞는 시스템을 찾아야 하는데, 시스템을 먼저 긍정해 놓고 시스템의 존속을 위해 목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결국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취한 선택은 그 본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가 왜곡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교밖에 대안이 없는데 학교의 의미를 물어서 무엇 하냐는 것이죠. 그렇다고 학교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 있겠죠. 다만 그 일은 학교가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책임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배우고 나누면서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야 한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공간은 어디고 방법은 무엇일까요. 대안적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 때, 그래서 학교가 책임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때 학교 본연의 역할도 잘 수행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19로 80일 만에 첫 등교하는 고3 학생 체온 측정에 나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5월 20일 경복고 정문. 사진 최승훈.


설원민

앞의 질문에 이어서 말해 보죠. 학부모 등 교육 주체들에게 ‘입시에 우선하는 교육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박노해

코로나19가 학교의 의미를 재개념화했다기보다는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보육과 입시가 큰 줄기라고 생각하는데 초등에선 보육이, 중등으로 올라가면 입시가 보다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크게 보면 초등이든 중등이든 결코 다르지 않고요. 아무튼 학교는 학생이란 육체를 보호하고 시장으로 진입하기 이전에 쓸모를 입증하는 장으로서 기능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괴로워하기도 하고 무언가 바꾸어 보려 애써 보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결국 무언가를 바꾸려면 다수를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야 하는데, 이를 교육 주체(학생, 교사, 학부모, 관료)에게 어떻게 납득시킬지는 다른 문제 같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학교의 의미에 관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말이죠. 개인적으로 학교는 인간 개인의 내면적 성장을 우선에 놓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입시보다 중한 교육의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고, 학교나 교사가 할 수 있는 부분도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에 우선하는 교육의 의미’가 있다고 한들 그것을 어떻게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제가 오랜 기간 품어 온 생각이고 딜레마입니다. 자아를 찾고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이 좋은 줄 몰라서 다들 입시에 목매는 것은 아닐 겁니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중해서 다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수능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게 아니고, 공무원이 적성에 맞아 그쪽으로 진로는 정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존하려면 어쩔 수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이미 정규직 직장을 얻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교사보다 미래를 생각하는 학생들은 세상을 훨씬 불안한 곳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생존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증폭시켰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 갑니다. ‘제로 성장’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할 것이라고 합니다. 취업의 문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 입시에 목을 매는 학생들을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학교교육에 큰 수혜를 입고 입시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어 정규직 직장을 얻은 제가(교사 집단이) 학생이나 그들의 부모에게 입시보다 중한 교육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언설입니다. 먹고사는 일만 해결되면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을까마는 그것이 늘 해결되지 않아 다들 이러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된 수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가 나서서 항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울 수 없다면 ‘참된 수업’도 결국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니까 말이죠. 다만 전부 세상의 탓이라고 두 손 놓고 지켜볼 순 없으니 ‘지금의’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야 할 듯싶습니다. 변화가 어느 쪽에서 찾아오든 말이죠.


설원민

끝으로 현재 상황 속에서 “우리가 교육답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노해

등교 개학을 하는 지금, 많은 것들이 쉽지 않습니다. 리코더나 농구처럼 손과 입을 쓰는 활동은 아예 할 수 없고, 대화는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스킨십이나 모둠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엄청나게 나쁘냐고 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재밌고 불편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코로나19 전이라고 해서 ‘교육적인 것’을 자유롭고 힘 있게 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 상황이 절대적으로 나빠진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학생들이 조용하니 떠드는 학생과 실랑이 벌일 일도 없고, 왜 하는지 모르겠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힘 빼지 않아도 되어서 좋습니다.

다만 앞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이유는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즉 교육적인 것이 과거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는 더 없을 것이라면 우리가 구태여 학교란 곳을 수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과거라고 해서 교육다운 것을 잘 해낸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방역 지침을 읽어 보면 교육이 아예 불가능하도록 명문화 되어 있어요. 학습지를 풀게 하는 선생님 역할 정도밖에 못 하도록 되어 있죠. 그런데도 우리가 학교란 곳을 수호하려는 이유가 고작 수업 일수 때문이라니 너무나 가련한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19가 학교를 망쳐 놓았고, 그래서 코로나19가 사라짐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는 그저 버티면 될 것입니다.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며 백신이 개발될 날을 기다리는 식으로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코로나19 이전에도 교육은 학교와 무관했고 교실은 붕괴되어 왔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코로나19가 보다 명징하게 드러냈고 그로 인해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을 뿐이죠. 누구나 불필요하다고 느끼던 행사나 대회가 사라지고, 학교 바깥에선 생태계가 복원되는 식으로요. 국가 수준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는 다거나(시간이 없어서) 학교 바깥을 상상하는 움직임도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코로나19로 인해 불가능해진 것에 주목하기보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사를 가는 중인 것 같아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죠. 물건들이 전부 제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을 가구 밑에서 발견하고, 버릴 물건은 버리며, 쌓인 먼지를 닦아 내기도 하죠. 새로이 살게 될 집은 조금 더 편안하고 따뜻한 곳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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