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산책가로서의 삶_안준철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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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코로나 시대, 산책가로서의 삶

 - 안준철 산책가(전북 전주 조합원)

 

 글  원민



비 온 뒤

세상 조촐한 것들이

잎새마다 빗방울 하나씩 달고

눈부셔 하고 있다

 

길 모서리, 혹은

돌 틈에서 자란

세상 보잘것없는 것들이

흔하디 흔한 빗방울 하나에

온 몸을 반짝이고 있다

 

혼자서는 쥐뿔도 빛날 게 없어

서로 서로 눈부셔 하고 있다.

 - 〈세상 조촐한 것들이〉 전문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바로 낭만샘 안준철 조합원이다. 2002년 〈오마이뉴스〉에 교단 일기를 연재한 그는 이내 ‘사랑의 교사’로 널리 알려진다. 이후 정년퇴임을 한 2016년 2월까지 무려 14년 동안 이어진 그의 교단 일기는 세 권의 에세이로 묶여 출간되었다. 그의 학생들을 향한 애정과 교사로서의 성찰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솔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책과 강연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라면 교사 안준철의 진면목을 확인했을 것이다. 위 〈세상 조촐한 것들이〉는 2001년 발행한 그의 세 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 같아 소개하고 싶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전북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옆에 있는 식당이었다. 잎이 무성한 가로수 그늘 아래 서 있는 안준철 조합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퇴임 후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은 그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늦은 점심이어서 그런지 식당 안은 한산했다. 메뉴는 한국인의 소울 푸드 청국장이었다. 지난해에도 사무국 풀씨와 양영희, 김은숙 조합원과 함께 그를 만나러 왔었다. 그때도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청국장을 맛있게 먹었다. 그에 따르면 아랫집은 밑반찬이 다양해서 좋고, 윗집은 청국장 본연의 맛이 더 깊어서 좋다고 했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 한 국자를 떠서 각종 나물과 함께 비벼 먹었다. 맛은 다들 잘 알 것이다. 구수하고 단백한 그 맛. 거기에 잘 익은 김치와 장아찌 등을 곁들여 먹으니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뚝배기를 보니 전주의 향토 음식인 ‘오모가리탕’이 떠올랐다. 오모가리는 뚝배기의 전북 방언이다. 한마디로 뚝배기에 끓인 민물매운탕인데 시래기를 넣는 게 특징이다. 투박하고 무심한 이름처럼 된장 베이스의 진하고 얼큰한 국물과 시래기의 구수한 맛이 어우러져 입맛 없는 여름철 보양식으로도 딱이다. 전주에 가면 꼭 한번 드셔보시라.


숟가락을 놓기 아쉬웠지만, 우리는 건지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출발했다. 그중 조경단을 품고 있어 임금님숲으로 불리는 둘레길 코스는 편백나무로 조성되어 있었다. 피톤치드 ‘뿜뿜’하는 임금님숲에서 삼림욕을 하며 안준철 조합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안준철 조합원은 벗 카페의 터줏대감이다. 낭만샘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게시글과 댓글을 달아 사실상 운영자나 다름없다. 《오늘의 교육》과 벗에서 출간한 단행본 리뷰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산책가로서의 삶을 시와 사진으로 나눠 주고 있다. 계절색을 담은 사진과 일상을 소재로 쓴 시를 보고 있노라면 빙그레 미소가 절로 나곤 한다. 그래서 창작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산책가로서 그의 하루 일과에 대해 물었다.

 

본래 아침형 인간인데다 암 투병을 하게 돼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숲이 있는 곳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숲에 들어서면 걷거나 자전거를 끌고 산책을 한다. 그렇게 숲 산책을 한 지 7개월 정도 됐다. 자전거는 퇴임 이후부터 꾸준히 타고 있다. 때로는 점심 도시락을 싸서 멀리까지 가기도 하는데 만경강을 따라 익산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많게는 하루 60km 정도 자전거를 타는데 건강 때문에 너무 오래 탈 수 없어 조절하고 있다. 그런 일상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장면과 사건을 사진과 시로 담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부캐’처럼, 그는 교사 안준철만큼이나 시인 안준철로도 오랜 시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가 글과 사진으로 들려주는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 산책가라는 직함은 그의 일상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여행가였다면 아마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 해서 좌절했을 것 같다. 그런데 산책가로 살고 있어서 그런지 큰 불편함이 없다. 자전거와 두 발로 전주천과 여러 둘레길을 달리고 거니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발생한 이유와 그보다 더 심각한 기후 문제를 한번 성찰해 보자. 우리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지구의 자원을 너무나 함부로 쓰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이도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삶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평생을 차 없이 살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큰 불편함도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걷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다. 초임 시절에 학교 선생님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이내 오토바이로 바꾸더니 금세 자가용으로 바꾸더라. 그런데 3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나는 자전거 한 대가 없었다. 학교 근처에 살아 걸어서 5분이면 출퇴근 할 수 있었지만, 멀리 돌아 20분 정도 걷곤 했다. 그렇게 출퇴근을 하다 보니, 출근길이 산책길이었고 퇴근길이 산책길이었다.


산책가라는 직함은...... 퇴임 후 강의를 하러 갔는데 직업란에 쓸 게 없었다. ‘전직 교사’라고 쓰기도 어색하고 ‘시인’이라고 쓰기도 어색해 고민하다 문득 산책가가 떠올랐다. 그렇게 자칭 산책가가 되었다. 이후 코로나와 맞물리면서 여행가가 아닌 산책가로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구나 싶었다. 여행가라고 하면 이동 수단으로 비행기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동안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기후 위기의 직접적인 오염원 중 하나이지 않은가. 

 

산책 중에 포착한 장면들이 시의 소재가 되곤 하는데 그런 섬세함 관찰력과 창작의 과정이 궁금하다.

 

어떤 상황을 발견하고 경험했을 때, 그걸 언어로 옮기는 초고 작업이 가장 어렵다. 당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퇴고를 하게 되는데 언제까지 퇴고를 하느냐면 최초에 느꼈던 그 감정이 나올 때까지다. ‘아! 이거다’ 싶을 때까지. 


그런데 시를 처음 쓸 때는 멋진 표현이나 문구가 나오면 그것에 집착하곤 했다. 최초에 경험했던 것들을 놔두고 그 문구에 매달려 시를 쓰곤 했다. 그러면 잠깐은 독자들이 환호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그게 다 들통나게 되어 있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가장 적실한 언어로, 가장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초고에 더 덧붙이는 것보다 덜어내는 시간이 훨씬 길다.


자칭 산책가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산책을 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많이 쓰게 된다. 요즘 꽃을 많이 찍었는데 실은 나무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아니 고마움이 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건강을 위해 산책을 시작했고 그러다 나무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까 날이 더워서 나무 아래서 원민 씨를 기다리는데 그 나무가 참 고맙더라. 더구나 몸이 아프니 좋은 공기도 마셔야 하고 휴식도 취해야 하는데 나무가 없다면 어디 가서 그럴 수 있나 싶다. 그렇게 나무에 대한 고마움이 자연과 만물로까지 이어지더라. 암 투병 이후에 이런 감정이 더 도드라지는 것 같다. 그게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대한 것까지 이어졌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찾아온다.


얼마 전에 카페에 썼던 ‘아침 인연’에 관한 이야기처럼. 비가 오면은 우산을 들고 동네 산책을 하고 맑은 날엔 자전거를 타고 좀 멀리 나간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면 어둑어둑하니까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창밖을 바라보게 되는데, 누가 우산을 쓰고 가면 ‘아, 비 오는구나’, 안 쓰고 가면 ‘안 오는구나’ 하고 알 수 있다. 그렇게 창밖의 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에 들어왔다 나간 거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에 시가 내게로 온다.


나는 관찰력이 참 부족한 사람이다. 30여 년 동안 아이들을 만나며 생일 시를 써 준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생각을 그대로 써 버리면 산문이 되니까 시를 쓰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생일 시는 훈련이자 나의 부족한 관찰력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했다. 완성된 생일 시를 보면 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일 거다. 생일 시를 쓰기 위해 한 아이를 만나고 관찰하는 시간은 그 아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 생일 시를 쓰기 위해서 한 달 전부터 그 아이와 쪽지를 주고받고 또 같이 산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다. 한 달이면 생일인 아이들이 서너 명 정도 됐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생활한 후에야 한 편의 시 속에 그들의 일부분이라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다. 그 시기만큼은 그 아이가 자신의 삶, 학교생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고맙게도 생일 시는 아이들을 하나의 생명으로서, 존재로서 사랑하기 위한 과정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의 부족했던 부분들을 많이 보완해 주는 기회가 되었다.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학생과 나 서로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생일 시는 교사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내 욕망이자 미숙함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다.


시를 쓰려면 삶도 좀 예쁘게 살아야 한다. 물론 예쁘게 살지 않아도 시를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나 스스로 허락할 수 없으니 삶도 좀 예쁘게 살아보고 싶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글을 쓰는 행위가 성찰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습관인 삶이 됐다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애초부터 그런 사람인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교사 대상 강연은 물론 〈세바시〉 같은 TV 프로그램에도 강연자로 출연했다. 재직 시절과 달리 퇴임 후 바뀐 강연 내용이 있는지, 또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다.

 

항상 교단 일기를 중심으로 강연을 했다. 수백 편의 교단 일기들 중에서 강연 성격에 맞는 열 편 정도를 추려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는 게 있는데 바로 ‘생명 값’에 대한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생명인데 자신을 부끄럽고 하찮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부터 아이들을 공평하게 인정해 주려고 노력했다. 기계적으로 공평해지려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귀하게 대해 주려고 했다.


내가 “너는 영웅이야”라고 해 줄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전 영웅이 아닌데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영웅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자기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거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는 성적을 우선시하면 안 된다. 꽃을 예로 들어보자. 화려하고 예쁜 꽃들은 꽃이라는 느낌이 확 온다. 성적인 우수한 아이들이 바로 화려하고 예쁜 꽃일 것이다. 그런데 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게 생긴 꽃들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예쁜 꽃들인데도 말이다. 그런 아이들을 꽃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보자는 거다. 꽃과 생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무게감이 있을까? 생명이 훨씬 더 무게감이 있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꽃으로 보는 것과 생명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내가 전문계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아이들을 꽃보다 생명으로 대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아이들을 생명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부터 교사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아이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느낌이 전달되게끔 해야 한다. 그런데 귀하게 여길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들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생명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생명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귀하디 귀한 거니까. 그럼 생명의 존엄을 논하는 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교실 속에 녹여 낼 수 있을까?


내 경우는 바로 출석 부르는 것이었다. 출석부에 적혀 있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었다.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출석을 부르다 보면 정말 그 아이가 고스란히 하나의 존재가 되어 나에게 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면, 실제로 학교에서 출석을 부르는 것처럼 교사 한 명 한 명을 호명하곤 했다. 그러면 강의가 끝나고 오늘 정말 많은 걸 배웠다며 “돌아가서 꼭 같은 방식으로 출석을 부르겠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있었다. 나중에 그 교사들과 이메일 주고받으면,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하고 그걸로 인해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아이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미로 출석을 부르는 것. 아마 내가 인문계고에서 우수 집단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 같다. 실업계고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게 내게는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 아이들로 인해 내 눈이 떠진 거니까. 그래서 그 모든 만남이 고맙다.

 

지난 10년 동안 《오늘의 교육》 열독자이자 가장 많은 리뷰를 남겨 주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주어 고맙다’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 주곤 했는데, 쓴소리도 들려주었으면 한다.

 

《오늘의 교육》을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은 계속 읽게 되어 있다. 나도 중간에 듬성듬성 읽고 다음 호를 받은 때도 있었다. 내용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그러다 의지적으로 다 읽었을 때, ‘아, 내가 이 책을 안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교육》과 소원하게 지내는 동안 생각이 많이 굳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거다. 새로운 것은 무엇을 덧붙여 제시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성찰이다. 


엄기호 선생님 등 필자들의 글을 보며 공감하는 것은 내 생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데, 다만 그분들은 그걸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글로 확인시켜 주어 매번 감탄하게 된다. 정용주, 채효정 선생님 등이 들려준 돌봄 문제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어디서 접할 수 있겠는가. 이들 편집위원들의 글을 읽다 보면 사안을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문제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반면 그들은 좀 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어떻게 이렇게 분석하고 통찰할 수 있지 하고 감탄하게 되고 주눅도 들지만, 결국은 내가 살아온 삶을 지향하고 있구나 하는 다소 우쭐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들이 분석하고 제시한 삶을 나는 이미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 삶에 대한 확신과 확인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굉장히 감사하고 고맙다.


물론 《오늘의 교육》에 대해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다. 노파심일 수도 있다. 학교 현장의 교육 혁신, 그런 몸부림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비판은 하되 애정 어린 비판이었으면 싶다. 창간호에서 이계삼 선생님이 이야기한 ‘어설픈 희망의 언사’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다. 나 또한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만이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라는 한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설픈 희망의 몸부림조차도 용인하지 못한다면 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실천해 보려는 사람들의 희망마저 빼앗으면 안 된다. 물론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우리가 10년 전에 화두로 잡았던 ‘교육 불가능’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테제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이계삼 선생님이 10년 전에 교육 불가능을 선언한 근본적인 배경을 곱씹어 생각하기도 한다. 정말 진짜 교육을 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었으니까.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교육 불가능을 선언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기에 더더욱 학교에서 당면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그때그때 유연하게 해결하려는 몸부림들을 폄하해선 안 된다.


 



 창립 10주년이 되면서 정년 퇴직을 하는 조합원들도 자연스레 많아지고 있다. 퇴직 후, 행복한 삶을 위해 조언을 해 준다면.

 

우리 나이로 63세에 퇴직했다. 10년이 지나면 73세가 되고, 또 10년이 지나면 83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덧없게 느껴졌다. 두 번의 10년이 지나면 인생이 끝나는 거다. 그래서 꾀를 냈는데, 10년 단위로 생각하지 않고 3년 단위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다. 첫 3년 동안은 산책가로 살아 보고, 두 번째 3년 동안은 시인으로 살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첫 3년은 전주에서 13개의 산책길을 개척하며 산책가로 살았다. 그런데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두 번째 3년에 문제가 생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를 열심히 쓰다 보니 1년 만에 새 시집  《생리대 사회학》 을 내게 된 것이다. 산책가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기계적으로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3년 동안은 영어 공부를 해야지 싶었는데, 산책가와 시인으로 살면서 영어 공부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5년을 9년처럼 살 수 있었다. 퇴임 후 인생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여생이 짧은 수도 길 수도 있는 것 같다. 건강 관리만 잘한다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안준철 조합원을 만난 5월 12일은 초여름처럼 더운 날이었다. 편백나무 숲은 시원했지만, 2시간 동안 산책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법 땀이 났다. 때마침 전주시에서 운영하는 숲속 작은 도서관이 보이기에 둘러보며 땀을 식혔다. 그러고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그와 담소를 나눴다.


11년 전 가을, 순천 선암사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교육공동체 벗을 함께 만들자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인연이 이어져 이듬해 그와 나는 저자와 초보 편집자로 다시 만났다. 그의 책,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은 내가 처음 편집한 책이다. 원고를 처음 읽었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사제지간의 정을 느껴 보지 못한 나에게 그의 에세이는 생경했다. 교사로서 그의 반성과 성찰에 감탄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런데 편집을 하느라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읽다 보니 가슴속에 차랑차랑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잠시지만 다시 임용 시험을 준비할까 하고 고민할 만큼. 그러면서 학창 시절을 돌아보게 됐다. 내 눈이 밝지 못해 좋은 선생님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믿고 의지할 스승의 부재에 마음이 헛헛했다. 아마 그때 가슴 한편에 교사 안준철이 각인된 것 같다. 


이 사실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번 조합원 인터뷰는 ‘스승의 날’을 맞이해 기획한 것이다. 대번 안준철 조합원이 떠올랐다. ‘스승의 날’에 대한 회의와 스승의 부재에서 오는 오래된 내적 부조화가 기울어진 순간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작은 설렘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또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카네이션 한 송이 준비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게 된 것도.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이 있다. 암 투병 중인 그는 식이 요법과 운동 요법을 병행하고 있다. 산책가로서의 삶은 운동 요법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가 완치 판정을 받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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