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글]미리 보는 1쪽 프로젝트 글 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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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혁 조합원 

경기 양주 만송초

 

안녕하세요. 저는 2020년 3월 1일 자 신규 초등교사 오제혁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에 가입한 지는 이제 한 달이 되어가는 따끈따끈한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조합을 안 지도 가입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교육공동체 벗’에서 출간한 책들을 읽으며 이 조합에서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분들의 지혜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2년간의 짧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혼자서 고민하고 좌절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2019년, 기간제 교사로 교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1년 동안 4학년 학급 아이들과 잊지 못할 한 해를 보냈습니다. 첫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 양복을 입고 가서 설렘 가득 안고 저를 소개했던 날부터, 마지막 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안아 주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던 날까지의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기억나곤 합니다. 그만큼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아이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 했기에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2019년은 제가 학교 문화를 알아가는 한 해였기도 합니다. 열정을 가득 안고 아이들과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활동들은 때로 학교 방침에 의해, 교직 문화에 의해 가로막히기도 하고 학교 눈치를 보며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저의 열정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는 학교 시스템 때문이었을까요? 생각 없이 살아왔고 자기주장을 펼칠 용기도 없는 저였기에 정답을 알지 못한 채 고민과 좌절에 빠지며 한 해를 마무리했습니다.


지난 2020년은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한 해였습니다. 번아웃이 찾아오면서 쉬고 싶었고 마음을 재충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신규 발령을 받게 되었고 저는 마지못해 학교에 가는 교사, 정말 해야 할 일만을 하는 교사가 되어 보람 없는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2019년 한 해를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아이들 곁에서 뭐든지 함께 했던 저는 어떻게, 왜 사라지게 된 걸까요. 저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저에겐 교육 철학이 부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했던 수업과 학급살이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적 성장을 일으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재미와 추억만 남은 레크리에이션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 저는 교사가 아닌 강사였습니다. 용기도 부족했습니다. 교육에 관하여 동료 교사 선배님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적이지 않은 결정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런 분위기를 바꿀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 외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만 적어도 이 두 가지 이유만큼은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더군요. ‘교육 철학’은 나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아야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지며, ‘용기’는 혼자서는 낼 수 없지만 곁에서 제 삶을 함께 나누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생길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교육공동체 벗’에 가입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곳에서는 제가 저의 무지함을 드러내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교육에 대한 철학을 배우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 마주칠 다른 교육적 고민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을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하고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직접 도움을 드리진 못해도, 배움을 통한 성장이 앞으로 함께할 저희 반 아이들에게, 그리고 저처럼 방황하는 후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홍정인 조합원 

서울 다시학교

 

○○대학교에 돈가스를 좋아하는 학생들의 친목 동아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돈가스 집에 신메뉴가 출시됩니다. 그런데 동아리 구성원들 사이에서 그것이 과연 ‘돈가스인가, 아닌가’로 논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투표가 진행되기에 이릅니다. 결과는 정통 돈가스 파의 승리!

개방과 다양성을 외치던 신메뉴 옹호파도 투표 결과에 승복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줄 알았으나, 문제는 정통파 안에서 터집니다. 치킨가스, 생선가스, 피자가스 등의 변조 돈가스들이 새롭게 논쟁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정통파 안에서 분란이 끊이지 않다가 동아리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는…….

 

다사다난 지난날들

위 이야기는 최근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대 돈가스 동아리가 해체된 사연’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킬킬 웃다가 결국 씁쓸해지는 이유는, 살다 보니 이런 일들이 삶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안학교 현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의 변화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열두 살 아이로 만났던 학생이 지금은 옆에서 함께하는 동료가 되었는데, 정작 함께하던 교사들은 완전히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터전을 옮기는 이사를 여러 번 겪었고, 아예 학교를 새로 만들기도 했으며, 그러던 중 이전에 일했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뭐 하나 순탄했던 적이 없습니다. 돈가스 동아리의 슬픔에 비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나 보면 논쟁거리도 아닌 일로 분란이 일어 눈물 바람으로 겪어 낸 적도 많았습니다.

 

왜 10년이나 계속하신 거에요?

‘왜 10년이나 계속하신 거에요?’라는 질문을 요즘 들어 자주 받습니다. 그 ‘왜’가 ‘이유’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인지 구분해야겠지만, 아무튼, 시작할 때의 그 이유가 변함없이 단 한 가지로 이어져 왔다면 오히려 계속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교육에 대해 진지하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학생보다 더 학생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칠렐레팔렐레 해맑던 저였지만, 교육학 책에서는 보지도 못한 사례들을 만나며 고민의 내용도 방향도 수없이 변화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와 다르게 교육의 역할도 학교의 역할도 새롭게 고민하며 지냅니다. 지금의 고민이 그냥 맨바닥에서 나온 것이 아니듯, 오늘의 실천이 또 내일의 고민을 위한 새로운 디딤돌이 될 것을 압니다. 듀이가 말한 ‘경험의 재구성’을 저 스스로 겪으며 사는 셈입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게 역동적인 과정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앞으로의 10년도 계속하기 위해

세상은 늘 변화한다는 식상한 말을 하며 살지만, 지난 한 해를 돌아봤을 때 변화는 둘째 치고 세상이 통째 뒤집히는 것도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다시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고 맙니다. 계획도 쓸모없게 되어 버리는 시절을 겪다 보니, 무언가를 고집하느라 부러지지 말고 아무렇게나 휘청거리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다시금 지킬 것이 뭔지 질문하는 동시에 새롭게 받아들이는 마음은 활짝 열어놓는 것이 정말 필요하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나 자신도, 내가 속한 공동체도 모두 건강하게 이어져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 아마 앞으로의 10년도 계속 다사다난할 것입니다. 새로운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며 더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하겠습니다.


류명숙 조합원

경기 양평 세월초

 

10대 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인 줄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중3이던 우리는 엄청나게 울었다. 그때 “독재자가 죽은 건데……”라고 말한 우리 반 아이를 나와 다른 아이들이 함께 욕을 하며 미워했다. 20대 때 나는 박정희가 독재자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박정희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느라 온 힘을 쏟았다. 30대 때 나는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는 선생님들을 미워했다.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교무실에서 회의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동료·선배 교사들을 공격했다. 40대 때 나는 시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눈치 보는 일이 힘들다고 입만 열면 동료 교사에게 이야기했다. 시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미워하며 살았다. 50대 후반인 지금 나는 우울함이 내민 손을 잡기도 하고 놓기도 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면 당당하고 여유가 있어 너그러워질 줄 알았다.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 많아 자신만만할 줄 알았는데, 실수할까 봐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라고 한참을 위로하고 위로해야 우울을 잡고 있던 손을 놓게 된다.


나는 내 괴로움은 남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옳다는 한 생각으로 남을 미워했던 마음을 참회하고 참회해도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생활하는 것이 아닌 일은 내가 할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한 생각으로 나는 지금 겁쟁이가 되어 있다. 30년을 넘게 학교생활을 했는데 업무가 두렵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업무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바꾸려 한다. 한 번에 통과할 생각을 말고 10번은 실수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덜 불안하다.


몸이 크게 아파 본 적이 없는 나는 아픈 동료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에 아픈 동료 교사를 보면 ‘어이구, 저렇게 아프면 나는 그만둬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선배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착한 언니는 병가와 조퇴로 동료에게 피해만 준다며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만둘 수 없는 언니는 얼마나 괴로울까? 언니와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갑자기 고마워졌다. 내가 그런 착한 동료가 되어 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옳다는 한 생각으로 남을 미워하며 마음대로 살았던 나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뭘 몰라서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이 많이 내렸다. 돌봄으로 학교에 온 우리 반 아이들과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숫자 8과 달팽이 모양을 눈을 치우며 만들었다. 아이들도 눈을 치우며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선생님, 힘들어서 쉬어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

“선생님, 힘들지 않아요?”

“응, 나도 힘들어.”

“그런데 왜 계속해요?”

“재미있잖아.”


이유진 조합원

한겨레


교육공동체 벗의 10주년을 축하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창립조합원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살갑게, 가깝게 지내진 못했지만 벗의 식구로서 살아온 것을 다행이자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먹고 살아왔어요. 기자일을 한 지는 25년이 조금 넘는 것 같네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더니, 작가는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것 같고, 기자가 가장 괜찮겠더군요. 그래서 힘들게 기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한 뒤 빠르게 쓰는 글을 오래 써와서 그런지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쉽지 않아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하는 게 가장 편할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저는 활발한 아이였는데, 사지를 옭죄는 듯한 ‘교육’이 싫었습니다. 학교는 무서운 곳이었고, 선생님도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규율에 목을 맨 학교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데다 불쾌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땐 너무 많은 성착취, 노동착취를 당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알게 되었고 여중, 여고라는 남학생 없는 가운데서도 우린 이등 학생이었어요.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훈육을 엄청나게 받았죠.


그에 견줘 남녀공학 대학은 사실은 학교 같지 않고 흥미진진했습니다. ‘해방의 학문’이라는 사회학은 가슴을 뛰게 했는데, 교직과목만큼은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교사’라는 말도 듣기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되도록 멀리멀리 가고 싶었죠.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고 신문사 사회부에서 교육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어, 어이없는 정치적 판단과 시대착오적인 행정 아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괴로워하게 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서로 재미있고 즐겁게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즈음 교육공동체 벗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다지 주저없이 동참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20여년 전 <우리교육> 기자로 짧게 일했던 인연도 크게 작용했지요.


이 글을 쓰기로 하면서 2011년 1월 창간준비호에 실린 박복선 편집위원장의 글 ‘창간준비호를 내며’를 다시 한번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교육》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 여타 진보적 교육 매체의 장단점을 살펴보면서 진보적 교육담론 생산을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그 글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를 준비하면서 오랜 토론을 거쳤지만 “진보란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고도 덧붙였네요. 10년이 더 지난 지금, 이제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정의하기는 더 힘들어졌고, ‘진보’가 무엇인지 묻는 목소리도 더 작아졌습니다.


1998년인가, 1999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시 초등 《우리교육》 김윤용 편집장이 물었습니다. “진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요. 그때 저는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던 기억만큼은 확실하게 납니다. 그 뒤에 무엇이라 중얼중얼 덧붙이긴 했는데, 떠오르지 않아요. 이제는 그때로 돌아가서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와 남한테 자주 실망스럽고 함께하는 것이 괴롭지만 그래도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나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려고 하지 않는 것요. 때론 너무 회의적이고 날카로워서 보기 싫고 아프지만,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용기있게 함께 10년을 지내온 지식공동체는 그래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보적인 교육공동체는 ‘진보 교육감’을 만드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이죠.


회사로 꼬박꼬박 격월간 《오늘의 교육》이 옵니다. 동문회보가 배달돼 오듯이 따라다니며 저를 식구로 챙겨주는 교육공동체 벗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뿌듯합니다. 앞으로 10년도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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